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Spirit of The God of Two Testaments
제5장
성령
1. 요한1서 5장 7절이란?
요한1서 5장 7절이 신의 물음에 대하여 증명을 해주는 본문으로 종종 사용되어지고 있으므로 지금 이 귀절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킹 제임스 역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
“하늘에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라. 또한 이 셋은 하나이니라.”
어떻게 이와 같은 번역이 나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알아보아야 확실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귀절은 다른 영어 번역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어 원본을 사용해서 번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311년에 킹 제임스 역을 번역하면서 학자들은 그 전에 출판되었던 에라스무스(Erasmus)의 그리스어 본문을 주로 사용했다. 에라스무스가 그리스어 신약성경의 초판을 출판했을 때 그에게는 혹독한 비판이 가해졌다. 그 비판이 지금 문제로 삼고 있는 이 귀절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다.
다음은 한 유명한 학자가 이에 관련된 이야기를 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그가 한 말은 우리의 관심을 끌만한 것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는 본문 비평에 있어서 뛰어난 학자이며 동시에 그 자신이 삼위일체의 신봉자이기 때문이다. 메츠거 교수의 말을 들어 보자 :
에라스무스에게 가한 비평 가운데 가장 심한 것 중의 하나는 스투니카(Stunica)의 것이다. 그의 본문은 다음과 같은 요한1서 마지막 장의 일부분이 빠져 있다. “아버지, 말씀, 성령 : 이 셋은 하나입니다. 또한 땅에도 증언자가 셋 있읍니다”(요 1:7-8).
에라스무스는 자신이 처음에 의존했던 원본 외에 다른 몇 개를 조사해 보았으나 이런 귀절들이 있는 그리스어 사본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그는 만약 그리스어 사본이 하나라도 발견된다면 개정판에는 이 부분을 삽입하겠다고 약속했다.
마침내 그와 같은 사본이 발견되었다. 1520년에 프란시스코 수도사인 후로이(Froy or Roy)라는 사람이 옥스퍼드에서 펴낸 그리스어 사본에 나타나 있다. 이것은 라틴어 번역 성경에서 그 귀절을 따온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약속대로 제3판(1522)에 이 귀절을 삽입했다.
그러나 그는 이 귀절을 논박하기 위해 넣었으며 아직도 확실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그의 의심을 주해에다 명시했다.
에라스무스 시대 이후에 나온 수많은 그리스어 신약성경 사본을 조사해 보면 그 가운데 단지 세 곳에서만 이와 비슷한 귀절이 나와 있다. 하나는 17세기 필체로 여백에 쓰여져 있는 12세기 사본인 “그레그”(Greg‧88)이다. 다른 하나는 컴프루텐시안 폴리그로트 그리스 원본(Complutensian Polyglot Greek Text)의 16세기 사본인 ‘티쉬’(Tisch. w110)이다.
나머지 하나는 15세기, 또는 16세기 후반부터 쓰여지기 시작한 ‘그레그’(Greg. 629)사본이다... A.D. 800년 전에는 라틴어 번역 성경에 그 구절이 나타나 있지 않다... 현대 로마 카톨릭 학자들은... 그 말들이 그리스어 성경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예를 들면 2개 국어로 출판된 다음의 네 번역판인 보버, 메르크, 놀리, 보겔즈 (Bover, Merk, Nolli, Vogels) 등에는 라틴어 번역 성경에 있는 그 귀절들이 나타나 있다... 그 반대편에 있는 그리스어 본문에서는 그 귀절들을 빼어 버렸다.
이와 같은 설명은 학자들이 요한1서 5장 7절에 대해 의심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솔직히 보여 주고 있다. 비록 삼위일체의 진술이 라틴어 번역 성경에는 나와 있지만 많은 그리스어 신약성경의 사본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신약성경은 원래 그리스어로 쓰여졌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신교와 구교의 학자들이 모두 그 귀절이 그리스 원본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점에 만장일치로 찬성한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대부분의 학자들 가운데는 자신이 삼위일체론자들이지만, 그들도 모두 다음과 같이 솔직히 인정한다 : “요한1서 5장 7절의 사본에 대한 증거는 충분하지 못하다... 우리는 이런 분석을 해서는 안된다.”
킹 제임스 역의 번역자들이 그리스어 사본을 잘 참조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귀절들을 삽입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그 귀절의 마지막 부분에 “이 셋은 하나이다”라고 나와 있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이 성경을 찾아 보는 사람들은 “이 셋이 하나”-셋이 아니라-라는 말씀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 한 성령
어떤 기독교 학자는 최근에 “여호와 하나님은 성령이시다. 그러나 성령이신 하나님과는... 같은 영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분명히 이 저자는 하나님으로 알려진 하나 이상의 영을 믿고 경배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어디를 찾아 보아도 야웨 하나님께서 ‘성령이신 하나님’과는 다른 성령이시라는 귀절을 볼 수가 없다. 그와는 반대로, 성경은 하나님이 둘, 셋이 아닌 한 분이신 성령이라는 사실을 항상 증언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영도 하나”라고 말하고 있으며 (엡 4:4), 히브리서 저자는 이 영이 “영원한 영”(히 9:14)이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도 다음과 같이 선포하셨다 :
“하나님은 영(靈)이시니 (‘영들’이 아님)〔그에게 (‘그들’ 이 아님)〕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 4:24).
창세기 앞 부분에 보면 야웨 하나님께서는 이 영을 ‘내 영’이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의 하나님께서 한 분이신 영원한 영이시더라도 이 영은 공간적인 제약을 받지 않는다. 시편 기자는 야웨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陰府)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시 139:7-8).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욥 33:4).
이와 같이 겸손한 욥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선포했다.
혹자는 ‘성령’이라는 말이 하나님을 나타내는 이름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아마 영어 번역에서 모두 첫 글자를 대문자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만약 이 말이 정말 하나님을 나타내는 이름이라면 왜 성경 속에 그런 기록이 나와 있지 않을까? 또한 성경이란 말이 ‘하나님의 영’, ‘영’, ‘예수님의 영’이라는 말들로 표현되어져 있다.
정말 ‘성령’이 하나님의 이름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묘사해 주는 실제적인 명칭인가? 몇몇 귀절을 보면 영어 성경은 그것이 이름이 아니고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고 확실히 깨닫게 해준다. 어떤 성경 귀절에는 대문자로 나와 있지 않다. 예를 들면 시편 51편에 있는 다윗의 기도는 킹 제임스 역에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있다 :
“주의 성신(holy spirit)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 52:11).
이 다윗의 기도를 보면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다윗 왕이 경배했던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분이시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을 상기시켜 주셨다 :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자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 왕이니라” (사 43:15).
“거룩하신 자가 가라사대,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 하시느니라” (사 40:25).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사 43:3).
이스라엘 하나님은 거룩한 자 (Holy One)이시다. 항상 ‘그분(He)’이시다. 절대로 ‘그들(they)’이 아니다. 거룩한 자로 표현하고 있다. 거룩한 자들이라고 하지 않았다. 만약 하나님이 거룩한 자이고 실제로 육신이 아닌 영이시라면 그는 거룩한 영 즉 성령이 되신다. 성경이 바로 이 성령을 증언해 주고 있다.
스데반은 순교당하기 바로 전에 성령을 거스리는 유대인들을 꾸짖었다. 실제로 그들의 조상들은 야웨-전능하신 하나님을 거절했다.
이사야서 6장에 보면 선지자가 하나님을 만난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있다. 야웨께서 자기 백성에게 전할 멧세지를 이사야에게 주셨다. 7백 년 후에 로마에서 사도 바울은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해서 증거했다. 이사야에게 말씀을 주신 분은 주님이셨다. 그러나 바울에 의하면 그분은 단지 ‘성령’이셨다.
구약성경에 보면,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로부터 나오면서 야웨를 시험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실은 ‘성령’을 시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신약성경 저자들은 성령의 선물을 주시는 분은 한 분이신 성령이라는 사실을 알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주십니다”(고전 12:8).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고치는 은사를 주십니다”(고전 12:9).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 12:11).
“우리는...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몇백 년 전에 야웨 하나님은 그의 선지자 요엘을 통해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다 :
“그런즉 내가 ...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그 후에 내가 내 신(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요엘 2:27-28).
“내 영”이라고 야웨는 말씀하셨다.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는 단 하나의 유일한 성령은 야웨의 영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3. 주님께서 성령님이시다.
비록 나사렛 예수께는 육신의 어머니가 계셨지만, 그의 육적인 탄생은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근본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눅 1:35).
아기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영적인 존재로 마리아를 강하게 감싸 주셨기 때문에 육신의 아버지가 필요하지 않았다. 위의 귀절에 나오는 성령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흥미롭다.
마리아는 성령님으로 아기가 잉태된 것이 드러났음으로, 그녀에게서 태어날 이 아기는 ‘성령이 충만한’(눅 4:1)자였다. 만약 예수님께서 성령이 충만한 자라면 우리가 그의 성령에 대하여 어떤 한계를 측정한다는 것이 정말 가능한가? 요한은 다음과 같이 외쳤다 :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능력에 찬 말씀을 전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낌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요 3:34, 필립의 번역).
아무리 우리가 노력해도 하나님의 영이 무한하게 임재한다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야웨께서 그의 예언자에게 엄격히 말씀하셨다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렘 23:24).
특이한 모습으로 전능하신 영은 나사렛 예수의 인격 속에 거하게 되었다 :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골 1:19).
그리고 예수님은 전능하신 영과 함께 인간적 성격도 가지고 계셨다.
“하나님의 신성의 충만하심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 거룩한 인격으로 깃들어 있읍니다” (골 2:9).
어떤 사람들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했다. 예수님께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는 소리가 들려 오자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결코 용서를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들은 절대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짓지 말자. 하나님의 영이 아닌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비방하는 죄를 절대로 짓지 말자.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을 둘이나 셋의 영으로 구분할 수가 없다. 그분은 한 분이시다. 어느 누구도 그 분이 될 수는 없다(신 6:4, 사 46:9). 마태복음 10장 20절과 마가복음 13장 11절을 비교해 보자. 마태는 “너의 아버지의 영”이라고 했고 마가는 하나님을 “거룩한 영(聖靈)” 이라고 불렀다. 이밖에 다른 성경 귀절이 더 없다면 이 두 귀절에서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하나님으로서 성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성경 귀절도 많이 있다. 그런데 그것들도 같은 견해를 표현해 주고 있다. 사도행전 5장을 보면, 아나니와 삽비라는 땅값의 얼마를 떼어 놓고 사도들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 결과로 그들은 모두 땅에 엎드러져 죽었다. 그러나 죽기 전에 베드로는 그들에게 자신들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본문에서 사용된 말들을 특별히 살펴 보자.
사도행전 5장 3절에는 “성령을 속였다”고 나와 있고 4절에는 “하나님” 자신을 속인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9절에 보면 “주의 영”을 시험하느냐고 한 말이 나온다. 여기에 나온 “성령”, “하나님”, “주의 영” 등은 모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거짓으로 대항했던 하나의 거룩한 영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죽임을 당하게 되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단지 사람이 아니라 ‘神人(God-Man)’이셨다. 여하튼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셨기 때문에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자신을 무덤으로부터 다시 소생케 하셨다. 그리하여 그분은 능력있는 영원한 영이 되신다.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였으니...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벧전 3:18).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요 6:63).
우리 인생들이 이 말씀의 진리를 깨닫기만 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조롱하거나 내 자신이 하나님에게 거짓된 행실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이웃이나 자신에게 그럴듯한 거짓말로 속이는 것도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상황에서 그대로 영원히 살 수 있을까?
사람들은 우리 주위에서 모두 죽어가고 있다. 세계의 지도자들이 오늘 여기에서 이름을 날리다가 내일이면 영원히 가버리고 만다. 우리는 우리의 친구들, 부모님들, 형제와 자매들, 그리고 심지어 우리 자식들의 장례식에 참석하기도 한다. 이런 우리의 한계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는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라는 믿음을 확고히 가져야 할 것이다.
한 신약성경 저자는 로마서 8장에서 이 영은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비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10).
이와 마찬가지로 에베소서 3장에 보면 하나님과 그의 영에 대한 귀절이 나온다. 14절에는 “아버지”로 나와 있고 16절에는 “그의 성령”이라 했고, 17절에는 특별히 “그리스도”로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이 로마서 8장과 에베소서 3장에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영을 통해서 믿는 자 안에 거하고 계신다고 표현했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진리의 영”을 보내 줄 것을 약속하셨다. 동시에 그분께서는 이 진리의 영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도 알려 주셨다 :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 14:17,18).
예수님께서는 또한 성령을 “보혜사(保惠師)” 또는 위로자로 나타냈다. 그런데 다른 성경 귀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바로 이 보혜사-변호해 주는 분-라고 가리키고 있다.
사도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 그들이 “거룩한 분”을 죽이는 것이라고 거리낌없이 그들을 비난했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행 3:14, 15).
그 후에 요한은 기독교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성령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1서 2:20).
이와 같은 신약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사람들에 의해 거부되고 십자가에 못박혔던 “거룩하신 분”이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도 바울은 이 부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a living soul)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그리스도)은 살려주는 영(Life-Giving Spirit)이 되었나니” (고전 15:45).
예수님께서는 그가 세상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때처럼 더 이상 육신 속에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지는 않는다. 바울의 말을 빌면, 그는 이제 생명을 주는 영이므로 그의 영을 자기 백성에게 부어 주시는 거룩한 분이 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영, 성령이라고 불려진다.
다음에 나오는 베드로의 편지의 두 귀절은 하나님의 예언자들을 움직였던 성령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셨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벧후 1:21).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벧전 1:10,11).
사도행전에 보면 주님께서는 ‘영’으로 계속해서 믿는 자들을 인도하신다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8장 29절에는 성령께서 빌립에게 말씀하셨고, 39절에는 “주의 영”이 빌립에게 나타나셨다.
이와 비슷한 예가 사도행전 16장에도 나온다. 6절에는 ‘성령’이 말씀을 전하지 아니 하셨고, 7절에는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했다.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에도 계속해서 ‘영’이 말씀하시고 계신다 :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계 2:7).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계 2:8).
이와 같이 요한계시록의 몇몇 귀절을 보면 죽기까지 충성을 다 한 자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며(2장 10, 11절), 우리에게 그가 올 때까지 가지고 있는 것을 단단히 간직하고 있으라고 권고하는 분이 또한 “성령”으로 나타나 있다(2장 25,29절).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다등면 열 사람이 업슨ㄴ 그이가 가라사대” (계 3:6,7).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계 2:17,18).
또한 히브리서를 보면 저자가 우리 주님을 “영적인 아버지”(히 12:9)라고 표현했다. 죽어가는 스데반이 하늘을 보며 주의 영광을 보았을 때 다음과 같이 부르짖은 것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행 7:59).
때때로 성경은 영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킨다 :
“내가 주의 신(Spirit)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陰府)에 내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시 139:7,8).
또한 하나님의 본성이나 본질을 의미할 때도 있다 :
“하나님은 여이시니” (요 4:24).
“누가 여호와의 신(the Spirit of Yahweh)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사 40:13).
신약성경의 저자가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적어도 두 번이나 그것을 예수님께 적용시켰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바울은 말한다 :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고전 2:16, 롬 11:34).
주석가들은 바울이 이사야서를 인용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한 학자의 말을 빌면 다음과 같다 : “하나님을 가리키는 주님은(사 40:13) 여기에서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바울 사도에게 야웨의 영은 실질적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인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고린도후서 3장의 주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바울의 진술을 잘못 이해할 수가 없다 :
“주는 영이시니” (고후 3:17).
하나님의 사도에 의해 감동으로 선포된 말씀과 같은 견해에서 한 침례교 책자에는 다음과 같이 위대한 진리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
“성령은 지금 여기에 존재하며 알 수 있고 서로 통할 수 있는 진정한 친구인 주 예수를 말한다.”
또한 존 스캇트는 우리에게 잘 가르쳐 주고 있다 :
“성령님은 바로 주 하나님이시다. 그는 거룩한 영이시며 전능한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의 주권을 우리가 제한시킬 수 없다.”
마지막 결론으로 사도 바울의 말씀을 다시 한번 마음 속에 새겨 보자 :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하나님은 같으니” (고전 12:4-6).
4. 성령으로 난 자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찾아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 유대인의 지도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3).
어떤 번역에는 “새로 나지 아니하면”이라고 나와 있지만, “위로부터 나지 아니하면”이라는 번역이 더욱 의미 깊은 것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태어나게 되면 위로부터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5).
여기에서 물로 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혹자는 이것을 육체의 탄생이라고 말했지만 그럴듯한 설명은 될 수 있으나 논리적인 설명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처럼 사도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물세례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1세기에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은 죄를 용서받고 성령을 받기를 원한다면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베드로는 말했다 :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2:38).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감동이 된 사람들은 :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 2:41)
이와 비슷하게 사도행전 8, 9, 10, 16장과 19장에 보면 물세례가 신도들의 새로운 탄생에 있어서 지배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10장에 보면 물세례를 받기 전에 성령을 받는 청중들의 특이한 경우가 나온다. 이것은 사도 베드로와 다른 유대인들에게 성령이 그들 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내린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베드로가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을 알았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간청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행 10:48).
다소의 사울은 아나니아에게 찾아갔을 때 이미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다. 그리고 사흘 동안 금식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울이 물세례를 받기 전에 죄사함을 받았는가? 아니다. 아나니아는 다음과 같이 권고했다 :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행 22:16).
아나니아는 다만 군중들에게 한 베드로의 사도적 권위를 따랐던 것 같다 :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 (행 2:38).
물세례는 ‘행위에 의한 구원’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행동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받기를 기대한다면 기꺼이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 :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행 5 :32).
왜 물세례가 성령을 받기 위한 성경적 필요 조건으로 요구되어지고 있는가? 물세례를 받는 것은 신앙의 행동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 장사지냄과 부활의 능력을 믿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존재 속으로 들어오셔서 우리 안에 ‘새로운 창조’를 우리의 현재의 삶 속에서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 같이 우리들도 죽도록 충성하면 영생을 얻도록 마지막 날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을 믿는 것이다(계 2:10).
물세례는 죽음, 장사지냄 그리고 부활과 같은 것들의 아름다운 상징적인 모습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를 베푸는 것이다. 물 속의 무덤은 죽음을 상징하고 또한 영광스러운 부활을 바라보게 해준다 :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으므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롬 6:3-5)
대부분의 영어 번역들이 ‘세례(bapism)’라는 단어를 알맞게 번역하지 못한 것 같다. 성경의 기록들을 자세히 살펴 보면 실제로 세례는 침례를 가리킨다. ‘세례’라는 말은 그 자체가 그리스어이지 영어는 아니다. 새 카톨릭 백과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세례라는 말은 그리스어에서 나온 말이다... 뜻은 ‘가라앉히다’, ‘살짝 담그다’이다.”
세례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묻히는 것으로 바울은 증거했다(롬 6:3-4, 골 2:12).
로마서 6장은 물세례가 새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보여 준다. 그러나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령으로 난 자가 되는 것이다.
몇몇 신약성경은 우리가 죽지 않을 영의 몸으로 부활할 때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죽은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영으로 난 자가 될 수 있다고 성경은 보여 준다. 성경적인 의미에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그 성령을 받으면 “그리스도의 마음”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단지 물에 젖기만 하고 세례를 받는다면 그것은 충분하지 못하다. 우리의 죄를 용서받고 성령이 우리의 삶 속에 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믿음과 철저한 회개를 함으로서 물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막 16:16).
“회개하여... 세례를 받고...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2:38).
성령받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훈계한다 :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이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9).
1세기의 사도들은 그들이 새로 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된 결과라고 깨달았다 :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을 통해서) 되었느니라” (벧전 1:23).
어떤 번역에는 ‘~에 의하여’라고 나와 있지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라고 분명히 나타냈다. 마치 강물이 강둑을 통해서 흐르듯이 성령님의 생수가 하나님의 말씀의 강둑을 통해서 우리의 삶 속으로 흐르고 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위로부터 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우리가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기만 하면 기꺼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분이다. 세례 요한의 첫 마디가 “회개하라”였다. 예수님의 첫 마디도 “회개하라”였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도 처음에 “회개하라”고 외쳤다(행 2:38, 3:19). 요한이 광야에 나타났을 때 그는 ‘회개의 세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세례는 물세례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는 예수님의 세례가 다르다는 것을 이미 살펴 보았다. 예수님의 세례는 두 가지 과정을 필요로 하고 있지 않은가?
요한복음 3장 5절에 보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개종자들이 예수님의 세례를 받았을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세례를 받고 또한 그들은 성령 세례도 받았다(행 2:38, 롬 8:9). 그러므로 예수님의 세례는 요한이 세례와는 달랐다. 요한은 자신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를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막 1:7, 8).
요한에 의하면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고 했다. 누구를 가리키는 말이었을까? 12제자들인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것이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인가? 아니다. 요한은 제자들에게만 제한을 두고 한 말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제자들이 선택되어지기 전에 그런 말을 하였고 또한 예수님께서 지상 선교를 시작하기 전에 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요한이 말했을 때는 유대 사람들을 위해 준다는 것으로 말했다. 성령의 세례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
“세례 유한은 온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막 1:4-8).
언제 이 성령이 주어지는가? 혹자는 그리스도의 부활 직후에 주어진다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요한은 말한다 :
예수께서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을 계속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요 20:22 R. S. V.).
이렇게 번역된 귀절을 보면 사도들은 그리스도가 숨을 내쉴 때 성령을 받았을 것이라고 믿게 해 준다. 그러나 그리스 원본에는 ‘그들’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또한 그리스어가 ‘숨을 내쉰다’와 ‘숨을 들이쉰다’로 번역이 될 때에는 뜻이 달라진다.
어떻게 번역을 하든지 간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확실히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충만한 모습으로 나타났으며, 그들도 결국은 그와 같은 성령을 받을 수 있다고 보여 주었다. 다음 성경 귀절을 보면 성령이 그 때에 그들에게 내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행 1:5).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을 것이다” (행 1:8).
우리가 사도행전 2장을 읽어 보면 제자들이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할 때 그 힘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선택받은 소수에게만 그의 영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로 나아오는 자에게는 모두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야웨는 요엘 선지자를 통해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다 :
“내가 내 신(Spirit)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욜 2:28).
초대 교회가 시작될 때 베드로는 선지자 요엘의 예언이 그 때에 이루어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선포했다. 이 약속은 유대인과 이방인들 모두에게 한 약속이다. 하나님의 영은 한 민족이나 한 세대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살펴보자 :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행 2:38,39).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이 제자들에게 내려왔다. 그 성령이 요엘서 2장 28절의 말씀대로 성취되면서 신도들에게 함께 하셨다. 그 성령은 예루살렘이나 유대 사람에게만 임재한 것이 아니다. 성경에 의하면 사마리아, 에베소, 빌립보, 고리도, 로마 그리고 심지어는 에티오피아의 사람들에게까지 그 성령이 점점 퍼져 나갔다. 그래서 제자들은 “세상을 뒤집어 엎는다”는 비난을 받기 시작했다.
그 당시 사회는 이미 이방 종교의 혼란으로 뒤집혀 있었다. 그러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제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 진리이신 하나님의 영이 로마 제국을 이끌게 되고 능력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었다 :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행 13:52).
또한 신도들을 위해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기도했다 :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엡 3:16).
계속해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그들의 마음 속에 들어가 사실 수 있도록 희망했다(엡 3:17). 우리의 삶 속에 그리스도를 모실 때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 :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롬 5:5).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의 성령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면 많든지 적든지 간에, 어느 정도 그의 영적인 특성을 소유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을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
“성령을 소멸치 말며” (살전 5:19).
진실된 성령으로 충만한 신자들은 자연적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 :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갈 5:22, 33).
세상은 이런 속성들을 우리에게 줄 수 없다. 그 대신 세상은 우리에게 사랑이 없는 성적 쾌락, 즐거움이 없는 흥분, 평화가 없는 휴식을 줄 따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에게 ‘진정한 그 무엇’을 준다. 우리의 뜻을 그의 뜻에 복종시키고, 우리의 영을 그의 거룩한 영에 맡기게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사랑, 참된 기쁨, 참된 평화 그리고 아름다운 선행을 이루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신약성경은 우리 안에서 생기는 이런 새로운 변화를 ‘새로운 창조’라 한다. 하나님의 처음 창조가 물리적인 것이었다면 이 창조는 영적인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형제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전 12:13).
저자는 우리가 모두 한 성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한다. 이 때 우리는 그의 영적인 ‘몸’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그 성령의 지배를 받고 충만한 성령을 소유한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성령을 충만하게 받아야 한다고 희망했다 :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18).
우리가 충만한 성령을 받았다면 “그것이 누구의 성령인가?”하고 물을 것이다. 성경은 명확하게 대답한다 :
“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욜 2:27, 28).
지금까지 우리는 야웨의 영이 주님의 영-예수님의 영이라는 것을 살펴 보았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 7:38, 39).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생수라고 가장 적절한 때에 관련지어 말씀하셨다. 그는 장막절 기간 동안에 예루살렘에서 말씀하셨다. 이 절기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광야에 있을 동안 반석에서 물을 마신 것을 기억하며(민 20:2-13), 오실 메시야의 해방을 소망하는 상징으로서 7일 동안 실로암의 연못으로부터 장막까지 금 항아리에 물을 담아 옮겼다.”
바로 이때에 그리스도는 자신이 생수를 소유하고 있다고 선포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성령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이미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4).
요한은 일찍이 메시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막 1:8).
바울은 바로 그분이 예수님이시라고 기록했다 :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는(supplying) 분” (갈 3:5).
또한 빌립보의 형제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라고 편지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supply)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고로”(빌 1:19).
위의 두 귀절에서 바울은 그리스어로 같은 근원어인 ‘공급하다(supply)’를 써서 표현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시며 또한 그렇게 약속해 주신 분이시라는 것을 확실할 수 있다.
두 사도의 말을 반복함으로 이 장의 결론을 맺으려고 한다. 먼저 바울의 말을 들어 보자 :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 15:45).
둘째로 예수님의 재림에 관해 훈계를 한 요한의 선언을 들어 보자 :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요1서 2:28,29).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는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 날 수 있고 성령으로 날 수 있으며 위로부터 새로 날 수 있는 것이다.(요 3:3,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