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 : 길들여지지 않은 지체

혀 : 길들여지지 않은 지체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 3:8)

"내 입의 말과 …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4)

다루기 힘든 지체

혀는 몸에서 가장 다루기 힘든 부분이며 가장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부분이다.
당신이 혀를 사용하는 것을 보아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 수 있다.
혀는 마음에 있는 것을 이야기한다.
만일 당신이 악을 입에 담는다면, 악이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 12:34).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 15:18).
야고보는 혀에 관해 아주 강한 가르침을 펴고 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약 1:26).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에 굴레 씌우리라"(약 3:2).
그는 혀를 말 전체를 제어하는 말고삐에 비유하고, 큰 배를 제어하는 키에 비유하며, 큰 화재를 일으킬 수 있는 작은 불꽃에 비유한다.
작은 혀는 몸 전체를 더럽힐 수 있으며,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이 그것을 길들일 수 있다(약 3:1-13).

이것이 하나님이 성령침례의 증거로서 방언 말함을 선택하신 한가지 이유이다
행 2:4; 10:46; 19:6).
우리는 회개하고, 믿고,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할 때 성령을 받는다.
우리의 혀는 가장 길들이기 힘든 부분이고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시키는 마지막 지체이다.
우리가 처음으로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방언을 말하게 될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침내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시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우리가 혀로 죄를 범하기 쉽다는 것과 혀는 가장 위험한 부분이라는 것, 그리고 혀로 범하는 죄는 우리의 거룩함을 완전히 파괴한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친다.
그러면 우리가 혀로 범하게 되는 죄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뒷말과 수다(Talebearing and gossip)

이것은 가장 악한 죄들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사탄이 하나님의 교회를 안으로부터 무너지게 만드는 술책이다.
이것은 사람에 대한 믿음을 뿌리부터 흔들며, 결백한 사라에게 피해를끼치며, 회개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것은 교회를 분열시키고, 성도를 낙담케 하며, 새 신자들이 환멸을 느끼게 한다.
성경은 누구의 흉도 보지 말라고, 특히 믿음 안의 형제 자매들의 흉을 보지 말라고 가르친다(딛 3:2, 약 4:11).
"그 이웃을 그윽히 허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시 101:5).
대다수의 사람들은 수다의 해악을 인정하려하나, 문제는 그들이 삶 속에서 그것을 적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자들이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적용하기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이다.
뒷말과 수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들어보기로 하자.
기본적으로 뒷말은 개인적이고 깊은 감각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남을 해칠 수 있는 루머를 퍼뜨리는 것을 의미하고, 남의 잘못을 비방하는 것을 포함한다.
뒷말은 남에 대해 거짓을 말하거나 밝혀지지 않은 루머를 퍼뜨리는 것을 의미하고, 남의 잘못을 비방하는 것을 포함한다.
뒷말은 남에 대해 거짓을 말하거나 밝혀지지 않은 루머를 퍼뜨리는 것 외에도,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사실을 말하는 것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사실을 말하는 것도, 전혀 알 필요가 없는 사람에게 수다로 말해진 것이라면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조직과 권위를 교회 안에 세워 놓으셨다(고전 12:28.7장 참조).
교회 안에 문제가 일어날 때에는 교회 안의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들어야 한다.
여하간, 교회의 다른 지체에게 말하는 필요 없는 수다는 옳은 것이 아니다.
교회 안의 평신도들은 서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롬 14:10,13, 마태 7:1, 약 4:12).
교회에서는, 전체 모임을 보도하기 위해 리더가 판단하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막 18:18, 고전 6:5).

이것은 교회의 지도자가 교회 안의 죄를 다루어야 하는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평신도는 그러한 책임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때로, 어떤 일들은 분명히 하기 위해 이야기되어야 한다.
그러나, 다른 이에게 해가 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옳지 않다.
뒷말과 수다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된다.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장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는니라"(잠 26:20,22).
만일 성도들이 이 말씀을 진정으로 믿었다면,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인가?

실질적인 예를 들기 위해서, 만일 교회의 형제라 불리는 어떤 사람이 음행을 범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은 죄를 숨겨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당신은 권위가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것을 목사나 장로 등 리더에게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면 이 문제는 리더의 책임 하에 있게 된다.
그리고 당신이 그 사실을 교회 안의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당신은 뒷말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목사님께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그는 교회를 지켜야 하고 죄를 지은 형제를 도와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이에게 이야기 할 이유는 없다.
만일 그 형제가 회개했다면 왜 다른 이들에게 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가?
다른 이들에게 그의 실패를 이야기하는 것이 어떻게 그를 도울 수 있을까?
다른 예로서, 평신도가 죄를 짓고, 회개한 다음에 다른 교회로 옮겼다고 가정할 때, 먼저 교회의 목사는 그가 옮겨간 교회의 목사에게 그에 대해서 이야기 해 줄 필요가 있다.
그러면 다음 교회의 목사는 그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은 평신도들에게는 비밀에 붙여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예들은 뒷말에 대한 두 가지 성경 말씀을 설명해 준다.
"두루 다니며 한담(閒談)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잠 11:13).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잠 17:9).
여러분은 회개하지 않은 죄를 덮어줄 권리가 없다는 것을 유의하여야 한다.
여러분의 친구가 관여되었거나 관여되지 않았거나 마찬가지이다.
또한 당신은 성경의 기준으로 볼 때 면직 당해야 하는 죄를 지은 것을 눈감아주어서도 안된다.
두 경우 모두, 교회의 리더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한다.
또한 여러분은 친구의 죄를 다른 이에게 말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죄를 지은 당사자와 교회의 리더, 그리고 하나님 사이의 문제이다.
보통, 죄를 지은 사람이 회개하지 않고 위선자의 삶을 계속해 가거나, 그가 교회에 불명예나 치욕을 몰고 올 때 그것은 교회적인 문제가 된다.
이러한 문제는 특히 교회 안에서 직책을 맡은 사람이 범죄 하였을 경우에 더 심각해진다.
예를 들어서 교회 안의 집사가 음행을 범한 다음 회개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 경우에도 목사는 무슨 일인지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문제는 교회 전체를 욕되게 할 수 있는 일이고, 또 그는 집사의 자격인 아름다운 지위를 잃었기 때문이다.
만일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는다면, 죄를 지은 당사자뿐 아니라 그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교회에 대하여 회의를 가지게 된다.
이것은 목사가 이미 회개한 죄에 대해서 공적인 발표를 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가 회개했다면, 목사는 그로 침묵을 지키게 하고 아무에게도 왜인지 말해서는 안된다.
많은 경우에, 목사는 교회의 직책에서 정지시키고 일정한 기간 침묵시킬 수도 있다.
물론, 다른 성도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가 추측하지도 말고 다른 이들과 수군대서도 안된다.

만일 다른 성도 중 하나가 당신을 비방하는 말을 했거나, 잘못된 일을 했거나, 아니면 어떤 영역해서 경솔했다고 들린다면 당신은 어찌할 것인가?
먼저, 사랑은 악을 생각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신은 먼저 그 루머를 믿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잊어버리라.
만일 기도한 후에도 그것을 잊을 수가 없다면, 상대방을 찾아가서, 완전한 이야기를 직접 듣고, 깨끗이 해결하라(마 18:15).
만일 당신이 어떤 사람에 대해 아주 심각한 루머를 듣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만일 그것을 무시할 수가 없다면, 목사에게 가서 그것에 대해서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목사는 그 일에 관련된 사람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목사가 그 루머가 사실이 아니라고 확신하게 된다면 그는 그것을 들은 사람들에게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고 느낀다면 그는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할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어떤 결과가 생기든 간에, 여러분은 루머들이 더 진전되는 것을 막아야 할 것이다.

만약 목사가 당신에 대한 심각한 루머를 듣게 된다면, 그는 당신을 개인적으로 불러서 그가 들은 것에 대하여 이야기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상황을 설명하고 그것이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당신은 잘못된 태도를 가져서는 안된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퍼뜨렸는지 찾으려고 하지 말고, 목사가 당신을 도우려 하는 것을 인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가 그 문제를 해결하게 하라.
만일 누가 그런 소문을 퍼뜨렸는지 찾으려고 한다면, 당신은 복수하려는 마음과 악의를 나타내는 것이 된다.
목사로 하여금 잘못된 소문을 퍼뜨린 사람을 꾸짖게 해야 한다.
만일 당신이 결백하다면, 목사에게 그 소문을 전해준 사람은 당신에게 좋은 일을 한 것이 된다.
특히 그가 그 소문을 다른 사람에게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을 경우에 말이다.

분쟁의 씨앗을 심음

뒷말에 관한 주제는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형제들 사이에 분쟁을 일으키게 하는 주된 원인이기 때문이다.
분쟁을 심는 것은 가증스러운 일로 명명된 7가지 중의 하나이다(잠 6:l9).
가증스러운 것이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며 당신을 천국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계 21:8).
분쟁의 씨앗을 뿌리는 것은 이 사람 저 사람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중요한 사실들을 퍼뜨리거나 불평을 함으로써, 미움과 불신, 분열을 일으키는 일이다.
뒷말로서 분열을 조장하는 사람은 장소와 주제와 대상에 상관없이 자신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이들은 비밀로 들은 일들을 떠벌리고 다니며, 우정을 통해서 알게 된 비밀마저도 마구 떠들어댄다.
그들은 누구라고 서슴없이 비판한다.
당신 자신을 이 영역에서 살펴 보라.
혹시 당신은 남 말하기를 좋아하지는 않는가?
당신은 타인의 실패담을 듣기를 좋아하지는 않는가?
당신은 타인을 비판하거나 남의 탓으로 돌리기를 즐기지는 않는가?
당신은 문제와 다툼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주의해야 한다.
당신이 뛰어난 설교자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만일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면, 당신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맹세하는 것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약 5:12).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마 5:35).
도대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예수께서는 왜 이러한 명령을 하신 것일까?
맹세하는 것은 신의 이름을 남용하면서 사실이라고 주장하거나 무엇을 약속하는 것이다.
맹세하는 것은 정식으로 하나님이 증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 가르침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는 어떤 일에든지 맹세하지 말고, 또 무슨 일을 하거나 어떤 조직에 가입한다고 맹세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율법은 주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을 허용했으나, 우리는 하늘로도 땅으로도 심지어는 우리 자신의 목숨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그 이유는 우리는 이런 것들을 변화시킬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고 또 우리의 맹세를 실행시킬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마 5:35-37).
하나님은 자신으로 맹세하실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신의 말씀을 실행시킬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말씀하시는 순간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도 있다.
만일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해 맹세하는 법의 요구를 받는다면, 우리는 단지 "인정합니다"라고 말할 수있다.
인정한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말하는 것, 확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확인할 수는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하는 말은 항상 사실이어야 하고 또한 우리의 약속은 맹세처럼 잘 지켜져야 한다.
우리는 이번만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맹세해"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리가 맹세하는 대상에 대한 통제력이 없으므로 맹세하지 않는다.
대신에 우리는 항상 진실을 말하여야 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약속을 지켜야 한다.

주의 이름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출 20:7).
이 계명은 오늘날 두 영역에서 적용될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마 12:28-31).
이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부속되어 있다.
이 계명은 주의 이름을 온전히 사용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모든 불경스럽고 헛되며 하나님의 이름을 가볍게 여기는 경우들을 경계한다.
이 계명은 또한 다른 이방 종교와 마술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을 정죄한다.
하나님의 이름은 찬양과 예언, 복음전파와 가르침, 경배와 묵상기도 중에 올바로 사용될 수 있다.
주의 이름을 존중하는 자들에게는 축복이 있다(말 3:16).

불행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계명을 간과하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우에 하나님이나 주, 예수, 할렐루야(히브리말로 "주를 찬양합니다" 라는 의미)같은 단어들이 의미 없이, 심지어는 장난스런 태도로 말해지는 것을 듣는가?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이러한 말들을 하는 것은 일종의 습관이 되어 버렸다.
만일 그들이 행복하거나 화나거나 슬프거나 실망했을 때는 그러한 말들을 단지 상투적인 말로 해 버린다.
왜 하나님께 관계되는 말들을, 진실로 하나님과 교제함이 없이 사용하는가?
이것은 또한 찬양과 경배의 음악과 시들을 부적절한 태도로 사용하는 것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유대인으로부터 교훈을 배울 수 있다.
그들은 주의 이름을 만홀히 일컫는 것에 대하여 지극히 주의하므로, 여호와라는 이름을 발음하여 하지 않는다.
그들이 구약성경을 인용하거나 옮겨 적을 때는 그들은 여호와라는 이름 대신에 헬라어로 주를 의미하는 Kurios로 대치한다.
예로서 이사야 40장 3절의 "주"가 여호와를 의미하는 대목이 마태복음 3장 3절에서는 그 단어가 Kurios나 "주"로 대치된 것을 볼 수 있다.

만일 당신이 "예수"나 "주", "하나님"같은 단어들을 진실한 찬양, 경배나 기도의 자세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습관을 버리는 것은 어떨까?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주의 이름을 만홀히 하는 죄를 범할 수도 있다.

속어(Slang)

목회자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모두는 속어를 사용할 때 주의하여야 한다.
많은 속어들이 나쁜 의미를 담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이 내포한 의미를 모르고서 사용하기 쉽다.
그렇다면 저주하는 말들을 완곡히 말하는 것은 어떠한가?
만일 우리가 어떤 말들을 사용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왜 우리가 그 파생어나 대체어를 사용해야 하겠는가?

더러운 대화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골 3:8).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우리는 성령의 전이다.
더러운 농담이나 더러운 행동은 우리에게 허용되어서는 안된다.
점잖지 못한 일들을 연상시키는 말들은 그리스도인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된다.
찬양과 부도덕한 말들이 한 입에서 날 수 있는가?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물이 단물을 내지 못하느니라"(약 3:11-12).
바울은 우리들에게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가르친다(엡 5:4).
"어리석은 말"은 게으르고 무감각한 말을 가리킨다.
"희롱의 말"은 헬라어 유트라펠리아(eutrapelia)에서 나온 것인데, 스트롱(Strong)의 신약 성경 헬라어 사전에 보면, 경멸적이고 상스러운 농담을 가리킨다.
그것은 야비하고 음탕한 농담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음란하고, 교묘히 성을 조장하는 대화에 끼어들어서는 안된다.
그들 중 어떤 일들은 입에 담기에도 부끄러운 것들이다(엡 5:12).
이 가르침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무시된다는 것은 심상치 않은 일이다.
많은 빛 바랜 이야기들이 모임의 성격에 관계없이 이야기 되고 있다.

저주함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 12:14).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약 3:10).
이 성경 구절들은 누군가를 저주하는 죄에 관련된 것들이다.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다(롬 12:21).
구약에서는 눈은 눈으로 갚으라고 가르쳤으나, 신약에서는 예수께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라고 가르치셨다(마 5:44).

어떤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특별한 권리를 부여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들이 하나님께 받은 권위로서 잘못을 범하는 신자들을 저주하려고 한다.
어떤 목회자는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한 여인과 그 가족에게 "당신들 그래서 잘되지 못할 거야" 등등의 말로 저주함으로서 앙갚음을 했다.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인정받지 못한다.
우리가 바로 앞에서 살펴본 하나님의 말씀과는 상반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위는 잘못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성경에는 우리로 그러한 저주들을 합리화시키게 할 수 있는 경우가 세가지 나온다.
우리는 그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타인을 저주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할 것이다.
그 세 가지 경우들은 열왕기하 2장 23, 24절과, 사도행전 5장 3절부터 10절 사이, 그리고 사도행전 13장 10절과 11절에서 볼 수 있다.

먼저, 벧엘에서 나온 어린아이들이 엘리사를 조롱한 장면이 있다.
그들은 엘리사를 대머리라고 불렀다.
당시 대머리는 구약성경에서 "가치 없는 인간"을 의미하던 경멸과 멸시의 상징이었다.
그들은 엘리사에게 "올라가라"며 조롱을 했다.
그것은 "네가 엘리야가 변형돼 올라갔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해 봐라"라는 의미였다.
엘리사는 그들을 주의 이름으로 꾸짖었다.
나중에 암콤 두마리가 나와서 그들 중 마흔 두 명을 죽였다.
여기서 먼저 주의해 보아야 할 것은 이 일은 율법 아래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 가르치시기 이전, 그리고 성령의 침례가 주어지기 이전의 일이었다.
또한 우리는 엘리사가 그들을 저주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들은 벧엘 출신이었고, 그곳은 금송아지를 모시고 있던 북 이스라엘의 두 도시 중 하나였다(왕상 12:29).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선지자와 하나님의 능력을 조롱하고 있었다.
율법에 따르면, 이 사람들은 그들의 우상 숭배를 인하여 벌써 죽음으로 정죄되었던 것이다(신 13:12-15).
하나님께서는 벌써 그들을 정죄하셨고, 문제는 단지 심판이 언제 일어나는가 하는 것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심판을 바로 행하시지는 않으므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보고 지나친다고 생각하기 쉽다(전 8:l1).
이 경우에는,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그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를 조롱할 때까지 심판을 유보하신 것이다.
엘리사가 그들을 저주했나 하지 않았나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측면으로 생각해서는 별 의미가 없다.

두 번째 경우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이다.
이 부부는 거짓말로서 하나님의 교회와 성령을 속이려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지식의 말씀을 주셔서 진실을 알게 하셨다.
베드로는 개인적으로 이들에게 저주를 내리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아나니아에게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하나님께서 지식의 말씀을 주신 직후에, 베드로는 삽비라도 그 남편이 죽은 것처럼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교회에 본보기로 삼으셨다.
오늘날 교회의 위선자들은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하지는 않는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는, 율법이 수여된 직후 아론의 아들이 그것을 순종치 않음으로 죽임을 당한 것처럼, 신약 교회의 초창기에 생긴 특별한 본보기였다(레 10:1-2).
두 가지 경우 모두, 심판은 본보기로서 즉시 행해졌다.
그리고 둘 중 어떤 경우에서도 사람이 죄지은 자를 저주하는 일은 없었다.

마지막 경우는 바울과, 바울의 복음전파를 방해하려 한 바예수의 일화이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지식의 말씀을 주셨고 바울은 바예수에게 예언한 경우이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그분이 하시려는 것을 알게 하셨고, 바울은 그것을 그 사람에게 나타내었다.
바울은 그에게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라고 이야기하였다(행 13:11).
여기에서 개인적인 원한은 개입되지 않았다.
진정한 복음의 일군은 결코 남을 미워하지 않으며 복수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러한 경우들은 저주할 권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죄인이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을 증명하는 것이다.
남을 저주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바울이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 l2:l4)라고 기록한 다음에 반대의 일을 행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누군가 잘못을 범했을 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여 그가 그의 잘못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그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그가 당신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믿음을 지키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 주어야 할 것이다.
누구든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다면, 우리는 은밀히 하나님께서 그를 도울 수 있도록, 우리가 변함없이 그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욕설, 비방하는 것(Reviling)

"후욕하는 자나…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10).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후욕하거나…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전 5:11).
욕설을 하거나 매도하는 것은 말을 남용하는 것이다.
욕설하고 매도하는 것은 무례하고 오만한 말로 남을 호통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성령의 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육신의 감정을 따라 행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서라도 여러분이 타인에게 욕을 하는 것은 정당화 될 수 없다.
여러분이 잘못된 대우를 받거나 온당치 못한 판단을 받게 되더라도 말이다.
"그래도 사람은 감정적인 존재인걸" 하는 핑계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육신의 감정을 극복할 수 있도록 성령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고린도 전서 4장 12절과 l3절에는 타인이 우리에게 욕을 했을 때 올바로 대처하는 방법이 있다.
사도들은 욕을 먹었으며, 핍박을 받았고, 명성에 손상을 입었으며 이 세상의 찌끼처럼 되었다.
그들의 응답은 축복이었다.

바울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판을 받을 때, 대제사장을 욕했다고 비난을 받았다(행 23:1-5).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령을 했는데, 그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행위였다.
그때 그는 바울을 율법에 따라 심판하려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바울은 즉시 그를 "회칠한 담(위선자)" 라고 말했고, 그 주위에 서 있던 자들이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욕한다고 바울을 꾸짖었다.
바울이 아나니아가 대제사장임을 깨달았을 때, 그는 사과를 했다.
그는 주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고 한 출애굽기 22장 8절을 인용하고 자신이 그 이야기를 했을 때는 대제사장에게 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설명했다.
바울은 그가 상대하고 있던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거나, 아나니아의 대제사장 직무 찬탈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에 따르면 아나니아는, 그의 범죄에 대한 책임으로 로마인들에 의해 면직되었다가 불법적으로 대제사장직을 찬탈했다.
바울은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음에도, 그의 대제사장이라는 직무 때문에, 대제사장을 욕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천사장인 미가엘 조차도 마귀에 대해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했다.
모세의 시체에 대해 변론할 때, 그는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유 9)라고 말했을 뿐이다.
미가엘은 의심할 바 없이 사탄도 처음에는 기름 부음 입은 천사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심지어는 사탄과도 말다툼을 하지 않았다.
유다는 이러한 미가엘의 훌륭한 태도를, 권위를 멸시하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비교하였다(8절, 10절).

마찬가지로 바울도, 배교자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는 시점까지 타락한 자들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 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라도 주 앞에서 저희를 거스려 훼방하는 송사를 하지 아니하느니라"(벧후 2:10, 11).
이 사람들은 아무의 말도 듣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견책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에게 주권을 행사하고 있는 이들을 멸시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안다(전 9:10).
이들에게는 주님, 그분의 말씀, 그의 교회나 그분이 세우신 지도자를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세상에 속한 사람들처럼 아무런 두려움 없이 훼방을 하는 것이다.

베드로와 유다에 의하면, 이 사람들은 천사로부터 배워야 한다.
배교한 천사를 하나님께 보고해야 하는 입장에 있던 천사들도 가혹한 말이나 잔인한 언어로서 송사하지 않았다.
그들은 저주나 욕설없이 단순히 사실을 전했다.
그들은 사람들보다 많은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예의바르게 사실만을 전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이나 미가엘을 비롯한 천사들이 욕하고 헐뜯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을 알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성직자와 신도들이 권위자들을 향해 함부로 말하기를 꺼리지 않고 있다.
신도들은 그들의 목사들에 대해 말하며, 목회자들은 다른 목회자들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만일 어떤 이가 죄를 범한다면, 그 문제가 목사나 장로에게 이야기되는 적절한 절차가 있다.
사실을 알아야 할 지도자에게 말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악의를 가지고 훼방하는 태도로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예의없이 말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심지어는 천사들도 이러한 것들을 말할 때는 주의하는 태도를 보였다.

거룩함은 우리로 악을 말하지 않는 것, 아무도 훼방하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
아무리 악한 죄를 지은 사람도 우리가 욕할 수는 없다.
우리는 특히 리더들을 비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비방하는 사람은 바울과 사도들이, 심지어는 천사들도 하기를 두려워하던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모든 사람을 향해 올바를 태도를 가질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겸비해야 하겠다.

거짓말과 거짓 증거함(Lying and bearing false witness)

"너는 네 이웃을 향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출 20:16, 막 10:19).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계 21:8).
이것들말고도 다른 많은 말씀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거짓말을 싫어하시는가 보이신다.
거짓이면, 말이든 행위이든 간에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없다(계 21:27).
가증스러운 것 일곱 가지 중에 두 가지는, 거짓말하는 혀와 거짓증인이다(잠 6:16-19).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해로울지라도 일단 약속한 것은 지키기를 원하신다.
이 모든 성경 말씀들은 "거짓 중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라는 말씀을 분명히 해준다(잠 19:5).

거짓말하는 것은 거짓이라고 알고 있는 사실을, 특히 속이려는 목적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진실을 감추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잘못된 인상을 주거나 주제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을 포함한다.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들어야 할 중요한 사실을 말해주지 않는 것도 거짓말의 일종이다.
다시 말해서, 알려야 하는 사실을 감추고 있는 것도 거짓말이다.
만일 우리가 의도적으로 타인을 착각하게 만들거나 잘못된 인상을 준다면 행위로 거짓말하는 것이 된다.
거짓말이 얼마나 사소한 것인가, 누구에게 거짓말을 했는가, 무슨 목적으로 거짓말을 했는가 하는 것은 중요치 않다.
거짓말은 말 그대로 거짓말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만일 두 사람이 논쟁을 벌인 후에 서로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어떨까?
그때 제 삼자가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로 작정하고, 양쪽에 다른 편에서 먼저 사과를 하더라고 거짓말을 한다고 하자.
설사 그 둘이 화해를 했다고 하더라도, 제 삼자는 거짓말을 한 것이다.
좋은 결과가 옳지 못한 방법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만일 부모가 자식을 교회에 나가지 못하게 한다면 어떨까?
그는 다른 곳에 간다고 말하고 교회에 갈 수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 또한 거짓말이다.
당신은 교회에 가기 위해 죄를 짓고 모든 것이 잘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믿지 않는 남편의 십일조를 내는 아내가 있다고 해보자.
그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의 십일조를 내지 않는 조건으로 그녀가 교회에 가게 허용하였다고 해보자.
그래도 그녀는 그의 십일조를 낼 수 있을까?
아니다.
이미 그녀는 약속을 했기 때문에, 자신의 말을 어길 수 없다.
그녀는 남편을 속이는 것이 되고 결국은 남편의 신임을 잃게 될 것이다.
당신이 교회를 돕고 있다고는 해도, 만일 당신의 방법이 잘못돼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 목전에 죄이다.

어떤 이들은, 라합의 경우가 좋은 결과는 어떤 수단이든 정당화시킨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숨겨주기 위해서 여리고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녀는 단순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신 위대한 일들을 들었고 그분께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정탐꾼들을 숨겨 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거짓말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녀 행동의 원천이 되었던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모든 나라들이 그분을 능력을 보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이었다.
라합은 그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만일 라합이 하나님의 율법을 알았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거짓말을 통하지 않고, 그들을 구원할 다른 길을 내셨을 것이다.

구약의 다른 예를 들자면,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 사라가 자신의 누이동생이라고 함으로서 두 번 거짓말을 하였다(창 12:10-20, 20:1-16).
그는 그럼으로써 자신의 아름다운 아내인 사라를 다른 이방 왕들이 빼앗고 자신을죽이지 못하게 하려 했다.
두 경우 모두, 왕들이 사라를 아브라함의 누이인줄 알고 아내로 취하려 했으므로, 비참한 결과를 빚을 뻔했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아브라함은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아브라함은 자신의 거짓말에 대한 책망을 받았고 한 번은 그 지역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위의 예들은 누구를 보호하기 위해 하는 거짓말이라도 옳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거짓말이라는 수단없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또한 아브라함의 경우는 반쪽뿐인 진실만을 말하거나, 의도적으로 잘못된 인상을 심어줌으로서 거짓말하는 경우의 예가 된다.
왜냐하면 사라는 사실상 아브라함의 이복 누이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행위로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만일 가짜 졸업장을 당신 것인 양 보인다면?
당신은 속이는 것이고 잘못된 인상을 줌으로서 거짓말하는 것이 된다.
만일 어떤 일에 사용하기 위해 당신이 일정액의 돈을 받는다면?
그리고 당신이 그 돈을 다 사용하지 않고 더 많은 액수의 영수증을 제시한다면?
그것 또한 거짓말이 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거짓을 말해서는 안된다.
만일 우리가 이전에 잘못한 것들이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고 또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를 지키실 것이라는 것을 신뢰할 수 있다.
하나님께 있어서는 "정직이 최선의 방법이다"라는 속담은 정말이다.

게으른 말(Idle words)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나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6-37)고 말씀하셨다.
그는 또한 마태복음 22장에서 누구든지 바보라고 부르지 말라고 경고하셨다.(시편 14편 l절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자나,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를 바보라고 함)

혀의 중요성(Importance of the tongue)

우리는, 사람이 자기가 한 말로서 의롭다 함을 받고 정죄함을 받을것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혀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자신의 혀를 재갈 먹이지 못하는사람은 헛되고 쓸모없는 종교의 모양을 가진 사람이고 자신의 혀를 제어하는 사람은 그의 온몸을 제어하는 사랍이라는 야고보의 가르침도 받았다.
이것은 우리가 거룩해지기를 원한다면"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딛 2:8).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혀를 통제할 수 있도록 도우실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숫군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 14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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