唯一神 하나님의 新約名稱에 對한 小考
唯一神 하나님의 新約名稱에 對한 小考
-The New Testament Name of Oneness God-
-유 제 원-
차 례
서 론
(1) 문제의 제시
(2) 방 법
본 론
(1) 주도 하나 믿음도 하나
(2) 위(位)라는 용어
(3)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
가. 아버지
ㄱ) 예수의 아버지인 하나님
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ㄷ) 아버지는 예수
ㄹ)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는 예수
ㅁ) 이 셋은 하나이다.
나. 아들
ㄱ) 영존하시는 아버지
ㄴ) 예수는 하나님이며 인간
ㄷ) 하나님은 예수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함
ㄹ) 예수는 영 이시다
ㅁ) 주 예수 그리스도
1.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구약의 증거
신약의 증거
2. 인간과 하나님으로서의 예수
다. 성령
ㄱ. 하나님의 영이 육신에서 나타남
ㄴ. 인간이 영을 향하여 기도했다
ㄷ. 성령은 하나의 인격체이다
ㄹ. 성령의 영향력
결론---------- 그 이름
가. 위대한 위임
나. 기 우
다. 예수의 이름 안에서 성취되는 일들
맺 는 말
서 론: (1) 문제의 제시----기독교의 하나님은 유일신이다.
모세는 이 유일신의 구체적 이름을 알기 위해 물었다. 그러나 구약의 아웨는 이스라엘이 부를 수 없는 이름이었다. 신약 시대에야 사도들과 초대교회는 그 이름을 알았고 모든 종교적 행사를 그 이름으로 집행했다. 오늘 날 많은 교회는 하나님에 대한 유일신관은 가지면서도 그 이름속에 내재한 능력을 행사함에 있어서는 다분히 유일신론적이 아닌 경향으로 흐르고 만다. 가령 교회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행한다” 할 적에 이는 바울의 “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고로새서3:17)라는 말에 어찌 부합되는가?
만약에 유일신 하나님을 신봉하는 사람이 그 하나님의 유일한 이름을 바로 알지 못하고 셋의 이름으로 모든 교회적 행사를 수행한다면 그곳에는 그 이름이 내포하고 있는 하나님의 무한한 권능이 발휘되지 못할 것이며 혹이라도 다신적인 개념 때문에 셋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의 권능과 그 결과를 기다린다면 이 이상 어리석은 일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2) 방법: Podt Bultmann 학파의 중추적 인물인 Rolf Rendtorff와의 하나님 이해에 관한 논쟁에서 W. Zimmerli 는 그의 양식사 비판 연구논문 “ Iih bin Jahwe"에서 에스겔서의 ”나는 여호와라“란 말씀을 주시하고 하나의 Gottingen 으로 삼았다. 그는 이 말씀은 하나님이 자신을 소개하는 표현 즉 Self Precentation formula 라고 하여 하나님이 자기 스스로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했다. 이 Jahwe 라는 이름안에 하나님의 전반적이고 인격적 전부가 표현 되었다는 것이다. Zimmerli 는 구약에서는 이름의 말씀에서 그 자신의 인격적 전체가 표현된다하여 이름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신약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 이름의 말씀 가운데서 탐구되는 의미와 계시는 구약의 그것에 못지 않을 것을 믿고 이를 규명함이 뜻있는 일인줄 알고 용기를 얻는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은 무엇인가? 마태복음 28:19의 위대한 위임 중에 나타난”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무엇인가를 밝히고 이 셋이 모두 본질적으로 한 하나님을 지칭하는 호칭이라는 것과 이 한 하나님의 참된 이름을 규명해 내려고 하는 시도는 의미 있는 일이 될것이다.
(1) 주도 하나 믿음도 하나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명기6:4)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은 적대적으로 한 분이란 의미인가? 혹은 하나님은 한 분 이상이라는 뜻인가? 사람들은 수세기에 걸쳐서 이 문제를 놓고 논쟁하여 왔다. 혹자는 말하기를 신명기 6:4 에 있는 하나라고 하는 히브리말 “echud"는 절대적인 하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절대적인 하나를 의미하는 히브리 말을 ”yahid" 라고 한다. 구약중 “yahid" 는 열두번 밖에 나오지 않은데 비하여 일상용어인 하나란 단어 ”echud"는 수천번씩 여러 곳에 사용된다는 것이다. 때로 이 단어가 한 가족이나 한 부족 그리고 한 국가를 의미할 적이 있다. 그러나 이 하나는 복수가 되는 하나는 아니다. 이 단어는 그 말 자체가 갖고 있는 의미의 수를 표시하는 말의 명사이다. 한 가족이 여러 사람으로 성립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신명기 6:4은 거기 기록된 말 하나가 무엇인가하는 그 말의 뜻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말 해 주고 있는 구절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히브리말 “echud"의 의미는 우리 한국말의 하나와 꼭 같은 의미이다.
신약성서도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기록한다. 예수 자신의 말씀을 인용해 보자. 그가 사탄에게 명할적에 “주너의 하나님을 경배하라 너는 그 분만을 섬길 것이다” 하고 하셨다. 왜 예수께서는 그분이란 말 대신에 그들(복수)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다시 히브리 6:13은 하나님께서는 자기보다 더 큰이를 두고 맹세하시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자기보다 더 큰이가 있을 수 없어서 자기를 두고 맹세하셨다” 하나님이 셋임을 믿는 Amplified Neiw Testament에서 갈라디아 3:20을 인용하도록 한다. “Now a go-between(intermediary) has to do with and implies more than one party there can be no mediator with juut one person. Yet God is only one person-and He was the sole party on giving that promise to Abraham. Bst to Low was a contract be-tween two, God and Israel: its validity was dependent on both." 이 성서의 표현에서도 역시 하나님은 단 한 분 뿐이시다. 바울이 역점을 준 것은 바로 이점이었다.
(2) 위(位) 라는 용어
하나님의 신성을 설명함에 있어서 위(位-Person) 라고 하는 제한적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부당할뿐더러 듣는 사람을 그르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 용어는 히브리서 1:3에 Xar- aktyr곧 영어의 Character이고 같은 11:1 에는 Elpijomenon 곧 영어의 Substance 인데 우리말 성서에는 전자를 “본체” 후자를 “실상”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 두 말은 모두 라틴어의 Person인데 그 의미는 연기자가 맡은 Character를 묘사하기 위해 쓰는 mask를 뜻한다. 그러므로 이용어의 합당한 쓰임이 있을 수 있다면 인간의 존재를 규명하기 위한 쓰임이 있을 수 있을 뿐이지 원숭이와 같은 하등 동물들을 위해 쓰여질 수도 없을뿐더러 더욱 천사와 같은 경지가 높은 피조물을 위해서도 쓰여질 수가 없는 것이다. 즉 이 위(位 Person)란 용어는 인자로서 그분의 인간성의 범주 안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사용될 것이다. 이 경우 예수는 그의 인간성 안에서 완전히 참된 인간이었음이 설명될 것이다. 신약에서 하나님이 쓰셨던 탈 혹은 가면(mark)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일 뿐이다. 하나님은 예수로 인하여 인류를 구원시키려고 인간의 몸으로 사셨던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가면(mark) 혹은 그리스도의 인격 뒤에 존재하고 계셨다 라는 관점에서만 이 용어는 사용의 가능성을 갖는다. 요컨데 하나님의 세 “본체” 하나님의 세 “실상” 세 인격 곧“세위”하고 할 때 이는 하나님의 신성을 설명함에 있어서 적절한 용어가 되지 못한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보는 서신들에서 ---각위---- 제위라고 사용할 때 분명히 이는 한사람의 수적인 개념에 젖어 있는 용어임을 알게된다. 위라는 말은 인간의 존재나 그숫자를 위해 쓰일 수 있는 제한적인 용어이다. 하물며 만일 이것이 하나님의 수를 나타내는 다신적 표현을 위해 쓰여졌다면 용납될 수 없는 문제가 될 것이다. 또 Person의 우리말은 “분”인데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함에 있어서 이 용어를 우리말로 옮겨 놓을 때 “세분이면서 한 지체”인 하나님이란 설명이 암시하게 되는 것처럼 자칫 과오를 범하게 될 수적 개념에 사로잡히고 말 것이다.
(3)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
(가) 아버지: 태초로부터 그리스도의 탄생까지 주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아버지로 나타내 보이셨다. 아무도그를 본 사람은 없으나 그는 성막의 속죄소에 있는 언약궤의 두 그룹사이(은총의 보좌)에서 모든 제사장들에게 말씀 하셨던 것이다(줄애굽기25:22). 구약에서 수차에 걸쳐 하나님은 주 하나님“ ”주여호와“ 주 너희 하나님” 등으로 일컬어졌다. 그러다가 그리스도가 탄생했을 적에는 천사가 나타나 “오늘날 다윗의 마을에 한 구세주가 나셨으니 그는 그리스도 주시니라” 라고 선언했다(눅2:11). 신약과 구약은 모두 한 분 주의 존재를 강조했으니(엡4:5, 신명기6:4) 신약의 주 예수와 그 구약의 주 하나님은 같은 주심이 자명하다.
구약성서에 Lord 란 단어가 큰 글자로 적힐 때 이는 우리말로 “여호와”이다. 그리고 신약의 Lord 도 역시 큰 글자로 적힐 때 우리말의 “주” 이신 데 그는 예수이다.
ㄱ) 예수의 아버지인 하나님
마태복음 7:18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아직 결혼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드러났다.”라고 하여 먼저 하나님이 예수의 아버지였음을 알 수 있다. 20절에도 “다윗의 자손 요셉아...... 그의 태중 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란 기록을 통하여 우리는 성령이 예수의 아버지임을 알게된다. 요컨데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잉태케 한 것은 성령이니 자연히 성령과 하나님은 그 정체가 밝혀진다. 이 사실에 있어서 이 둘은 똑같은 존재이다. 곧 성령이란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다른 하나의 칭호인 것이다.
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요한복음 10:29~33에서 우리는 주께서 친히 하신 말씀“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란 말씀을 안다.
이때 유대인들은 돌을 들어 예수를 치려했다. 그들이 치려고 돌을 든 이유는 “우리가 당신을 돌로 치려는 것은 선한 일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하는 때문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했소” 라는 대답에서 발견된다. 예수는 스스로 자기를 하나님이 되게 할 필요가 없었다. 그 자신이 이미 하나님이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5:43에는 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는데 너희는 나를 영접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그를 영접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그 이름도 같은 하나님을 말하고 있다.
ㄷ) 아버지는 예수: 요한복은 14:8-10의 빌립과의 대화에서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보여주시면 우리가 만족하겠나이다.” 라고 요구했을 때 예수는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와 함께 지냈는데 아직도 나를 모르느냐?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너희가 믿지 않느냐....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자기의 일을 행하시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하는 내 말을 믿으라“고 대답하셨다. 우리는 앞서 (ㄴ)에서 아버지는 성령임을 고찰하였다. 그러므로 예수 자신은 성령 안에 있고 성령이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다. 10절 하반에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자기 일을 행하시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은 나는 성령 안에 있고 성령께서 내 안에 있다는 뜻이다. 예수는 성령 안에 있었고 또한 그분 안에 있었다.
ㄹ)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는 예수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예수께 관한 질문을 한다. 마가복음 14:62에는 “.......인자가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보니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고 또 하나님의 오른편에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이 보였다. 그리하여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있고 하나님의 오른편에 인자가 서 있는 것이 보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크게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다같이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그를 성문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쳤다. 증인들은 옷을 벗어 사울 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 그들이 스데반을 돌로 치고 있는 동안 스데반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아 주옵소서“라고 외쳤다. 우선 오른편이 행하는 직무를 보도록 한다. 사람들이 이 말의 뜻을 특별한 것으로 혹은 물질적인 것으로 만들려 하는 것은 슬픈일이다.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에 관한 기사의 오른편이란 뜻을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혹은 특별한 개념으로 만들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마태 25:31 “인자가 모든 천사를 거느리고 영광 중에 와서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아놓고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별하듯이 그들을 구별하여 양은 그의 오른편에 염소는 그의 왼편에 둘것이다.....”여기서 우리는 “그의 오른편에 있는 존재를 털이 복실복실한 네 발 달린 짐승이고 ”왼편에“ 있는 것은 남을 받기를 좋아하는 뿔 가진 네 발 짐승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의 오른편에 있는 무리는 구원받아 영광 받는 인간의 존재요 “왼편에” 두게 되는 인간은 하나님께서 모르노라고 거절할 불법 하는 자들이다.
그의 우편과 좌편, 분명히 이것이 물질적인 관점에서부터 신적 관점이 되어질 때에, 영은 어디에나 존재하기 때문에 그 하나님은 우리의 왼편도 오른편도 우리의 위에 또 아래에 있을 수 있고 우리의 앞이나 뒤에 또 우리의 모든 둘레에 계실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신관을 노함에 있어서 오른편이다 왼편이다 하는 말로 하나의 물질적 개념을 낼 수가 없다. 전도서 10:2 “지혜자의 마음(심장)은 왼편에 있느니라.....” 이 구절이 염통을 가르쳐 말하는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가? 곧 지혜자의 염통은 왼편에 붙어 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이는 사람의 영혼, 마음, 느낌, 그의 태도의 총화, 그리고 그의 내적 존재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은 “삼가 열심을 다하여 네 마음을 지키라 이것에서 생명이 나오느니라”한 말씀 중에 양심에 화인 맞아 그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고 한 사도바울의 경고에 나타난 마음, 다른 말로하여 지혜자는 그의 양심을 속이지 않도록 조심하고 우매자는 그의 양심을 속이고 마비시켜 마침내는 자신의 느낌을 파괴하고 만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오른편 혹은 왼편이란 말로 물질적인 개념을 만들어 낼 수 없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이 말은 영적인 개념이다. 오른편은 영예의 자리이다. 골로새서 1:19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그의 모든 충만하심을 그 아들 안에 머물게 하시고”
ㅁ) 이 셋은 하나이다.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은 -----처녀가 잉태하여 한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 이는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란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이 예언의 성취대로 그는 참되시고 전능하고 전지하신 하나님이 되셔야 할 것인데 그는 육신이라고 하는 겉옷을 입으셨던 것이다. 그는 세상에 계시다. 그리고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 그리고 그 세상은 그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분이 이제는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 “증거하는 이가 셋이 있는데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다. 이 셋은 하나가 되려고 의논한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이다. 그는 본질적으로 근본적으로 불가 분리적으로 하나이다.
(나) 아들
ㄱ) 영존하시는 아버지: 이사야는 예수를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권능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다(이사야9:6). 예수 그리스도는 불가시적 하나님의 가시적 형상이다(골1:15).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육신하신 존재이다. 이것이 정말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다.
ㄴ) 예수는 하나님이며 인간: 예수는 그 탄생부터 신비이다.
그는 인간의 격식을 갖추어 탄생하지 않았다. 그는 지상의 육신적 친아버지를 갖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성령이었다. 그의 모친은 처녀 마리아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이요 인간이였다. 그러므로 그가 하나님으로는 아버지요, 인간으로는 아들이었다. 그는 나무의 뿌리요 동시에 싹이었다. 이는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바 그대로의 사실이다(요한복음10:39, 14:8, 9 계22:16) 이 성구들은 하나님은 영이신고로 둘이 아닌 한 분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아들의 육신 안에 거하신다. 육과 뼈가 없는 영은 하나의 인격적 존재가 될 수 없다(눅 24:39). 인간 된 몸으로서 그는 먹었고 하나님 됨의 능력으로 보리떡과 생선을 많게 했다. 인간 됨 때문에 배에서 주무셨고 하나님으로서 일어나 바다를 잔잔케 하셨다. 인간 됨으로서 나사로의 무덤에서 눈물 흘려 기도하셨으며 하나님 됨으로서 무덤에서 스스로 부활하여 살아나셨다. 인간으로서 그는 죽으셨고 하나님으로서 그는 죽음으로부터 살아나셨다(요한복음2:19). 한 형상 혹은 한 분 안에서 예수는 하나님이며 인간이고 영이며 육신이고 아버지시며 아들이시다.
ㄷ) 하나님은 예수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함
디모데전서 3:16은 “우리 종교의 비밀은 확실히 위대하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나시고.....”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계시록 1:5~8 사이에는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고 주께서 말씀하신다.
즉 그는 “ㄱ”에서 “ㅎ” 처음에서 나중 끝까지의 모든 것이며 전능한 자란 의미이다. 정말로 이분이 누구인지를 알려면 17~18을 읽음이 마땅할 것이다. “나는 처음과 나중이요 ” “나로 살아있는 자나 내가 죽었다. 그러나 보라, 영원 무궁토록 나는 살아있고 죽음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스스로를 밝히고 있다. 계시록 22 ; 16은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천사를 보내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증거했다. 나는 다윗의 뿌리요 그의 자손이며 빛나는 새벽별이다.” “나 예수” 그는 아무도 자기 자신 속에다 포함 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모든 것의 모든 것이다. 이전에 다른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았고 이후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현재에도 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 그는 말하기를 “다른 하나님이 있더냐? 나는 다른 하나님을 알지 못하노라”라고 하였다.
ㄹ) 예수는 영이시다.
이리하여 여러분은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그의 아드님의 영을 보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셨다. (갈라디아서 4 ; 6). 고린도후서 3 ; 17은 “주는 곧 영이시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다.” 성서는 영이 셋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영은 하나라고 말한다. 에베소서 4 ; 4은 “몸도 하나요 영도 하나이다”라고 기록한다. 그러므로 성령은 이 하나의 영이고 이는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불려져야 한다. 고린도전서 15 ; 45은 “성서에 ”성서에 첫사람 아담은 산 존재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언자들은 그들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들에게 그리스도 수난과 그뒤에 올 영광을 미리 알려주신 사실을 따라 그일이 어느때 어떤 형편으로 올 것인지 살펴보았다“(베드로전서 1 ; 11). 성서는 계속하여 이 거룩한 사람들속에 거했던 그리스도의 영은 성령이었다고 말해주고 있다. 즉 베드로후서 1 ; 21은 ”예언은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돌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말씀을 말한 것이다“라고 말하여 베드로는 이 그리스도의 영은 바로 성령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요 또한 아들의 영이니 이는 영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ㅁ) 주 예수 그리스도
그러면 주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며 어떤 분인가?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오 인간이시다. 그는 완전한 인간 이시며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 (1)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시다. 예수께서 인간이었나는 것은 그의 인간 혈통적 사실에 비추어 볼때 너무나 자명하다. 하와에게 주어진 약속에서 예수는 그 여자의 “후손”임이 언급되었다(창 3 ; 15).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신명기 18 ; 15)고 선언했다. 이사야의 예언 가운데도 메시아에 관해서 언급되어 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이사야 9 ; 6)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도 메시아에 대하여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예레미야 23 : 5)고 말씀하셨다. 신약성서의 첫 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이러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요 다윗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다”(마태복음 1 : 1). 예수는 인간의 정신적 육체적 조직을 가지고 계셨다. “그는 지혜와 키가 날로 자랐다(누가복음 2 ; 52). 지음을 받은 피조물인 면에서 그는 지식적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마가복음 13 ; 32)
제 5장 사도의 교리 그는 양친에게 순종했다. “예수는 부모를 따라 나사렛으로 돌아가 그들을 받들어 섬겼다”(누가 2 ; 51). 예수는 기도와 순종과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일 등으로 자신이 하나님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에 대한 그의 복종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올라가셨다”(마태복음 14 ; 23). “그는 밤을 새우며 하나님께 기도하셨다“(누가 6 ; 12) 예수의 기도생활은 다른 경우에도 여러번 나타난다. ”나의 아버지시여 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 26 ; 39). ”나는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하라시는 대로 심판한다“(요한복음 5 ; 30).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성하였다(요한복음 17 ; 4).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시지 않는다(요한복음 8 ; 29). “나는 내 마음대로 말한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무엇을 말해야 하고 또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을 친히 내게 명령하신 그대로 한 것이다”(요한복음 12 ; 47).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것을 모르셨습니까?(눅2:49)>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산다“ (요한복음 6:57) 내 아버지께서는 나보다 크시다(요한복음14:28).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 (요5:36)
예수께서 “인자”하고 하는 표제에 자신을 적용시키므로 자신의 인간성을 충분히 인정하셨다. 사도들의 간증 가운데에도 예수의 인성은 설명되었다. “아들 자신까지도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복종하게 하신 분에게 복종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만유의 주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아래 있게 하셨다(갈라디아4:4).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아드님을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상속자로 정하셨으며....”(히브리서 1:1, 2)“ 그는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에게 다 맡기셨다(벧전2:28). 예수는 시험과 정신적 고통의 대상이었다. 그때에 예수께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시러 성령의 인도로 빈들에 가셨다.”(마태2:1). 그는 친히 시험을 받고 고난을 당하셨다. (히2:18) 그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모든 일에 시험을 받으셨다. (히브리서4:15). “그는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자라”(이사야 53:3). 그는 하나님의 영적 영향력을 받아 드리는 사람이었으며 영적 성장의 주체였다.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이사야 1:2~3)”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이 충만하여 갈릴리에 돌아오셨다. (누가4:14)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부어주셨다.(행전10:38) ”예수는 하나님에게 더욱 총애를 받게되였다“(눅2:52)
예수의 완전한 인성은 그의 중보직을 완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며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신데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이시다.” (딤전2:5) “그러므로 그는 모든점에 있어서 형제들과 같아 져야만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비하고 신실한 제사장이 되심으로 백성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한 것이다(히브리서2:17).
이상과 같은 여러 성경 말씀들은 예수의 완전한 인성을 인정케 할뿐이다.
ㄹ)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그리스도안에 계시는 하나님.
구약의 예언들과 신약의 기록들 중에는 그의 신성을 입증하기 위해 자주 인용되는 주 예수의 선재에 대한 가르침 그의 숭고한 성격과 위치 보통인간의 그것을 능가하는 그의 기품 그의 통치권 그의 왕국의 크기, 그 성격 또 그 영원함 등의 내용이 많다.
이 많은 내용의 예언과 말씀들은 예수의 신성에 대해 일치하면서도 이 내용들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예수의 신성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증명 없이도 진리가 되기 때문이다. 천사는 초인간적 존재이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 이전에 존재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인 것은 아니다. 그러면 구약과 신약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신성에 대한 긍정적 가르침을 찾아보도록 한다.
구약의 증거: 시편 2편에는 메시아를 인정하는 말씀이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편2:12). 이러한 말은 그가 제아무리 숭고하다 할지라도 단순한 피조물을 두고는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러한 존재는 초월적 우주적 대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제아무리 그가 순수한 의도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는 지식과 능력에 있어서 제한을 받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시편 45편의 메시아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이사야의 예언에는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 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 의왕이라 할 것임이라(이사야9:6)고 기록되어 있다. 또 예레미야의 예언에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 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 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예레미야 23:5~6) 예언자 미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가5:2).”
신약의 증거
(1) 예수는 스스로 그 자신의 신성과 그가 하나님의 대권을 갖고 계심을 주장했다.
무소부재-----“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내가 그들과 함께 있다”(마태18:20). “보라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
하나님의 능력----“아버지께서 죽은 사람들을 일으켜 생명을 주시듯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신다”(요한복음5:21). 이 일은 피조물로서의 아들에 의하여 행해지는 진실은 아니다. 이는 그분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에 의해 이뤄지는 진실이다.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올 것이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그리고 듣는 사람은 살 것이라”(요한복음5:25). “놀라지 말라 때가 올터인데 그때는 무덤 속에 있는 사람들이 다 그의 소리를 듣고 나올 것이며....(요한복음5:28,29)” 하늘과 땅 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마태복음28:18). 이렇게 하여 신약성서는 우리에게 예수의 전지성(마10:31,33. 마가8:38). 하나님께로서 난 그의 권위(요한복음5:22,27 마태25 스31,46)들을 주장하였다.
(2) 인간과 하나님으로서의 예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이상의 그 무엇인가.
그렇다. 그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다르고 사람과도 다르면서도 이 둘 다가 존재를 의미하기 위하여 쓰여질 수 있는 이름이나 상징 혹은 용어는 무엇이 될 것인가? 이 혼성체는 신성과 인성의 요소를 둘다 가지고 있고 각 실체에서의 결과이니 만큼 그는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그리고 ”인자(Son of man)"라고 불러질 것이다. 하나님이라고 불려질 때는 그의 신적 실체에 대한 말이다. 그러나 그를 사람이라고 부를 때 이는 그의 인간적 실체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된다. 그의 근원에서 그는 성령에서 결과된 존재이고 그의 인간적 근원에서 그는 육신에서 결과된 존재이다. 복음서의 기자의 과업은 그의 신적 근원에서 나온 예수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용어가 주어진 것이다. 누가의 과업은 인간적 근원에서 나온 예수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인자”한 용어가 주어졌던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또 하나님은 하나님을 창조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 안에 있는 신적 실체는 바로 하나님 자체이다. 예수는 “나와 나의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오한복음 10:30) 고 할 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현현(Theophany)또는 “몸 안에 계신 하나님”의 현상이다.
하나님의 신적인 질적인 요소 혹은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존재한다. 실재에 있어서, 그의 탄생으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나타남에서 하나님의 질적 충성만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친히 몸소 존재하여 나타났었다. 그러나 양적으로 볼 때 하나님은 그렇게 제한적이 아니다. 그는 모든 의미에서 무제한적 존재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예수께서 그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말하면서도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계셨다.
이리하여 시간적으로 몸으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 계셨던 것이다(요한복음14:9, 고후5:19). 그러나 이 몸은 공간과 시간을 채우고 심지어 영원의 세계에서의 아버지 직 을 초월하는 그 아버지 안에 계셨다.
예수를 부름에 있어서 사람이라고만 부르고 “인자” 하고 부르지 않을 때 그가 본래 주장했던 모든 인성들을 부인하는 것이 될 것이다. 예수를 부를 때 하나님이라 않는다면, 하나님에게 무제한적으로, 무소부재한 면에서 전지 전능하신 면에서 남아있는 부분으로서의 하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인성과는 달리 하나님은 유일하시고 그의 영원한 실체에 있어서 단독이시며 결코 복수는 아니시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예수의 인성 안에서 투사 하셨을 째 이는 “하나님은 육신으로 나타나심....” (딤전3:16).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사람됨으로 인하여 예수는 모든 인간의 대표였다. 그러나 하나님됨으로 인하여 예수는 아버지와 더불어 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유일한 분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만 있을 때는 중재(중보)가 필요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갈라디아3:20).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며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신데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이시다(딤전2:5).
하나의 Analogy 로 설명해 보겠다. 물을 가지고 영이신 하나님으로 생각하자. 그리고 빙산을 예수그리스도로 생각하자. 물은 이 빙산 안에 들어있고 이 빙산은 또한 물 가운데 들어있다.
얼음은 고체화한 물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화한 하나님이다.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물은 얼음이고 물이 얼음이라고 말하게 하는 것을 가능케한다. 우리는 꼭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라 말할 수 있게 된다. 물은 액체로서 그리고 고체로서의 표현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무소 부재하고 불 가시적 영 이 있고 특수한 가시적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것이다. 그는 그 특수한 몸매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면에서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다.
(다) 성령: 이 유일한 진리며 살아 계신 하나님은 오늘에는 하늘로부터 보내진 성령이다.
성령은 이 세상에 스스로를 나타내고 계신 것이다. 지금은 성령의 시대다.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떨어진 인격이 아니다. 성령은 곧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영이시다”(요4:24)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서는 거룩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거룩한 성령”이라는 것을 알기는 어렵지 않다. 성경은 “영은 하나뿐”(엡4:4) 이라고 말했고, “주는 영이시다” (고후3:17)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사도행전 9:5에서 우리는 “예수는 우리 주”라고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분명히 “예수는 성령이시다”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그리고 그 분은 위로자이다. 제자들에게 자기는 떠날지라도 제자들과 영원토록 함께 있게 될 다른 위로자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태복음 14:18에는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예수께서는 “이 다른 위로자는 예수이니 그것은 그가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가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는 육신으로 그들과 함께 계셨다. 그는 육신으로 그들과 함께 계셨다.
그러나 그는 육신으로 떠나셨다. 그러나 그는 오순절 날에 영으로 다시 돌아오셨다. 만약에 성령이신 이 위로자가 그 다른 존재였다고 할 것 같으면 예수는 오늘날 여기 계시지 않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계실 수가 없다. 그러나 그는 지금 여기 계시다. 누구나 사람이 성령의 세례를 받았을 적에 그 체험은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계시는 것 곧 영광을 알게되는 소망“인 것이다(골로새서1:21).
ㄱ) 하나님의 영이 육신에서 떠남: 하나님이신 영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을 떠나야만 했다.
이는 그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함이며 그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사실 그는 이 일 때문에 세상에 왔다고 말씀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외쳤을 때 그의 인간적 존재가 영적 존재로 향하여 그렇게 외쳤던 것이다. 그는 완전한 인간이요 또 역시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 안에 계셨다. 즉 그는 그의 육신 가운에서 완전한 인간이었고, 영으로는 전능의 하나님이었다.----겟세마네 동사네서 인간이 영을 향하여 ”아버지여 만일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나에게서 떠나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외쳤던 것이다. 그가 참으로 마음(Spirit-영)은 윈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한말에 주의를 집중하기 바란다. 그러기에 그의 육신은 고문에서 고난에서 움추릴 수밖에 없었다. 한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예수가 행한 희생이란 도대체 무엇이냐? 또 왜 그것이 그렇게 위대하냐?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위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죽지 않느냐? 이들이 죽을 때는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보장이나 희망도 없이 죽지 않느냐? 그러나 예수는 자기의 가르침에서 그가 죽으면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홰 그의 희생이 그렇게도 위대하단 말인가?“ 이런 질문은 우리에게 상당한 깊은 생각을 요구한다. 예수께서는 그가 어렸을때부터 자신은 죽기 위해 탄생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성경는 로마서에서”우리가 아직 이방인이 되었을 때에“---즉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나그네요, 원수요, 외국인이요, 또 우리가 아무런 관계를 갖지 않을 때 그리스도께서 이런 불경한 자들을 위해 죽어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아무 상관이나 관심기울이지 않은 세상을 위해 죽어 주셨다는 의미이다.
ㄴ) 인간이 영을 향하여 기도했다: 하나님의 아들을 통하여 일 하신 이는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의 영이 인간을 통하여 역사 하셨다는 말이다. 그리고 예수가 기도하신 것은 인간이 영을 향하여 기도하신 것이다.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는 우리의 희생제물이었고 우리의 자리를 위하여 우리의 잘못을 대신 질머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셨다. 이분이 바로 우리의 자리에서 죽으셨던 것이다. 그가 바로 이 죽음의 주인공이었다. 누구나 영을 죽일 수는 없다. 영에게 옆구리를 향하여 창을 꽂을 수는 없다. 영을 십자가에 달아 못박을 수도 없다. 그들은 인간을 못 박았던 것이다. 하긴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못박기는 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죽이지는 못했다. 예수는 말씀하시기를 자기의 생명을 그들에게 맡겼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죽이지는 못했다. 예수는 말씀하시기를 자기의 생명을 그들에게 맡겼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은 자신에게 속해있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이 이 성전을 헐면 사흘만에 이르키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가 하나님으로서 말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의 몸을 두고 하신 말이었다. 그는 약속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고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가르쳐 알게 할 성령 곧 아버지께서 나의 이름으로 보내실 위로자(보혜사)성령을 너희에게 보내겠다”고 하셨다.
또 “나는 너희를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생수의 강을 너희에게 있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분은 창조에 있어서는 아버지이고 구원자요 중보자로서는 아들이고 우리의 몸 안에 살기 위해 오시는 일에 있어서는 성령이시다. 말씀하시기를 “너희 몸이 성령의 전 인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하셨고 로마서 8장에서는 “하나님의 영에 이끌리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이니라”고 바울은 기록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는 그 분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은 모두 다 하나의 같은 영이다. “너희가 같은 영으로 세례를 받으며 이제는 한 몸이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고 가리켜 말한다 할지라도 영원한 저 세상에서는 이 모두는 다 하나님 하나로 될 것이다.
ㄷ) 성령은 하나의 인격체이다.
“영” “신” “성령” “성신”이라는 용어는 하나의 신적 인격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는 다음의 여러 성경 구절에서 명백하다. “예수께서 영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시다” (마태 4:1) “성령을 모독한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마태 12:31).” 기타(눅 2:26, 눅 12:12, 행전5:3, 행 10:19, 13:12, 2:10, 롬 15:16, 고전 2:13, 딤전 4:1, 히3:15, 4:7, 벧후 1:21) 이상의 성경본문 외에도 유사한 성경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성령이라고 부르기에 적합한 신적이 존재가 있음을 가르친다. 이들 성구들은 어떤 면으로서도 이 성령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떨어져 나온 별개의 인격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ㄹ) 성령이 영향력: 이 용어는 때때로 신의 영향력이나 능력을 의미하는데 쓰였다. 다음 성경은 그 예이다. “여호와 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민수기 11:29) 하나님의 신이 그 위에 임하니라(삼상10:10) 또한 역대하 15:1, 시편51:11, 이사야32:15, 44:3, 61:1, 눅4:18, 에스겔36:27, 요엘2:28, 마태3:11(병행마가 1:8, 눅3:16). 마가12:36, 눅1:15, 2:27, 11:13, 요한 3:34, 20:22, 행2:4, 8:17, 10:38, 살전 4:8, 벧전 1:12, 4:14 이 구절들에서 나타난 중요성은 성령이 “노아졌다” 혹은 “내려졌다”가 아니라, 우리에게 그 성령을 주시고 보내시고 부으신 그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진 별개의 “충만해지고” “기름 부어지고” “세례 받게된” 인격적 존재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에게 “부어지고” “주어지고” 한 것이다. 명료한 의미는 이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영적인 사람에게 성화, 세례, 계시, 기적적인 능력부여 등의 방법으로 영적 영향력을 발휘함을 뜻한다.
ㅁ) 성령은 보내졌다.
인간의 마음은 제한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제한 적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자체의 성품 때문에 하나님을 완전 무결하게 이해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속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인류에게 알게 하는 일이 기대되는 것이다.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에 대한 설명은 인간의 방법(이해 할 수 있는)에 따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그림 언어적 말씀들을 잘 이해한다. 즉 이 언어들이 그것만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표현이라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잘못을 범하면 안될 것이다. 우리는 성서의 전반적 가르침에 의거하여 이 문제를 해석해야 한다. 요한복음 7:39에는 “성령이 아직 사람들에게 임하지 않았다. 이는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으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당시 세상에는 하나님의 기적적이고 거룩한 영향력으로써 하나님의 영이 없었다는 말인가? 당시까지에는 경건한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인가? 12제자뿐만 아니라 70인의 제자들까지도 기적을 행했는데 이런 일이 없었다는 말인가? 아니, 이 성령의 보냄은 세상에 하나의 존재적 인 것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당시까지의 세계사가 경험했던 것 이상의 더 큰 실천으로서 하나님의 기적적이고 거룩한 영향력의 보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이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전에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과의 대화 중 “다른 보혜사는 성령” 이라고 말씀 하셨으며 그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내질 것이며 그가 모든 것을 알게 가르친 것이며 그가 예수에 관한 일을 증거하고 영원토록 함께 거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한 14:26, 15:26).
이 말씀의 의미는 지금 이전에 계시지 않았던 신적인 존재가 온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제자들의 그 어떤 참 사랑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한 성품의 도래를 말하는 것도 아니요 세상에 그 어떤 다른 종교가 존재할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올바른 설명은 무엇인가?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성격을 살아 계신 한 분 하나님으로서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어려움과 문제들을 가지고 인간에게 예수에게 찾아가는 일에 익혀 있었고 이렇게 하여 예수에게서 위로의 도움과 교훈을 구했던 것이다. 예수께서 이들에게 인간으로서 나타내 보이시는 동안 추종자들은 그의 신적 성품을 인식하여 그들의 영적 필요를 공급받기 위해 하나님에게 의지하게 하도록 하는 일이 필요했다.
이러한 관련성은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준다. 즉 예수는 그들이 지금껏 누렸던 것 이외의 다른 어떤 신적 현재(현존)함에 의한 기쁨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그 차이는 신적 영향력의 종류가 아니라 그 정도의 차이였다. 그들의 필요에 대한 자신들의 인식과 그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실 것을 믿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과 영적 축복을 가져오는데 관건이 된다고 하는 의미이다.
예수는 “내가 아버지에게 구하겠다. 그리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같이 계시게 하실 것이다. 그는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를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기 때문에 그를 맞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알고 있다. 그것은 그가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가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그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18).
나는 너희의 보혜사(위로자)가 되겠다. 이 위로자인 보혜사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곧 내 자신인 신적 성품 안에 있는 나이다.“ 다시 그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리하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아버지와 나는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14:23). 이는 분명히 아버니와 그 영과 그리스도 자신이 그들 추종자(제자)들에게 임하여 함께 거할 것을 말한다. 보혜사는 이 세 존재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각각 그 하나 하나는 모두로서의 전체적인 하나이다.
그러므로 공정한 결론은 이것이다. 각각의 셋은 그의 모든 충만 안에서 창조자 및 왕으로서 그리고 중보자 및 구원자 또는 성화케 하시는 자로서 그리고 보혜사(위로자)로서의 도저히 나눌 수 없는 불가분의 하나이신 하나님이시다.
그 어떤 의미상으로도 셋의 신적 인격체가 아니다. 다른 이름 또는 호칭들 아래에서의 전혀 유일한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결 론------------- 그 이름
유일하신 하나님의 참된 이름은 무엇이며 왜 그것이 중요한가, 또 그 이름 안에 내재한 능력을 살펴보도록 한다.
성경상의 참된 하나님은 다른 거짓 신들과 구별되는, 그리고 그 이름을 통하여 하나님으로서 인간에게 계시는 하나의 이름 혹은 적절한 명칭을 가지고 계신다. 이러한 사실은 자명한 일이로되 지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다. 모세로 하여금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도록 명령했다. 그 모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히브리어로 흔히 구약성경에 엘(el)혹은 엘로힘(elohim), 히랍어로 데오스(Theos)인데 이는 다른 것 중에서 경배 받을 자란 의미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이름이나 적절한 명칭이 아니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서의 하나의 표제 또는 호칭(title)이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하라”(출3:13~14).
모세가 이 질문을 하나님에게 할 당시에 애굽 땅에는 잡다한 신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신들은 각각 이름이나 적절한 호칭들을 가지고 있었다. 애굽의 거짓 신들이 이렇게 이름이나 적절한 명칭들을 가지고 있었다. 애굽의 거짓 신들이 이렇게 이름이나 적절한 명칭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영원히 살아 계시는 유일이신 성경의 하나님에게도 마찬가지 사실 이 된다. 그런데 그 이름을 하나님은 그의 종 모세에게 불붙는 가시덤불에서 출애굽기 3장에 기록된 것과 같이 계시해 주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이 계시를 신약에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실 적에 공고하게 굳치셨다. “너의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기를 기대했고 마침내 보고 기뻐했다.
그러자 유대 사람들은 말했다. “당신은 아직 나이 오십도 못되어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심으로 진심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었다”(요 8:56~58).
이 성경구절에서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그분인 “내가 있었다(I am)" 고 선포했다. 언제 예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났었다는 말인가?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을 적에 아브라함이 부른 자기 하나님의 이름은 예수였다.
(가) 위대한 위임------마태복음 28:19에 숨어 있는 이름을 밝히고져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예수는 개종자들을 위해 세 개의 표제 호칭들을 반복하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했다. 그리고 아들의 이름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렇게 하라고 명령했다. 이제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받으면 지체없이 예수라고 대답하게 되었다. 아들의 이름과 성령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이다.
요한복음 5: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는데 너희는 나를 영접하지 않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만약 예수께서 그의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면 우리가 알려고 하는 계시된 아버지의 이름은 무엇인가? 마태복음 1:21에는 “마리아가 아들을 낳거든 예수라 하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예언자 이사야는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사43:11). 뿐만 아니라 천사는 예수의 탄생을 찬양할 때 ”예수가 자기 백성을 구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예수께서 구원자가 되고 육신 중에 나타나서 이사야 43:11의 하나님이 되실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요 4:42, 빌3:20). 아버지의 이름은 예수이다. 아들의 이름은 예수이다. 이제는 요한복음 14:26을 보도록 하자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 예수께서 보혜사는 모든 믿는 자에게 오는데 이 보혜사는 예수의 이름으로 올 것을 약속했다(요14:16).
(나) 기우-------마태복음 28:19에 나타난 세 표제 칭호들이 참된 이름이 무엇이란 것은 제자들은 족히 알 수가 있었다. 만약에 이 이름이 제자들에게 계시되어 있지 않았다 할 것 같으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기우를 염려해 볼 수 있다. 즉 위대한 위임을 명령받은 사람들은 제자들이었다. 그 중에는 베드로를 위시한 다른 제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 일 후 몇 십일만에 예루살렘의 모처 다락방에서 되어진 일로 베드로는 “우리가 어찌할꼬!” 하고 질문하는 자들에게 대답한 말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행 2:38)이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가 아니었다.
우리가 아는 바로 당시 그곳에는 여러 제자들을 비롯한 120문도가 있었다. 그 중에는 마태28:19을 기록한 레위인 마태도 있었다. 마태는 왜 잠잠했는가? 왜 일어나서 베드로에게 “아니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라고 항의하지 않았던가! 성경에는 모순이 없다. 마태의 기록과 베드로의 설교가 다를 수 없다. 마태는 그 표제들의 참 이름이 무엇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오늘날 어떤 교사나 교수라 할지라도 “아버지”는 표제나 호칭이지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 이름은 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이 셋은 모두 한 이름을 위한 대명사로서 그 이름이 내포하고 있는 신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참 이름 혹은 바로 그 사람만을 가리키는 고유한 이름 즉 고유명사는 될 수가 없다. 숫자적인 관념에 따라서 생각한다 하더라도 마태28:19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들”(복수)이 아닌 단수 곧 그들 이름(단수)으로 이 의식을 행하라고 했다. 그러므로 복수 아닌 유일하신 그 이름은 무엇인가? 예수이다!
(다) 예수의 이름 안에서 성취되는 일들.
ㄱ. 기도 ㄴ. 성령의 임재 ㄷ. 구원 ㄹ. 세례
(ㄱ) 기도
“너희가 나의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이를 시행하리라” (요14:14).
우리의 기도는 물론 예수의 이름으로 해야한다. 모든 공중기도나 개인기도를 막론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해야한다. 이것은 우리가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흔히 대 예배후의 축도가 이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이를 시정하는 용기를 가져야한다. 이 용기는 예수의 이름의 갖는 의미와 그 중요성을 이해할 때 거기서 얻어질 것이다.
(ㄴ) 성령의 임재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겠고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것을 모두 생각나게 할 것이다(요14:26).
하나님의 모든 중보의 역사는 예수의 이름으로 시작되어 있다.
(ㄷ) 그의 이름 안에서의 구원
이분을 힘입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이름은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들 가운데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는 없다(행4:12).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갈3:26).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그리스도를 인하여서 외에는 다른 방법이 있지 않다.
(ㄹ) 세례
그리고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눅24:47~48).
성경은 죄의 회개와 용서는 다름 아닌 예수의 이름으로 전파된다고 했다. 세례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다음과 같이 되어있다. “회개하라 그리고 하나 하나가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다(행2:38).
그리하여 사도들은 교회의 탄생일인 주 후33년(혹37년) 오순절 날에 그들의 개종자들을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 주었을 때 누가 24장과 마태 28장의 위대한 위임을 수행했다. 신약성경 도처의 세례가 베풀어지는 곳마다에서 세례는 예수의 이름으로 집행되었다. 이들은
(1)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전도할 때....“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행 8:16).
(2) 베드로가 가이사랴에서 전도할 때....“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명했다”(행10:48).
(3) 개종한 바울이 세례 받을 때.... 그는 다시 보게되었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 세례 받고....“(행9:18). 여기에는 무슨 이름인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를 받았다. 이는 다음에서 설명되는 것과 같이 그가 선포한 내용이 바로 예수의 이름으로 받 는 세례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받은 바의 그것을 전파한 사람이다.
(4) 바울이 에베소에서 전도할 때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행 19:5). 신약의 사도 들은 죄의 용서를 위한 세례를 어떻게 집행했나, 하는 것이 지성인이나 공정한 마음이 개개인에게 하등의 의심 을 줄 만한 여지가 있는가? 성경은 ”너희가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다. 우리는 전통 을 믿을 것인가? 진리를 믿을 것인가?(요일 2:12, 3:23).
맺는 말: 지금까지 이 글에서 나타난 조그마한 시도가 여러 고매하신 학자 교수님들의 머리를 갸우뚱할 만큼이라도 문제가 되어주고 미약한 사고의 여지만이라도 갖게 될 수가 있다면 본인은 지대한 격려를 받고 한량없는 용기로서 이 길을 향해 전진할 것을 다짐하는 바이다. “예수의 이름” 은 Zero Word 가 아니다.
그 안에는 실제적인 하나님의 무한한 진리와 권능이 더 무진장으로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