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에서의 권위와 조직
교회 안에서의 권위와 조직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다스리는 것과…"(고전 12:28)
성결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우리는 이제 교회의 조직과 권위라는 주제에 대해서 몇 가지로 다루어 보고자 한다.
이 장을 소개하기 위한 몇 가지의 질문들이 여기에 있다.
교회에서 권위의 범위는 무엇인가?
교회는 성결의 기준을 세울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
교회는 성결의 기본적인 원칙들을 범하는 사람들과 교제를 끊도록 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
개개인의 사역자나 성도는 교회의 결정에 어느 정도까지 따라야 할 의무가 있는가?
모든 사람들은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자신들 위에 인간의 권위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성도들 상호간의 관계에 대해서 성결은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교회의 다스림은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졌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에 진정으로 권위와 조직을 세우셨다는 것을 확증함으로써 이 주제를 시작하고자 한다.
시작부터 우리는 교회란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의 계획을 체험하고 거룩하고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부르심을 받은 신자들의 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바이다.
그것은 인간적인 조직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러한 것에 제한되지도 않는다.
특정한 교파에 속한 회원이나 교인이라는 것이 구원의 필수조건이 될 수 없다.
또한 각 사람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주신 신념들과 상반되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거나 혹은 거짓 교리를 가르치는 리더십을 따라갈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의 조직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셨고 인정하셨다.
그리고 복음을 전파하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권위와 조직을 말할 때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 사이에 세우신 관계들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 회원이 되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서 세워진 조직화된 체계 안에서 활동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교회의 시작부터 하나님은 그의 교회 안에 조직을 가지셨다.
예수님은 열두 사도들을 택하시고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도록 훈련하셨다.
그리고 주님은 유다를 그 그룹의 첫 번째 재무 출납원으로 임명하셨다(요 13:29).
우리가 교회의 역사서인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우리는 조직을 위한 노력과 지도자에 대한 인준 및 통일성 있는 의사 결정과 상호 교제에 관한 많은 예들을 찾아볼 수 있다.
초대 교회의 조직
사도행전 1:l5∼26에 보면 초대 오순절 교회의 창립 멤버들이었던 l20여명의 신자들이 가룟 유다를 대신할 계승자를 뽑기 위해서 함께 모였다.
베드로가 그 모임의 의장이었다.
사도직을 위한 자격들이 정해지고 두 사람이 지명되었는데 결국 맛디아가 선택되었다.
성령 강림 후에 사람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
이것을 다른 말로하면 그들은 열두 사도들의(사람에 의해서 선택된 맛디아를 포함하여) 리더십을 인정하고 사도들의 교리적인 가르침과 교제의 방법들을 따랐다는 것을 말해준다.
게다가 그들은 교회 재정의 모금과 분배에 있어서도 사도들의 리더십을 인정했다.
사도행전 6장에서도 열두 사도들은 다시 한 번 모든 믿는 자들을 소집하고서 이번에는 교회의 사무를 처리할 체계를 조직했다.
그 모임은 사도들이 말씀을 전하는 것과 기도에 더 많은 시간을 헌신할 수 있도록 교회의 업무를 맡아서 섬길 일곱 집사들을 선택했다.
사도들은 먼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을 뽑도록 규정했다.
그리고 회중들이 일곱 사람들을 뽑고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를 위에 안수했다.
안수는 교회의 기본 교리들 중에 하나인데(히6:2),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빌 때나 병고침을 위해서 기도할 때나 혹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어떤 사람들을 따로 세울 때 시행되어졌다.
이 경우에서 안수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서 일곱집사들의 선택을 인정하시고 권위를 부여하셨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곱 집사들 중의 하나인 빌립은 후에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파했다.
그곳에서 부홍이 일어났을 때 사도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어 조사하고 감독하고 돕도록 하였다.
그 때부터 사마리아인들은 성령을 받기 시작했었다(행8:14-17)
사도행전 11장에서 우리는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이(리더십과 사역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 베드로를조사하기 위해서 소환한 것을 보게 된다.
베드로는 방금 이방인인 고넬료 가정에 복음을 전하였는데 유대에 있는 교회 지도자들은 베드로의 활동에 대한 자세한 보고를 듣기를 원했다.
그들은 베드로의 행동들이 정당한 근거가 있는지 아닌지를 알기를 원했다.
이 시점까지 베드로는 가장 두드러진 지도자로서 예수님으로부터 천 국 열쇠를 받았으며, 뿐만아니라 주님으로부터 고넬료 가정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직접적인 명령을 받았지만, 그는 여전히 교회의 권위에 복종했다.
그는 조사를 받았고 모임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비평도 들었으며 그리고 권위 안에서 이것들에 대한 답변을 하였다.
같은 장에서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에 보내어서 소문은 들었지만 아직 설립하지 않은 교회에 대해서 조사를 하게 하였다(행 11:22-30).
바나바의 임무는 그들에 관하여 알아보고 그들에게 가르침과 지도력(leadership)을 주는 것이었다.
바나바는 안디옥에 머물렀고 그 후에 바울을 그의 동역자로 데려 왔다.
또한 선지자들도 예루살렘에서 와서 그들을 도왔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의 필요를 위해서 모금을 하였고 그 헌금을 바나바와 바울의 손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에게 보내었다.
안디옥 교회는 성장하였고 그 교회 자체에서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일어났다.
하나님께서는 바나바와 바울올 선교사역으로 부르셨는데 이 부르심을 자신들뿐만 아니라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나타내셨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의 사역자들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안수하여 선교사들로 임명하였다(행 13:1-4).
그들은 선교를 나갔고 각처에 교회들을 세우고 그 교회들을 돌보도록 사역자들을 세웠다(행 14:23).
그 다음의 교회의 큰 회의는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다.
이때쯤 교회는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다.
교회는 이제 더 이상 예루살렘에 있는 지역 회중들이 아니라 온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이방 나라들에게까지 퍼졌다
교회의 첫 총회라고 불려질 수 있는 모임에 여러 교회들로부터 지도자들과 사역자들이 격렬한 쟁점이 되는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함께 모였다.
문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거기서 많은 변론과 논쟁이 있은 후 베드로는 바울과 바나바처럼 이방인들은 이러한 것들을 행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어떤 믿는 바리새인들은 반대적인 견해를 표명했다.
주님의 형제였던 야고보가 그 회의의 의장이었는데 그가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자 그 총회의 대다수가 그 결정을 지지하였다.
결정이 내려진 후 그 결과를 받아들이고 연합한 전 교회는 지역교회들과 교리적인 선언을 교통하기 위한 대표자들을 선택하였다.
분명한 것은 초대교회는 모세의 율법에 관하여 이방인들을 속박하고 있던 것을 결정할 권위를 실행했다는 것이다.
특별히 그들은 이방인들이 지켜야할 네 가지의 것들을 결정하면서 이렇게 권고하였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행 15:28-29).
이 모임 후에 바울은 사도행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부각된다.
비록 그의 입장이 충분히 변호되었지만 바울은 그의 3차 선교여행 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야고보와 예루살렘의 다른 지도자들에게 완전한 보고를 하였다.
그들은 그의 보고를 듣고 기뻐하였으나 유대인 기독교 공동체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어떤 유대인 서원자들을 바울이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도록 충고하였다.
그는 그들의 권위에 대한 순종과 연합을 조성하기 위해 서 그들의 충고를 따랐다(행 21:18-26).
서신서들에서 우리는 상호교제와 사역의 원칙들에 대한 확립과 헌금을 모금할 목적으로 건전하고 밀접한 조직에 대한 더 많은 증거들을 보게된다.
야고보와 베드로 그리고 요한은 기둥들이었고 전 교회를 다스리는 지도자들(general leaders)이었다(갈 2:9).
이러한 사실도 바울이 베드로와 다른 사람들의 외식과 거짓교리에 대해서 책망하는 것을 막지는 못하였다(갈 2:11-14).
베드로의 잘못은 사도행정 15장에서 교회가 내련 결정에 역행하는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그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바울은 그의 전도 여행을 통해 설립된 수많은 교회들의 감독자였으며 그는 그들에게 편지를 써서 교훈과 격려와 경고를 하였다.
그는 또한 디모데와 디도같은 사람들을 자기 밑에서 동역할 감독자와 사역자들로 임명하였다.
디도는 그레데의 감독자로 임명되었는데 그 지역에 사역자들을 임명하는(ordaining) 책임을 부여받았다(딛 1:5).
바울은 이 두 사역자들이 각자의 지역에서 조직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그들에게 설교자들(preachers)이 되기 위한 자격 조건들을 제시하여 주었다(딤전 3:1-7, 딛 1:5-16).
바울은 이 두 구절에서 사역자(minister)와 목사 (pastor)를 의미하는 감독(bishop) 혹은 장로(elder)라는 용어를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또한 집사들을 위한 자격들을 주었다(딤전 3:8-13).
우리는 또다시 바울이 디도와 다른 형제를 위한 추천서(recommendation)를 보낸 것을 보게되는데 이들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을 모으기 위해 여러교회들에 보냄을 받았었다(고후 8:16-24).
바울은 매 주일마다 연보를 하는 체계(system)를 세웠는데, 그래서 누군가 그 헌금을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갈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라고 편지로 권면하였다(고전 16:1-3).
사도요한도 또한 데메드리오라는 전도자(evangelist)를 위한 추천의 편지(letter of recommendation)를 보냈다.
같은 편지에서 그는 교회가 디오드레베를 복음의 사역자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경고를 보냈다(요삼 9-12).
예수님과 바울은 교회 안에서 논쟁을 진정시키고, 죄인을 판단하고, 필요하다면 절교(disfellowshipping)내지 출교(excommunicating)하는 절차를 말씀하셨다(마 18:15∼18, 고전 5:1∼13).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경고를 했다(행 20:28-30).
그리고 에베소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거짓 사도들을 시험하여 분별해 내도록 명령을 받았다(계 2:2).
이 모든 성경말씀들은 교회들 사이에서 밀접한 협력 관계가 있었고 문제들을 조정하는 방법들이 있었다는 것을 밝히 보여 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거기에는 분명하게 규정된 권위의 질서(lline of authority)가 있었다.
첫째로 지역교회(local church)에 대한 책임을 맡고 있는 장로들(지교회의 목사들이나 부교역자들)이 있었고 그리고 지역교회의 업무를 도와주는 집사들이 있었다.
그 다음에 여러 교회의 그룹들이나 여러 지역들에 대한 책임을 맡고 있는 감독들(overseers) 이 있었는데, 그레데에 보내진 디도와 같은 경우이다.
여기서 보면 바울은 디도의 위에 있으며 그가 설립한 많은 교회들을 감독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특별한 사역은 이방인들을 복음화하도록 전도자들(missionary)을 지도하는 것이었으며 이와 같이 베드로는 유대인들을 복음화하도록 지도하였다(갈 2:7-8).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주 대변인(majorspokesman)이며 대표자(representative)였던 것 같다.
반면에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최고지도자(chief leader)였던 것 같다.
그러므로 개 교회와 각 사역자는 권위에 있어서 자기 위에 더 높은 누군가의 보호 아래 있었다.
심지어 베드로나 바울과 같은 최고 권위의 지도자들도 서로 권면하였고 총회로서의 교회의 권위에 복종하였다.
이 두 지도자들은 사역의 보고를 하였고 예루살렘에 모인 사역자들의 모임에서 충고를 받아들였다.
이것은 교회행정이 개인적인 지위나 위치를 능가함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하나님이 주신 직분이지만 교회 행정(church government)을 대신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리더십의 권위(The authority of leadership)
성경은 교회 안에서의 리더십의 권위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고 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살전 5:12-13).
여기에서 이 말씀들이 개 교회(local churches)안에서와 마찬가지로 교회들 사이의 권위 구조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주의해 보라.
또한 우리는 지도자들의 특성을 알아야 한다는 것도 주의해 보기 바란다.
우리는 권위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이 하는 일 때문에 그들을 존경해야 한다.
우리는 사람에 대해서 존경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직분 때문에 존경하거나 두려워 해야한다.
권위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를 존경하는 것이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롬 13:1, 2-7).
이 말씀은 사역자들과 성도들 사이에 뿐만 아니라 교회와 세상권세(civil matters)에도 적용된다.
물론 어떤 사람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의 직분에서 해임하는 합법적인 방법들도 있으나 우리는 이런 문제들은 차후에 다룰 것이다.
여기에 권위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존경해야 하는 필요성에 대한 다른 말씀이 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딤전 5:17).
교회 안에 리더십을 두는 목적은 "성도를 온전케하며 봉사의 일(the work of the ministry)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의 말씀으로 요약된다(엡 4:11, 12).
사역자가 해야 할 일은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여 경계하며 권하는"일이다(딤후 4:2).
권위의 목소리에 주의를 하지 않는 성도들이나 목회자들까지도 이들은 위험한 위치에 있게 된다.
유다서 8절에서 유다는 "권위(dominion)를 업신여기며 영광(dignitities)을 훼방하는" 사람들은 배교자들(apostates)이라고 말하고 있다.
베드로도 또한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 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그러나 이 사람들은…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벧후 2:10-13).
말세의 징조들 중에 하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가 가정에서, 사회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도전을 받아 실추되는 것이다(딤후 3:2, 8).
요약
이 모든 것들로부터 우리는 어떤 결론을 얻을 수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다스림을 두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전 12:28).
하나님은 그의 교회에 5중의 사역을 주셨다(엡 4:11).
교회 안에는 예언과 섬 김(minister)과 권위(exhort)와 그리고 '다스림(rule)'이라는 여러 가지의 다른 직분들이 있다.
이 다스림 곧 행정은 개교회(local church) 안에서 존재할뿐만 아니라 개교회 차원을 넘어서도 존재한다.
우리는 신약교회가 많은 목적들을 성취하기 위해서 조직이 있었다는 것을 보았다.
교회는 지역교회의 회중들을 조사하기 위해서 사역자들을 보냈고, 새로운 교회들을 설립하기 위해서 선교사들을 보냈으며, 사역자들을 보내어서 지역교회의 성도들을(local congregations) 조사하고 교리적인 논쟁들을 해결해 주며 현금을 모금하도록 하였다.
교회는 또한 인정된 전도자들을 위한 추천의 편지를 보내고, 교회 안의 죄인들을 출교하고, 지역교회들에게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서 경고하고, 거짓 선지자들을 정죄하였다.
우리가 본대로 교회는 때때로 일어나는 새로운 문제들에 대한 결정을 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신약교회는 사도행전 15장에서 총회를 통하여 이방인 신자들(Gentile believers)을 위한 성결의 기준을 확립하였다.
교회는 역시 사도들과 선교사들과 사역자들 및 집사들을 위한 자격들을 제시하고 이 직분들에 합당한 적임자들을 뽑았다.
예수님께서 이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명백하게 언급을 하시지는 않았다는 것을 주의하라.
어떤 한 사람이 이 새로운 문제들에 대한 결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교회가 결정을 만들고 이것들을 선포하였다.
우리시대에도 교회는 여전히 새로운 성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권위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의 상황들을 고려하여 성결을 더 명확하게 정의를 내릴 권위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교회는 흡연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고 그 권위를 유효하게 실행해 오고 있다.
교회내의 심판(Judgement)
특별한 경우에 있어서 교회는 개개인을 심판할 권위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사람이나 그의 행동, 그리고 그의 신념들에 대해서 판단하지는 않는다(마 7:1, 롬 14:10, 약 4:12).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예언조차도 판단하고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했나를 시험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전 14:29, 요일 4:1).
전 교회적으로 연관된 문제에 있어서는 예수님과 바울은 성도들 사이 의 논쟁에 대하여 심판을 위한 절차를 말씀하셨다.
요약해서 말하면 한 개인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심판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만 교회는 성도들 사이의 문제와 교회 안의 회개하지 않은 죄를 심판할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마태복음 18:15-18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심판의 절차들을 살펴보자.
1.만약 두 성도들이 그들 사이에 문제를 가지고 있다면,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당사자가 개인적으로 상대방에게 가서 그것을 해결하도록 해야한다.
물론 어떤 형제가 자기에 대해서 적대시하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한성도가 알았다면 그는 모든 것을 그만두고 그에게 가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 후에야 그는 제단에 가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수 있다(마 5:23-24).
2.만약 문제 해결을 위한 시도가 잘되지 않았을 때, 그 괴로움을 당하는 당사자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인들을 그와 함께 데리고 가서 그 상대방과 그 문제를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3.만약에 범죄한 사람이 여전히 문제를 바르게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때에는 그 문제를 교회 앞에 가지고 와야 한다.
이것은 이 문제가 이제는 교회의 지도자들 곧 목사와 제직들에게 넘겨지고 그들에 의해서 다루어져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 문제를 심판할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4.만약 범죄한 그 사람이 교회의 판결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는 출교를 당하고 이방인처럼 간주된다.
위의 구절 중 18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교회의 결정과 지도력을 존중하신다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정직하고 공명하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결정을 자신의 결정으로 받아들이시고 그것을 시행하실 것이다.
이것은 교인들이 교회의 결정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교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는 이방인으로 간주될 것이다.
송사(訟事)
이상의 절차들은 교회 내에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올바른 방법이다.
성도들은 세상 법 아래서 다른 성도들을 고소할 수 없다(고전 6:1-8).
그 이유는 성도들이 천사들을 판단할 것이며 천년왕국에서 심판하 도록 훈련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우리가 지금 교회 내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면 어떻게 천사들과 오는 세상을 심판할 수 있겠는가?
그뿐만이 아니라 교회 내의 문제로 세상 법에 의존하는 것은 불신자들 앞에서 나쁜 본보기를 남기게 된다.
세상의 눈앞에 교회분쟁에 대한 모습을 제시하는 것보다 차라리 속는 것이 낫다.
이 말씀은 세상에서 잘못을 범한 사람에 대한 송사를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이유들은 그러한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관용하고 보복하지 마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마 5:38-42).
예를 든다면 자동차 사고상의 손해로 불신자를 송사하는 것이나 혹은 종교적 자유와 같은 합법적인 권리를 변호하기 위하여 법정에 가는 것들은 괜찮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회개하지 않고 교회의 심판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출교를 당하고 이방인으로 간주될 것이다.
이 시점에서는 그는 더 이상 교회 안의 성도가 아니라 세상 죄인인 것이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상 법정에 가는 것이 적절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교회의 직원이 교회의 재산을 자신의 명의로 넣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두세 명의 교회의 대표자들이 그에게로 가서 그를 만나야 할 것이다.
만약 그가 그 서류들을 사실대로 바꾸기를 거절한다면 그 교회의 목사와 제직들은 그 문제를 심판해야 한다.
만약 그가 여전히 거절한다면 그는 공식적으로 출료를 당하게 된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그 사람에게 그의 죄의 심각성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고, 교회를 죄에서 깨끗하게 하기 위함이며 또한 세상의 눈에서 그를 교회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함이다.
이후에 교회는 그 사람을 이방인으로서 다루게 되기 때문에 그를 세상 법정에 데리고 갈 수가 있다.
출교(Disfellowshipping)
우리는 방금 출교에 대한 한가지 이유를 언급하였는데, 그것은 교회의 심판에 복종하기를 거절하는 것이었다.
고린도전서 5:1∼13에서 바울은 다른 정당한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이것들은 8장에서 더 자세히 다루었었다).
바울이 가르침을 준 고린도 교회의 특별한 문제는 교회 내에 있는 어떤 사람이 근친상간의 죄를 범한 것에 대한 것이었다.
그 교회는 영적인 은사들로 인해서 매우 교만해졌었고 그래서 이 죄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바울은 그 죄를 심판하여 그 범죄자를 물리치지 않은 것에 대해 그들을 강하게 책망하였다.
이러한 경우에 올바른 절차는 그 죄인을 출교하는 것이다.
그는 세상 곧 사탄의 왕국에 보내어지게 된다.
이것을 공개적으로 함으로써, 그 사람은 충격을 받아 회개에 이르게 될 수도 있다.
또한 그는 사탄의 손에서 어느 정도 고통을 받아 회개하고 교회에 되돌아오기를 원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 출교를 당한 결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는 희망이 있게 된다.
그러나 그 사람의 죄가 덮여지고 무시된다면 그는 결코 회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바울은 이런 류의 심판을 형제라고 일컬음을 받으면서 음행하는 자나 탐하는자, 우상숭배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 그리고 술취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에게 확대시키고 있다.
바울은 성도들이 이런 자들과는 사귀지도 말고 함께 먹지도 말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교회의 규율이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명백한 말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행한다.
교회가 어떤 사람을 죄 때문에 출교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 가서 그와 함께 교제한다.
우리는 나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와 함께 시내를 돌아다니고 그리고 그를 위로한다.
이럴 때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그 사람이 더욱 거역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돕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사람 안에 있는 반역적이고 부정한 영과 절교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영은 쉽게 우리에게 그와 같이 되도록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한번은, 어떤 사역자가 자기가 목회하고 있는 마을에서 술에 취하게 된 일과 여러 명의 소녀들과 부도덕한 교제에 빠진 일로 출교를 당하였다.
몇 개월 후, 그는 다른 지역으로 가서 설교하기 시작하였고 부흥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회개에 대한 어떤 증거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를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글쎄요. 하여튼 그분은 목사님입니다"라고 하면서 그를 도우러 갔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된다.
어떻게 우리가 성경이 말씀하는 관점에 의해서 출교를 당하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과 교제할 수 있는가?
어떻게 사역자의 자격을 상실한 사람의 사역을 도울 수가 있는가?
근신(謹身)
어떤 사람을 근신하게 하는 것과 출교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이 잘못을 저지른 후 그러나 회개를 한다면, 그는 교회 안에서 직분을 위한 자격을 상실할 수 있다.
이 경우에 그의 직분은 일시적으로 혹은 영구히 빼앗기게 된다.
이와 비슷하게 교회 안에서 두드러지게 쓰임을 받고 있는 어떤 사람도 얼마동안 그의 직분을 부분적으로 혹은 전부를 빼앗기게 된다.
이것을 근신(silencing)이라고 부른다.
성경은 지도자들이 가져야 할 자격들을 열거하고 있는데, 그러므로 지도자가 그의 자격들을 잃어버리면 당연히 그의 직분에서 물러나든가 아니면 성경적인 자격들을 다시 얻을 때까지 근신해야 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출교는 죄를 범한 어떤 사람이 그 죄를 인정하거나 회개하기를 거절하고, 교회의 심판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에게 해당된다.
이런 사람은 이방인으로 간주된다.
개교회의 사역자도 만약 그가 죄를 범하고 회개할 때는 일정 기간 근신에 처해질 수 있다.
이러한 종류의 징벌은 그가 일정한 기간을 통해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선한 이름을 잃게 되는 경우에도 또한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교회의 이름을 더헙히거나, 그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교회 안에서 사용된다면 다른 이들에게 거치는 반석이 될 수도 있다.
만일 근신을 받은 사람이 자신의 죄를 정말로 뉘우친다면 그는 다른 교회나 모임으로 자신의 적을 옮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벌을 달갑게 여기고 자신이 속한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길 것이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 12:11).
징계의 과정은 그 사람이 회개했는가 안했는가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 사람이 자신이 신실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인내와 겸손함을 가지고 있는가도 함께 보이게 된다.
만약 그가 인내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참을성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만일 목회자가, 자신의 지위를 잃을 만큼 큰 죄를 범하지 않는다면, 그는 근신의 징계를 받거나 그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지도자에 의해서 유예기간을 받게 될 수 있다.
그가 그 기간동안 신실한 믿음을 지킨다면, 그 목회자는 완전히 복권되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그로부터 거두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교회 안의 지도력은 지도자의 자질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권위를 행사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는 것일 뿐이고 우리는 그들을 경멸해서는 안된다.
많은 경우에 교회의 장로들이나 교단의 지도자들은 그들이 징계한 이들이 떠드는 이야기와 행동들에 의해서 상처를 받는다.
그들은 죄를 인정하거나 용납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들의 친한 친구들에게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목회자는 자신의 목회를 영원히 잃을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그가 한 아내의 남편이 아니거나 혹은 간음과 같은 죄를 계속 범함으로서 그가 속한 사회에서 좋은 평판을 잃을 경우이다(딤전 3:1-7).
그는 아직도 회개하고 성도로서 받아들여 질 수는 있다.
그러나 그는 단지 개교회에서 일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한 경우가 많이 있다.
그들은 다른 교단으로 교직을 옮김으로서 자신의 목회를 다시 세우려 하지 않고, 자신의 개교회에서 신실하고 충성된 일군이 되었다.
개인이 어떻게 느끼는가와는 상관없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자신의 의지를 내세우거나 불순종하거나 죄를 짓지 않도록 하자.
만약 우리가 잘못을 범한다면, 교회의 목사와 지도자들의 벌을 달게 받도록 하자.
회개하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더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자.
공개적 책망
공개적으로 누구를 책망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가?
일반적으로, 가르칠 때는 전체적으로 가르치고 개인의 문제를 다룰 때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하는 것이 가장 좋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지명해서 책망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덕이 못된다.
그러나, 죄를 지은 사람이 공개적으로 꾸짖음을 받아서 다른 이들이 배우게 해야 할 경우도 있다.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딤전 5:20).
이것은 잘못을 범하거나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사람을 항상 공개적으로 꾸짖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갈라디아서 6:1은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또한 목회자나 혹은 누구든지 사적으로 화를 내거나 원망하거나 하는 것이 적합치 않다는 것을 배웠다.
공개적인 책망은 공개적으로 죄를 짖고 또 반항적인 이들을 위한 것이다.
만일 성도가 파문되거나 회개하지 않고 파문되기 직전의 상황까지 간다면 공개적인 책망을 하는 것이 적절한 일일 것이다.
만약 어떤 이가 교회를 갈라지게 한다거나 하나님의 역사를 막는다면, 공개적인 꾸짖음은 적절한 것이다.
공개적인 책망은 죄를 지은 성도가 회개했을 때 사용하는 방법이 아니다.
필요시에 그는 근신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목회자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숙고하지 않았거나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지 못했다면 공개적인 책망을 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종류의 사역은 꼭 필요한 것이며 또 중요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아주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반항적인 경우가 많으며 또 돌이키지 않을 경우가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족적인 연대와 개인적인 감정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책망과 견책은 디모데후서 4장 2절을 보면, 목회의 일부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요 16:8을 보라.
하나님의 성령이 세상의 죄를 제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견책"은 시험하다, 검사하다, 확신하다, 따지다, 노출시키다 그리고 견책된 사람을 부끄럽게 하다라는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뜻들이 나타내는 것처럼, 견책은 때때로는 공개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이루어진다.
죄를 공개적이거나 개인적으로 책망하는 것 말고도, 교회 예배에 혼란을 부를 이들을 책망해야 할 필요도 있다.
이것은 예배의 순서를 바꿈으로 해결될 수도 있다.
하지만 때때로 질서가 없는 사람은 예배 인도의 위치에서 빠져야 할 경우도 있다.
목회자로서의 감독은 이러한 것들을 정리해서 예배가 정숙하고 질서 가운데 이루어지게 할 권리가 있다(고전 14:33, 40).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성경 말씀을 따라서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이루어 질 수 있도록 확실히 해야 한다.
예를 들자면, 한 예배에서는 세 가지 이상의 방언과 통변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좋다.
그리고 인도자는 가르침이 잘 지켜지는가를 살펴야 한다(고전 14:27-29).
책망은 교회의 심판이나 출교와 긴밀한 연관이 있으며 또 그것들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그 목적은 교회를 죄와 반항으로부터 깨끗케 하고 모든 믿는 자들이 배우게 하기 위함이다.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대상 16:22).
이것은 권위에 대한 아주 중요한 성경구절이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가르쳐 준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직위를 존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사람이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의 직위를 이용해 뜻을 이루셨다.
하나님은 이방의 왕 키로스를 세우셔서 그분의 뜻을 이루셨다(사 44:28-45:3).
그리고 그분은 이집트의 왕 느브를 세우셔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다(대하 35:20-24).
하나님께서는 예언의 영을 타락한 왕 사울에게 보내셨다(삼상 19:23-24).
특히 하나님께서는 가야바가 당시 가지고 있던 대 제사장의 직분 때문에 그로 예언의 말을 하게 하셨다.
가야바는 사실 예수님을 죽이려고 계획하였던 것이지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을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서 당신의 뜻을 말씀하셨다(요 11:49-52).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직위 때문에 이러한 악한 자들을 사용하셨다면, 얼마나 더-우리가 그들이 잘못하고 있다고 오해할지라도-신실하고 정직한 그분의 사역자들능 사용하실 것인가?
둘째로, 이 성경구절은 하나님께서 직위를 옮기시기 전에는 결코 개인이 지도자에 대해서 행동을 취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이 부르신 지도자를 몰아내기 위해 계획하거나 반항하는 것은 성경적인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형과 누나인 아론과 미리암의 불평, 고라의 반역을 용납하지 않으시고 모세의 권위를 세우셨다.
심지어 지도자가 실수를 하고 잘못을 범할 지라도, 그 권위 아래에 있는 개인이 대항한다는 것은 정말로 위험한 일이다.
사울이 타락하고 사무엘이 다윗을 다음 왕으로 세웠을 때에도 다윗은 사울을 대적하지 않았다.
시기로 가득한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다윗은-마치 하나님의 뜻처럼 보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사울을 해칠 수 있는 기회에 그를 살려 보냈다.
사울이 왕인 이상에는, 다윗은 그의 직위와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사실은 존중했다.
당신이 아무리 자신을 합리화하려 해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위에 세우신 권위를 비난하거나 대항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아무튼, 어떤 지도자들은 이 성경구절은 자신의 독재를 합리화하기 위한 구실로 사용한다.
그들은 자신들 또한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모든 이들은 권위에 순복해야 한다.
초대 교회가 바로 그러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순복하라"(롬 13:1).
그러한 관점에서 왕상 2:13-27의 말씀을 읽어 보라.
솔로몬은 다윗의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하나님의 세우심을 받았다.
그의 이복형인 아도니아는 자신이 왕이 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결국 솔로몬이 기름부음을 받았다.
아도니아는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압 장군과 더불어 자신의 계획을 계속 추진했다.
특히, 그는 다윗의 첩을 자신의 첩으로 삼고자 했다.
그 당시의 관습은 왕이 죽은 후 첩은 그냥 과부로 지내든지 아니면 후계자의 첩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도니아는 사람들의 눈에 다윗 왕의 후계자로 보이고 싶어했던 것이다.
솔로몬은 그것을 알아차리고 아도니아와 요압을 처형했다.
그는 또한 아비아달의 제사장직을 취하였으나 그를 죽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이전에 하나님께 제사하고 다윗 왕을 도왔었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그와 그의 직위를 존중했으나 그의 직위는 해제했다.
그는 존경심과 함께 심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비아달이 자신의 반역으로 인해서 제사장의 자격을 잃었고, 그에 따라 솔로몬이 아비아달의 제사장직을 해제할 권위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택하신 지도자였고, 아비아달을 심판할 권위가 있었다.
어떤 이들은 목회자가 근신이나, 파문이나, 혹은 다른 심판을 받는다면, 교회는 앞의 구절들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부르심과 기름 부으심을 훼방하는 것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권위를 가진 이들은 심판할 권리를 가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취하는 것이 아니고, 잘못을 범한 사람이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서 자격을 상실하는 것일 뿐이다.
사실상,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특정한 죄를 용인하는 것 때문에 그들을 책망했다.
그는 '너희를 판단할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다.
만일 없다면 어떻게 후에 세상을 판단할 것이냐고 물었다(고전 5:1-13, 6:1-5).
어떤 사람이 교회내의 직위로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해서, 그 직위를 잃게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개인도 직위를 빼앗으려고 시도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사실이나,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그것을 행할 권위를 허락하셨다.
그렇지 않으면 왜 하나님께서 목사와 집사의 자격에 대한 기준을 주셨겠는가?
하나님 스스로 교회 안에 권위를 세우셨다(고전 12:28).
그리고 지도자도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롬 12:8).
만일 그 권위가 전혀 무기력하고 지도력이 발휘될 수 없다면 왜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하셨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과 인도하심을 따라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분의 뜻과 시간을 특정한 상황 가운데서 보이셨다고 믿는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이미 성경에, 지도자가 죄를 범하고 성경에 언급된 자격들을 잃는다면, 그의 위에 있는 권위자가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것을 언급하셨다.
교회의 성도들은 권위에 대항해서는 안되나, 그 위에 있는 권위에 그것을 말해야 하고, 위의 권위에 있는 사람은 그 사건을 판단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라는 말은 목회자가 아무런 제한없이 독재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 말씀은 아비아달이 반역으로 자신의 자격을 상실했을 때,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
또한 에스라와 느헤미아가 부적격한 제사장들을 몰아낼 때도 마찬가지였다(에스라 2:61-63, 느헤미아 7:63-65).
지도자의 실수
만일 우리의 목사나 지도자가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그것이 방법이나 프로그램, 혹은 특정한 가르침에 관한 것이라면, 우리는 겸손하게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각기 다른 의견과 확신을 가질 수 있으나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들을 존중하고 위해야 한다.
우리는 결코 비판하거나 불평, 분쟁을 조장해서는 안된다(3, 4장 참고).
만일 우리가 그러한 방법이나 프로그램을 바꾸기를 원한다면,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어떤 때는 적절한 태도로서 자신의 의견을 지도자에게 건의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만일 어떤 문제에 있어서 깊이 있게 참여하고 있지 않다면 최소한 방해가 되는 일을 하지 말라.
만약 지도자가 비도덕적으로 행동하거나 죄 가운데서 살거나 거짓된 교리를 전한다면, 우리는 그 문제를 지도자 위에 있는 사람에게 보고해서 그들이 문제를 처리하게 해야 한다.
앞에서 권위를 순복하는 것의 중요성을 설명했지만 지도력의 문제에 대하여 두 가지를 분명히 하고자 한다.
먼저, 지도자들은 올바른 태도와 적절한 권위를 통해서 교체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아무도 지도자의 잘못된 교리나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는 실수를 따라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도자가 그리스도를 따를 때라야만 그들을 따른다(고전 11:1, 갈 1:8 참고).
독립적 태도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모든 이들에게 권위를 허락하셨는가를 보았다.
심지어 천국열쇠를 가졌던 베드로조차도 교회의 권위에 순복했다.
이것은 독립적으로 나가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그렇다면, 누가 당신을 살피는가?
어떤 이들은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온전히 하나님의 명령만을 받고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사람은 필요치 않아"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진리를 전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가 당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디모데와 디도에게 보내진 편지에 의하면, 설교자의 특정한 자격 요건들이 있다.
예를 들자면, 자신의 가정을 돌아볼 수 없는 이는 목회자가 되거나 목회자의 자리를 유지할 수 없었다(딤전 3:4-5).
이러한 자격기준을 실행할 수 있는 권위는 꼭 필요하다.
타인과 협력해서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은 주의해서 자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 남들과는 일할 수 없는가?
왜 자신들의 생각만이 최고라고 생각하는가?
왜 항상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왜 독립적으로 되고자 하는가?
보통, 온순한 마음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많은 목사들이 자신의 성도들에게 권위에 순종하라고 강조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위의 권위에 순종하지 못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십일조를 요구하지만 그들은 누구에게 십일조를 내는가?
그들은 종종 성도들의 삶을 주관하려 하지만, 도대체 그들은 누구에게 조언과 지도를 받는가?
기억하라.
하나님께서 교회 내의 권위를 세우셨다.
이 교회 저 교회, 심지어는 이 교단 저 교단을 옮겨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공통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지도자를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혹은 교회내의 기준, 판단, 책망을 견디지 못하는 이들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들은 왜 자신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가지고 만족하지 못하는가 자신을 자세히 살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잘못된 것인가?
아니면 그들이 지도자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인가?
다시 말하지만, 특정 교단에 가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
그러한 모든 성도들이 교회에 속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이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히 10:25).
엡 4:11-16, 딤후 4:1-4, 히 13:17 및 다른 성경구절들을 보면, 각각의 교회들이 분명한 권위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지도력을 갖는 것은 하나님의 뜻인 것이 분명해 진다.
또한, 우리는 개개의 교회들이 더 큰 모임들과 연관을 가지고 교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다.
"보라 형제가 동거함이 어찌그리 아름다운고"(시 133:1).
대부분의 경우 교회나 교단을 옮겨 다니거나 자신의 고집만을 세우는 이들은 하나님께 반항하거나 자신의 뜻을 추구하는 이들이다.
만약 당신이 위에 언급한 성경구절들로 자신을 살폈고 그 후에도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느낀다면, 성경을 진실하게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찾아서 그들과 교제하고 함께 일하도록 하라.
모든 모임들은 교제를 가지게 되어 있고, 당신이 어떤 이들과 교제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8장 참고).
교회 안에서 신실한 이들과 또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이들과 교제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모임들 가운데 역사하고 계신다.
그러나 아직 온전한 진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과 아무런 분별없이 교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당신은 그들과 어느 정도까지는 함께 일하거나, 그들을 인도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그들의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과 너무 친근하게 교제하다보면 당신의 확신과 믿음이 약해지게 될 것이다.
독립적인 모임들에 자주 일어나는 일은, 다른 이들과의 교제를 너무 추구하다 보니 성결을 강조하지 않는 사람들과 교제하거나 기본 신앙이 불분명한 사람들과 교제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다른 교회에서 오는 이들을 그들을 담당했던 이전의 목사와 연락도 없이 받아들이게 될 수도 있다.
그것은 교회를 위선자나 불만을 가진 사람들 혹은 권위에 습관적으로 대항하는 사람들로 가득차게 할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홀로 떨어져 있는 모임이 거룩함과 교리적인 순수성을 잘 지키는 예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연합함에는 힘이 있다.
하나님의 권위를 우리의 삶에 받아들임으로 우리는 그분의 보호와 축복 그리고 인도하심을 받게 될 것이다.
연합함의 장점들
교회연합의 장점들은 위에 언급한 것들 말고도 또 있다고 믿는다.
신약 성경 안의 교회들도 그러한 이유들로 연합되었었다.
연합은 전도를 촉진시킨다.
힘을 합치면 일을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고, 서로 경제적인 도움도 줄 수가 있으며 서로의 재능도 나눌 수가 있다.
또한 연합은 신앙과 확신을 서로 격려하게 한다.
그것은 또한 선교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되며(초대교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또 개교회들이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지상명령을 수행함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수단이 된다.
연합은 사탄과 죄가 침투하지 못하게 막는데 좋은 방패가 된다.
초대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누가 믿을 만하고 누가 악한지 그리고 누가 진정한 선지자인지 아는데 도움이 된다.
우리는 신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알고 그들과 교제할 수 있다.
우리는 성결의 기준을 세우고 권위에 대한 성경의 말씀들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사용할 수 있다.
새로운 상황이나 중요한 결정을 내림에 있어서 우리는 함께 연합해서 사도행전 15장에 있었던 같은 결정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결정할 수 있다.
"모사가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잠 11:14)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9-12).
하나님께서는 교회 회중의 결정을 존중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의 뜻을 보이시기 위해서 그 방법을 사용하실 것이다(행 15:28).
이 장에서 강조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권위를 세우시는 데는 방법이 있어야 한다.
이 권위는 개인의 유익과 목회자 모두를 위해서 필요하다.
이것은 개교회를 하나님의 뜻 안에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방패막이다.
큰 모임 안에 있는 다양한 관점들-너무 편협한 견해나 너무 자유로운 사람들-이 전체가 균형을 이루도록 돕는다.
또한 사람들 전체가 활력을 얻고 또 전진하게 돕기도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와 지도력에 순종하도록 노력하자.
특히 목회자들이여!
자신을 돌아 보라.
목회자는 가장 좋은 본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직분은 깨끗하고 거룩해야 한다.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
누구도 권위 밖에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모든 이들은 필요할 때마다 충고와 격려, 경고와 책망으로 도움을 받아야 한다.
전체교회는 강한 지도력과 귀중한 진리를 세움으로 큰 힘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다스리는 것과…"(고전 12:28)
성결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우리는 이제 교회의 조직과 권위라는 주제에 대해서 몇 가지로 다루어 보고자 한다.
이 장을 소개하기 위한 몇 가지의 질문들이 여기에 있다.
교회에서 권위의 범위는 무엇인가?
교회는 성결의 기준을 세울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
교회는 성결의 기본적인 원칙들을 범하는 사람들과 교제를 끊도록 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
개개인의 사역자나 성도는 교회의 결정에 어느 정도까지 따라야 할 의무가 있는가?
모든 사람들은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자신들 위에 인간의 권위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성도들 상호간의 관계에 대해서 성결은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교회의 다스림은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졌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에 진정으로 권위와 조직을 세우셨다는 것을 확증함으로써 이 주제를 시작하고자 한다.
시작부터 우리는 교회란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의 계획을 체험하고 거룩하고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부르심을 받은 신자들의 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바이다.
그것은 인간적인 조직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러한 것에 제한되지도 않는다.
특정한 교파에 속한 회원이나 교인이라는 것이 구원의 필수조건이 될 수 없다.
또한 각 사람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주신 신념들과 상반되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거나 혹은 거짓 교리를 가르치는 리더십을 따라갈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의 조직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셨고 인정하셨다.
그리고 복음을 전파하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권위와 조직을 말할 때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 사이에 세우신 관계들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 회원이 되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서 세워진 조직화된 체계 안에서 활동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교회의 시작부터 하나님은 그의 교회 안에 조직을 가지셨다.
예수님은 열두 사도들을 택하시고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도록 훈련하셨다.
그리고 주님은 유다를 그 그룹의 첫 번째 재무 출납원으로 임명하셨다(요 13:29).
우리가 교회의 역사서인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우리는 조직을 위한 노력과 지도자에 대한 인준 및 통일성 있는 의사 결정과 상호 교제에 관한 많은 예들을 찾아볼 수 있다.
초대 교회의 조직
사도행전 1:l5∼26에 보면 초대 오순절 교회의 창립 멤버들이었던 l20여명의 신자들이 가룟 유다를 대신할 계승자를 뽑기 위해서 함께 모였다.
베드로가 그 모임의 의장이었다.
사도직을 위한 자격들이 정해지고 두 사람이 지명되었는데 결국 맛디아가 선택되었다.
성령 강림 후에 사람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
이것을 다른 말로하면 그들은 열두 사도들의(사람에 의해서 선택된 맛디아를 포함하여) 리더십을 인정하고 사도들의 교리적인 가르침과 교제의 방법들을 따랐다는 것을 말해준다.
게다가 그들은 교회 재정의 모금과 분배에 있어서도 사도들의 리더십을 인정했다.
사도행전 6장에서도 열두 사도들은 다시 한 번 모든 믿는 자들을 소집하고서 이번에는 교회의 사무를 처리할 체계를 조직했다.
그 모임은 사도들이 말씀을 전하는 것과 기도에 더 많은 시간을 헌신할 수 있도록 교회의 업무를 맡아서 섬길 일곱 집사들을 선택했다.
사도들은 먼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을 뽑도록 규정했다.
그리고 회중들이 일곱 사람들을 뽑고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를 위에 안수했다.
안수는 교회의 기본 교리들 중에 하나인데(히6:2),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빌 때나 병고침을 위해서 기도할 때나 혹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어떤 사람들을 따로 세울 때 시행되어졌다.
이 경우에서 안수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서 일곱집사들의 선택을 인정하시고 권위를 부여하셨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곱 집사들 중의 하나인 빌립은 후에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파했다.
그곳에서 부홍이 일어났을 때 사도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어 조사하고 감독하고 돕도록 하였다.
그 때부터 사마리아인들은 성령을 받기 시작했었다(행8:14-17)
사도행전 11장에서 우리는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이(리더십과 사역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 베드로를조사하기 위해서 소환한 것을 보게 된다.
베드로는 방금 이방인인 고넬료 가정에 복음을 전하였는데 유대에 있는 교회 지도자들은 베드로의 활동에 대한 자세한 보고를 듣기를 원했다.
그들은 베드로의 행동들이 정당한 근거가 있는지 아닌지를 알기를 원했다.
이 시점까지 베드로는 가장 두드러진 지도자로서 예수님으로부터 천 국 열쇠를 받았으며, 뿐만아니라 주님으로부터 고넬료 가정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직접적인 명령을 받았지만, 그는 여전히 교회의 권위에 복종했다.
그는 조사를 받았고 모임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비평도 들었으며 그리고 권위 안에서 이것들에 대한 답변을 하였다.
같은 장에서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에 보내어서 소문은 들었지만 아직 설립하지 않은 교회에 대해서 조사를 하게 하였다(행 11:22-30).
바나바의 임무는 그들에 관하여 알아보고 그들에게 가르침과 지도력(leadership)을 주는 것이었다.
바나바는 안디옥에 머물렀고 그 후에 바울을 그의 동역자로 데려 왔다.
또한 선지자들도 예루살렘에서 와서 그들을 도왔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의 필요를 위해서 모금을 하였고 그 헌금을 바나바와 바울의 손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에게 보내었다.
안디옥 교회는 성장하였고 그 교회 자체에서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일어났다.
하나님께서는 바나바와 바울올 선교사역으로 부르셨는데 이 부르심을 자신들뿐만 아니라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나타내셨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의 사역자들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안수하여 선교사들로 임명하였다(행 13:1-4).
그들은 선교를 나갔고 각처에 교회들을 세우고 그 교회들을 돌보도록 사역자들을 세웠다(행 14:23).
그 다음의 교회의 큰 회의는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다.
이때쯤 교회는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다.
교회는 이제 더 이상 예루살렘에 있는 지역 회중들이 아니라 온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이방 나라들에게까지 퍼졌다
교회의 첫 총회라고 불려질 수 있는 모임에 여러 교회들로부터 지도자들과 사역자들이 격렬한 쟁점이 되는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함께 모였다.
문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거기서 많은 변론과 논쟁이 있은 후 베드로는 바울과 바나바처럼 이방인들은 이러한 것들을 행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어떤 믿는 바리새인들은 반대적인 견해를 표명했다.
주님의 형제였던 야고보가 그 회의의 의장이었는데 그가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자 그 총회의 대다수가 그 결정을 지지하였다.
결정이 내려진 후 그 결과를 받아들이고 연합한 전 교회는 지역교회들과 교리적인 선언을 교통하기 위한 대표자들을 선택하였다.
분명한 것은 초대교회는 모세의 율법에 관하여 이방인들을 속박하고 있던 것을 결정할 권위를 실행했다는 것이다.
특별히 그들은 이방인들이 지켜야할 네 가지의 것들을 결정하면서 이렇게 권고하였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행 15:28-29).
이 모임 후에 바울은 사도행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부각된다.
비록 그의 입장이 충분히 변호되었지만 바울은 그의 3차 선교여행 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야고보와 예루살렘의 다른 지도자들에게 완전한 보고를 하였다.
그들은 그의 보고를 듣고 기뻐하였으나 유대인 기독교 공동체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어떤 유대인 서원자들을 바울이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도록 충고하였다.
그는 그들의 권위에 대한 순종과 연합을 조성하기 위해 서 그들의 충고를 따랐다(행 21:18-26).
서신서들에서 우리는 상호교제와 사역의 원칙들에 대한 확립과 헌금을 모금할 목적으로 건전하고 밀접한 조직에 대한 더 많은 증거들을 보게된다.
야고보와 베드로 그리고 요한은 기둥들이었고 전 교회를 다스리는 지도자들(general leaders)이었다(갈 2:9).
이러한 사실도 바울이 베드로와 다른 사람들의 외식과 거짓교리에 대해서 책망하는 것을 막지는 못하였다(갈 2:11-14).
베드로의 잘못은 사도행정 15장에서 교회가 내련 결정에 역행하는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그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바울은 그의 전도 여행을 통해 설립된 수많은 교회들의 감독자였으며 그는 그들에게 편지를 써서 교훈과 격려와 경고를 하였다.
그는 또한 디모데와 디도같은 사람들을 자기 밑에서 동역할 감독자와 사역자들로 임명하였다.
디도는 그레데의 감독자로 임명되었는데 그 지역에 사역자들을 임명하는(ordaining) 책임을 부여받았다(딛 1:5).
바울은 이 두 사역자들이 각자의 지역에서 조직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그들에게 설교자들(preachers)이 되기 위한 자격 조건들을 제시하여 주었다(딤전 3:1-7, 딛 1:5-16).
바울은 이 두 구절에서 사역자(minister)와 목사 (pastor)를 의미하는 감독(bishop) 혹은 장로(elder)라는 용어를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또한 집사들을 위한 자격들을 주었다(딤전 3:8-13).
우리는 또다시 바울이 디도와 다른 형제를 위한 추천서(recommendation)를 보낸 것을 보게되는데 이들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을 모으기 위해 여러교회들에 보냄을 받았었다(고후 8:16-24).
바울은 매 주일마다 연보를 하는 체계(system)를 세웠는데, 그래서 누군가 그 헌금을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갈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라고 편지로 권면하였다(고전 16:1-3).
사도요한도 또한 데메드리오라는 전도자(evangelist)를 위한 추천의 편지(letter of recommendation)를 보냈다.
같은 편지에서 그는 교회가 디오드레베를 복음의 사역자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경고를 보냈다(요삼 9-12).
예수님과 바울은 교회 안에서 논쟁을 진정시키고, 죄인을 판단하고, 필요하다면 절교(disfellowshipping)내지 출교(excommunicating)하는 절차를 말씀하셨다(마 18:15∼18, 고전 5:1∼13).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경고를 했다(행 20:28-30).
그리고 에베소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거짓 사도들을 시험하여 분별해 내도록 명령을 받았다(계 2:2).
이 모든 성경말씀들은 교회들 사이에서 밀접한 협력 관계가 있었고 문제들을 조정하는 방법들이 있었다는 것을 밝히 보여 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거기에는 분명하게 규정된 권위의 질서(lline of authority)가 있었다.
첫째로 지역교회(local church)에 대한 책임을 맡고 있는 장로들(지교회의 목사들이나 부교역자들)이 있었고 그리고 지역교회의 업무를 도와주는 집사들이 있었다.
그 다음에 여러 교회의 그룹들이나 여러 지역들에 대한 책임을 맡고 있는 감독들(overseers) 이 있었는데, 그레데에 보내진 디도와 같은 경우이다.
여기서 보면 바울은 디도의 위에 있으며 그가 설립한 많은 교회들을 감독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특별한 사역은 이방인들을 복음화하도록 전도자들(missionary)을 지도하는 것이었으며 이와 같이 베드로는 유대인들을 복음화하도록 지도하였다(갈 2:7-8).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주 대변인(majorspokesman)이며 대표자(representative)였던 것 같다.
반면에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최고지도자(chief leader)였던 것 같다.
그러므로 개 교회와 각 사역자는 권위에 있어서 자기 위에 더 높은 누군가의 보호 아래 있었다.
심지어 베드로나 바울과 같은 최고 권위의 지도자들도 서로 권면하였고 총회로서의 교회의 권위에 복종하였다.
이 두 지도자들은 사역의 보고를 하였고 예루살렘에 모인 사역자들의 모임에서 충고를 받아들였다.
이것은 교회행정이 개인적인 지위나 위치를 능가함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하나님이 주신 직분이지만 교회 행정(church government)을 대신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리더십의 권위(The authority of leadership)
성경은 교회 안에서의 리더십의 권위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고 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살전 5:12-13).
여기에서 이 말씀들이 개 교회(local churches)안에서와 마찬가지로 교회들 사이의 권위 구조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주의해 보라.
또한 우리는 지도자들의 특성을 알아야 한다는 것도 주의해 보기 바란다.
우리는 권위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이 하는 일 때문에 그들을 존경해야 한다.
우리는 사람에 대해서 존경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직분 때문에 존경하거나 두려워 해야한다.
권위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를 존경하는 것이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롬 13:1, 2-7).
이 말씀은 사역자들과 성도들 사이에 뿐만 아니라 교회와 세상권세(civil matters)에도 적용된다.
물론 어떤 사람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의 직분에서 해임하는 합법적인 방법들도 있으나 우리는 이런 문제들은 차후에 다룰 것이다.
여기에 권위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존경해야 하는 필요성에 대한 다른 말씀이 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딤전 5:17).
교회 안에 리더십을 두는 목적은 "성도를 온전케하며 봉사의 일(the work of the ministry)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의 말씀으로 요약된다(엡 4:11, 12).
사역자가 해야 할 일은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여 경계하며 권하는"일이다(딤후 4:2).
권위의 목소리에 주의를 하지 않는 성도들이나 목회자들까지도 이들은 위험한 위치에 있게 된다.
유다서 8절에서 유다는 "권위(dominion)를 업신여기며 영광(dignitities)을 훼방하는" 사람들은 배교자들(apostates)이라고 말하고 있다.
베드로도 또한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 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그러나 이 사람들은…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벧후 2:10-13).
말세의 징조들 중에 하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가 가정에서, 사회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도전을 받아 실추되는 것이다(딤후 3:2, 8).
요약
이 모든 것들로부터 우리는 어떤 결론을 얻을 수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다스림을 두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전 12:28).
하나님은 그의 교회에 5중의 사역을 주셨다(엡 4:11).
교회 안에는 예언과 섬 김(minister)과 권위(exhort)와 그리고 '다스림(rule)'이라는 여러 가지의 다른 직분들이 있다.
이 다스림 곧 행정은 개교회(local church) 안에서 존재할뿐만 아니라 개교회 차원을 넘어서도 존재한다.
우리는 신약교회가 많은 목적들을 성취하기 위해서 조직이 있었다는 것을 보았다.
교회는 지역교회의 회중들을 조사하기 위해서 사역자들을 보냈고, 새로운 교회들을 설립하기 위해서 선교사들을 보냈으며, 사역자들을 보내어서 지역교회의 성도들을(local congregations) 조사하고 교리적인 논쟁들을 해결해 주며 현금을 모금하도록 하였다.
교회는 또한 인정된 전도자들을 위한 추천의 편지를 보내고, 교회 안의 죄인들을 출교하고, 지역교회들에게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서 경고하고, 거짓 선지자들을 정죄하였다.
우리가 본대로 교회는 때때로 일어나는 새로운 문제들에 대한 결정을 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신약교회는 사도행전 15장에서 총회를 통하여 이방인 신자들(Gentile believers)을 위한 성결의 기준을 확립하였다.
교회는 역시 사도들과 선교사들과 사역자들 및 집사들을 위한 자격들을 제시하고 이 직분들에 합당한 적임자들을 뽑았다.
예수님께서 이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명백하게 언급을 하시지는 않았다는 것을 주의하라.
어떤 한 사람이 이 새로운 문제들에 대한 결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교회가 결정을 만들고 이것들을 선포하였다.
우리시대에도 교회는 여전히 새로운 성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권위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의 상황들을 고려하여 성결을 더 명확하게 정의를 내릴 권위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교회는 흡연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고 그 권위를 유효하게 실행해 오고 있다.
교회내의 심판(Judgement)
특별한 경우에 있어서 교회는 개개인을 심판할 권위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사람이나 그의 행동, 그리고 그의 신념들에 대해서 판단하지는 않는다(마 7:1, 롬 14:10, 약 4:12).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예언조차도 판단하고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했나를 시험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전 14:29, 요일 4:1).
전 교회적으로 연관된 문제에 있어서는 예수님과 바울은 성도들 사이 의 논쟁에 대하여 심판을 위한 절차를 말씀하셨다.
요약해서 말하면 한 개인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심판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만 교회는 성도들 사이의 문제와 교회 안의 회개하지 않은 죄를 심판할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마태복음 18:15-18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심판의 절차들을 살펴보자.
1.만약 두 성도들이 그들 사이에 문제를 가지고 있다면,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당사자가 개인적으로 상대방에게 가서 그것을 해결하도록 해야한다.
물론 어떤 형제가 자기에 대해서 적대시하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한성도가 알았다면 그는 모든 것을 그만두고 그에게 가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 후에야 그는 제단에 가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수 있다(마 5:23-24).
2.만약 문제 해결을 위한 시도가 잘되지 않았을 때, 그 괴로움을 당하는 당사자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인들을 그와 함께 데리고 가서 그 상대방과 그 문제를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3.만약에 범죄한 사람이 여전히 문제를 바르게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때에는 그 문제를 교회 앞에 가지고 와야 한다.
이것은 이 문제가 이제는 교회의 지도자들 곧 목사와 제직들에게 넘겨지고 그들에 의해서 다루어져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 문제를 심판할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4.만약 범죄한 그 사람이 교회의 판결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는 출교를 당하고 이방인처럼 간주된다.
위의 구절 중 18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교회의 결정과 지도력을 존중하신다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정직하고 공명하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결정을 자신의 결정으로 받아들이시고 그것을 시행하실 것이다.
이것은 교인들이 교회의 결정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교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는 이방인으로 간주될 것이다.
송사(訟事)
이상의 절차들은 교회 내에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올바른 방법이다.
성도들은 세상 법 아래서 다른 성도들을 고소할 수 없다(고전 6:1-8).
그 이유는 성도들이 천사들을 판단할 것이며 천년왕국에서 심판하 도록 훈련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우리가 지금 교회 내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면 어떻게 천사들과 오는 세상을 심판할 수 있겠는가?
그뿐만이 아니라 교회 내의 문제로 세상 법에 의존하는 것은 불신자들 앞에서 나쁜 본보기를 남기게 된다.
세상의 눈앞에 교회분쟁에 대한 모습을 제시하는 것보다 차라리 속는 것이 낫다.
이 말씀은 세상에서 잘못을 범한 사람에 대한 송사를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이유들은 그러한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관용하고 보복하지 마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마 5:38-42).
예를 든다면 자동차 사고상의 손해로 불신자를 송사하는 것이나 혹은 종교적 자유와 같은 합법적인 권리를 변호하기 위하여 법정에 가는 것들은 괜찮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회개하지 않고 교회의 심판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출교를 당하고 이방인으로 간주될 것이다.
이 시점에서는 그는 더 이상 교회 안의 성도가 아니라 세상 죄인인 것이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상 법정에 가는 것이 적절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교회의 직원이 교회의 재산을 자신의 명의로 넣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두세 명의 교회의 대표자들이 그에게로 가서 그를 만나야 할 것이다.
만약 그가 그 서류들을 사실대로 바꾸기를 거절한다면 그 교회의 목사와 제직들은 그 문제를 심판해야 한다.
만약 그가 여전히 거절한다면 그는 공식적으로 출료를 당하게 된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그 사람에게 그의 죄의 심각성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고, 교회를 죄에서 깨끗하게 하기 위함이며 또한 세상의 눈에서 그를 교회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함이다.
이후에 교회는 그 사람을 이방인으로서 다루게 되기 때문에 그를 세상 법정에 데리고 갈 수가 있다.
출교(Disfellowshipping)
우리는 방금 출교에 대한 한가지 이유를 언급하였는데, 그것은 교회의 심판에 복종하기를 거절하는 것이었다.
고린도전서 5:1∼13에서 바울은 다른 정당한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이것들은 8장에서 더 자세히 다루었었다).
바울이 가르침을 준 고린도 교회의 특별한 문제는 교회 내에 있는 어떤 사람이 근친상간의 죄를 범한 것에 대한 것이었다.
그 교회는 영적인 은사들로 인해서 매우 교만해졌었고 그래서 이 죄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바울은 그 죄를 심판하여 그 범죄자를 물리치지 않은 것에 대해 그들을 강하게 책망하였다.
이러한 경우에 올바른 절차는 그 죄인을 출교하는 것이다.
그는 세상 곧 사탄의 왕국에 보내어지게 된다.
이것을 공개적으로 함으로써, 그 사람은 충격을 받아 회개에 이르게 될 수도 있다.
또한 그는 사탄의 손에서 어느 정도 고통을 받아 회개하고 교회에 되돌아오기를 원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 출교를 당한 결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는 희망이 있게 된다.
그러나 그 사람의 죄가 덮여지고 무시된다면 그는 결코 회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바울은 이런 류의 심판을 형제라고 일컬음을 받으면서 음행하는 자나 탐하는자, 우상숭배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 그리고 술취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에게 확대시키고 있다.
바울은 성도들이 이런 자들과는 사귀지도 말고 함께 먹지도 말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교회의 규율이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명백한 말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행한다.
교회가 어떤 사람을 죄 때문에 출교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 가서 그와 함께 교제한다.
우리는 나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와 함께 시내를 돌아다니고 그리고 그를 위로한다.
이럴 때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그 사람이 더욱 거역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돕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사람 안에 있는 반역적이고 부정한 영과 절교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영은 쉽게 우리에게 그와 같이 되도록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한번은, 어떤 사역자가 자기가 목회하고 있는 마을에서 술에 취하게 된 일과 여러 명의 소녀들과 부도덕한 교제에 빠진 일로 출교를 당하였다.
몇 개월 후, 그는 다른 지역으로 가서 설교하기 시작하였고 부흥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회개에 대한 어떤 증거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를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글쎄요. 하여튼 그분은 목사님입니다"라고 하면서 그를 도우러 갔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된다.
어떻게 우리가 성경이 말씀하는 관점에 의해서 출교를 당하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과 교제할 수 있는가?
어떻게 사역자의 자격을 상실한 사람의 사역을 도울 수가 있는가?
근신(謹身)
어떤 사람을 근신하게 하는 것과 출교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이 잘못을 저지른 후 그러나 회개를 한다면, 그는 교회 안에서 직분을 위한 자격을 상실할 수 있다.
이 경우에 그의 직분은 일시적으로 혹은 영구히 빼앗기게 된다.
이와 비슷하게 교회 안에서 두드러지게 쓰임을 받고 있는 어떤 사람도 얼마동안 그의 직분을 부분적으로 혹은 전부를 빼앗기게 된다.
이것을 근신(silencing)이라고 부른다.
성경은 지도자들이 가져야 할 자격들을 열거하고 있는데, 그러므로 지도자가 그의 자격들을 잃어버리면 당연히 그의 직분에서 물러나든가 아니면 성경적인 자격들을 다시 얻을 때까지 근신해야 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출교는 죄를 범한 어떤 사람이 그 죄를 인정하거나 회개하기를 거절하고, 교회의 심판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에게 해당된다.
이런 사람은 이방인으로 간주된다.
개교회의 사역자도 만약 그가 죄를 범하고 회개할 때는 일정 기간 근신에 처해질 수 있다.
이러한 종류의 징벌은 그가 일정한 기간을 통해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선한 이름을 잃게 되는 경우에도 또한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교회의 이름을 더헙히거나, 그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교회 안에서 사용된다면 다른 이들에게 거치는 반석이 될 수도 있다.
만일 근신을 받은 사람이 자신의 죄를 정말로 뉘우친다면 그는 다른 교회나 모임으로 자신의 적을 옮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벌을 달갑게 여기고 자신이 속한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길 것이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 12:11).
징계의 과정은 그 사람이 회개했는가 안했는가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 사람이 자신이 신실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인내와 겸손함을 가지고 있는가도 함께 보이게 된다.
만약 그가 인내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참을성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만일 목회자가, 자신의 지위를 잃을 만큼 큰 죄를 범하지 않는다면, 그는 근신의 징계를 받거나 그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지도자에 의해서 유예기간을 받게 될 수 있다.
그가 그 기간동안 신실한 믿음을 지킨다면, 그 목회자는 완전히 복권되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그로부터 거두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교회 안의 지도력은 지도자의 자질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권위를 행사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는 것일 뿐이고 우리는 그들을 경멸해서는 안된다.
많은 경우에 교회의 장로들이나 교단의 지도자들은 그들이 징계한 이들이 떠드는 이야기와 행동들에 의해서 상처를 받는다.
그들은 죄를 인정하거나 용납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들의 친한 친구들에게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목회자는 자신의 목회를 영원히 잃을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그가 한 아내의 남편이 아니거나 혹은 간음과 같은 죄를 계속 범함으로서 그가 속한 사회에서 좋은 평판을 잃을 경우이다(딤전 3:1-7).
그는 아직도 회개하고 성도로서 받아들여 질 수는 있다.
그러나 그는 단지 개교회에서 일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한 경우가 많이 있다.
그들은 다른 교단으로 교직을 옮김으로서 자신의 목회를 다시 세우려 하지 않고, 자신의 개교회에서 신실하고 충성된 일군이 되었다.
개인이 어떻게 느끼는가와는 상관없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자신의 의지를 내세우거나 불순종하거나 죄를 짓지 않도록 하자.
만약 우리가 잘못을 범한다면, 교회의 목사와 지도자들의 벌을 달게 받도록 하자.
회개하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더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자.
공개적 책망
공개적으로 누구를 책망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가?
일반적으로, 가르칠 때는 전체적으로 가르치고 개인의 문제를 다룰 때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하는 것이 가장 좋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지명해서 책망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덕이 못된다.
그러나, 죄를 지은 사람이 공개적으로 꾸짖음을 받아서 다른 이들이 배우게 해야 할 경우도 있다.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딤전 5:20).
이것은 잘못을 범하거나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사람을 항상 공개적으로 꾸짖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갈라디아서 6:1은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또한 목회자나 혹은 누구든지 사적으로 화를 내거나 원망하거나 하는 것이 적합치 않다는 것을 배웠다.
공개적인 책망은 공개적으로 죄를 짖고 또 반항적인 이들을 위한 것이다.
만일 성도가 파문되거나 회개하지 않고 파문되기 직전의 상황까지 간다면 공개적인 책망을 하는 것이 적절한 일일 것이다.
만약 어떤 이가 교회를 갈라지게 한다거나 하나님의 역사를 막는다면, 공개적인 꾸짖음은 적절한 것이다.
공개적인 책망은 죄를 지은 성도가 회개했을 때 사용하는 방법이 아니다.
필요시에 그는 근신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목회자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숙고하지 않았거나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지 못했다면 공개적인 책망을 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종류의 사역은 꼭 필요한 것이며 또 중요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아주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반항적인 경우가 많으며 또 돌이키지 않을 경우가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족적인 연대와 개인적인 감정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책망과 견책은 디모데후서 4장 2절을 보면, 목회의 일부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요 16:8을 보라.
하나님의 성령이 세상의 죄를 제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견책"은 시험하다, 검사하다, 확신하다, 따지다, 노출시키다 그리고 견책된 사람을 부끄럽게 하다라는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뜻들이 나타내는 것처럼, 견책은 때때로는 공개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이루어진다.
죄를 공개적이거나 개인적으로 책망하는 것 말고도, 교회 예배에 혼란을 부를 이들을 책망해야 할 필요도 있다.
이것은 예배의 순서를 바꿈으로 해결될 수도 있다.
하지만 때때로 질서가 없는 사람은 예배 인도의 위치에서 빠져야 할 경우도 있다.
목회자로서의 감독은 이러한 것들을 정리해서 예배가 정숙하고 질서 가운데 이루어지게 할 권리가 있다(고전 14:33, 40).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성경 말씀을 따라서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이루어 질 수 있도록 확실히 해야 한다.
예를 들자면, 한 예배에서는 세 가지 이상의 방언과 통변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좋다.
그리고 인도자는 가르침이 잘 지켜지는가를 살펴야 한다(고전 14:27-29).
책망은 교회의 심판이나 출교와 긴밀한 연관이 있으며 또 그것들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그 목적은 교회를 죄와 반항으로부터 깨끗케 하고 모든 믿는 자들이 배우게 하기 위함이다.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대상 16:22).
이것은 권위에 대한 아주 중요한 성경구절이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가르쳐 준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직위를 존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사람이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의 직위를 이용해 뜻을 이루셨다.
하나님은 이방의 왕 키로스를 세우셔서 그분의 뜻을 이루셨다(사 44:28-45:3).
그리고 그분은 이집트의 왕 느브를 세우셔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다(대하 35:20-24).
하나님께서는 예언의 영을 타락한 왕 사울에게 보내셨다(삼상 19:23-24).
특히 하나님께서는 가야바가 당시 가지고 있던 대 제사장의 직분 때문에 그로 예언의 말을 하게 하셨다.
가야바는 사실 예수님을 죽이려고 계획하였던 것이지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을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서 당신의 뜻을 말씀하셨다(요 11:49-52).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직위 때문에 이러한 악한 자들을 사용하셨다면, 얼마나 더-우리가 그들이 잘못하고 있다고 오해할지라도-신실하고 정직한 그분의 사역자들능 사용하실 것인가?
둘째로, 이 성경구절은 하나님께서 직위를 옮기시기 전에는 결코 개인이 지도자에 대해서 행동을 취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이 부르신 지도자를 몰아내기 위해 계획하거나 반항하는 것은 성경적인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형과 누나인 아론과 미리암의 불평, 고라의 반역을 용납하지 않으시고 모세의 권위를 세우셨다.
심지어 지도자가 실수를 하고 잘못을 범할 지라도, 그 권위 아래에 있는 개인이 대항한다는 것은 정말로 위험한 일이다.
사울이 타락하고 사무엘이 다윗을 다음 왕으로 세웠을 때에도 다윗은 사울을 대적하지 않았다.
시기로 가득한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다윗은-마치 하나님의 뜻처럼 보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사울을 해칠 수 있는 기회에 그를 살려 보냈다.
사울이 왕인 이상에는, 다윗은 그의 직위와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사실은 존중했다.
당신이 아무리 자신을 합리화하려 해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위에 세우신 권위를 비난하거나 대항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아무튼, 어떤 지도자들은 이 성경구절은 자신의 독재를 합리화하기 위한 구실로 사용한다.
그들은 자신들 또한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모든 이들은 권위에 순복해야 한다.
초대 교회가 바로 그러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순복하라"(롬 13:1).
그러한 관점에서 왕상 2:13-27의 말씀을 읽어 보라.
솔로몬은 다윗의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하나님의 세우심을 받았다.
그의 이복형인 아도니아는 자신이 왕이 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결국 솔로몬이 기름부음을 받았다.
아도니아는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압 장군과 더불어 자신의 계획을 계속 추진했다.
특히, 그는 다윗의 첩을 자신의 첩으로 삼고자 했다.
그 당시의 관습은 왕이 죽은 후 첩은 그냥 과부로 지내든지 아니면 후계자의 첩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도니아는 사람들의 눈에 다윗 왕의 후계자로 보이고 싶어했던 것이다.
솔로몬은 그것을 알아차리고 아도니아와 요압을 처형했다.
그는 또한 아비아달의 제사장직을 취하였으나 그를 죽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이전에 하나님께 제사하고 다윗 왕을 도왔었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그와 그의 직위를 존중했으나 그의 직위는 해제했다.
그는 존경심과 함께 심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비아달이 자신의 반역으로 인해서 제사장의 자격을 잃었고, 그에 따라 솔로몬이 아비아달의 제사장직을 해제할 권위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택하신 지도자였고, 아비아달을 심판할 권위가 있었다.
어떤 이들은 목회자가 근신이나, 파문이나, 혹은 다른 심판을 받는다면, 교회는 앞의 구절들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부르심과 기름 부으심을 훼방하는 것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권위를 가진 이들은 심판할 권리를 가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취하는 것이 아니고, 잘못을 범한 사람이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서 자격을 상실하는 것일 뿐이다.
사실상,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특정한 죄를 용인하는 것 때문에 그들을 책망했다.
그는 '너희를 판단할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다.
만일 없다면 어떻게 후에 세상을 판단할 것이냐고 물었다(고전 5:1-13, 6:1-5).
어떤 사람이 교회내의 직위로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해서, 그 직위를 잃게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개인도 직위를 빼앗으려고 시도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사실이나,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그것을 행할 권위를 허락하셨다.
그렇지 않으면 왜 하나님께서 목사와 집사의 자격에 대한 기준을 주셨겠는가?
하나님 스스로 교회 안에 권위를 세우셨다(고전 12:28).
그리고 지도자도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롬 12:8).
만일 그 권위가 전혀 무기력하고 지도력이 발휘될 수 없다면 왜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하셨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과 인도하심을 따라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분의 뜻과 시간을 특정한 상황 가운데서 보이셨다고 믿는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이미 성경에, 지도자가 죄를 범하고 성경에 언급된 자격들을 잃는다면, 그의 위에 있는 권위자가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것을 언급하셨다.
교회의 성도들은 권위에 대항해서는 안되나, 그 위에 있는 권위에 그것을 말해야 하고, 위의 권위에 있는 사람은 그 사건을 판단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라는 말은 목회자가 아무런 제한없이 독재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 말씀은 아비아달이 반역으로 자신의 자격을 상실했을 때,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
또한 에스라와 느헤미아가 부적격한 제사장들을 몰아낼 때도 마찬가지였다(에스라 2:61-63, 느헤미아 7:63-65).
지도자의 실수
만일 우리의 목사나 지도자가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그것이 방법이나 프로그램, 혹은 특정한 가르침에 관한 것이라면, 우리는 겸손하게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각기 다른 의견과 확신을 가질 수 있으나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들을 존중하고 위해야 한다.
우리는 결코 비판하거나 불평, 분쟁을 조장해서는 안된다(3, 4장 참고).
만일 우리가 그러한 방법이나 프로그램을 바꾸기를 원한다면,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어떤 때는 적절한 태도로서 자신의 의견을 지도자에게 건의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만일 어떤 문제에 있어서 깊이 있게 참여하고 있지 않다면 최소한 방해가 되는 일을 하지 말라.
만약 지도자가 비도덕적으로 행동하거나 죄 가운데서 살거나 거짓된 교리를 전한다면, 우리는 그 문제를 지도자 위에 있는 사람에게 보고해서 그들이 문제를 처리하게 해야 한다.
앞에서 권위를 순복하는 것의 중요성을 설명했지만 지도력의 문제에 대하여 두 가지를 분명히 하고자 한다.
먼저, 지도자들은 올바른 태도와 적절한 권위를 통해서 교체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아무도 지도자의 잘못된 교리나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는 실수를 따라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도자가 그리스도를 따를 때라야만 그들을 따른다(고전 11:1, 갈 1:8 참고).
독립적 태도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모든 이들에게 권위를 허락하셨는가를 보았다.
심지어 천국열쇠를 가졌던 베드로조차도 교회의 권위에 순복했다.
이것은 독립적으로 나가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그렇다면, 누가 당신을 살피는가?
어떤 이들은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온전히 하나님의 명령만을 받고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사람은 필요치 않아"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진리를 전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가 당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디모데와 디도에게 보내진 편지에 의하면, 설교자의 특정한 자격 요건들이 있다.
예를 들자면, 자신의 가정을 돌아볼 수 없는 이는 목회자가 되거나 목회자의 자리를 유지할 수 없었다(딤전 3:4-5).
이러한 자격기준을 실행할 수 있는 권위는 꼭 필요하다.
타인과 협력해서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은 주의해서 자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 남들과는 일할 수 없는가?
왜 자신들의 생각만이 최고라고 생각하는가?
왜 항상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왜 독립적으로 되고자 하는가?
보통, 온순한 마음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많은 목사들이 자신의 성도들에게 권위에 순종하라고 강조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위의 권위에 순종하지 못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십일조를 요구하지만 그들은 누구에게 십일조를 내는가?
그들은 종종 성도들의 삶을 주관하려 하지만, 도대체 그들은 누구에게 조언과 지도를 받는가?
기억하라.
하나님께서 교회 내의 권위를 세우셨다.
이 교회 저 교회, 심지어는 이 교단 저 교단을 옮겨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공통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지도자를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혹은 교회내의 기준, 판단, 책망을 견디지 못하는 이들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들은 왜 자신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가지고 만족하지 못하는가 자신을 자세히 살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잘못된 것인가?
아니면 그들이 지도자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인가?
다시 말하지만, 특정 교단에 가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
그러한 모든 성도들이 교회에 속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이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히 10:25).
엡 4:11-16, 딤후 4:1-4, 히 13:17 및 다른 성경구절들을 보면, 각각의 교회들이 분명한 권위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지도력을 갖는 것은 하나님의 뜻인 것이 분명해 진다.
또한, 우리는 개개의 교회들이 더 큰 모임들과 연관을 가지고 교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다.
"보라 형제가 동거함이 어찌그리 아름다운고"(시 133:1).
대부분의 경우 교회나 교단을 옮겨 다니거나 자신의 고집만을 세우는 이들은 하나님께 반항하거나 자신의 뜻을 추구하는 이들이다.
만약 당신이 위에 언급한 성경구절들로 자신을 살폈고 그 후에도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느낀다면, 성경을 진실하게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찾아서 그들과 교제하고 함께 일하도록 하라.
모든 모임들은 교제를 가지게 되어 있고, 당신이 어떤 이들과 교제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8장 참고).
교회 안에서 신실한 이들과 또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이들과 교제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모임들 가운데 역사하고 계신다.
그러나 아직 온전한 진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과 아무런 분별없이 교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당신은 그들과 어느 정도까지는 함께 일하거나, 그들을 인도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그들의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과 너무 친근하게 교제하다보면 당신의 확신과 믿음이 약해지게 될 것이다.
독립적인 모임들에 자주 일어나는 일은, 다른 이들과의 교제를 너무 추구하다 보니 성결을 강조하지 않는 사람들과 교제하거나 기본 신앙이 불분명한 사람들과 교제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다른 교회에서 오는 이들을 그들을 담당했던 이전의 목사와 연락도 없이 받아들이게 될 수도 있다.
그것은 교회를 위선자나 불만을 가진 사람들 혹은 권위에 습관적으로 대항하는 사람들로 가득차게 할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홀로 떨어져 있는 모임이 거룩함과 교리적인 순수성을 잘 지키는 예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연합함에는 힘이 있다.
하나님의 권위를 우리의 삶에 받아들임으로 우리는 그분의 보호와 축복 그리고 인도하심을 받게 될 것이다.
연합함의 장점들
교회연합의 장점들은 위에 언급한 것들 말고도 또 있다고 믿는다.
신약 성경 안의 교회들도 그러한 이유들로 연합되었었다.
연합은 전도를 촉진시킨다.
힘을 합치면 일을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고, 서로 경제적인 도움도 줄 수가 있으며 서로의 재능도 나눌 수가 있다.
또한 연합은 신앙과 확신을 서로 격려하게 한다.
그것은 또한 선교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되며(초대교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또 개교회들이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지상명령을 수행함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수단이 된다.
연합은 사탄과 죄가 침투하지 못하게 막는데 좋은 방패가 된다.
초대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누가 믿을 만하고 누가 악한지 그리고 누가 진정한 선지자인지 아는데 도움이 된다.
우리는 신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알고 그들과 교제할 수 있다.
우리는 성결의 기준을 세우고 권위에 대한 성경의 말씀들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사용할 수 있다.
새로운 상황이나 중요한 결정을 내림에 있어서 우리는 함께 연합해서 사도행전 15장에 있었던 같은 결정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결정할 수 있다.
"모사가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잠 11:14)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9-12).
하나님께서는 교회 회중의 결정을 존중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의 뜻을 보이시기 위해서 그 방법을 사용하실 것이다(행 15:28).
이 장에서 강조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권위를 세우시는 데는 방법이 있어야 한다.
이 권위는 개인의 유익과 목회자 모두를 위해서 필요하다.
이것은 개교회를 하나님의 뜻 안에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방패막이다.
큰 모임 안에 있는 다양한 관점들-너무 편협한 견해나 너무 자유로운 사람들-이 전체가 균형을 이루도록 돕는다.
또한 사람들 전체가 활력을 얻고 또 전진하게 돕기도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와 지도력에 순종하도록 노력하자.
특히 목회자들이여!
자신을 돌아 보라.
목회자는 가장 좋은 본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직분은 깨끗하고 거룩해야 한다.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
누구도 권위 밖에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모든 이들은 필요할 때마다 충고와 격려, 경고와 책망으로 도움을 받아야 한다.
전체교회는 강한 지도력과 귀중한 진리를 세움으로 큰 힘을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