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인 거듭남 - 제7장 침례식문 :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제7장 침례식문 :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행 2:38) 

기독교에서 침례는 '예수 이름으로' 시행되어야 한다. 이것은 물침례를 받을 때 예수 이름을 구두적으로 부르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의 기록


성경 어느 곳에서도 실제 침례를 베풀 때 어떤 다른 이름이나 다른 식문을 언급한 곳이 없지만 사도행전은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준 5가지의 예들을 보여 주고 있다. 

(1)베드로는 신약 교회에 있어서 첫 설교를 하고난 후 다른 사도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사람들에게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받도록 명했다(행 2:14; 37-38). 그의 메시지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이같은 명령을 따라 침례를 받았다. 즉,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받은 것이다(행 2:41).

(2)사마리아 사람들도 빌립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하는 말씀을 믿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다(행 8:12, 16).

(3)이방인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이 성령을 받았을 때 베드로는 그들에게 '주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고 명했다(행 10:48). 

(4)바울이 에베소에서 침례 요한의 어떤 제자들을 만나 무슨 침례를 받았는지 질문했다. 바울은 그들이 단지요한의 침례만 받은 것을 알고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다시 침례를 주었다(행 22:16).

(5)바울 자신도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는데 왜냐하면 아나니아가 그에게 말하기를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고 했기 때문이다(행 22:16).

(6)사도행전에 기록된 이 다섯 가지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에서도 고린도에 있는 이방인 신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다고 기록한다. 고린도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문자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으로')침례를 받았기에 그들은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지 바울에게 속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이 여섯 개의 성경 본문들을 근거로 사도적인 교회에서는 항상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다는 결론을 내린다. 모든 신자들 - 유대인, 사마리아인, 그리고 이방인- 은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다.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됨


침례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는 것이며 그의 죽음과 장사에 연합하는 것이다(롬 6:4; 골 2:12). 

예수님은 오직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되셨기에 침례는 예수 이름으로 시행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연합이며 그러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는다(롬 6:3, 갈 3:27). 우리는 그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음으로 우리 자신을 개인적으로 그와 연합시키며 그의 이르을 사용한다.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성전에 자신의 이름을 두고서 하나님 자신과 성전을 동일시하였다(왕상 8:29). 신약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며(고전 3:26-17), 따라서 그분의 이름을 담고 있어야 한다. 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성도들은 신분을 나타내는 표시로써 자신들 위에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계 3:12; 14:1; 22:4). 

그리스도의 이름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게 하는 것에 관해서는 헬라어 eis(에이스)라는 단어를 연구해 보면 더욱 뜻이 분명해지는데, KJV(킹 제임스역)은 갈라디아서 3:27에서 eis를 '안으로'라고 번역한다. 이 말은 물론 사도행전 8:16, 사도행전 19:5, 고린도전서 1:13에도 나타나 있다. 바인(W. E. Vine)은 “침례를 받은 사람은 그가 침례를 받을 때 사용한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님께 온전히 속하게 되고 예수님의 기업이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 이름은 인격과 권위와 능력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주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침례는 그분의 인격과 권위와 권세 안에서 하늘의 시민권 안으로 받는 것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은 것은 그의 지체, 그의 생명 안으로, 그의 나라에 있는 시민권 안으로 침례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침례는 우리를 예수와 연합(동일시)시키며, 특히 우리를 그와 연합시킨다는 것은 그의 이름으로 받는 침례를 말하며, 그것은 우리를 그의 기업이 되게 하고, 또한 그의 지체가 되도록 만든다.


성(姓)을 취함


성경에서 구원을 거듭남과 양자를 삼는 것을 표현한다. 구약에서 한 아이는 할례시에 공식적으로 그의 이름을 얻게 된다(눅 1:57-63; 2:21). 침례는 바로 영적인 할례이다(골 2:11-12). 구약의 어떤 제사장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았고 그들의 계보(系譜)를 증명하지 못했기에 제사장직에서 제외되었다(에 2:61-62).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아버지의 이름으로 '기록'될 때에 우리의 제사장직과 우리의 영적 상속권을 주장할 수 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시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다(요 5:43; 히 1:4). 그러므로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신 이름이다. 하나님의 모든 영적 가족은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나(엡 3:4-15). 그러므로 분명 예수라는 우리가 침례를 받을 때 반드시 취해야 하는 이름이다. 우리가 침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가족이 되기를 원한다면 마땅히 그의 이름을 취해야 한다.


그 이름으로 얻는 죄사함


침례는 죄사함을 위한 것인데(행 2:38), 예수의 이름은 죄사함과 절대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베드로는 예수 이름에 관하여 이것을 선포하였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그는 또한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행 10:43)고 전파하였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21)고 했다. 아나니아는 특별히 '예수의 이름'으 침례를 받을 때 죄를 씻는 것과 연관지어 말했다.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행 22:16).


그 이름 안에 있는 능력과 권세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구할 때 '예수' 그 이름을 부를 수 있다. 어떤 이름을 부르는 것을 또한 그 이름 이면에 있는 권위도 나타낸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 예수의 능력과 권세를 의지한다고 볼 수 있다.

(1)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 28:18-19)라고 말씀하셨다.

(2)산헤드린 공회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앉은뱅이를 고쳐 준 것에 관하여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행 4:7)고 추궁하였다.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고 대답했다(행 4:10).

(3)주님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4)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의 이름을 부를 때 하나님의 모든 능력과 권세를 우리에게 주신다(행 3:6, 16). 따라서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침례를 베풀 때, 권세와 영적인 역사를 일의는 그분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 이름으로 하라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이 구절은 바로 그의 대리자로서, 그를 따르는 자로서, 그리고 그를 의지하여 예수의 능력과 권세로써 모든 것을 말하고 행하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할 특별한 영적 행동을 하게 될 때는 이 구절이 문자적으로 적용된다.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에게 안수하며 그의 이름을 불러 모든 일을 행한다. 그리고 물침례도 예외일 수 없다.


예수는 가장 뛰어난 이름이다


침례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 가장 중요한 영적 행위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알게 하신 가장 뛰어나며 가장 위대하고 가장 능력 있으며 가장 자기 계시적인 이름은 '예수'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빌 2:9-10).


구주로 예수님을 영접함


이름을 부르는 것은 자신의 주를 부르는 것이다.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은 자신의 왕이자 주님이신 분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다. 예수 이름의 침례는 예수님을 주와 구원자로서 영접하는 것을 나타낸다. 

베드로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시라고 설교하고서 그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을 것을 명했다(행 2:36-38). 그의 말을 들었던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주(主)되심과 메시아 되심을 믿고 받아들였을 때 그들은 침례를 받았다(행 2:41). 사마리아 사람들은 빌립이 예수에 관해 전파할 때 그 메시지를 받아 들였고 또한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다(행 8:12, 16).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는 것과 관련하여 침례 요한의 제자들이 회심할 때에도 성경은 특별히 중요한 사건으로 다룬다(행 19:4-5). 그들은 예수 이름으로 다시 침례를 받음으로 예수에 관한 믿음을 보여 주었고, 또한 그를 메시아요, 주시며, 구세주로 여기며 요한의 사역의 완성으로 인식하였다.


신성이 충만하신 예수님을 영접함


예수 이름의 침례는 또한 신성(神性)의 모든 충만이 예수 안에 있으며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그분 안에 있다는 믿음을 입증한다(골 2:9-10). 바울은 이 말씀 속에 있는 개념을 물침례와 연관지어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이 두 구절 바로 다음에 우리는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골 2:12). 예수 이름의 침례는 예수님의 충만한 신성과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그분의 완전한 역할을 강조한다.


마술적인 식문이 아니다


예수 이름은 마술적인 식문이 아니다. 그 이름을 불러 울려 퍼진 소리가 죄를 사한다든지 혹은 다른 어떤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 예수님은 응답하신다. 그 이름은 예수님의 임재와 역사를 나타낸다.

스게와의 아들들은 예수 이름을 사용하고서도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개인적으로 예수님과 관계도 없었고 그를 믿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행 19:14-17). 

예수의 이름이 마술적인 식문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이 그 이름을 구두적으로 부를 필요성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위해 기도하면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고 말했다. 앉은뱅이가 걷게 되었을 때 베드로는 설명하기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라고 했다(행 3:16). 이 구절은 믿음으로 예수의 이름이 불려졌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내적 믿음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 분리할 수 없다. 침례시 하나님의 말씀에 명령한 대로 믿음으로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 주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신다.


모든 민족을 위한 유일한 침례


우리가 언급할 수 있는 모든 계층의 시자들이 모두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다. 기독교의 침례는 오직 한 가지의 성경적 형식만이 있을 수 있다. 신약의 교회사 속에서 한번은 이런 방식, 한번은 저런 방식으로 침례를 주는 따위의 일은 있을 수 없다. 한번 침례를 베푸는데 다른 여러 가지 형태가 있을 수 없다. 신약의 교회에는 오직 하나의 침례만 있을 뿐이다.


이름을 구두적으로 불러야 한다


(1)예수 이름의 침례는 그의 능력과 권세를 의미하지만 그의 능력과 권세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믿음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이름으로 권세를 나타내고자 한다면 실제로 올바른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불러야 한다. 이름 안에 있는 능력과 권세에 관해 분명히 얻게 되는 논점은 이것이다. 우리가 실제적으로 침례를 받을 때 이름을 사용한다면 그 이름은 '예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2)성경은 예수 이름이 침례시 구두적으로 불려졌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사도행전 22:16에는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고 말한다. 이것이 침례시 주의 이름(예수)을 부르라는 성경적 명령이다. 일반적으로 집례자(執禮者)가 보통 그 이름을 부르지만 수침자(受浸者)도 역시 예수 이름을 부른다. 왜냐하면 침례의 정당성은 수침자의 믿음에 달려 있는 것이지 집례자의 믿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3)침례에 관한 구절에 들어 있는 의미들을 분명하고 평이하게 파악해 보면 '예수 이름으로'가 침례 식문(式文)임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4)다른 상황에서도 '예수 이름으로'하는 것은 예수 이름을 구두적으로 말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그의 이름으로 병든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으며(막 16:17-18) 야고보는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병든 자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고 말했다(약 5:14).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위하여 기도했을 때 실제로 그 이름을 사용했는데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고 말했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가 예수 이름으로 기도했을 때 그들은 실제로 예수 이름을 불렀다.

(5)설령 '예수 이름으로'가 맞는 식문이 아니라고 해도 성경에서 기독교 침례에 대한 다른 어떤 식문도 찾을 수 없다. 분명한 식문이 없다면 어떻게 이교도의 침례나 유대교로 입교하기 위한 침례나 요한의 침례로부터 기독교의 침례를 구별할 수 있겠는가? 식문이 없다면, 혹은 식문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왜 바울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예수 이름으로 재침례(再浸禮)를 주었겠는가?

(6)신학자들과 교회사가들은 대부분 사도행전이 초대 교회의 침례 식문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인정한다. 사용된 식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혹은 그와 같은 의미를 갖는 문구였다. 삼위의 이름을 사용한 증거는 전혀 없다. 갈라디아서 3:27과 로마서 6:3이 뒷받침하는 사도행전 2:38과 10:48(비교 8:16; 19:5)의 증거는 초기 기독교에서 삼위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나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었다고 제시하고 있다.


마태복음 28:19


이 구절은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록한 것이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우리는 이 구절을 사도행전 2:38과 같이 후에 예수 이름으로 베푼 침례를 언급한 모든 내용과 어떻게 일치시킬 수 있는가? 여기에는 생각해 볼 수 있는 몇 가지 견해들이 있다. 

첫째, 두 구절은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침례 식문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는 맞고 다른 하나는 틀렸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모순된 견해이다. 왜냐하면 기독교 침례는 오직 한 가지 형식 이외에는 다른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신약 교회 시대의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기 때문에 두 개의 상반된 침례 식문이란 있을 수 없다. 성경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말씀 자체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성경이 두 개의 식문을 주었다면 어느 것이 옳은가? 우리는 어느 것을 믿어야 하는가? 

마태는 마태복음 28:19를 기록했고 또한 베드로가 오순절날 설교할 때에 그와 함께 서 있었다(행 2:14).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질문이 모든 사도들에게 제기되었다(행 2:37). 만약 베드로가 그릇된 답변을 해 주었다면 마태는 그의 답변을 수정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베드로의 말보다는 차라리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하겠다" 라고 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8:19를 말씀하신 것을 들었고 마태는 베드로가 말한 사도행전 2:38을 들었기에 단지 일주일 내지 열흘이라는 시간의 간격으로 두 사건을 별개의 것이라고 이해해서는 안된다. 사도행전 2:38이 마태복음 28:19과 상반된 구절이라면 교회의 최초의 설교자(베드로)는 오류를 범한 베드로를 따른 것이 되고, 그래서 우리는 사도들이 말했거나 기록한 어느 것도 믿을 수 없게 된다. 만일 그러한 경우라면 신약의 모든 가르침을 버리는 편이 낫다. 

두번째 견해는, 마태복음 28:19은 식문을 나타내지만 사도행전 2:38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거나 혹은 바꾸어 역으로 말하는 견해다. 그러나 두 구절 속에 '…이름으로(in the name of)'라는 같은 말이 나오기 때문에 이 해석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한 구절이 식문을 말하지 않았다면 다른 쪽 구절도 그러하다. 우리는 이미 왜 사도행전 2:38이 식문을 설명하는지에 관해 많은 이유들을 보아 왔다. 

세번째 견해는, 마태복음 28:19이나 사도행전 2:38의 어느 구절도 침례 식문을 말하는 게 아니며 그 구절 속에 어떤 식문도 전혀 기술되어 있지 않다는 견해다. 이 견해는 침례의 중요성이나 다른 형태의 침례로부터 기독교의 침례를 구별할 필요성에 비추어 보거나, 상식적으로 문제의 구절을 읽어 봐도 전혀 타당하지 못하다. 오직 유일하게 가능성있는 견해는 마태복음 28:19과 사도행전 2:38 두 구절 모두 동일한 침례 식문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견해가 옳다고 한다면 식문을 제시하면서도 성경 말씀의 일치를 깨뜨리지 않기 때문에 매우 설득력이 있다.


지상 명령의 비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기록한 사람은 마태만은 아니다. 마가와 누가도 다소 다른 말로 표현했지만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지시하신 말씀을 기록했다(마 28:19-20; 막 16:15-18; 눅 24:47-49; 행 1:4-8).


마태마가누가
1가서 모든 민족을 가르치라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모든 족속 중에 복음을 전파하라
2침례를 주라믿음과 침례회개와 죄사함
3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나의 이름으로그의 이름으로
4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표적이 따를 것이다위로부터 능력을 기다리라


마태와 마가는 분명하게 침례를 언급했다. 침례는 죄사함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행 2:38) 누가도 역시 침례를 우회적인 표현으로 언급하고 있다. 확실히 세 복음서 모두 하나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마태복음을 포함해서 각각의 복음서의 내용에 있어서 그 이름은 단수이다. 마가와 누가는 의문의 여지없이 그 이름을 예수로 기록하고 있다. 마태복음 28:19도 역시 분명하게 그 이름을 '예수'라고 기록했다.


유일한 이름


마태복음 28:19은 유일한 이름을 나타내고 있다. 왜냐하면 기록되어 있는 이름은 단수이지 복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울이 창세기 22:18에 기록된 단어가 단수임에 각별한 중요성을 부여한 갈라디아서 3:16을 읽어 보아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바른 이름이 아니며 단지 설명하는 명칭에 불과하다. 그 명칭들이 바른 이름들이라고 한다 할지라도 이 구절은 분명히 세 가지의 이름이 아닌 오직 한 이름만을 기술하고 있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바른 이름이 무엇인지 여전히 질문해 보아야 한다.


아들의 이름


의심할 여지 없이 아들의 이름은 예수이다. 천사가 요셉에게 말하기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했기 때문이다(마 1:21).


아버지의 이름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고 하셨다(요 5:43). 그는 아버지께 기도하기를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라고 하셨다(요 17:6, 26). 구약 성경 말씀에는 메시아가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리라고 예언되어 있다(시 22:22; 히 2:12). 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기업으로 삼으셨다(히 1:4). 하나님은 육신을 입으시고 어떤 이름으로 자기를 나타내고, 선포하고, 기업으로 얻으셨는가? 바로 '예수'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예수'라는 이름을 통하여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 것이다.


성령의 이름


예수님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26). 성령은 예수 이름을 통하여 주어지고 계시된다.


마태복음 28:19의 문맥


마태복음 28:19의 문맥은 그 구절의 유일한(singular) 이름이 예수임을 더욱 더 명확하게 보여 준다. 

18절에서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셨다. 19절은 이어서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라고 한다. 예수님은 "내가 모든 권세를 가졌으니 그러므로 세 가지의 서로 다른 이름들로 침례를 주라(혹은 또 다른 한 이름으로)"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내가 모든 권세를 가졌으니 그러므로 나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내게 주어졌다'라는 말은 우리에게 한 가지 결론을 기대할 수 있게 해 준다. 즉 '가서 모든 민족 중에서 나의 제자를 삼아 그들에게 나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들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라'는 결론이다.

왜 초대 교회가 즉시 삼중적 이름(threefold name)을 사용하여 침례를 시행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에 대한 충실한 해석은 19절이 원래 주님께서 침례 식문으로 언급하신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침례식에 사용될 실제 말씀에 관하여 지시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이미 제시하신 대로 침례를 받은 사람은 침례를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소유하게 되리라는 것을 가리키신 것이다.


예수는 신약의 하나님의 이름이다


마태복음 28:19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분명하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유일한 이름은 예수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서로 다른 명칭이다. 유일하신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아버지이며 아들 안에서 육체로 오시며 성령으로써 우리 마음 속에 내주(內住)하신다. 이러한 모든 직임들을 계시하는 하나의 이름은 '예수'이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께서 한 이름으로 계시되리라는 것을 예언했다. "그러므로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사 52:6). "그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슥 14:9). 예수의 이름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며(빌 2:9-10). 그러므로 마태복음 28:19이 예수 이름을 언급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누구인가? 물론 이것은 하나님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인가? 여호와(또는 야웨)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다른 모든 신과 구별하기 위해 칭하신 유일한 이름이었다(사 42:8). 이 분석은, 한 삼위일체 교수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들'(복수)이 아닌, 그 '이름'(단수)은 우리가 침례 받을 때 사용해야 하는 이름으로, 삼위일체 하나님 야웨로 이해되어야 한다"라는 결론을 얻게 하였다. 

그러나 신약에서 하나님의 최고의 이름은 여호와가 아니라 예수다. 예수는 모든 이름보다 뛰어나며 문자적으로 '여호와-구원자' 혹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의미를 갖기 때문에 그 이름의 의미 속에 분명히 여호와가 포함되어 있다. 

계시록에 보면 '하나님과 어린 양'의 종들이 그들의 이마에 '그의 이름'(단수)을 가지게 될 것이다(계 22:3-4). 어린양의 이름은 예수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은 예수이다.


침례 식문에 대한 결론


마태복음 28:19를 포함하여 침례 식문에 대하여 언급한 모든 성경 말씀은 예수 이름을 말하고 있다. 

침례 식문이 성경적이기 위해서는 단지 구두적으로 주님을 가리키는 말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이름을 포함해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푼다"든지 "주님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침례를 베푼다" 또는 "그분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푼다" 라는 식문들은 모두 충분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 식문들 중 어느 것도 우리가 사용하도록 명해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실제로는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확한 식문은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노라"이어야 한다. 또한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출생한 다른 사람들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별하기 위하여 주 혹은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덧붙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삼위일체 교리


이러한 강력한 점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마태복음 28:19이 나타내고 있는 그 '이름'을 사용하기보다는 그 문장을 침례 식문으로 반복하는 실제적인 한 가지 이유는 그들 삼위일체론자들이 삼위일체론을 시인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많은 삼위일체론자들이 예수 이름으로 주는 침례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예를 들면 20세기 오순절 운동의 첫 지도자였던 챨스 파햄(Charles Parham)은 분명하게 삼위일체론을 부정한 적이 결코 없었지만 침례는 예수 이름으로 주었다. 우리는 또한 삼위일체라는 잘못된 교리를 지지하기 위해 삼위일체 침례 식문을 사용해야 할 어떤 근거도 없다는데 주목해야 한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결코 나타나 있지 않으며, 성경은 항상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닌 한 분임을 강조한다. 더우기 예수는 아버지(사 9:6)이시며, 아들(마 1:21)이시며, 성령(고후 3:17-18)이시다. 신성의 모든 충만이 그리스도 안에 육체로 거하신다(골 2:9).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단순히 예수로서 육체로 오신 한 분 하나님의 세 가지 다른 표현(manifestation)일 뿐이다. 성경은 현대의 삼위일체론의 교리를 가르치고 있지 않는다. 따라서 삼위일체론적 세례 식문도 주장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다.


마 28:19은 예수 이름으로 베푸는 침례를 가르친다


왜 마태복음 28:19이 예수 이름으로 침례 주는 것을 언급하는 것인지 9가지 근거들을 아래와 같이 요약하였다.

(1)문법상 하나의 이름(name, 단수)을 나타낸다.

(2)이 구절의 문맥상 예수님께서 자신의 권세를 설명했고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고 말씀하셨다.

(3)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동일한 가르침에 관해 마가와 누가가 묘사한 글에서는 '예수'가 유일한 이름임을 보여준다.

(4)마태가 물론, 초대 교회 또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주었다(행 2:38; 8:16; 10:48; 19:5; 22:16; 고전 1:14).

(5)아버지의 이름은 예수다. 아버지는 그 이름 '예수'를 통하여 계시된다(요 5:43).

(6)아들의 이름은 예수이다(마 1:21).

(7)성령의 이름은 예수다. 성령은 그 이름 '예수'를 통하여 계시된다(요 14:26).

(8)하나님은 신약 속에서 한 이름을 가지고 자신을 계시하셨고(슥 14:9) 그 이름은 '예수'다(계 22:3-4).

(9)성경은 삼위일체 교리를 가르치고 있지 않으므로 삼위적인 식문을 사용하는 것을 정당화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다.


교회사 속에서의 증거


사도들은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초기 속사도 시대(the early post-apostolic era)의 그리스도인들도 그와 같이 행하였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사도행전이 원래의 식문을 나타내고 있다는데 동의한다. 교회사가들은 일반적으로 예수 이름이 더 오래된 식문이며 삼위적인 식문은 단지 점차적으로 채택되어졌다는데 의견을 같이 한다.


침례 식문은 정말로 중요한가?


모든 사람은 성경적 식문을 사용해야 한다. 누군가 침례를 받았을 때 예수 이름으로 하지 않았다면 그는 예수 이름으로 다시 침례를 받아야 한다.

(1)성경은 물침례에 대단히 큰 중요성을 부여해 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이 명한 대로 정확히 침례를 받아야 한다.

(2)우리는 사도적 교회의 본을 따라야 한다.

(3)전통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대신하는 것은 부적당하다.

(4)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 말씀을 귀히 여긴다면 그 말씀을 정확하게 따를 것이다. 성경적 식문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불순종과 반항 내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부주의하게 접근하는 것이 될 것이다.

(5)요한의 제자들은 이미 물에 잠기는 회개의 침례를 받았지만, 바울은 예수 이름으로 다시 그들에게 침례를 주었다(행 19:1-5). 두 가지의 침례에 있어서 외적인 차이점은 단지 '이름'에 있었다. 그러나 이 차이는 침례를 다시 받아야 할 만큼 중요했던 것이다.

(6)예수의 이름은 유일하게 침례가 갖는 모든 목적과 연관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됨, 그리스도와 연합함, 죄사함을 얻는 것과 연관된다. 

이미 성령을 받았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을 필요가 있다. 고넬료의 경우가 지적하듯이 하나님은 회개하고 믿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며 예수 이름의 침례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에게조차도 성령을 주실 것이다. 영적 경험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지속적으로 순종하는 것은 항상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어떤 가르침도 부적절한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침례의 경우에 성경은 침례가 구원의 일부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받을 것을 명하고 있다. 

식문이 중요하지 않다면 어떤 이름으로 주어도 모두 타당한 기독교적 침례가 될 것인데 그것은 불합리하다. 침례의 영적인 중요성은 사용되는 식문과 불려지는 그 이름에 의해 분명하게 나타난다. 예수의 이름을 사용함은 (1)그리스도의 성품(그분이 진실로 누구인가 하는 것)과 (2)그리스도의 사역(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과 (3)그리스도의 능력과 권위(스스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등 이런 것들에 대한 믿음을 입증한다. 이것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의 핵심이다.

침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 신성에 관한 완전한 단계의 이해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믿음이란 언제나 완전한 지식보다 앞서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제한된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해도 믿음으로 성경적인 침례 식문에 순종하는 것과, 성경의 가르침을 알면서도 무시한 채 그릇된 전통과 교리를 따라 만들어진 인위적 식문을 사용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성경은 예수 이름을 사용한 식문 외에 어떤 다른 식문도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만족할 만한 다른 어떤 식문도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다. 성경의 기록에만 충실한다면 두 가지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1)기독교적 침례는 예수 이름으로 행해져야 하는데, 이는 그의 능력과 권위를 의미하며 그를 믿는 것과 입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의미한다.

(2)다른 어떤 식문도 성경적으로 유효하지 못하다.


결론


예수 이름으로 받는 침례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는 아래와 같다.

(1)성경은 다음과 같은 식문을 제시하고 있으며 다른 식문은 말하고 있지 않다. 

①마태복음 28:19은 이 식문을 설명하고 있다. 

②사도적인 교회는 이 식문을 고수하였다(행 2:38; 8:16; 10:48; 19:5; 22:16; 고전 1:13).

(2)침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 지내는 것이다(롬 6:4; 골 2:12).

(3)침례는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연합이며(롬 6:3; 갈 3:27) 그 이름 때문에 우리는 그의 기업이 된다.

(4)침례를 받음으로 우리는 새로운 탄생과 양자됨과 영적인 할례의 일부로써 이제 새로운 성(姓)을 갖게 된다. 하나님의 영적 가족이 갖는 이름은 예수이다(엡 3:14-15).

(5)침례는 죄사함을 위한 것(행 2:38)이며 예수 이름은 죄를 사하는 유일한 이름이다(행 10:43).

(6)예수의 이름은 하나님의 모든 능력과 권위를 나타낸다(마 28:18; 행 4:7, 10). 우리가 믿음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 능력과 권위가 우리에게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행 3:6; 16).

(7)말에나 일에나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해야 하며(골 3:17) 침례는 그 말과 일에 해당한다.

(8)예수의 이름은 인간에게 알려진 가장 위대한 이름이며 모든 사람은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빌 2:9-11).

(9)침례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필수적인 일부이며 예수 이름은 우리를 구원하는 유일한 이름이다(행 4:12).

(10)예수 이름으로 베푸는 침례는 예수님이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시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온전히 인정하는 우리의 믿음을 명백하게 보여준다(요 14:6-11).

(11)예수 안에 신성이 충만한데 거하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나타낸다(골 2:9).

(12)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신약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이름이다(마 1:21; 요 5:43; 14:26).

(13)예수 이름의 침례는 인간의 전통에 대하여 그 이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고 순종해야 함을 증명한다.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거룩함이란 무엇인가

머리에 관한 성경의 진리

성경적인 장신구와 옷차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