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에 관한 성경의 진리
"만일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고전 11:14, 15)
머리에 관련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은 고린도전서 11장 1절∼16절에 잘 나와있다.
이 구절은 여자는 긴 머리를 가져야 하고 남성은 짧은 머리를 가져야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자세한 것을 공부하기 이전에 왜 그런 것인가 하는 이유를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여성이 머리를 자르지 말아야 하는 이유
l.자르지 않은 머리는 권위에 대한 순종의 상징이다.
2.천사들은 여자가 이 '표'를 가지고 있는지 살핀다.
3.여성이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고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머리는 그녀의 쓰는 것이 된다.
만일 그녀가 자신의 머리를 깎는다면 그것은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다.
4.본성은 여성에게 자른 머리나 민머리에 반하여 긴 머리를 가지라고 가르치고 있다.
5.긴 머리는 여자의 영광이 된다.
6.여자는 교회의 예표이고, 긴 머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순종의 예표가 된다.
7.그것은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의 구분을 유지하시는 방법들 중의 하나이다.
남성이 짧은 머리를 가져야 하는 이유
l.남성의 짧은 머리는 권위의 상징이다.
2.자신의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리스도인 자신의 머리(권위)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긴 머리는 성경적으로 덮는 것이다.
3.본성은 남자가 짧은 머리를 가질 것을 가르친다.
4.긴 머리는 남자에게 있어서 수치이다.
5.남자는 그리스도의 상징이다.
남자의 짧은 머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권위를 상징한다.
6.그것은 남성과 여성을 외적으로 구분하시는 하나님의 방법들 중 하나이다.
이러한 이유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또 분별하기 위해서 우리는 구약에서 언급된 머리 모양의 중요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약과 신약의 연관성을 먼저 알아야 한다.
구약성경은 우리의 가르침과 교훈을 위해서 기록된 것이다(롬 15:4, 고전 10:11).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다(갈 3:24).
구약은 우리가 세우심을 받은 터의 일부이다(엡 2:20).
구약성경 안에는 우리가 신약의 깊이와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많은 예표와 그림자가 있다(골 2:16,17; 히 8:5, 10:1).
특히 구약의 말씀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하나님께서 머리 모양에 얼마나 많은 중요성을 부여하셨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머리는 완전함과 힘의 상징이었다
유대인들 사이에는 머리숱이 많은 것은 완전함과 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반대로 머리술이 없는 것은 정반대를 의미했다; 부족함, 잃어버린 영광, 나약함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예를 들자면, 열왕기하 2장 23절에 나오는 어린아이들은 일부러 엘리사를 대머리라고 불렀다.
구약성경에서 대머리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대머리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무가치하고 부족한 사람들은 호칭하는 말이었다.
머리를 자르는 것은 불명예와 애통함을 의미했다.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서, 머리를 자르는 행위는 부끄러움(에스라 9:3; 느혜미야 13:25)과 애통함(이사야 22:12; 에스겔 7:18; 아모스 8:10)을 의미했다.
이사야서 3장 l7절에서 24절에서, 교만한 여인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은 잘 정돈된 머리 대신에 대머리가 되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존귀함을 잃어버리고 또 부끄러움에 처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예레미야 7장 29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잘라진 머리를 이스라엘의 타락과 그로 인해 하나님께 버림받은 상태를 상징하기 위해 사용하셨다.
머리는 영광의 상징이었다.
여인의 긴 머리는 에스겔서 16장 7절에 보면 하나님의 축복의 한 상징이었다.
잠언 16장 31절에 보면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의 머리를 교훈을 주실 목적으로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의 머리를 자름으로서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을 떠날 것인가를 보이라고 말씀하셨다(겔 5:1-4, 12).
먼저, 그의 영광이 성전의 안뜰에 가득하였다(10:3).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은 뜰로 옮겨갔고 결국은 성전을 떠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10:19).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것과 또 그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의 머리를 이용하셨다.
머리가 없는 에스겔은 영광을 잃어버린 에스겔을 상징하고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린 예루살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자르지 않은 머리는 하나님께 구별되는 것의 표였다.
머리에 관한 다른 중요한 의미들은 나실인에 대하여 공부해 보면 알 수 있다(민수기 6:1-21).
이 말은 히브리어 나지르(nazir)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스트롱의 히브리어 및 갈대아어 사전은 이 말을 "구별된 즉 헌신된" 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나실인들은 여호와께 성별되어야 했던 사람들이다.
이 구별은 세 가지 외적 표시로써 보여져야만 했다.
나실인은 포도나무의 열매는 어떠한 것이라도 피해야만 했고 시체를 만져서는 안되었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머리를 잘라서는 안되었다.
이들 중에서 마지막 표시만이 나실인을 외적으로 바로 알아볼 수 있는 경우였다.
남자나 여자도 다 나실인이 될 수 있었다(2절).
나실인의 서원은 일정 기한을 통해서 행해질 수도 있었고, 평생을 통해서 이루어 질 수도 있었다.
삼손이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나실인이 된 것과는 달리, 바울은 일정한 기간 나실인의 서원을 했다(행 21:20-27, 삿 13:7).
그러므로 머리는 구별의 표시였다.
머리숱이 많은 것이 힘과 완전함과 영광을 상징했으므로, 머리가 자라나는 정도는 그 사람의 하나님께 드리는 힘과 노력을 의미했다.
머리는 "(자신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표"였다(민 6:7).
나실인은 그들의 머리를 어떠한 경우에도 자를 수 없었고 그냥 자라나게 두어야 했다는 사실을 주목하여 보라.
구별의 기간 동안 그는 거룩했다.
서원이 끝날 때 그는 머리를 자를 수 있었다(5절).
그가 자신을 더럽힐 수 없었던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구별의 표가 그의 머리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7절).
만일 나실인이 그의 서원을 깨뜨리고 더럽혀진다면 그는 그의 머리를 밀어야 했다(9절).
왜 그런가?
만일 그가 그의 머리를 자르지 않았다면, 그의 행위가 비록 그렇지 않더라고, 그것은 그가 아직도 하나님께 헌신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의 행동과 외모는 상충된 것이므로 그는 위선자가 된다.
또한, 만일 그가 그의 서원을 깨뜨린다면 그는 그 서원을 처음부터 다시 이행해야 했다(12절).
그가 서원을 깨뜨린 다면 그는 의롭다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겔 3:20, 18:24, 33:12,13절 참조).
그가 서원의 기간을 마쳤을 때는 머리를 다시 자를 수 있었고 그 자른 머리를 제단에 화목제로 드려야 했다(18절).
그 드려진 머리는 '구별을 위해 드려진 머리털'이라고 불렸다(19절).
나실인에 대해서는 다른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7년째 되는 해는 이스라엘에 있어서 안식년이라고 불린다.
안식년에는 나무나 포도덩굴은 가지치기를 받지 않으며, 땅도 갈지 않고 내버려둔다.
특히 포도덩굴에 있어서는 전혀 소산물을 거두지 않는다(레 25:5,11).
히브리어에서 '소산물을 거두지 않는다'라는 말은 '나지르(nazir)'이다.
그 단어는 민수기에서는 "나실인"이라는 말로 번역되었다.
사실상, 이 단어를 스트롱 사전은 '가지를 치지 않은 포도나무 줄기(마치 머리를 자르지 아니한 나실인처럼)'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다.
이러한 '나실'의 포도덩굴은 전혀 가위를 대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자랄 수 있도록 내버려졌다.
이것으로 나실인의 머리가 얼마나 길었는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나실인의 머리는 잘라지거나, 태워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자라면서 하나님께 드려졌다.
요약으로, 구약 성경에서 머리는 무엇을 의미하였던가?
그것은 힘과, 완전함, 영광의 상징이었다.
머리가 없는 것은 무가치함과 영광이 떠나간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나실인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나실인의 예를 통해 머리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서 하나님께 헌신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외적인 표적이라는 것을 배우기 위해 공부했다.
신약의 가르침
이제 우리는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1장 1절∼16절에 이르는 말씀을 공부할 준비가 되었다.
천주교회에서는 이 구절을 여성이 기도할 때는 반드시 어떤 종류의 천을 머리에 쓰고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로 해석하고 가르친다.
개신교회들은 오늘날의 교회에는 이 구절이 해당하지 않는다며 보통 이 구절을 완전히 무시한다.
많은 근본주의 교회들이 시작할 무렵에는 이 구절을 여성들은 머리를 길러야한다는 것으로 믿었고 오늘날도 일부 교회들은 이 가르침을 그대로 유지해 오고 있다.
우리는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임을 믿는다(딤후 3:16).
우리는 성경의 어떤 부분이든지 무시되어서는 안된다고 믿는다.
모든 성경구절은 귀중하고 값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구절을 분석해 보자.
바울의 영적 권위
1절과 2절; 바울은 우리가 그를 따르고 그가 전해준 규례와 가르침을 지키라고 권하고 있다.
그것은 다음 부분에서 그가 이야기한 머리에 관한 가르침에서도 적용된다.
이양된 권위에 대한 원칙
2절과 3절;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머리이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육체는 그분의 안에 거하시던 영에게 순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하신 영의 계획과 목적을 위해 자신의 몸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복했다(빌 2:8).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남자의 머리이시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다.
이것은 단순히 한 남자는 그 가정의 가장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영적인 권위와 그 가정의 대표로서의 권위를 부여받은 것이다.
아담이 최초로 창조된 것 같이, 오늘날 일반적으로 남성은 모든 인간, 남자와 여자의 대표격이다(출 20:5).
여성의 해방과 관계없이, 아내는 그녀의 남편에게 순복해야 한다(엡 5:22, 골 3:18, 벧전 3:1).
4절: 남자는 그가 기도하거나 예언할 때 머리에 무엇을 써서는 안된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는 머리인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예언하는 것은 설교하는 것과 간증하는 것을 포함한다.
5절: 다른 한편으로는, 머리(head)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기도나, 설교나 간증을 하는 여자는 자신의 머리인 남자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은 자신들의 위치를 바꾸려고 해서는 안된다.
여성이 머리에 무엇을 쓰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성에게 주신 위치를 상징하는 것이다.
15절에 따르면 긴(전혀 잘려지지 않은) 머리는 하나님께서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것이다.
6절: 만약 여성의 머리가 무엇으로 덮여 있지 않다면, 그것은 불명예요 부끄러움이었다.
이것은 그녀의 머리가 심하게 잘렸거나 아니면 밀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그녀의 영광이 떠나갔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7-9절: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창 1:26).
그는 인류의 대표격이며 그의 머리가 무엇인가에 덮여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육체를 입은 인간 중에서 남자는 가장 권위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인류는 남자에게서 나왔다(창 2:22).
이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여성의 머리는 무엇인가에 의해 덮여야 한다.
성은 구분되어야만 한다.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고, 여자의 머리(hair)는 여자의 영광이다(15절).
10절: 심지어는 천사들까지도 이 주제에 관련되었다.
우리는 천사들이 우리의 구원을 살펴보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벧전 1:12).
우리는 또한 교만과 반역이 사탄과 다른 많은 천사들이 타락하도록 만들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딤전 3:6, 사14:12-15).
여기서 우리는 여성이 천사들 때문에 능력 곧 표(mark, sign)를 자신의 머리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여자는 교회의 상징이며, 교회가 자신의 머리인 그리스도에게 순복하고 있는가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여자의 잘려지지 않은 머리는 권위에 순종하는 교회에 대한 상징이다.
11-12절: 바울은 여성이 남성에 비해 열등하지 않다고 가르친다.
또한 남성은 여성이 없이는 온전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특히 교회에 있어서는 사실이다.
아무튼 누군가가 머리로 선택되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대표와 권위자로서-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남자를 선택하셨다.
13절: 바울은 가르치는 방법의 일부로서 질문을 던진다.
여자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합당한가?
그의 대답은 그렇게 하는 것은 그녀에게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이다(5절).
14절: 그냥 관습이 아니라 본성이 남성의 머리는 짧아야 하고 여성의 머리는 길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이 면에 있어서 성의 구분을 지키는 것이다.
15절: 여성의 머리는 그녀의 영광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긴 머리는 다음 구절들의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쓰는 것으로 주어진 것이다.
이 구절은 모자나 스카프 같은 쓰는 것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그녀가 머리에 쓰는 것은 바로 그녀의 머리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만일 기도하거나 타인에게 전도할 때마다 머리에 무엇을 쓰기 위해서 멈추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항상 마음을 하나님께 두고 있고 또한 쉬지 않고 기도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살전 5:17), 이것은 모자나 스카프를 항상 머리에 쓰라고 말하는 것이 된다.
바울은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헬라어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6절의 "쓴"이라는 뜻의 헬라어는 카타칼룹토(katakalupto)이다.
스트롱 사전은 이것을 "완전히 덮다 혹은, 가리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15절의 "쓰는 것"이라는 뜻의 헬라어는 페리볼라이온(peribolaion)이다.
스트롱 사전은 그 뜻을 "어떤 것을 덮은 것, 덮개나 베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5절과 6절은 여성의 머리가 완전히 덮이거나 가려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15절은 그녀의 머리가 덮개이며 베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분명히, 긴 머리는 5절과 6절, 11절에 비추어 볼 때 적절한 덮는 것이다.
16절: 하나님의 자녀는 다투기를 좋아하지 아니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논란하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된다.
교회는 머리에 있어서도 바울이 전해준 것과 다른 규례를 가져서는 안된다.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이, 만일 누구든지 이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는 순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일 그 말이 사실이라면 바울의 모든 가르침은 헛된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분쟁과 불순종을 용인하는 것이 된다.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만약 여러분들이 그러한 규례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않아도 됩니다"
2절과 16절을 같이 읽어보면, 바울이 그의 가르침을 지키고 변론을 하지 말라고 한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
머리에 관한 성경 가르침의 이유들
성경이 남자는 짧은 머리를 가지고 여성은 긴 머리를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는 이유를 요약해 보자.
기본적으로, 여성의 긴 머리는 남성과의 관계를 말해준다.
그것은 자신이 남성의 영광인 것 같이 또한 그녀의 영광이 된다.
그것은 그녀가 남자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말해주며 또한 가정에서는 남편에 이어 두 번째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녀의 남편에게 순종함으로서, 또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순종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녀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반역하지 않는 것은 천사들에게도 표가 된다.
그것은 그녀의 영광과 그녀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표가 된다.
그것은 그녀에게 덮는 것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그녀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기도하고, 설교하고 또한 간증할 수가 있다.
여성이 머리를 기르고 남성이 머리를 자르는 것은 본성이 가르치고 있으며, 또한 각 개인이 자연의 섭리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심어주신 정상적인 욕구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머리는 하나님께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인 성의 구분을 제공한다(신명기 22:5과 6장 참고).
이 모든 것에 대한 증거로서, 우리는 많은 나라들의 현대화와 서구화 현상을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여성이 머리를 자르는 것은 여성이 남성의 의상을 입는 것, 흡연하는 것, 술 마시는 것 그리고 도덕적인 기준을 내리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지어져 왔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 여성의 긴 머리는 나실인의 경우처럼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의미해 왔다.
하나님께서는 향상 그의 백성들에게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증거를 가지라고 요구해 오셨다.
이스라엘인들은 좋은실례가 된다.
그들은 1900년간이나 국토를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국가적 주체성과, 문화, 그리고 종교를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고대 민족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가 그들을 구분해 왔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구분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구분의 표식으로서 어떤 것도 선택하실 수가 있었다.
그분은 독단적인 이유가 아니라 위에서 열거한 이유로 인해서 머리를 선택하셨다.
우리가 이 명령을 인식하게 되면, 어떻게 이것이 교회를 세상으로부터 구분하게 되는 가를알게 된다.
상징
여성이 긴 머리를 가지는 것에 대한 다른 이유로서, 우리는 어떻게 이 가르침이 상징으로서 들어맞는가를 보아야 한다.
남자는 그리스도의 상징이다.
여자는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상징이다.
이 상징은 3절과 또한 에베소서 5장 22절부터 32절에 나와 있다.
그러므로, 남자가 긴 머리를 가지는 것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여자가 자신의 머리를 자르는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순복하지 않으며 교회가 그 영광을 잃어버렸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논증의 많은 것들은 예표에 의존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아름다운 성경의 예표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모든 예표들의 중요성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것들에 많은 중요성을 부여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왜 그것이 필요한지를 인식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지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구약성경의 성도들을 생각해보라.
명백히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과 계획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들에게는 감추어져 있던 많은 것들이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계시로 허락되었다.
예를 들어서, 그들이 예식시(時)에 사용하였던 기름은 성령, 하나님의 임재의 예표이다.
피를 통한 이스라엘의 구원, 홍해의 물 그리고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였던 구름들은 모두 오늘날 우리가 받는 구원의 예표이다(고전 10:1-2).
광야에서 들려졌던 놋뱀은 십자가 위에 매달렸던 그리스도의 예표이다(요 3:l4).
성막의 복잡한 구조들은 오늘날 우리의 구원의 많은 부분에 있어서 적용이 된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순종은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을 이해하고 또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들이 불순종함으로서 예표를 깨트릴 때마다,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임했다.
모세를 예로 들어 보자.
그는 예표를 이해하지 못했고 또한 그렇게 요구되지도 않았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는 이스라엘에게 물을 공급하기 위해서 한 번은 반석을 치라고 요구받았고, 또 다른 경우에 있어서는 반석에 대고 이야기하라고 요구받았다.
그러나 그는 두 번째에도 반석을 때리고 말았다.
이것은 우리에게 아주 심각한 잘못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으로 인해서 모세를 약속의 땅으로 들여보내지 않으셨다(출 17:6; 민 20:8-12).
이 한 번의 불순종이 모세가 전 생애를 통해서 준비해 오고 바래왔던 것을 성취하지 못하게 하였다.
왜 그런가?
고린도전서 10장 4절이 반석은 그리스도라고 말해준다.
예수께서는 단 한 번만 맞으셔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모세의 불순종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예표를 깬 것이 되고 말았다.
명백히 이것은 하나님께는 심각한 일이었다.
머리에 관한 가르침이 몇몇 예표와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주의하여 그것을 순종해야 하겠다.
우리는 그것을 가볍게 여겨서 무시할 수는 없다.
그것으로 생길 수 있는 어려움이나 다른 이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에 관계없이, 우리의 의무는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실한 사랑의 참된 정의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니"(요 14:15).
무엇이 긴 머리인가?
실제적인 문제로서, 많은 사람들이 여성이 가져야 하는 긴 머리에 관한 정확한 정의를 원한다.
나실인에 대한 교훈에서 그것은 자르지 않은 머리나 자연스럽게 자라도록 내버려 둔 머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달리 어떤 정의를 내린다 해도 그것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머리가 자연스럽게 자라도록 내버려둠으로써 우리는 바울이 14절에서 말한 선생인 자연이 여인들 각각의 적절한 머리 길이를 결정하게 할 수 있다.
또한 6절은 만약 머리가 잘린다면 그것은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세 가지 머리 길이가 언급된 것을 알 수 있다.: 긴 머리(자르지 않은 것), 짧은 머리(자른 머리) 그리고 민머리.
남자의 머리는 최소한 여성과 구분될 만큼은 짧아야 한다.
이 길이는 시대나 문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우리 시대와 문화에서는, 머리가 권위와 도덕에 대한 도전의 표식으로서 이용되어 왔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남자의 머리는 잘 정돈되어 충분히 짧아서 아무도 그가 반항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남자의 적절한 머리길이를 결정함에 있어서 우리는 다음의 질문들을 숙고해 보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 사회의 일반적 여성들의 머리보다 짧은가?
그것이 교회나 그리스도에게 비난거리가 되지는 않는가?
그것이 사회의 권위에 대한 반항은 아닌가?
혹은 목사님께 반항하는 것은 아닌가?
교회의 다른 형제 자매들에게 거치는 돌이 되지는 않는가(고전 8:9-13)?
그것이 그가 구원받은 세상의 좋지 못한 요소들과 연관시키는 면은 없는가?
그것이 세상의 변덕이나 유행과 일치하지는 않는가?
불신자들에게 좋은 증거가 될 수 있는가?
동일한 이 질문들이 또한 수염에 대해서 적용될 수도 있다.
많은 나라들이 남성의 머리에 대해서 법 규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한국과 싱가폴을 예로 들자면, 그들 나라는 남자가 칼라나 귀, 눈썹 아래로 머리를 기르는 것을 금지했었다.
지금이 예수님이 여성같이 긴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오해를 해소할 적절한 기회라고 본다.
먼저 그는, 어떤 이들이 믿는 것처럼, 나실인이 아니었다.
그는 나사렛이란 동네에서 거주했던 나사렛 사람이었다.
그는 포도주스를 마셨고 시체를 만졌으므로 나실인의 서원을 한 것도 아니었다.
예수님이 긴 머리를 가지고 있는 모든 그림들은 최소한 몇 세기 후에 그려진 것들이고, 성경적인 그리고 역사적인 근거가 희박하다.
로마의 조각상과 동전의 주조, 그리고 다른 역사적인 자료들이 그리스도 당시의 남자들이 짧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그 당시에 남자들이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하고 있었다는 역사적인 증거는 없다.
만일 그리스도가 긴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는 자신의 가르침과 자신이 의도한 본성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머리 염색
몇몇 구절들이 머리를 염색하는 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잠언 16장 32절에 따르면, 흰머리는 영광의 왕관이라고 했다.
머리색을 바꿈으로서, 영광은 사라지게 된다.
예수님 자신도 자신의 머리카락 색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셨다(마 5:36).
4장에서 이미 언급된 화장을 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똑같이 적용된다.
볼과 눈썹을 칠하는 것과 머리를 염색하는 것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비슷하게, 가짜 속눈썹을 다는 것과 자연스럽지 못한 색깔과 길이의 가발을 하는 것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머리를 자르는 것과 짧은 가발을 착용하는 것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남성과 여성 모두를 위한 가장 안전한 방법은 머리색을 바꿀만한 어떤 것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태도
여성의 긴 머리를 향한 태도에는 두 가지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어떤 여자들은 긴 머리를 가꾸고 유지하는 일에 대해서 잔뜩 골이 나 있다.
하지만 적당한 노력을 기울인다면 긴 머리를 현대적이고 단정하며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하겠어"라고 이야기 하지만 머리라는 특정한 질문에 이르러서는 그들은 발뺌하기 일쑤다.
머리를 기르는 이유를 깡그리 잊어버리고마는 그런 자세는 자기애와 게으름, 헌신의 부족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 것을 보여준다.
다른 위험한 태도는 교만과 겉치레이다.
순종의 상징인 긴 머리를 가지고서도 자기과시의 태도를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너무 과다한 공을 들이거나 머리숱을 많게 보이게 하고 사치스러운 헤어피스를 사용하 는 것은 자신에게 주의를 집중시키게 하고, 긴 머리의 참된 뜻은 외면하게 만들기 쉽다.
이것은 긴 머리의 목적과 선한 증거를 멸절시킨다.
많은 이들이 교회 예배와 대규모 집회들 가운데서 길고 아름답고 거룩한 머리에 좋은 인상을 받았지만, 또 다른 많은 이들이 자기 과시적인 머리모양들을 보고 당황하고 거부감을 가지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는 사도들의 시대에도 존재했었다.
디모데전서 2장 9절에서 바울은 여성이 '장식한 머리'를 가지는 것을 금지했다.
그것은 '정교하게 꾸민 머리모양'을 의미했다.
베드로는 '땋은 머리'에 과도한 장식을 하는 것을 경고했다(벧전 3:3).
이 성경구절들은 당시에 커다란 머리 장식물과, 또한 빈번히 명주실과 금 동전을 붙여서 과도히 수놓은 머리모양들이 유행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머리를 가꾸는데 있어서도 절제와 중용이 필요했었다.
거룩함을 위해 의도된 것을 오용함으로서 자신의 거룩함을 버리는 것은 여자에게 있어서 부끄러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1:1-16의 말씀을 무시할 것인가?
결론으로서, 고린도전서 11장의 말씀을 어떻게 할 것인가?
당연히 우리는 그것을 외면하거나 불편하다는 이유로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은 모세가 반석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만약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를 위한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다른 구절들을 같은 방법으로 외면하지 않도록 막아줄 수 있을까?
만약 머리에 관한 가르침을 외면한다면, 같은 장에 나와있는 '성찬을 행하라'는 가르침도 외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목회자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중립적이어서는 안된다.
만약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는 그의 성도들에게 그것을 가감없이 전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와 성도들 다 하나님 앞에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목회자는 성경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만약 그가 성경구절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 지혜와 지식을 구할 필요가 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한 다음에는 그것을 자신의 성도들에게 전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돈과 사람들의 기분을 맞추려고 하는 삭꾼이다.
진정한 목자는 비록 자신의 성도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일지라도 설교할 만큼 성도들을 사랑해야 하나.
그는 귀에 달거나 쓰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일부라도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교회내의 책무를 맡김으로서 불순종을 조장해서는 안된다.
만일 어떤 계명이든 배놓고 가르치려는 사람은 아예 선생이 되지 않음으로서 더 큰 책망을 피해야 할 것이다(약 3:1).
목회자는 자신의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한다.
여기서의 질문은, 우리가 고린도전서 11장 1절로 16절의 말씀을 외면할 것인가?
아니면 그 가르침을 정확히 지켜야 할까 하는 것이다.
"만일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고전 11:14, 15)
머리에 관련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은 고린도전서 11장 1절∼16절에 잘 나와있다.
이 구절은 여자는 긴 머리를 가져야 하고 남성은 짧은 머리를 가져야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자세한 것을 공부하기 이전에 왜 그런 것인가 하는 이유를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여성이 머리를 자르지 말아야 하는 이유
l.자르지 않은 머리는 권위에 대한 순종의 상징이다.
2.천사들은 여자가 이 '표'를 가지고 있는지 살핀다.
3.여성이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고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머리는 그녀의 쓰는 것이 된다.
만일 그녀가 자신의 머리를 깎는다면 그것은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다.
4.본성은 여성에게 자른 머리나 민머리에 반하여 긴 머리를 가지라고 가르치고 있다.
5.긴 머리는 여자의 영광이 된다.
6.여자는 교회의 예표이고, 긴 머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순종의 예표가 된다.
7.그것은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의 구분을 유지하시는 방법들 중의 하나이다.
남성이 짧은 머리를 가져야 하는 이유
l.남성의 짧은 머리는 권위의 상징이다.
2.자신의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리스도인 자신의 머리(권위)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긴 머리는 성경적으로 덮는 것이다.
3.본성은 남자가 짧은 머리를 가질 것을 가르친다.
4.긴 머리는 남자에게 있어서 수치이다.
5.남자는 그리스도의 상징이다.
남자의 짧은 머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권위를 상징한다.
6.그것은 남성과 여성을 외적으로 구분하시는 하나님의 방법들 중 하나이다.
이러한 이유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또 분별하기 위해서 우리는 구약에서 언급된 머리 모양의 중요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약과 신약의 연관성을 먼저 알아야 한다.
구약성경은 우리의 가르침과 교훈을 위해서 기록된 것이다(롬 15:4, 고전 10:11).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다(갈 3:24).
구약은 우리가 세우심을 받은 터의 일부이다(엡 2:20).
구약성경 안에는 우리가 신약의 깊이와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많은 예표와 그림자가 있다(골 2:16,17; 히 8:5, 10:1).
특히 구약의 말씀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하나님께서 머리 모양에 얼마나 많은 중요성을 부여하셨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머리는 완전함과 힘의 상징이었다
유대인들 사이에는 머리숱이 많은 것은 완전함과 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반대로 머리술이 없는 것은 정반대를 의미했다; 부족함, 잃어버린 영광, 나약함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예를 들자면, 열왕기하 2장 23절에 나오는 어린아이들은 일부러 엘리사를 대머리라고 불렀다.
구약성경에서 대머리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대머리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무가치하고 부족한 사람들은 호칭하는 말이었다.
머리를 자르는 것은 불명예와 애통함을 의미했다.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서, 머리를 자르는 행위는 부끄러움(에스라 9:3; 느혜미야 13:25)과 애통함(이사야 22:12; 에스겔 7:18; 아모스 8:10)을 의미했다.
이사야서 3장 l7절에서 24절에서, 교만한 여인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은 잘 정돈된 머리 대신에 대머리가 되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존귀함을 잃어버리고 또 부끄러움에 처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예레미야 7장 29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잘라진 머리를 이스라엘의 타락과 그로 인해 하나님께 버림받은 상태를 상징하기 위해 사용하셨다.
머리는 영광의 상징이었다.
여인의 긴 머리는 에스겔서 16장 7절에 보면 하나님의 축복의 한 상징이었다.
잠언 16장 31절에 보면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의 머리를 교훈을 주실 목적으로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의 머리를 자름으로서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을 떠날 것인가를 보이라고 말씀하셨다(겔 5:1-4, 12).
먼저, 그의 영광이 성전의 안뜰에 가득하였다(10:3).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은 뜰로 옮겨갔고 결국은 성전을 떠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10:19).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것과 또 그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의 머리를 이용하셨다.
머리가 없는 에스겔은 영광을 잃어버린 에스겔을 상징하고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린 예루살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자르지 않은 머리는 하나님께 구별되는 것의 표였다.
머리에 관한 다른 중요한 의미들은 나실인에 대하여 공부해 보면 알 수 있다(민수기 6:1-21).
이 말은 히브리어 나지르(nazir)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스트롱의 히브리어 및 갈대아어 사전은 이 말을 "구별된 즉 헌신된" 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나실인들은 여호와께 성별되어야 했던 사람들이다.
이 구별은 세 가지 외적 표시로써 보여져야만 했다.
나실인은 포도나무의 열매는 어떠한 것이라도 피해야만 했고 시체를 만져서는 안되었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머리를 잘라서는 안되었다.
이들 중에서 마지막 표시만이 나실인을 외적으로 바로 알아볼 수 있는 경우였다.
남자나 여자도 다 나실인이 될 수 있었다(2절).
나실인의 서원은 일정 기한을 통해서 행해질 수도 있었고, 평생을 통해서 이루어 질 수도 있었다.
삼손이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나실인이 된 것과는 달리, 바울은 일정한 기간 나실인의 서원을 했다(행 21:20-27, 삿 13:7).
그러므로 머리는 구별의 표시였다.
머리숱이 많은 것이 힘과 완전함과 영광을 상징했으므로, 머리가 자라나는 정도는 그 사람의 하나님께 드리는 힘과 노력을 의미했다.
머리는 "(자신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표"였다(민 6:7).
나실인은 그들의 머리를 어떠한 경우에도 자를 수 없었고 그냥 자라나게 두어야 했다는 사실을 주목하여 보라.
구별의 기간 동안 그는 거룩했다.
서원이 끝날 때 그는 머리를 자를 수 있었다(5절).
그가 자신을 더럽힐 수 없었던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구별의 표가 그의 머리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7절).
만일 나실인이 그의 서원을 깨뜨리고 더럽혀진다면 그는 그의 머리를 밀어야 했다(9절).
왜 그런가?
만일 그가 그의 머리를 자르지 않았다면, 그의 행위가 비록 그렇지 않더라고, 그것은 그가 아직도 하나님께 헌신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의 행동과 외모는 상충된 것이므로 그는 위선자가 된다.
또한, 만일 그가 그의 서원을 깨뜨린다면 그는 그 서원을 처음부터 다시 이행해야 했다(12절).
그가 서원을 깨뜨린 다면 그는 의롭다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겔 3:20, 18:24, 33:12,13절 참조).
그가 서원의 기간을 마쳤을 때는 머리를 다시 자를 수 있었고 그 자른 머리를 제단에 화목제로 드려야 했다(18절).
그 드려진 머리는 '구별을 위해 드려진 머리털'이라고 불렸다(19절).
나실인에 대해서는 다른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7년째 되는 해는 이스라엘에 있어서 안식년이라고 불린다.
안식년에는 나무나 포도덩굴은 가지치기를 받지 않으며, 땅도 갈지 않고 내버려둔다.
특히 포도덩굴에 있어서는 전혀 소산물을 거두지 않는다(레 25:5,11).
히브리어에서 '소산물을 거두지 않는다'라는 말은 '나지르(nazir)'이다.
그 단어는 민수기에서는 "나실인"이라는 말로 번역되었다.
사실상, 이 단어를 스트롱 사전은 '가지를 치지 않은 포도나무 줄기(마치 머리를 자르지 아니한 나실인처럼)'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다.
이러한 '나실'의 포도덩굴은 전혀 가위를 대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자랄 수 있도록 내버려졌다.
이것으로 나실인의 머리가 얼마나 길었는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나실인의 머리는 잘라지거나, 태워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자라면서 하나님께 드려졌다.
요약으로, 구약 성경에서 머리는 무엇을 의미하였던가?
그것은 힘과, 완전함, 영광의 상징이었다.
머리가 없는 것은 무가치함과 영광이 떠나간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나실인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나실인의 예를 통해 머리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서 하나님께 헌신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외적인 표적이라는 것을 배우기 위해 공부했다.
신약의 가르침
이제 우리는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1장 1절∼16절에 이르는 말씀을 공부할 준비가 되었다.
천주교회에서는 이 구절을 여성이 기도할 때는 반드시 어떤 종류의 천을 머리에 쓰고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로 해석하고 가르친다.
개신교회들은 오늘날의 교회에는 이 구절이 해당하지 않는다며 보통 이 구절을 완전히 무시한다.
많은 근본주의 교회들이 시작할 무렵에는 이 구절을 여성들은 머리를 길러야한다는 것으로 믿었고 오늘날도 일부 교회들은 이 가르침을 그대로 유지해 오고 있다.
우리는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임을 믿는다(딤후 3:16).
우리는 성경의 어떤 부분이든지 무시되어서는 안된다고 믿는다.
모든 성경구절은 귀중하고 값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구절을 분석해 보자.
바울의 영적 권위
1절과 2절; 바울은 우리가 그를 따르고 그가 전해준 규례와 가르침을 지키라고 권하고 있다.
그것은 다음 부분에서 그가 이야기한 머리에 관한 가르침에서도 적용된다.
이양된 권위에 대한 원칙
2절과 3절;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머리이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육체는 그분의 안에 거하시던 영에게 순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하신 영의 계획과 목적을 위해 자신의 몸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복했다(빌 2:8).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남자의 머리이시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다.
이것은 단순히 한 남자는 그 가정의 가장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영적인 권위와 그 가정의 대표로서의 권위를 부여받은 것이다.
아담이 최초로 창조된 것 같이, 오늘날 일반적으로 남성은 모든 인간, 남자와 여자의 대표격이다(출 20:5).
여성의 해방과 관계없이, 아내는 그녀의 남편에게 순복해야 한다(엡 5:22, 골 3:18, 벧전 3:1).
4절: 남자는 그가 기도하거나 예언할 때 머리에 무엇을 써서는 안된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는 머리인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예언하는 것은 설교하는 것과 간증하는 것을 포함한다.
5절: 다른 한편으로는, 머리(head)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기도나, 설교나 간증을 하는 여자는 자신의 머리인 남자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은 자신들의 위치를 바꾸려고 해서는 안된다.
여성이 머리에 무엇을 쓰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성에게 주신 위치를 상징하는 것이다.
15절에 따르면 긴(전혀 잘려지지 않은) 머리는 하나님께서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것이다.
6절: 만약 여성의 머리가 무엇으로 덮여 있지 않다면, 그것은 불명예요 부끄러움이었다.
이것은 그녀의 머리가 심하게 잘렸거나 아니면 밀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그녀의 영광이 떠나갔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7-9절: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창 1:26).
그는 인류의 대표격이며 그의 머리가 무엇인가에 덮여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육체를 입은 인간 중에서 남자는 가장 권위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인류는 남자에게서 나왔다(창 2:22).
이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여성의 머리는 무엇인가에 의해 덮여야 한다.
성은 구분되어야만 한다.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고, 여자의 머리(hair)는 여자의 영광이다(15절).
10절: 심지어는 천사들까지도 이 주제에 관련되었다.
우리는 천사들이 우리의 구원을 살펴보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벧전 1:12).
우리는 또한 교만과 반역이 사탄과 다른 많은 천사들이 타락하도록 만들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딤전 3:6, 사14:12-15).
여기서 우리는 여성이 천사들 때문에 능력 곧 표(mark, sign)를 자신의 머리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여자는 교회의 상징이며, 교회가 자신의 머리인 그리스도에게 순복하고 있는가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여자의 잘려지지 않은 머리는 권위에 순종하는 교회에 대한 상징이다.
11-12절: 바울은 여성이 남성에 비해 열등하지 않다고 가르친다.
또한 남성은 여성이 없이는 온전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특히 교회에 있어서는 사실이다.
아무튼 누군가가 머리로 선택되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대표와 권위자로서-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남자를 선택하셨다.
13절: 바울은 가르치는 방법의 일부로서 질문을 던진다.
여자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합당한가?
그의 대답은 그렇게 하는 것은 그녀에게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이다(5절).
14절: 그냥 관습이 아니라 본성이 남성의 머리는 짧아야 하고 여성의 머리는 길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이 면에 있어서 성의 구분을 지키는 것이다.
15절: 여성의 머리는 그녀의 영광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긴 머리는 다음 구절들의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쓰는 것으로 주어진 것이다.
이 구절은 모자나 스카프 같은 쓰는 것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그녀가 머리에 쓰는 것은 바로 그녀의 머리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만일 기도하거나 타인에게 전도할 때마다 머리에 무엇을 쓰기 위해서 멈추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항상 마음을 하나님께 두고 있고 또한 쉬지 않고 기도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살전 5:17), 이것은 모자나 스카프를 항상 머리에 쓰라고 말하는 것이 된다.
바울은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헬라어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6절의 "쓴"이라는 뜻의 헬라어는 카타칼룹토(katakalupto)이다.
스트롱 사전은 이것을 "완전히 덮다 혹은, 가리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15절의 "쓰는 것"이라는 뜻의 헬라어는 페리볼라이온(peribolaion)이다.
스트롱 사전은 그 뜻을 "어떤 것을 덮은 것, 덮개나 베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5절과 6절은 여성의 머리가 완전히 덮이거나 가려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15절은 그녀의 머리가 덮개이며 베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분명히, 긴 머리는 5절과 6절, 11절에 비추어 볼 때 적절한 덮는 것이다.
16절: 하나님의 자녀는 다투기를 좋아하지 아니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논란하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된다.
교회는 머리에 있어서도 바울이 전해준 것과 다른 규례를 가져서는 안된다.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이, 만일 누구든지 이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는 순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일 그 말이 사실이라면 바울의 모든 가르침은 헛된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분쟁과 불순종을 용인하는 것이 된다.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만약 여러분들이 그러한 규례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않아도 됩니다"
2절과 16절을 같이 읽어보면, 바울이 그의 가르침을 지키고 변론을 하지 말라고 한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
머리에 관한 성경 가르침의 이유들
성경이 남자는 짧은 머리를 가지고 여성은 긴 머리를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는 이유를 요약해 보자.
기본적으로, 여성의 긴 머리는 남성과의 관계를 말해준다.
그것은 자신이 남성의 영광인 것 같이 또한 그녀의 영광이 된다.
그것은 그녀가 남자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말해주며 또한 가정에서는 남편에 이어 두 번째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녀의 남편에게 순종함으로서, 또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순종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녀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반역하지 않는 것은 천사들에게도 표가 된다.
그것은 그녀의 영광과 그녀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표가 된다.
그것은 그녀에게 덮는 것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그녀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기도하고, 설교하고 또한 간증할 수가 있다.
여성이 머리를 기르고 남성이 머리를 자르는 것은 본성이 가르치고 있으며, 또한 각 개인이 자연의 섭리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심어주신 정상적인 욕구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머리는 하나님께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인 성의 구분을 제공한다(신명기 22:5과 6장 참고).
이 모든 것에 대한 증거로서, 우리는 많은 나라들의 현대화와 서구화 현상을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여성이 머리를 자르는 것은 여성이 남성의 의상을 입는 것, 흡연하는 것, 술 마시는 것 그리고 도덕적인 기준을 내리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지어져 왔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 여성의 긴 머리는 나실인의 경우처럼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의미해 왔다.
하나님께서는 향상 그의 백성들에게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증거를 가지라고 요구해 오셨다.
이스라엘인들은 좋은실례가 된다.
그들은 1900년간이나 국토를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국가적 주체성과, 문화, 그리고 종교를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고대 민족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가 그들을 구분해 왔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구분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구분의 표식으로서 어떤 것도 선택하실 수가 있었다.
그분은 독단적인 이유가 아니라 위에서 열거한 이유로 인해서 머리를 선택하셨다.
우리가 이 명령을 인식하게 되면, 어떻게 이것이 교회를 세상으로부터 구분하게 되는 가를알게 된다.
상징
여성이 긴 머리를 가지는 것에 대한 다른 이유로서, 우리는 어떻게 이 가르침이 상징으로서 들어맞는가를 보아야 한다.
남자는 그리스도의 상징이다.
여자는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상징이다.
이 상징은 3절과 또한 에베소서 5장 22절부터 32절에 나와 있다.
그러므로, 남자가 긴 머리를 가지는 것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여자가 자신의 머리를 자르는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순복하지 않으며 교회가 그 영광을 잃어버렸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논증의 많은 것들은 예표에 의존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아름다운 성경의 예표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모든 예표들의 중요성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것들에 많은 중요성을 부여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왜 그것이 필요한지를 인식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지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구약성경의 성도들을 생각해보라.
명백히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과 계획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들에게는 감추어져 있던 많은 것들이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계시로 허락되었다.
예를 들어서, 그들이 예식시(時)에 사용하였던 기름은 성령, 하나님의 임재의 예표이다.
피를 통한 이스라엘의 구원, 홍해의 물 그리고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였던 구름들은 모두 오늘날 우리가 받는 구원의 예표이다(고전 10:1-2).
광야에서 들려졌던 놋뱀은 십자가 위에 매달렸던 그리스도의 예표이다(요 3:l4).
성막의 복잡한 구조들은 오늘날 우리의 구원의 많은 부분에 있어서 적용이 된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순종은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을 이해하고 또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들이 불순종함으로서 예표를 깨트릴 때마다,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임했다.
모세를 예로 들어 보자.
그는 예표를 이해하지 못했고 또한 그렇게 요구되지도 않았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는 이스라엘에게 물을 공급하기 위해서 한 번은 반석을 치라고 요구받았고, 또 다른 경우에 있어서는 반석에 대고 이야기하라고 요구받았다.
그러나 그는 두 번째에도 반석을 때리고 말았다.
이것은 우리에게 아주 심각한 잘못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으로 인해서 모세를 약속의 땅으로 들여보내지 않으셨다(출 17:6; 민 20:8-12).
이 한 번의 불순종이 모세가 전 생애를 통해서 준비해 오고 바래왔던 것을 성취하지 못하게 하였다.
왜 그런가?
고린도전서 10장 4절이 반석은 그리스도라고 말해준다.
예수께서는 단 한 번만 맞으셔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모세의 불순종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예표를 깬 것이 되고 말았다.
명백히 이것은 하나님께는 심각한 일이었다.
머리에 관한 가르침이 몇몇 예표와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주의하여 그것을 순종해야 하겠다.
우리는 그것을 가볍게 여겨서 무시할 수는 없다.
그것으로 생길 수 있는 어려움이나 다른 이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에 관계없이, 우리의 의무는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실한 사랑의 참된 정의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니"(요 14:15).
무엇이 긴 머리인가?
실제적인 문제로서, 많은 사람들이 여성이 가져야 하는 긴 머리에 관한 정확한 정의를 원한다.
나실인에 대한 교훈에서 그것은 자르지 않은 머리나 자연스럽게 자라도록 내버려 둔 머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달리 어떤 정의를 내린다 해도 그것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머리가 자연스럽게 자라도록 내버려둠으로써 우리는 바울이 14절에서 말한 선생인 자연이 여인들 각각의 적절한 머리 길이를 결정하게 할 수 있다.
또한 6절은 만약 머리가 잘린다면 그것은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세 가지 머리 길이가 언급된 것을 알 수 있다.: 긴 머리(자르지 않은 것), 짧은 머리(자른 머리) 그리고 민머리.
남자의 머리는 최소한 여성과 구분될 만큼은 짧아야 한다.
이 길이는 시대나 문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우리 시대와 문화에서는, 머리가 권위와 도덕에 대한 도전의 표식으로서 이용되어 왔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남자의 머리는 잘 정돈되어 충분히 짧아서 아무도 그가 반항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남자의 적절한 머리길이를 결정함에 있어서 우리는 다음의 질문들을 숙고해 보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 사회의 일반적 여성들의 머리보다 짧은가?
그것이 교회나 그리스도에게 비난거리가 되지는 않는가?
그것이 사회의 권위에 대한 반항은 아닌가?
혹은 목사님께 반항하는 것은 아닌가?
교회의 다른 형제 자매들에게 거치는 돌이 되지는 않는가(고전 8:9-13)?
그것이 그가 구원받은 세상의 좋지 못한 요소들과 연관시키는 면은 없는가?
그것이 세상의 변덕이나 유행과 일치하지는 않는가?
불신자들에게 좋은 증거가 될 수 있는가?
동일한 이 질문들이 또한 수염에 대해서 적용될 수도 있다.
많은 나라들이 남성의 머리에 대해서 법 규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한국과 싱가폴을 예로 들자면, 그들 나라는 남자가 칼라나 귀, 눈썹 아래로 머리를 기르는 것을 금지했었다.
지금이 예수님이 여성같이 긴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오해를 해소할 적절한 기회라고 본다.
먼저 그는, 어떤 이들이 믿는 것처럼, 나실인이 아니었다.
그는 나사렛이란 동네에서 거주했던 나사렛 사람이었다.
그는 포도주스를 마셨고 시체를 만졌으므로 나실인의 서원을 한 것도 아니었다.
예수님이 긴 머리를 가지고 있는 모든 그림들은 최소한 몇 세기 후에 그려진 것들이고, 성경적인 그리고 역사적인 근거가 희박하다.
로마의 조각상과 동전의 주조, 그리고 다른 역사적인 자료들이 그리스도 당시의 남자들이 짧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그 당시에 남자들이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하고 있었다는 역사적인 증거는 없다.
만일 그리스도가 긴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는 자신의 가르침과 자신이 의도한 본성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머리 염색
몇몇 구절들이 머리를 염색하는 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잠언 16장 32절에 따르면, 흰머리는 영광의 왕관이라고 했다.
머리색을 바꿈으로서, 영광은 사라지게 된다.
예수님 자신도 자신의 머리카락 색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셨다(마 5:36).
4장에서 이미 언급된 화장을 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똑같이 적용된다.
볼과 눈썹을 칠하는 것과 머리를 염색하는 것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비슷하게, 가짜 속눈썹을 다는 것과 자연스럽지 못한 색깔과 길이의 가발을 하는 것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머리를 자르는 것과 짧은 가발을 착용하는 것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남성과 여성 모두를 위한 가장 안전한 방법은 머리색을 바꿀만한 어떤 것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태도
여성의 긴 머리를 향한 태도에는 두 가지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어떤 여자들은 긴 머리를 가꾸고 유지하는 일에 대해서 잔뜩 골이 나 있다.
하지만 적당한 노력을 기울인다면 긴 머리를 현대적이고 단정하며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하겠어"라고 이야기 하지만 머리라는 특정한 질문에 이르러서는 그들은 발뺌하기 일쑤다.
머리를 기르는 이유를 깡그리 잊어버리고마는 그런 자세는 자기애와 게으름, 헌신의 부족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 것을 보여준다.
다른 위험한 태도는 교만과 겉치레이다.
순종의 상징인 긴 머리를 가지고서도 자기과시의 태도를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너무 과다한 공을 들이거나 머리숱을 많게 보이게 하고 사치스러운 헤어피스를 사용하 는 것은 자신에게 주의를 집중시키게 하고, 긴 머리의 참된 뜻은 외면하게 만들기 쉽다.
이것은 긴 머리의 목적과 선한 증거를 멸절시킨다.
많은 이들이 교회 예배와 대규모 집회들 가운데서 길고 아름답고 거룩한 머리에 좋은 인상을 받았지만, 또 다른 많은 이들이 자기 과시적인 머리모양들을 보고 당황하고 거부감을 가지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는 사도들의 시대에도 존재했었다.
디모데전서 2장 9절에서 바울은 여성이 '장식한 머리'를 가지는 것을 금지했다.
그것은 '정교하게 꾸민 머리모양'을 의미했다.
베드로는 '땋은 머리'에 과도한 장식을 하는 것을 경고했다(벧전 3:3).
이 성경구절들은 당시에 커다란 머리 장식물과, 또한 빈번히 명주실과 금 동전을 붙여서 과도히 수놓은 머리모양들이 유행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머리를 가꾸는데 있어서도 절제와 중용이 필요했었다.
거룩함을 위해 의도된 것을 오용함으로서 자신의 거룩함을 버리는 것은 여자에게 있어서 부끄러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1:1-16의 말씀을 무시할 것인가?
결론으로서, 고린도전서 11장의 말씀을 어떻게 할 것인가?
당연히 우리는 그것을 외면하거나 불편하다는 이유로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은 모세가 반석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만약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를 위한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다른 구절들을 같은 방법으로 외면하지 않도록 막아줄 수 있을까?
만약 머리에 관한 가르침을 외면한다면, 같은 장에 나와있는 '성찬을 행하라'는 가르침도 외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목회자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중립적이어서는 안된다.
만약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는 그의 성도들에게 그것을 가감없이 전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와 성도들 다 하나님 앞에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목회자는 성경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만약 그가 성경구절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 지혜와 지식을 구할 필요가 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한 다음에는 그것을 자신의 성도들에게 전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돈과 사람들의 기분을 맞추려고 하는 삭꾼이다.
진정한 목자는 비록 자신의 성도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일지라도 설교할 만큼 성도들을 사랑해야 하나.
그는 귀에 달거나 쓰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일부라도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교회내의 책무를 맡김으로서 불순종을 조장해서는 안된다.
만일 어떤 계명이든 배놓고 가르치려는 사람은 아예 선생이 되지 않음으로서 더 큰 책망을 피해야 할 것이다(약 3:1).
목회자는 자신의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한다.
여기서의 질문은, 우리가 고린도전서 11장 1절로 16절의 말씀을 외면할 것인가?
아니면 그 가르침을 정확히 지켜야 할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