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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함이란 무엇인가

거룩함이란 무엇인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和平)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 : 14)

거룩함의 정의

거룩함이란 하나님의 근본적 속성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이 말은 절대적인 완전함과 순전함을 의미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본질적으로 거룩하시다.
이 말이 사람이나 다른 대상물에게 적용될 때는 하나님께로 구별된 것을 의미한다.
구약의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거룩함이란 "구별"이라는 부정적인 개념과 "헌신"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말은 특히 죄와 세상으로부터의 구별과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을 받았으므로 죄와 질병과 귀신을 이길 권세를 받은 것이다(막 16:15-18).
죄를 이길 수 있는 이 권세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진실로 거듭났다는 사실에 대한 증인이 될 수 있게 해준다(행 1:8).
우리는 이렇게 말 할 수 있다:
"하나님이 나를 죄에서 구원하셨다.
그분이 나를 죄로부터 건져내셨다."

거룩함은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히브리서 12장 14절 말씀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5)는 말씀만큼이나 강한 진리이며 구원과 관련된 것이다.
중생의 경험 이후에는 육체와 거듭난 영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난다.
이 싸움은 거룩함을 위한 싸움이며,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서 이 싸움에서 이겨야하는 것이다.

구별의 필요성.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자신처럼 거룩한 백성을 요구하신다.(벧전 1:15-16).
아담과 하와의 죄로부터 시작하여 인류의 죄는 인간을 거룩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켰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원래의 관계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은 사람이 죄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든지 죄로부터 분리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다른 하나는 이 세상의 신(神)인 마귀의 자녀들이다.(요일 3:10, 고후 4:4).
둘 사이의 중립이 되는 사람들은 없다.
이 두 부류는 서로 다르며 구별된다.
하나는 거룩한 백성들-거룩한 제사장들이다.(벧전 2:9).
다른 하나는 부정한 백성들이다.
이 부정한 세계로부터의 분리에 대한 요구는 분명하고 명백하다.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고후 6:17).

산 제사.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이 구절 말씀은 거룩함과 분리에 더 깊은 의미를 전해준다.
거룩함은 우리의 욕망과 의지의 희생을 포함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받으심직한 방법으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희생을 하더라도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기꺼이 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거룩해야 하며 이 세상과 분리되어야만 한다.

거룩함은 성령이 주신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도움을 통해서만 거룩해질 수 있다.
성화(聖化,즉 분리)는 복음을 들음으로써 시작되며, 믿음과 회개 그리고 예수 이름으로 받는 물 침례를 통해 지속된다.
그러나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성령의 충만과 내재를 통해 성취되는 것이다.(벧전 1:2).
오늘날의 이 시대에, 하나님의 법은 석판(石版)에 쓰여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아무런 법도 없는 분이시라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은 이미 에덴 동산에서도 법을 세우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오늘날 하나님의 법을 성령으로 믿음을 통해 우리 마음에 쓰시고자 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양심으로 인도를 받으며, 성령의 감화와 확신으로 인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안에는 거룩함의 근본적인 기초(基礎)가 내주하고 있는 것이다.

거룩함은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이 직접 가르쳐준다.

방금 전에 우리가 언급한 바에 의하면 이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확증하셨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거룩함은 성령 충만한 교사와 목사가 가르쳐준다.

요한1서 2:27은 무슨 의미인가?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이 구절 말씀은 단순히 성령을 받은 모든 사람들 안에 있는 기초적인 거룩함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령이 충만한 교사에게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에베소서 4:11-12에 따르면 교사는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거룩함이란 오직 온전함을 위한 싸움이며, 이 사역은 성도들로 하여금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주신 것이다.

거룩함은 성경이 가르쳐준다.

성경은 한 개인이 직면할 수 있는 무수한 상황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그것은 바로 성령과 그 사역의 목적이다.
성경은 모든 문화와 시대와 상황 속의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기초적인 지침을 제시해준다.
거룩함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으시는 행동과 태도를 말해주며,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서 기대하시는 행동과 태도를 가르쳐 준다.

거룩함은 개인적인 문제이다.

빌립보서 2:12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것은 각 개인이 구원을 위한 자신의 법을 만들라는 의미가 아니라, 각 객인이 경외(敬畏)함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구원은 궁극적으로 개인 자신의 책임인 것이다.
중생의 체험 이후에 각 개인은 경주의 마지막까지 인내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것을 끝까지 잡아야만 하는 것이다.(히 3:14)

개인적인 확신.

각 개인은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으로 책임이 있으므로, 각 개인은 자신만의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성령을 받은 때부터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교사들과 성령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또한 개인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확신이나 또는 불확신에 의존할 수는 없으며, 특정한 문제에 대해 자신 스스로가 답을 구해야 한다.
물론, 성경의 어떤 분명한 가르침은 그 자체로서 충분한 확신이 되며, 자신이 그것에 대한 확신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회피할 수는 없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다른 신자(信者)는 함께 느끼지 못하는 확신을 주실 수도 있다.
아마도 이것은 그 사람의 배경이나 또는 어떤 분야에서의 그의 연약함 때문에 필요한 것일 것이다.
혹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그를 자신과의 더 밀착된 관계로 인도하고 계시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 사람은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과 부합하는 것이라면 자신의 확신에 따라 진실하게 행동해야 한다.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5,23).
동시에, 그는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해서는 안된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은 그의 확신을 깎아 내려서는 안되며 존중해 주어야만 한다.(롬 14:2-6).
하나님은 개인적인 헌신을 하는 사람을 존중하며 축복하실 것이다.
이런 특별한 헌신을 통해서 특별한 축복이 오며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거룩함은 법제화(法制化)할 수 없다.

거룩함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에 의해 동기부여가 이루어져야 한다.
사역자는 영적 권위가 있으며, 실제로 성도들 사이에서 행동과 의복의 표준을 정할 책임이 있다.
사역자는 신자(信者)들에 대해 하나님께 보고서를 올려야 할 것이다.(히 13:17).
그러나, 사역자가 "겸손으로 옷 입으시오"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마음속에 거룩함이 없다면 사람들은 순종하지 않을 것이다.
거룩함은 법제화할 수 없다
- 그것은 마음속에 있든지 아니면 없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거듭난 이후에, 성도는 성령이 주신 거룩한에 대한 근본적인 본능을 가지며, 거룩한 삶을 살도록 성령 충만한 목자에게 배운 것을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결합시켜야 한다.
그러나 오히려 많은 사람들은 거역하는 마음을 갖게 되며 교파들과 교회들을 비교하려고 애쓴다.
교파는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구원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거룩함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지켜진다.

성경은 이렇게 가르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요일 2:15).
우리가 거룩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사단의 지배 아래에 있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할 때 가능하다.
법이나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어느 정도 죄를 피하게 할 수 있지만, 오직 사랑만이 거룩하지 않은 모든 것과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의 임재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피하려는 소망을 우리 안에 생겨나게 할 것이다.
만일 한 사람이 진실로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기호(嗜好)나 편리함에 상관없이 그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 쓸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의 아버지이며 구세주이신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는 그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쓰신 편지를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편지 내용에 따라 살기를 원하게 된다.
우리 안에 계신 그의 성령이 우리가 순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나님은 또한, 비록 우리의 육신은 순종하기를 원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로 하여금 즐거이 순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요 14:23; 요 14:25; 요일 2:3 ).
반면에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거룩함에 대한 몇가지 기본 원리.

성경은 참된 거룩함의 필수적인 요소를 가르쳐준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롬 12:2)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고전 9:25).
이 세가지 성경구절은 실제 성결 생활의 핵심을 묘사한다.
거룩함에 대한 어떤 특정한 기준을 세우는 근본적인 목적은 우리가 이런 기본적인 원리에 따라 살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함이다.
먼저, 우리는 죄악의 세상처럼 행동해서도 안되며, 또 그런 모습으로 비쳐져서도 안된다.
심지어 우리는 죄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나 죄의 모양을 가진 것이라도 피해야 한다.
문제는 "우리는 세상에 빠지지 않으면서 얼마나 세상과 닮을 수 있는가?" 또는 "여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도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최소한도는 어디까지인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가능한 한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로 구별되었다는 것을 이 세상에서 분명히 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우리는 모든 일에 절제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자아 조절과 억제를 훈련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육신은 우리의 영(靈)에 복종해야 한다.
절제(節制)란 또한 모든 일을 극도로 또는 지나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히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방종, 타협, 또는 세속화의 한 극단으로 치달아서는 안되며, 또한 스스로 의로움, 위선, 그리고 겉치레의 또 다른 극단으로 치달아서도 안된다.
세상을 본받지 않으며 모든 일에 절제하는 원리는 본서에서 논의되는 모든 분야에 대해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

그리스도인은 죄인이 아니다.
우리는 거듭났으며, 그래서 우리는 죄를 이길 힘을 가지고 있다(행 1:8; 롬8:4).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거듭났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지니게 되었다.(롬 8:29).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며,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간다.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즉 그리스도를 닮았다면, 우리는 죄인이 될 수는 없다.
사실, 우리는 죄를 미워해야만 된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시 97: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잠 8:13).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자동적으로 우리는 악을 미워하게 된다.
지금 우리 모두는 인간 존재로서 다른 성품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더욱 공격적이고 거침없이 말하며 외향적인 반면 어떤 사람들은 더욱 보수적이거나 태평스럽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우리 삶 속에서 성령이 왕으로서 다스린다면, 죄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어떤 차이점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우리들의 본래의 성품과 상관없이 우리 각자는 악을 미워하게 될 것이다.
이것 때문에 사역자는 죄에 대해 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근본적인 성품에 상관없이 그는 죄를 구별하고 죄를 반대하는 설교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죄에 대한 사역자의 태도.

사역자는 죄를 반대하는 설교를 할 책임이 있다(겔 3:17-19).
사역자는 또한 죄를 열거함으로써 사람들이 무엇이 죄인지를 알도록 도와줄 수 있다.
사역자는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기준을 세울 의무가 있다.
이 기준들은 성도들 특히 지도자나 타(他)의 모범이 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며, 방문객(또는 초신자)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사역자의 개인적인 성향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그 안에 계시는 성령은 죄를 참을 수 없으며, 사역자로 하여금 죄를 반대하는 설교를 하게 만든다.
성령은 사역자로 하여금 필요할 때에는 담대하게 사람들을 꾸짖고 훈계하게 한다.
성령의 기름부음과 감동이 사역자에게 필요한 영적인 힘을 주도록 성령은 그의 삶 속에서 왕으로서 다스려야 한다.
비난하는 데 빠른 사람, 빨리 분노하는 사람, 참을성이 없는 사람도 성령에 의해 변화될 것이다.
이런 사람은 훈계하는 데 있어서 친절하고 온유해질 것이며, 사람들의 죄악을 볼 때에 사랑으로 설교하게 될 것이다.
사역자는 성령으로 충만하고 넘쳐야만 한다.
그때에 하나님의 성령이 그를 통해 설교하게 될 것이다.(욜 2:28).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므로, 사역자도 역시 죄를 미워하게 될 것이며, 죄를 반대하는 설교를 할 능력을 받게 될 것이다.
동시에 사역자는 그의 마음속에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가지게 될 것이다.

어떤 사역자들은 너무 태평하고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기를 싫어해서 어떤 특정한 방법으로 죄를 책망하는 설교를 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어떤 사역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제 성격상 저는 죄를 책망하는 설교를 할 수 없어요.
저는 사랑에 대해서만 설교를 할 뿐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죄에 빠진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죄를 책망하는 설교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을 영원히 잃어버린바 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되기 때문이다.
참 사랑을 온유함 이상의 어떤 것이다.
만일 내가 정말로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에게 진실을 말해줄 수 있을 만큼 사랑해야 한다.
그가 그것 때문에 나를 미워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사역자는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자신을 계속해서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진리를 선포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듣는 사람들은 사역자로 하여금 진실을 말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임을 깨닫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사랑이다.
이렇게 할 수 없는 사역자는 그리스도의 전달자로서 부적합하다.

참된 사역자는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것만을 설교하지는 않는다.
사역자는 귀를 즐겁게 해주는 사람이나 농담꾼이 아니다.
물론, 설교단에서 유머나 상상 또는 창작은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사역자의 기본적인 소명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들려주는 것이다.
만일 사역자가 단지 어떤 사람이 약한 성품을 가지고 있고 또 그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이 두렵다는 이유 때문에 그 사람이 계속 죄악 속에 있도록 내버려둔다면, 그 사역자는 성령으로 재충만 받을 필요가 있다.
그 사람은 약한 그리스도인일 뿐이며 절대 지도자는 아닌 것이다.

사역자는 전달자일 뿐이며 저자(著者)가 아니다.

사역자는 하나님이 아니며, 그는 위대한 목자장의 일을 감당할 수 없다.
사역자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바꿀 수 없다.
사역자는 단지 전달자에 불과하다.
우편배달부가 편지의 내용을 바꾸는 것은 불법이다.
편지 수령인은 편지의 내용에 대해 우편배달부를 비난할 권리가 없으며, 그에게 내용을 바꾸어 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다.
우편배달부는 저자가 아니며, 내용을 바꾸는 것은 그의 능력 밖의 일이다.
마찬가지로, 사역자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달하기만 할뿐이다.
사역자가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바꿀 수는 없다.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이해해야할 성구들.

죄와 거룩함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인의 입장을 알기 위해서 이해해야할 필수적인 중요 성구들이 많이 있다.
로마서 6장과 8장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라는 총괄주제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죄의 법

(롬 7:20).

바울은 이 세상에는 모세의 법(法)이나 양심의 법(法)보다 더 큰 죄의 법(法)이 있다고 가르친다.
즉, 구약의 법이나 정신적 동의와 이성적 추론의 과정이 사람의 속에 내재된 기본적인 죄의 본성을 이길 힘이 없다는 것이다.
이 죄의 법은 또한 죄의 본성, 옛 사람, 옛 본성, 첫 아담, 육신 등으로 불린다.

성령의 법

(롬 8:2).

성령의 법은 유일하게 죄의 법보다 더 큰 법(法)이다.
이것만이 사람을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법이다.
성령의 충만을 통해 사람의 내면에 새로운 본성이 탄생되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본성은 죄를 소원하지 않으며, 그 안에 하나님의 법과 소원을 포함하고 있다.
선행이 성령의 법을 대치하거나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

(요일 3:9).

이 성구는 하나님의 자녀는 죄를 연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새로운 본성을 받았기 때문에 죄를 짓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
이것은, 자신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처럼, 그리스도인은 죄를 미워하고 자신의 삶 속에서 죄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그가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다음의 예를 통해 위의 성구가 의미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어떤 음식이 당신을 병이 나게 만든다면,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미안하지만, 전 이 음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
만일 어떤 행동이 당신이 매우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든지, 아니면 당신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라면,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는 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앞의 두 경우에 있어서 "∼수 없습니다"라는 표현은 신체적으로 그 행동을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적으로나 지식적으로 그것을 꺼리게 된다는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본성에 의해 죄로부터 스스로를 자제(自制)하게 되는 것이다.
이 본성을 가지고 있는 한,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지 않게 될 것이다.
성령이 죄를 이길 힘과 승리를 준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 2:14)

죄에 대하여 죽음

(롬 6:2)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서 더 살리요"
그 다음 몇 구절은 계속해서 우리의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회개를 통해) 십자가에 못 박혔고,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섬겨서는 안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롬 6:7).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과 죄로부터 구원받았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를 들어본다면, 죽은 사람은 어떤 감정을 느낄까?
죽은 사람의 뺨을 때리든지 혹은 그 사람의 눈앞에서 천만 원이라는 돈을 흔들어 보이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물론, 그 사람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미 죽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면, 죄에 대한 어떤 유혹에도 우리는 반응을 보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완전히 죽었고, 우리 인생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했다면,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반은 죽고 반은 살아있다면, 그것은 어려운 일이며, 결국에는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

(롬 8:38-39).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귀신, 천사, 사람, 시험, 환난, 시간이나 환경 등 아무것도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킬 권세가 없다.
아무것도, 심지어 사단 자신도 우리를 우리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요 10:29; 요일 5:18).
그러나 그리스도인 자신은 불신앙과 불순종을 통해 자신과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깨어버리고 배교할 수 있는 것이다(롬 11:20-22; 벧후 2:20-22).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요일 1:8).

이 성구는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데 자주 오용(誤用)되어왔다.
이 구절은 죄의 행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죄의 본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거듭났다 할지라도, 옛 본성은 억제된 채로 그 사람 속에 내재하고 있다.
그는 아직 변화되지 않았고, 그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다(롬 8:23).
그래서 요한은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체험 속에서 어느 시점에 자신의 죄의 본성이 뿌리째 뽑혀버렸다는 이론을 고집한다면, 그는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신자(信者)와 그의 죄의 본성 사이에는 명확한 구별이 있지만, 죄의 본성이나 가능성은 늘 존재한다.
사실상, "죄에 대하여 죽은"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거듭난 신자들을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에 그는 죄를 지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바로 그 요점이다.
"죄인-성도" 같은 것은 없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거룩한 성품을 주셨으며, 죄를 미워하는 마음을 주셨다.
성령은 영원히 성도 안에 내주(內住)하면서 죄에 대한 싸움에서 그리스도인을 도와주신다.
예를 들면, 사람이 라디오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악한 본성이나 옛 사람을 이길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프로그램이 그리스도인이 듣기에 부적합한 것이라면, 그는 그저 라디오를 꺼버린다.
그는 라디오가 자신의 사고에 악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을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한 권세를 가지고 있다.
성령이 그의 삶을 지배하는 한, 그는 죄가 그의 삶 속으로 들어오려고 할 때 죄를 꺼버릴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만약 어떤 그리스도인이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단지 그가 성령으로 하여금 그 영역에서 완전히 다스리게끔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다른 주인에게 굴복시키는 것이고, 그 주인의 종이 된 것이다(롬 6:16).
90퍼센트 그리스도인이나 죄를 짓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없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요일 3:8)

그리스도인은 죄인인가?

앞에 언급한 구절로 조명해보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임에 틀림없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죄인이 아니다.
과거에 우리는 죄인이었지만, 이제는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렇다면 죄를 범하는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입장인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이런 사람은 스스로를 사단의 영향 아래, 그리고 죄의 본성 아래로 떨어지도록 방치한 것이다.
이 사람은 즉시 우리의 대언자이며 모사(謀士)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야 한다(요일 2:1).
예수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셨으므로 우리는 그분에게 직접 우리의 죄를 고백할 수 있으며, 그 분은 우리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히 4:14; 요일 1:9)

개인적인 기도.

예수님께서 하는 고백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죄를 용서함 받게 되므로, 개인적인 기도는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고백하기 위해서 교회에 올 때까지 기다려서는 절대로 안된다.
오히려 즉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개인적인 은밀한 기도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든 아니면 우리 자신이 직접 말로 간구하든, 하나님과 나누는 우리들의 대화이다.
우리 모두가 자신을 살필 필요가 있으며, 우리를 은밀한 죄와 허물로부터 깨끗하게 씻어주실 것을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고전 11:31).
우리는 또한 성령의 가르침과 인도하심을 구할 필요가 있다.
이런 기도는 회중 앞에서 소리를 내서 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한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도는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이길 수 있는 힘을 구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육과 영의 더러운 것

(고후 7:1).

바울은 이렇게 말하면서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이 구절에서 "육"은 육신적인 요소를 뜻하고 "영"은 사람 속에 있는 영적인 요소를 뜻한다.
가장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이 세상에 살아있는 한 육과 영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5장 28절은 여자를 향한 음욕을 마음의 간음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것은 영적인 죄이며, 육신은 실제로 간음을 행하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여전히 죄이다.
하나님께는 마음속의 미움이 실제 살인 행위와 동일하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육신의 행위뿐만이 아니라 마음의 생각까지도 깨끗케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하기 위해서 육과 영을 깨끗케 해야 한다.

육은 단지 영이 거하는 거처일 뿐이다.
사람이 거듭날 때, 그는 즉시 싸움-육과 영의 전쟁-을 시작한다.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계속되는 이 전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간다면, 성령이 이 전쟁에서 우리를 위해 승리하실 것이다(딤후 2:5).

사단의 메시지.

마귀는 우리에게, 우리가 아직 육신 안에 있으며 또 육신이 약하므로, 우리가 거룩하게 살 수 없다고 믿게 하려고 애쓴다.
그는 우리가 매일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믿기를 원한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명령하셨다.
육신이 약하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께서 육신에 죄를 정하셨다는 것도 사실이다(롬 8:3).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심으로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없이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히 2:14).
예수께서는 육신 안에서 죄를 이기셨으며, 그분이 우리의 본이 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을 우리 안에 모시고 있으므로, 우리도 역시 육신 안에서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완전함.

성경은 우리가 완전한 데로 자라간다고 가르치고 있다.
히브리서 6장 1-2절은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고 말하고, 빌립보서 3장 15절은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에베소서 4장 12절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온전케 하기"위하여 5가지 사역을 주셨다고 가르치고 있다.
절대적인 완전함과 상대적인 완전함은 구별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을 보이신 것처럼 절대적인 완전함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완전함을 이루기 위한 이 성장 과정이 진행되는 중에라도, 우리가 적절하게 성장하고 있다면, 우리는 상대적인 개념에서 완전한 것으로 생각될 것이다.
예를 들면, 일 개월 된 아기도, 비록 이(齒)가 나지 않았고 완전히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으며 걸을 수 없고 말할 수 없을지라도, 완전한 아기인 것이다.
상대적인 개념에서는 이것은 완전한 것인데, 나이에 알맞게 적당하게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10년 후에도 이 아이가 여전히 걷지 못하고 말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사과 싹은 아직 사과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불완전한 것은 아니다.
나중에 그 꽃은 작은 푸른 공 모양이 될 것이며, 그 후에 익게 될 것이다.
각 단계마다, 그것은 완전한 것이다.
이 예는 우리가 완전해지라는 권면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배우고 성장하며 우리의 잘못을 고쳐나가야 한다.
우리는 처음 중생의 체험을 한 바로 그 자리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완전함의 다른 수준으로 인한 관용.

어떤 사람들은 다름 사람들보다 더 빨리 발전할 수 있다.
기독교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거듭날 때, 그들은 훌륭한 기초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더 빨리 성장할 수 있다.
반면 이교도나 무신론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생각과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
그래서 두 사람이 동시에 성령을 받았다할지라도 완전함의 수준이 서로 다를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을 비판해서는 안된다(마 7:1).
특히, 성도들은 다른 사람들이 거룩함의 어떤 기준에 도달하는 데 실패했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인내심을 갖고 새로운 성도를 완전하게 되도록 감독하는 일은 일차적으로 성령과 사역자의 일이다.

성도뿐만 아니라 교회도 완전함의 정도가 다를 수 있다.
이것은 성도들의 배경과 초석(礎石)에 달려있다.
그것은 또한 사역자에게 달려있기도 한다.
어떤 사역자들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조심할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양들은 완전한 데로 나아갈 수 없다.
또 어떤 사역자들은 자신의 개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교회를 세우므로 그 양들은 완전한 데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완전한 데로 나아가자.

이 장(章)을 쓴 목적은 거룩함이란 일상의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매일 순종해야 하는 계명임을 입증하기 위함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벧전 1:1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해질 것을 명령하셨으므로, 그분은 우리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임을 안다.
그분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룩함과 의로움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
우리는 티나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해 계속해서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엡 5:27).
만약 우리에게 주름이나 얼룩이 생기면, 우리의 회개를 통해 예수의 보혈로 그것을 즉시 씻어야 한다(요일 2:1).

성령은 우리에게 구별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따라서 성령이 우리의 삶을 다스리고 우리의 옛 본성이 죄와 세상을 향해 죽어있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우리는 의롭다함(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옳다함)을 받았다!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
완전한 데로 나아가자.
단순히 중생의 체험을 하고 거기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성장하고 세워 나가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깨끗케 하자.
완전한 데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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