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인 거듭남 - 제9장 방언을 말함

 제9장 방언을 말함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방언 말함은 무엇을 뜻하는가?


방언을 말하는 것은 '전혀 배운 적이 없는 언어로 말하는 초자연적인 은사'이다. 헬라어는 glossa(글로싸)로써 '혀'라는 단어인데 몸의 기관이나 언어를 의미한다. 몇몇 현대 번역인들은 흠정역(KJV)의 "다른 방언으로 말한다"라는 문구를 "외국 방언으로 말한다"(모펫성경, Moffat), "외국어로 말한다"(굳스피드성경, Goodspeed), "상이한 언어로 말한다"(필립스 성경, Phillips) 등으로 번역한다.

신약 성경에서 분명하게 방언 말함을 나타내는 구절은 사도행전 2장, 사도행전 10:44-47, 사도행전 19:6, 고린도전서 12-14장 등 네 군데이다. 각각의 경우에 있어서 방언을 말했던 사람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행 2:4) 하나님의 능력으로 방언을 말했다. 

방언 말함이란 횡설수설하는 말이 아니며, 실제적인 의미도 없이 이해할 수도 없는 무아지경 상태에서의 말이 아니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스스로 이해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진정한 언어를 말하는 것이다. 여러번 목격자들은 그 언어들을 알아 들었다(행 2). 그 언어들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인간 내지 천사의 언어일 수 있다(고전 13:1). 방언 말함은 단지 우연히 이루어지거나, 믿음과 아무런 관련성 없이 중요하지도 않은 그런 희귀한 현상이 아니다. 이것은 신약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서 중요한 일부인 것이다.


이사야 28:11-12


이사야는 교회에 나타날 방언의 역할을 말하였다(사 28:11-12). 안식과 상쾌함은 성령침례이며(행 3:19, 행 2:38) 이사야는 생소한 입술과 다른 언어가 성령침례에 동반하리라는 것을 예언했다. 어떤 이들은 이사야가 단지 외국인에 의한 이스라엘의 침략을 언급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1)이사야는 방언을 적의 침공과 연관시킨 것이 아니라 안식과 상쾌함으로 연관시켰다. (2)베드로의 말은 이 상쾌함을 성령과 더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3)바울은 이사야의 말을 방언에 적용해다(고전 14:21-22). 바울은 하나님께서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도록 하시기 위해 신약 교회에서 표적으로써 방언 말함을 선택하셨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이사야에 나오는 구절을 사용했다.

이사야 28:11-12이 이방인의 이스라엘 침략을 언급한다 할지라도 이 구절은 즉각적인 성취(앗수르의 침략)와 먼 장래의 성취(신약 교회에서의 방언)을 담고 있다. 예언과 모형론의 이중적 성취는 성경에서 흔한 일이다. 아무튼 이사야 28:11-12은 베드로와 바울의 말을 근거로 하여 신약 교회에서 방언 말함에 적용된 것이 분명하다.


마가복음 16:17


예수께서는 승천 직전에 방언 말함을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으로 약속하셨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막 16:17). 어떤 번역본은 "새 방언"을 "새 언어"(TAB)로 혹은 "외국 방언"(Goodspeed)으로 번역한다. 방언 말함은 어느 곳에서든지 그리스도인들에게 따르는 표적이다.


오순절날 


방언과 관련된 예언이 최초로 성취된 때는 오순절날이었다. 이 때 에 예수님의 유대인 제자 120명이 성령으로 침례를 받고 방언을 말했는데 이 무리 가운데는 사도들과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여러 여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행 2:1-4). 

초자연적인 소리가 방 안에 가득했고 성령이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특별한 역사를 하시고자 그 장소에 임하셨다. 불의 혀 같은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했고 성령이 각 사람을 충만하게 하시기 시작했다(행 2:3). 모인 무리들은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성령이 그들 안에 임하신 후에 그들은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함은 각 사람이 성령침례를 받고 충만함을 얻었다는 명백한 표적이었다.

구약의 시내산에서 율법이 주어질 때 번개와 뇌성(雷聲)과 불꽃이 동반한 것처럼(출 19:16-19) 유사한 현상들이 신약 교회가 세워지면서 최초로 성령 부어주실 때 함께 동반하였다. 그러나 일단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모든 사람에게 주신다는 것을 증거하셨으므로 이러한 형식으로 다시금 성령 부어주심을 강조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지만 바람과 불꽃과는 달리 방언 말함은 성경에서 여러번 다시 나타난다. 이것은 특별히 개인의 성령침례에 관련한 유일한 표적이기 때문에(다른 현상들은 성령이 일으킬 수 있는 표징들이다) 방언 말함은 다른 표적들에서는 볼 수 없는 충분한 중요성과 기능을 가진다. 각국에서 온 유대인들이 오순절을 지키고자 예루살렘에 있었다. 120명이 성령을 받고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을 때 이들 많은 방문객들이 제자들의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성경에는 그들이 대략 14개국의 지역 출신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행 2:5-11).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외국인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오직 이 방언의 기적을 행하셨다고 주장하는데 그렇지 않다. 잠시 후에 베드로는 한 언어로 그들 모두에게 설교를 하였다. 이 말은 아마 그 당시 모든 유대인들의 모국어인 아람어이었거나 국제적 통상언어(通商言語)인 헬라어일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청중들이 복음의 메시지를 듣는데는 굳이 방언의 기적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은 성령을 주셨다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기적적인 표적으로써 방언을 사용하셨다. 베드로는 방언에 관한 그들의 질문과 평가를 이용하여 그의 설교를 시작했으며 이 기적은 성령 부어주심에 관한 요엘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즉시로 그들에게 설명했다(행 2:14-21). 그는 설교 후반부에서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예수)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3)고 말했다. 청중들이 사람들의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방금 보고 들었기에 베드로는 그것을 약속된 성령의 증거로써 강조했던 것이다.


고넬료가 방언을 말함


우리는 성령을 받은 최초의 이방인의 이야기에서 분명한 방언 말함의 기록을 발견한다.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행 10:44-46). 

베드로와 동행한 유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들 이방인들이 즉시 성령을 받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 이유인즉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이방인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먼저 유대교로 개종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행 15:1). 이러한 강한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와 동행했던 유대인들은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도 참으로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는 이방인들이 방언을 말하는 것을 그들도 들었기 때문이다. 풀핏 주석에 의하면, "이것은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증거였다." 이 기록에서 바람같은 소리나 불꽃같은 혀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오직 방언을 말하는 것만이 결정적인 증거였다.

베드로는 이 일을 예루살렘의 교회에 보고하면서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는 것과 같이 하는지라"(행 11:15)고 말했다. 방언 말함은 사도행전 2장과 10장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유일한 표적이지만 오직 이것만으로도 이방인들이 오순절날의 체험을 받았음을 베드로에게 확신시키기에 충분했다.


에베소인들이 방언을 말함


에베소에서 침례 요한의 제자들 역시 성령을 받았을 때 방언을 말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행 19:6). 이 기사는 방언을 말하는 성령침례가 모든 믿는 자를 위한 것임을 입증한다. 이들 믿는 자들마다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졌던 동일한 체험을 그들도 받았다는 것을 그들에게 확신시켜 주는 표적이라는 것이었다.


사마리아인들이 방언을 말함


사도행전 8장에서 사마리아인들이 성령을 받은 것에 관한 기사는 방언에 대해 정확하게 기술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령침례의 표적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세한 묘사는 부족하지만 몇 가지 확실한 표적은 나타나 있다. 성령침례를 받을 때는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즉시 그것이 초자연적인 것임을 확인할 수 있으며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이었다. 이 표적이 바로 방언을 말하는 것이었다고 간주하는 것은 지극히 논리적이다.

(1)기적과 기쁨과 믿음과 물침례가 있었지만 모든 사람들은 사마리아인들이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음을 알고 있었다.

(2)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인들에게 안수하는 순간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에는 모든 사람이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분명한 표적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무엇보다도 이 표적은 초기에 있었던 감정의 변화나 믿음의 고백이나 물침례와는 다른 어떤 것이었다. 병고침이나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은 이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본 것은 어떤 기적이 나타난 것이 아니었으며 어떤 성령의 은사들도 아니었다.

(3)거기에는 마술사 시몬이 얻고 싶어 할 만큼 분명하고도 초자연적인 표적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시몬은 분명히 이 기적으로 돈 주고 사서 그의 마술쇼에 이용하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사람들에게 안수를 하면 이 기적적인 표적이 절로 나타나게 하는 능력을 원했다. 다시 말해 이 표적은 기쁨의 표현, 믿음의 고백,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숩게 속일 수 있는 어떤 마술, 마술사나 의심많은 관객드을 매료시킬 만한 그 어떤 것 등, 그 어느 것보다도 훨씬 놀라운 것이었다. 더우기 이 표현은 다른 어떤 기적에도 없었던 것이었기에 시몬을 매료시켰다.

오순절날의 사건에 있어서 오직 방언만이 성령침례의 외적 표적 역할을 했다. 설교나 기도가 성령침례의 표적은 아니며 그것들은 사마리아인들이 이미 목격한 것들이기 때문에 이것들이 성령침례의 표적이 될 가능성은 없다. 

사마리아인의 체험을 성경의 다른 기록들과 비교할 때 공통적인 기적의 표적은 방언 말함이었다는 것이 명백하다. 호크마(Hoekema)는 방언 말함이 오늘날의 교회를 위해 여전히 적용된다고는 스스로 믿지는 않았지만 동일한 결론을 내린다. "우리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방언을 말했다는 어떤 말도 들어보지는 못했지만… 성령을 받았다는 어떤 공공연한 증거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방언을 말했다는 점에 있어서 우리의 오순절 친구의 의견에 동의한다."


바울이 방언을 말함


사도행전 9장은 바울이 성령을 받았음은 암시하지만 성령 받은 모습을 묘사하고 있지는 않다. 결과적으로 본문은 방언 말함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바울은 방언을 했다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는 서신서에서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말했기 때문이다(고전 14:18). 그는 방언 말함이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에(고전 12:8-10) 그 가르침으로 비추어 다른 사람들이 그랬듯이 바울 자신도 성령을 받았을 때 방언을 말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에베소인에 관한 기사와 같이 바울의 증거는 초대 교회에 있어서 방언이 반복될 수 없는 단지 일회적 사건이 아님을 입증한다. 유대인들이 오순절날 방언을 말한 이후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유대인인 바울도 방언을 말했고 그의 헌신과 사역 중에 계속해서 방언을 말했다.


사도행전에 있는 이야기들의 비교


우리는 성경에서 사람들이 성령을 받은 것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모두 다섯 가지의 경우들을 살펴 보았다. 세 가지 경우에는(오순절날, 고넬료, 에베소) 성령을 받은 즉시 방언을 말했다. 네번째 경우(사마리아)는 정확하게 명시하고 있지는 않으나 분명히 초자연적이며 즉시 확인할 수 있는 외적 표적이 나타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것이 방언 말함이었다는데 동의한다. 다섯번째 경우(바울)에 성경은 방언을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후에 바울은 그의 믿음의 삶 전반에 걸쳐 방언을 말했다고 밝힌다. 

그렇다면 성령침례의 표적으로 방언 외에 가능한 다른 어떤 표적이 있는가? 사도행전 2장은 바람같은 소리와 불의 혀를 기록하고 있으나 이것드은 최초의 성령 부음에 앞서 나타났고 다른 사건들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사도행전 8장은 모든 영적 은사와 기적들이 표적으로 여겨지지 않았음을 입증한다. 사도행전 19장에는 예언이 언급되지만 방언을 말한 다음에 언급되고 있다. 

사도행전 10장은 하나님 높임(찬양)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초자연적인 표적이 아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오직 방언을 말하는 것만이 성령이 주어진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하고도 유일한 표적으로 인정된다는 점이다.

방언 말함은 한 가지 기록 이상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유일한 외적 표식이며 개개인이 성령침례를 받는 실제적인 순간에 발생했다. 사도행전은 성령을 받을 때 방언을 말하게 될 것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방언 말함은 성령의 선물(침례)를 받았다는 초기의 표적(증거)임이 분명하다.


참고 가능한 다른 구절들


예수님께서 "바람이 임의(任意)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고 말씀하셨을 때 아마도 방언을 염두에 두셨을 것이다(요 3:8). 적어도 방언 말함은 처음에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말한 로마서 8:16절 말씀을 실현한다. 또한 바울이 주 예수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구원의 일부라고 썼을 때 아마 그의 마음 속에 방언 말함이 곧 주를 시인하는 한 요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롬 10:9-10). 왜냐하면 아무도 성령에 의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12:3).


방언은 필수적인가?


분명한 것은 방언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성령침례와 방언의 관계는 믿음과 행함의 관계와 흡사하다. 우리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행함은 항상 진정한 믿음 속에 수반된다. 이처럼 방언이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지만 성령침례의 첫 표적은 방언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방언은 항상 성령침례에 동반하는가? 사도행전은 그러하다고 지적하며 개인의 충만함과 연관된 초기의 표적으로써 방언외에 어떠한 것도 기록하지 않는다. 방언이 없는 성령침례는 비성경적인 개념이다. 성경은 이런 가능성은 언급하지 않는다. 우리는 누군가 성령침례를 받을 때 항상 방언을 말할 것을 기대해야 한다.


방언을 하는 이유


왜 하나님은 성령침례의 표적으로 방언을 선택하셨는가? 우리는 하나님이 통치하심을 깨달아야 한다. 그는 우리에게 그가 행하실 것들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시고 계획을 세우실 수 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로우며, 하나님은 종종 사람이 보기에 이상하고 어리석고 멸시받는 것들을 사용하여 당신의 뜻을 성취하신다(고전 1:25-29). 하나님께서 방언 말함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표적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은 역사적으로 인간과 더불어 그의 언약과 그 언약 아래서 약속된 축복을 이루시기 위해 물리적인 표적을 외적으로 사용해 오셨다. 그 예로써 노아에게 보이신 무지개와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할례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성령침례의 초기 표적으로써 방언을 선택하신 몇 가지 이유들을 아래와 같이 확인할 수 있다.

(1)혀는 몸에서 통제하기에 가장 어려운 지체인 것 같다. 작은 지체이지만 온 몸을 지시하고 통제하고 더럽힐 수 있다(약 3:2-6).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 3:8). 만약 사람이 그의 혀를 통제할 수 없다면 그가 믿는 신앙은 무용지물이다. 그러나 자신의 혀를 통제할 수 있다면 온 몸을 통제할 수 있다(약 1:26; 3:2). 누구든지 성령을 받기 전에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굴복시켜야 하는데 그가 굴복시킬 마지막 지체는 혀이다. 혀를 굴복시킬 때 하나님은 스스로 영광을 받으시고자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통제하기 어려운 지체를 사용하여 그 사람 안으로 들어가 완전히 주장하시어 그의 주 되심을 증거하신다. 뇌가 언어를 통제하듯이 이것은 실제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식과 이성과 의지의 중심 -즉 그 사람의 모든 것- 을 주관하시는 것을 나타낸다.

(2)방언 말함은 교회의 연합을 상징한다. 홍수 이후로도 인간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과 겨루고자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악한 계획을 막고 그들을 흩어버리시고자 그들에게 하나의 구음(口音)대신 많은 언어를 주셨다(창 11:1-9). 오순절날이 시작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과정을 역으로 바꾸어 여러 민족으로부터 사람들을 취하셔서 방언을 표적으로써 그들을 하나의 영적 가족으로 연합 시키셨다. 교회는 모든 족속과 민족과 방언의 백성을 포함하고 있지만 모든 이들은 성령의 언어를 통하여 하나이다. 방언 말함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얻게 하는 새로운 언어가 된다.

(3)방언 말함은 누구에게든지 적용되며 어떤 상황하에서도 나타나는 명확한 표적이다. 사람들의 국적과 언어와 지역에 상관없이 그들에게서 방언 말함이 있을 때, 그것이 일상적인 언어인지 방언을 말하는 것인지 인식할 수 있다.

(4)어떤 분명한 시간에 방언을 말함으로 성령침례가 나타나기 때문에 방언 말함은 성령 체험의 확신을 준다. 자신이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초기 증거인 방언을 말함으로써 성령을 받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면 그는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자각할 수 있다. 

많은 교회들은 이 입증할 만한 방언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은 채 결과적으로 그 신자들은 구원을 논하기에는 불분명한 증거들을 애써 믿고 있다. 어떤 기독교인은 비록 지식적으로는 '구원받았다'라고 알고 있지만 속으로 느끼는 것은 '구원받지 못했다'라는 생각이 지배적일지 모른다. 우리는 구원이 인간의 느낌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특히 우리의 체험이 성경의 실례와 일치하지 않는다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확신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많은 교회의 신자들이 지나치게 간소화된 구원의 방법을 받아들이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심에 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한 교회에서 믿기만 하면 다른 조건없이 영원한 구원을 보증받는다고 가르치던 영향력 있는 신자가 공공연하게 죄를 범하는 생활을 하기 시작한다면 교회에서는 그가 진정한 회심없이 신앙 생활을 했다고 말할 것이다. 이같은 내용은 자신의 회심이 진정하 것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이 문제에 대한 보통의 해결책은 이렇다. "죄에서 돌아서서 그리스도께서 너의 마음에 들어오시기를 구하고 그를 믿으라." 

이 가르침은 참 훌륭하지만 단지 지식적으로만이 아닌 영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가 그분께 모든 것을 맡겼을 때 모두가 알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를 주셨다. 즉 성경 말씀을 따라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을 받아 방언을 말하게 될 것이다.


방언이 성령의 영속(永續)적인 임재의 증거는 아니다


방언 말함은 성령을 받을 때 나타나는 초기의 표적이지만 그 자체가 성령이 영구적으로 임재한다는 것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성령의 열매와 같이 성령의 영속적인 임재를 말하는 더욱 중요한 증거가 있다(갈 5:22-23). 특히 사랑은 진정한 제자도를 입증하는 궁극적인 시금석(試金石)이다(요 13:34-35). 하나님의 진실한 자녀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에 순종하고, 성령을 따라 행하며, 그의 인도하심을 받는다(요일 2:3-5; 롬 8:4,14). 이러한 특징들이 없다면 하는 것 자체가 성령이 그의 안에 거하시는 것이나 그의 삶을 주장하고 있다는 보증이 되지 않는다. 

성령을 받은 후에 계속해서 방언을 할 수 있는 능력은 단지 그가 그 특별한 은사를 받을 만한 믿음이 잇고 특별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 순응할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성경의 교훈을 준수해야 하며 그 가르침에 복종하며 구원받기 위해 하나님의 성령에 순종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기꺼이 하나님의 뜻을 충족하려고 하지 않는데도 방언을 말하는 능력을 가질 수 있는데,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가 특정한 말씀에 관해서는 순조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그의 믿음을 평가하시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은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지도 않은데 성령을 받은 후 계속 방언을 하는 경우에 대해) 인간이 마음으로나 영으로 방언을 말하는 것을 '배울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떤 때는 뇌가 이 기억된 말을 의식적으로 할 수 있도록 잠재의식 속에서 '배울 수' 있다. 그렇다면 비록 성령의 감동하심이 없다 해도 그 사람이 한 번 성령에 의해 주어졌던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성령의 감동 없이도 혹은 성령이 그들을 떠나신 후에도 자신의 의지대로 방언을 말할 수 있는가를 설명해 준다. 덧붙여 우리는 인간이 그릇된 방언의 모방과 심지어 사단의 능력에 의해 만들어진 거짓 방언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간과(看過)해서는 안된다. 사단은 많은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으며 종종 하나님의 역사를 모방하려 든다(출 7:10-12; 계 13:2, 11-15). 어떤 불신자나 배교자들이 사단의 능력으로 '방언을 말할 수'도 있다. 물론 인간이 영이나 마귀에 의해 만들어진 거짓 방언이 있다하더라도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주어진 성경적인 방언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침해할 수는 없다.


성령침례 이후에도 계속해서 방언을 하는가?


성경은 초기 성령침례를 받을 때 방언을 말한 이후에도 방언 말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계속 방언을 말한다고 해서 반드시 신령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처럼 처음의 체험 이후 계속해서 방언을 말하지 못한다고 반드시 신령하지 않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물론 바울은 자주 방언을 말했으며(고전 4:18) 일반적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통하여 계속해서 방언을 한다.

성령은 충만하지만 계속해서 방언을 말하지는 못하는 경우 방언을 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그가 좋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처음 성령을 체험할 때 했던 것처럼 방언의 은사를 구하고 믿음을 가지고 성령에 순종한다면 다시금 방언을 할 수 있다. 방언은 개인의 유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성령의 은사를 구하고 사용하기를 바라신다고 믿는다. 이전에 방언의 은사를 받았는데, 이 은사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疎遠)해졌음을 나타낸다. 방언의 은사는 인내와 믿음과 더불어 기도로 간구하는 모든 성령 충만한 신자들에게 유용한 것이다(마 7:7-11; 21:22; 요 14:12-14; 고전 12:31).


방언의 은사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방언의 은사를 논하였다. 그는 모두가 이미 성령침례를 받고 방언을 체험한 적이 있는 구원받은 신자들에게 이 글을 썼다.(고전 1:2; 12:13). 그가 목적한 바는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에게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는 문제에 대하여 지도하고자 한 것인데 특히 공중 집회에서의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는 문제에 대하여 지도하고자 한 것인데 특히 공중 집회에서의 방언과 은사 사용에 대하여 가르치려는 것이었다.


고린도전서 12장


1절: 바울의 목적은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가르치는 것이다. 

2절: 고린도 교인들은 그들이 회심하기 전에는 영적인 일들에 관하여 전혀 무지하였다.

4-11절: 많은 성령의 은사들이 있지만 모두가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12-17절: 거듭난 신자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 

28-30절: 하나님은 몸의 다양한 지체들에게 서로 다른 기능들을 부여하셨다.

31절: 우리는 진심으로 가장 좋은 은사들을 사모해야 한다. 성령의 은사보다도 더 위대하고 중요한 것이 있다.


고린도전서 13장


어떤 성령의 은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고린도전서 14장


1절: 우리는 사랑을 구해야 하지만 또한 성령의 은사도 사모해야 하는데 특히 예언을 하려고 해야 한다. 

2-4절: 방언 말함은 방언하는 자의 덕성(德性)을 기르지만(덕을 세우고 유익을 준다), 예언(모든 사람이 아는 언어로써 성령의 감동을 받아 전하는 말)은 다른 모든 사람(교회)의 덕을 세운다.

6-11절: 통역이 없다면 공개적인 방언의 메시지는 교회 전체에게 유익이 없다.

20절: 방언의 은사가 나타날 때 그것이 타당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이해할 수 있는 지혜 있는 신자로서 성숙한 신앙을 가져야 한다.

26-31절: 보통의 교회 집회에서는 찬송시(psalms)(노래)와 가르치는 말씀(doctrine)과 방언과 계시(모두가 아는 말로 전하는 영적 진리의 말씀)과 방언 통역이 있을 수 있으며 또한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32-33절: 예언의 은사는 예언하는 사람에게 제재(制裁)를 받는다. 하나님은 모든 은사가 교회에서 질서있게 나타나기를 원하신다.

39절: 모든 사람은 예언하기를 사모해야 하며 아무도 방언 말함을 금해서는 안된다. 

40절: 우리는 모든 것을 적당히 그리고 질서있게 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2-14장에 대한 결론


(1)방언 말함은 신약 교회의 일반적인 일이었다. 바울은 방언을 했으며 다른 신자들도 자기와 같이 방언하기를 원했고 올바른 방언의 사용을 위한 가르침도 제시하면서 교회는 방언을 금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2)고린도전서에서 언급한 방언 말함은 사도행전과 동일한 현상이다. 두 곳 모두 동일한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다. 바울은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것처럼 사람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실제 언어를 말한 것이지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떠드는, 알아 들을 수도 없고 뜻도 모르는 그런 말이 아니었다(고전 13:1).

(3)사도행전에 기록된 방언 말함은 성령침례를 받을 때 처음 나타나는 표적이지만 고린도전서에서는 방언이 두 가지의 부가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특히 방언 말함은 개인 경건에 있어서 개인의 덕을 세우며 방언이 통역될 때 전체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지속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4)공중 앞에서의 방언은 통역이 없으면 거의 유익을 줄 수 없다.

(5)방언은 개인 경건에 대단히 도움이 된다.


방언을 말하는 것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성경적인 방언 말함은 오직 성령이 그 말을 주실 때 나타난다(행 2:4). 그러므로 방언 말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성령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방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므로 단지 방언을 하기 위해 간구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방언이 표증이라는 사실을 전혀 혹은 거의 모르더라도 상관없이 성령을 받을 때 자동적으로 방언을 말하게 된다. 

물론 방언을 말하는 현상에 친숙해 있지 않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억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라면 간구하는 사람을 격려하여 안심시키고 전적으로 성령께 복종하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겠지만 어떤 경우라도 방언 말하는 방법을 '가르칠' 필요는 없다.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너무 방언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데 집중해야 한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의 생활 속에서 항상 방언을 할 수 있는 방언의 은사를 받을 수 있으며 또 받아야 한다. 그러나 또한 모두가 다 방언의 은사를 받고 방언을 하는 것은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고전 12:28-30). 방언을 하는 것보다 성령 충만한 생활을 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물론, 장성한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열매와 그 은사까지도 겸비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 이론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방언 말함을 반대하고 있다. 

안토니 호크마는 그의 저서 '방언 연구'에서

(1)"성경은 모든 신자들이 회심한 이후 성령침례를 구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침례는 회심의 일부이며 방언은 항상 성령침례에 동반되기 때문이다.

(2)"오순절주의(Pentecostalism)는 그리스도를 성령에 종속시키는 비성경적 주의를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심을 믿으며 성령을 받을 때 그리스도를 모시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침례의 교리는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그리스도를 높인다.

(3)"오순절주의는 그리스도인들을 성령침례를 받은 사람들과 받지 못한 사람들 두 부류로 나누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령침례는 회심의 일부이기 때문에 단지 진정한 사도적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과 그 밖의 사람들을 구분할 뿐이다.

(4)"오순절주의는 1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 기간의 교회가 완전한 진리를 소유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방언 말함이 교회사에 걸쳐 존재했다. 인간의 죄악과 배교와 오류와 무지가 철저하게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를 변질시킬 수는 있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실질적으로 모든 오순절주의는 수세기 동안 교회가 복음의 여러 핵심적인 진리들을 버렸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5)"영적인 축복은 육체적인 현상으로 입증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 진술을 받아들이지만 만약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택하시면 이 주장도 하나님께서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을 막을 수 없으며 성령침례의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육체적인 표적을 나타내셨다. 성경은 방언 말함을 성령침례의 증거(행 10:46)와 '표적'(고전 14:22)으로 설명한다. 하나님은 종종 영적인 역사에 동반하는 육체적인 표적을 선택하신다. 물침례는 영적인 축복(죄사함)과 물침례에 꼭 필요한 육체적 표현(외적 의식)으로 구성된다. 성령침례의 장기적인 증거는 성령의 열매이지만 성령의 열매가 하나님께서 만드시 최초의 육체적인 표적을 대신할 수는 없다.

(6)"기적이 오늘날 교회를 위한 것인지 여부는 증명될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


기적은 오늘날도 존재한다


오늘날 방언을 반대하는 가장 보편적인 주장은 기적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다.

(1)"기적은 단지 사도들만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오순절날 120명의 제자와 고넬료, 에베소인 등을 들어 이 글을 쉽게 논박(論駁)할 수 있는데 이들 모두 방언을 말했다. 스데반과 빌립도 12제자 중에 들지 않지만 그들 또한 많은 기적을 일으켰다(행 6:8; 8:6-7).

(2)"오직 사도들 내지 그들에 의해(안수에 의해) 위임받은 사람들만이 기적을 행하거나 그 능력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나니아가 바울을 위해 기도했고 바울은 시력을 회복했지만(행 9:17-18) 아나니아가 열 두 사도에게서 특별한 위임을 받았다고 지시하는 바는 어디에도 없다. 바울과 바나바는 열 두 사도 중에도 들지 않았으며 그들에 의해 위임받은 적도 없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사역 가운데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행 14:3). 신약 성경은 어떤 제한이나 차별없이 모든 믿는 자에게 기적(능력)을 약속하신다. 예수님은 모든 믿는 자가 방언을 말하며 여러 가지 기적을 경험하리라고 약속하셨다(막 16:17-18). 모든 믿는 자는 기적 뿐만이 아니라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다(마 21:22; 막 11:22-24; 요 14:12-14; 15:7). 지역 장로들은 성도의 신유를 위해 기도할 수 있으며 모든 성도들은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할 수 있다(약 5:14-16). 기적과 방언은 하나님께서 모든 교회에게 주신 선물이다(고전 12:8-10, 28).

(3)"기적은 단지 사도 시대만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각 말씀들은 시대적인 제한없이 모든 믿는 자와 온 교회에게 주어졌다. 바울은 당대의 모든 교회에게 고린도전서를 썼는데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편지했다(고전 1:2). 고린도전서는 병고침의 은사, 능력 행함, 각종 방언을 말함 등 성령의 은사를 논하고 있으며(고전 12:8-10), 바울은 분명히 교회가 모든 영적 은사들을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보유하고 올바로 사용하기를 기대했다.

모든 사람은 지상명령이 오늘날 교회에도 해당되며 성취되어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 한다. 초대 교회는 그 명령을 성취했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막 16:20),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히 2:4). 우리가 초대교회와 동일한 주, 동일한 명령, 동일한 복음, 동일한 믿음,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는 동일한 세상을 공유하고 있다면 우리가 전하는 동일한 메시지와 함께 그 메시지를 확신케 하는 동일한 표적들을 갖게 될 것이다.


방언은 폐하여지지 않았다


고린도전서 13:8-10에는,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본문을 들어 '온전한 것'을 완성된 '신약성경'과 동일시하므로 신약성경이 완성되었을 때 그와 함께 방언이 폐하여졌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 주장은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잘못되었다.

(1)방언을 포함한 성령의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교회 안에 존재할 것이다(고전 1:2, 7).

(2)그러므로 '온전한 것'을 예수 그리스도, 혹은 더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재림과 일치시키는 것이 타당하다. '온전한'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텔레이온(teleion)인데, 이는 중성 단수이다. 이 단어는 '성경'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성경을 의미하는 경우로 쓰일 때에는 언제나 여성 복수형으로 쓰여지기 때문이다.

(3)8절과 같이 방언은 예언과 지식 등과 함께 폐하여질 것이다. 예언은 성령에 감동된 설교와 찬양과 증거 등을 말한다. 교회에는 분명히 지금도 예언과 지식이 존재하고 있다.

(4)성경은 기적과 바꿀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성경은 문서로 기록된 형태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내지만 하나님은 말씀을 확증하시기 위해 여전히 기적과 표적과 성령의 은사 등을 사용하신다(막 16:20; 히 2:4).

(5)고린도전서 13:11-13에서 바울은 영적 성장의 단계를 육체적, 정신적 성장에 비유하였지만 방언을 어린 아이와 같은 것으로 분류하지는 않았다. 그는 우리의 부분적인 지식을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우리가 얻게 될 완전한 지식과 비교하였다. 우리가 이미 완전한 단계에 이르렀다면 우리는 바울보다 영적으로 더 성숙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신약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방언 말함이 어린 아이와 같은 것이라면 바울은 계속해서 방언을 말했기 때문에 결코 어린 아이와 같은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전 14:18).

(6)신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우리는 아직 완전하지 못하며 세상 또한 완전하지 못하다. 온전한 곳은 오직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올 것이다.

(7)신약 성경이 완성되었다고 해서 왜 방언과 예언과 지식을 멈춰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방언없이 성령을 받을 수 있는가?


우리는 모두 다섯 가지의 성령침례에 관한 기사들을 분석했고 매 경우마다 방언이 나타났음을 알았다. 많은 다른 본문들에서는 방언을 언급함 없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성령침례를 받았던 사람들이었다. 최초 성령침례 후의 모든 체험에 반드시 방언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사도행전에서 어떤 회심의 기사는 분명히 방언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사도행전의 전개 방식은 몇 가지 대표적인 회심 사건을 상세히 설명하고 다른 기록들은 간단히 언급하는 것이다. 세 가지의 매우 중요한 내용은 방언을 언급하는데 상세하게 기술된 이들 기사들은 다른 일반적인 기사들을 판단할 수 있는 표준을 제시해 주는 것이지, 역으로 일반적인 기사들이 세 가지의 중요 기사를 위한 표준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주장도 이 분명한 증거들을 뒤집거나 제거할 수 없다. 

물론 방언 말함보다 더 중요한 것은 회개하고 믿고 성령을 받는 것이다. 방언은 단지 성령침례에 동반할 뿐 성령침례와 분리해서는 아무런 중요성을 갖지 못한다. 성경은 믿고 성령을 받는데 더 강조를 두기 때문에 지나치게 방언을 강조하지 않지만 그래도 방언을 기대할 만큼은 충분히 깨닫게 해준다.


결론


풀핏 주석에서 우리와 일치하는 점은,

(1)방언 말함은 말하는 사람이 알지 못하는 외국 언어로서 초자연적인 말을 의미한다.

(2)선교를 목적으로 습득한 외국어 구사 능력이 아니다.

(3)방언 말함은 실제의 언어이며 의미없이 횡설수설하는 말이 결코 아니다.

(4)천상의 혹은 인간의 언어일 수 있다.

(5)고린도에서 있었던 방언 말함은 실제적인 언어를 말한 것이었다.

(6)방언 말함은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됨을 상징한다. 

결론적으로 방언을 말하는 것이 신약 교회에서 지니는 기능은 이러하다.

(1)방언 말함은 성령침례의 최초 표적이다(행 2:4; 10:46; 19:6). 이것은 "방언의 은사"와는 용도(用度)면에서 구별되는데, 방언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성령 충만한 신자에게 회심에 이어 부여해 주시는 것이다.

(2)성령 충만한 사람은 개인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사적이든지 회중을 위한 것이든지) 개인 경건의 삶 속에서 방언의 은사를 사용할 수 있다(고전 12:8-10); 14:1-5, 12-13, 27-28).

(3)성령 충만한 사람은 교회의 덕을 위하여 방언의 은사를 사용할 수 있다. 공개적인 방언과 통역이 있을 때 교회를 위한 덕을 세우게 된다(고전 12:8-10, 28-30; 14:5, 12-13, 27-28).

방언 말함은 신자가 경험할 수 있는 개인의 경건과 공중집회에서 나타나는 정상적인 신앙 체험의 일부이다. 무엇보다도 누구든지 처음 성령을 받고 그의 삶 가운데 성령을 모실 때 우리는 그 사람이 방언할 것을 예측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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