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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생명기도수첩 (우리의 사명과 시대를 분별하는 파수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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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생명기도수첩 우리의 사명과 시대를 분별하는 파수꾼   예수님이 기도하셨던 유다 광야 ‘ 미드바르 ’ 는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다   ■■ 생명교회 l 사명 ( 하나님이 주신 할 일 ) :  거룩한 교회가 완전한 복음을 온누리에 l 비전 ( 우리가 이루어 나갈 성취 ) :  사람을 살리는 예수 생명의 공동체 l 생명 선언문 :  우리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 말씀에 뿌리를 두고 , 하나님을 기쁘시게 자라 ,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자 되심과 주인 되심을 세상에 흘려 보내는 제자 공동체이다 . l 한국국제연합오순절교회 선언문 :  한국인으로서 , 우리는 전 세계 어디에 있든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입 맞추지 않은 거룩한 남은 자이며 ,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 연합하고 협력하여 민족의 복음화와 세계 복음화에 헌신하는 사도적 오순절 그리스도인이다 .   ■■ 주기도문 ( 마태복음 6:9-13)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나라이 임하옵시며 ,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 아멘 !   ■■ 예수님 찬양   예수님 찬양 , 예수님 찬양. 예수님 찬양합시다 . 예수님 찬양 , 예수님 찬양. 예수님 찬양합시다 . 할렐루야 , 할렐루야. 예수님 찬양합시다 . 할렐루야 , 할렐루야. 예수님 찬양합시다 .   예수 이겼네 . 예수 이겼네 .  예수 사탄을 이겼네 . 예수 이겼네 . 예수 이겼네 .  예...

오순절 운동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오순절 운동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사도행전의 교회는 완벽하지 않았지만 생동감이 넘쳤다. 그 지도자들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 사도적 패턴은 오래가지 못했다. 오순절의 이야기는 결국 교회가 그 뿌리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이사야의 표현을 빌리자면,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줄에 줄을 더하고 줄에 줄을 더하여"(이사야 28:10) 조금씩 회복되어온 여정이었다. 국가와 결혼한 교회 무엇이 교회를 사도적 뿌리에서 멀어지게 했는지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서기 325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교회 내부 논쟁을 매듭짓겠다며 첫 공의회를 소집한 일이다. 그는 주교들에게 합의를 강요했고,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자 사실상 자신이 입장을 정해 교회에 강제했다. 역사가들은 이를 흔히 "콘스탄티누스적 타락"이라 부른다. 국가와 교회가 뒤섞이기 시작한 이 지점부터, 교회는 점점 더 사도적 원형에서 멀어져갔다. 다시 돌아오는 길 16세기, 마르틴 루터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외치며 교회를 다시 사도적 방향으로 돌려세웠다. 오랜 전통이 성경의 본래 패턴을 가려온 만큼, 그 시작점까지 돌아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이 회복을 향한 갈망을 흔히 "회복 운동"(restoration impulse)이라 부른다. 18세기에는 존 웨슬리가 교회를 한 걸음 더 사도적 신앙에 가깝게 이끌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단지 교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체험해야 한다고 강조했기에, 종종 오순절 운동의 "할아버지"로 불린다. 19세기 후반에는 세 가지 흐름이 더해졌다. 첫째는 웨슬리의 완전 성화 교리에서 자라난 성결운동으로, 이 흐름은 점차 회심 이후의 체험을 "성령침례"라는 말로 부르기 시작했다. 둘째는 영국에서 시작된 케직(higher life) 운동으로, 능력 ...

땅끝까지

땅끝까지 — 오순절의 선교 열두 살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랍비들과 토론하고 계셨을 때, 애타게 찾아 헤매던 부모님께 이렇게 답하셨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누가복음 2:49). 어린 시절부터 이미 그분 안에는 분명한 사명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후 공생애 내내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고 거듭 말씀하셨고(누가복음 19:10),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동전과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를 통해 그 마음을 풀어내셨다. 그리고 갈릴리 어부들을 부르실 때, 그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 약속하시며 사역의 동반자로 초청하셨다. 갈릴리에서 땅끝까지 이 사명의 정점은 십자가였다. 죄 없으신 어린양으로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인류가 죄의 형벌 없이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을 길을 여신 것—그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부활 이후, 마태복음은 대위임령으로 복음서를 마무리한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마태복음 28:19). 사도행전은 이 도전을 그대로 이어받는다. 승천을 앞두신 예수님은 성령이 임하시면 제자들이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증인이 되리라 약속하셨다(사도행전 1:8). 실제로 누가는 사도행전 전체를 이 지리적 확장의 궤적을 따라 구성한다—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그리고 이방 세계로. 제자들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들의 시야는 처음엔 유대 세계에 갇혀 있었지만, 사도행전 10장에 이르러 마침내 그 경계가 무너지고 복음이 사마리아인과 이방인에게까지 열린다. 초대교회는 때로 박해에 떠밀리면서도 끊임없이 움직이는, 본질적으로 선교하는 교회였다. 현대 오순절 운동, 다시 선교하는 교회로 현대 오순절 운동은 바로 이 사도적 원형으로 돌아가려는 열망에서 태어났고, 그래서 처음부터 선교하는 교회의 성격을 띠었다. 이 운동에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초기 오순절 신자들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한 몸, 여러 지체

한 몸, 여러 지체 — 성령의 은사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하나의 몸이지만 지체는 여럿이고, 각 지체마다 맡은 기능이 다르다(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 12장). 그래서 우리는 하나 됨을 추구하는 동시에 다양성을 기뻐한다. 하나님은 이 몸의 각 지체에게 특별한 능력과 사역을 나누어주셨고, 우리는 저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찾아 최선을 다해 활용해야 한다. 세 가지 목록, 한 분 하나님 성경은 은사를 몇 가지 목록으로 소개한다. 로마서 12장은 몸을 섬기는 실제적 능력들—가르침, 권면, 나눔, 인도함, 긍휼 베풂 같은—을 나열한다. 이 중 상당수는 사람의 타고난 재능과 겹쳐 보이지만, 그것이 영적 영역에서 작동하게 하시는 분은 언제나 하나님이시다. 에베소서 4장은 조금 다른 성격의 목록을 준다—사도, 선지자, 전도자, 목사, 교사라는 직분들이다. 이들은 교회 전체를 온전케 하여, 모든 성도가 저마다의 자리에서 섬길 수 있도록 세워주는 역할을 한다. 아홉 가지 표적적 은사 고린도전서 12장은 세 번째 목록을 제시한다. 성령의 직접적 개입으로 나타나는 초자연적 은사들이다.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특정한 필요를 위해 주시는 통찰), 특별한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성령이 즉석에서 주시는 메시지), 영들 분별함, 각종 방언, 그리고 방언 통역—이 아홉 가지다. 이 은사들은 교회 안에 하나님이 지금도 일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표적이며, 동시에 교회의 사명을 힘 있게 감당하도록 돕는 도구다. 은사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몇 가지 원리가 이 은사들의 사용을 이끈다. 먼저, 은사의 근원은 오직 성령이시다. 그리고 그 은사가 누구에게, 언제 나타날지는 성령의 뜻에 달려 있다—사람이 마음대로 켜고 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은사들을 사모하고, 성령의 인도에 민감하도록 스스로를 준비시켜야 한다. 하나님은 이 은사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교회 안에서 계속 나타나기를 원하신다. 은사가 겨냥하는 궁극적 목적은 언제나 주님을 높이는 것이다. ...

내 영혼이 노래하네

내 영혼이 노래하네 — 예배의 실천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과 마주 앉으신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깊게 팬 골, 그리고 그 여인 자신의 부끄러운 사연에도 불구하고, 대화는 이내 예배라는 주제로 흘러간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말씀하신다(요한복음 4:23-24). 그 말씀은 지금도 유효하다. 누구를, 어떻게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예배하지 않은 문명은 없다. 지역과 인종과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인식한 더 높은 존재를 향해 예배해왔다. 그러므로 질문은 "예배할 것인가"가 아니라 "누구를,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이다. 십계명의 첫 두 계명이 바로 이 문제를 다룬다—오직 하나님만이 예배의 대상이시며, 그분 외의 무엇을 예배하거나 그분의 형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은 우상숭배다. 누구를 예배할지는 명확하지만, 어떻게 예배할지는 좀 더 미묘한 문제다. 성경은 예배의 단 하나의 정해진 형식을 규정하지 않는다. 대신 넓은 원칙을 제시한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야기, 그리고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준 예배 지침(고린도전서 14장)은 예배에도 바르고 그른 방식이 있음을 보여준다. 옛 언약의 예배에서 새 언약의 예배로 구약의 예배는 제사와 제단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족장들이, 이후에는 대제사장이 이 역할을 감당했고, 성막과 성전이 그 중심 장소였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이 그림이 완전히 바뀐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의 죄를 짊어지신 단번의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 반복되는 짐승의 피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의 예배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사도행전은 상세한 예배 순서를 제시하지 않지만, 몇 가지 뚜렷한 요소들을 보여준다. 새 언약 백성이 드리는 예배 찬양과 음악은 예배의 중심에 있었다. 시편은 그 자체로 노래 모음집이며, 인간의 감정을 이성적 사고보다 더 풍성하게 표현한다. 바울도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다양한 종류의 노래를 언급한다. 오늘날에...

거룩함의 아름다움

거룩함의 아름다움 — 삶으로 드리는 예배 "여호와께 그 이름의 영광을 돌리고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시편 29:2). 그리스도 안의 새 생명은 사랑과 기쁨과 평강이 흘러넘치는 삶이며, 우리가 그분의 형상으로 점점 빚어져 가는 과정이다. 그 여정에서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이 예배가 될 수 있음을,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배워간다. 선택이 아니라 명령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브리서 12:14). 구원의 여정은 거듭남으로 시작해, 그리스도를 점점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부활의 영광에서 완성된다. 거듭남이 하나님 나라를 "보기" 위한 조건이듯, 거룩함은 주님을 "보기" 위한 조건이다.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베드로전서 1:15-16)는 말씀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명령이다. 거룩함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께 있어 거룩함은 절대적인 순전함과 완전함, 무죄함을 뜻한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거룩함은 그분의 성품과 뜻에 일치하는 것—그분처럼 생각하고, 그분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그분이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며, 그리스도라면 행하셨을 대로 행하는 것이다. 성경은 거룩함을 두 방향으로 정의한다. 하나는 분리—죄와 세상의 가치관에서 떠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헌신—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자"(고린도후서 6:17, 7:1). 이 둘은 동전의 양면이다. 거룩한 삶을 살아낼 힘은 어디서 오는가 거룩함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구원의 다른 모든 측면과 마찬가지로, 성화 역시 은혜로, 믿음을 통해 받는다(에베소서 2:8-...

완전히 새로운 삶

완전히 새로운 삶 — 회개, 침례,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이유는 단 하나, 십자가로 가시기 위해서였다. 성육신은 속죄를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다시 사심으로써 우리를 죄의 권세와 그 결과에서 건져내시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주셨다. 모든 사람에게 구주가 필요하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죄의 삯은 사망이요"(로마서 3:23, 6:23).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와 함께하실 수 없다. 그 분리가 곧 죽음이며, 생명의 근원에서 끊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유일하게 죄 없으신 분이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그 형벌을 대신 짊어지셨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대속, 구속, 화목제물, 화해라는 언어로 설명한다. 그리고 그분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음을 이기셨다—그 부활 때문에 우리도 새 생명과 미래의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은혜로, 믿음을 통하여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에베소서 2:8-9). 은혜란 구원이 선물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것도, 자격을 갖추어 받는 것도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받는다. 그런데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동의나 말뿐인 고백 이상이다. 믿음은 신뢰와 헌신과 실천을 포함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이다(야고보서 2:14-26). 그러므로 참된 믿음과 순종은 서로 떼어낼 수 없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믿는 것이고, 그분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날, 예루살렘에서 복음이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는 좋은 소식이다(고린도전서 15:1-4).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복음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한 분 하나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한 분 하나님 성경의 첫 문장은 변론이 아니라 선언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성경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증명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저 그 사실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사도적 신앙은 아주 분명한 자리에 선다—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 한 분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것이다. 창조주는 반드시 계셔야 한다 우주의 존재를 설명하는 방법은 셋뿐이다. 우주가 스스로 영원히 존재했거나,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냈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창조하셨거나. 어느 쪽을 택하든 과학적 증명을 넘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주의 정교한 질서, 생명의 놀라운 복잡성, 그리고 모든 인간 사회에 예외 없이 존재하는 도덕관념—이 모든 것은 이성 없는 물질의 우연보다 지혜롭고 전능하신 창조주를 훨씬 더 설득력 있게 가리킨다. 유한한 인간의 정신이 무한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스스로 떠올릴 수 있었을까?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 그 개념을 우리 안에 심어주셨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영이시니"(요한복음 4:24). 살과 피와 뼈로 이루어진 분이 아니다. 스스로 나타내지 않으시면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분은 인격을 가지신 분이다—개별성과 이성과 성품을 지니셨다. 스스로 존재하시고, 영원하시며, 변함이 없으시다. 어디에나 계시고(편재), 모든 것을 아시며(전지), 모든 능력을 가지셨다(전능). 그리고 그분의 도덕적 성품에는 거룩함과 공의, 자비와 은혜, 사랑, 신실함이 담겨 있다. 요한일서 4:8은 단언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이토록 하나님을 사랑과 온전히 동일시하는 종교는 달리 없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명기 6:4). 이 쉐마 고백이 사도적 신앙의 출발점이다. 하나님은 절대적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