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인 거듭남 - 제10장 교회사 속에서의 증거:침례
제10장 교회사 속에서의 증거:침례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히 12:1).
모든 교리는 오직 성경에 기초를 두어야 하며 인간의 전통이나 신조나 철학에 두어서는 안되기 때문에(갈 1:8-9; 골 2:8; 딤후 3:16-17). 우리는 이 책에서 성경에 기초하여 모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보여준 교리를 전혀 듣지 못했으며 어떤 이들은 그러한 교리들을 현대에 와서 고안(考案)해낸 것으로 생각한다. 비록 역사가 성경의 진리를 변경시키거나 대체할 수 없었지만 교회사 속에서 이 교리를 연구한 사실은 매우 명백하게 드러난다.
교회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의 문제점들
교회사를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특히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고려해야 할 몇 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있다. (1)교회 역사가들의 교리적 성향(性向) (2)고대 교회 저자들의 교리적 성향 (3)변조(變造)의 가능성(고대 필사본에 다른 내용을 첨가). (4)현존하는 문서들이 그때 당시의 일반적인 신자들의 관점을 나타내고 있지 못할지도 모른다. (5)역사는 정복자에 의해 쓰여진다. (6)거짓 교리는 교회 초기 당시부터 존재했었다.
회개와 물침례
초기 속사도 시대의(A.D. 90-140) 교회 침례가 오직 믿는 자만을 위한 것이며 회개는 침례가 그 효력을 갖는데 필수적인 것이라고 가르쳤다. 루터파의 교수인 오토 하이크(Otto Heik)는 이렇게 진술한다. "침례 역시 신비적으로 작용을 한다는 뜻은 없었다. 회개와 믿음이 없이는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루터파 교수인 클롯쉐(E. H. Klotsche)는 이 당시에 있었던 믿음에 대해 "침례와 가장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은 회개다. 이것은 침례를 받기 위한 예비적인 단계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유아 세례가 용인되기 시작했을 때 신학자들은 믿음과 회개가 침례 다음에 올 수 있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로마 카톨릭의 고해성사(告解聖事)가 되었다. "원래 회개 다음에 침례를 행한 것이 유아 세례를 행함으로 그 순서가 거꾸로 되어 버렸을 때 고해(penance)는… 하나의 성례전(sacrament)의 위치를 갖게 되었다."
침수에 의한 물침례
교회사가들은 일반적으로 초기 속사도 시대의 교회는 침수세례(浸水洗禮)를 행하였다는데 의견을 같이 한다. 클롯쉐(Klotsche)는 "침수 세례를 행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초대 교회 당시에는 보편적이었다."라고 말했다. 케닛 스콧 레이토릿(Kenneth Scott Latourette)은 "침례는 침수에 의해 행해졌던 것 같으며 가장 정상적인 방법이었다."
헤르메스(Hermas: 2세기초)는 침수에 의한 침례를 기술했고 이레니우스(Irenaeus: - 202?)는 물을 붓는 세례를 비난하였다. 터툴리안(Tertulian: - 220?)은 침수에 의한 침례를 가르쳤고 유아 세례를 인정하지 않았다. 씨프리안(Cyprian: - 258?)은 물을 뿌리는 것을 주장한 최초의 변증가이지만 그조차도 침수가 표준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침례가 물에 잠기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병자를 위해 물을 뿌리는 것을 조언했다. 디다케(Didache)에서는 침수에 의한 침례를 가르치지만 만약 많은 물을 사용하는 것이 어려울 경우라면 물을 붓는 것도 허용하고 있다. 거룩한 사도의 법(The Constitution of the Holy Apostles: 2∼3세기)은 디다케와 비슷한 구절을 담고 있는데, 침수세례를 가르치지만 물을 붓는 것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동방 정교회(The Eastern Orthodox)는 서방에 있는 그들의 반대 세력인 로마카톨릭이 침수를 물을 뿌리는 것으로 바꾼 사실에도 불구하고, 유아에게까지 침수 세례를 베풀고 있다. 비록 대부분의 초기 개신교 지도자들은 침수 세례가 성경적인 방법임을 인정했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개신교들은 계속해서 카톨릭의 전통 그대로 행하고 있다. 마틴 루터는 헬라어 밥토(bapto)에 근거한 침수 방식에 우선권을 두었으며 죤 칼빈은 침수 방식이 초대 교회의 관행이었음을 인정했다. 그리고 요한 웨슬레는 로마서 6:3-5을 침수 세례로 해석했다.
구원의 필수 부분으로써의 물침례
초기 속사도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침례를 구원의 일부로 확신했다. 레이토릿은, "침례는 받기 전에 지었던 모든 죄를 씻는다고 믿었다. 침례를 받은 이후에 그리스도인은 죄를 범해서는 안되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한 "침례는 '죄 사함'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데 필요한 신생(新生)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여겨져 왔던 것 같다"고 했다.
1세기와 2세기의 침례에 관하여 종교와 윤리 백과 사전(the Encyclopedia of Religion and Ethics)은 "지배적인 사상은 죄의 용서와 거듭남과 성령의 은사 등이었다… 침례가 가져오는 변화는 '이름'과 물에서 나타났는데, 이 물은 실제적으로 효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했으며 단지 상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고 설명하고 있다. 하이크(Heik)에 따르면 속사도 시대의 교부들(post-apostolic fathers:A.D. 90-140)은 "침례는 죄 사함을 준다"라고 가르쳤다. 헬라 변증가들(A.D. 130-180)에게도 침례는 '용서와 거듭남을 위한 씻음'이었다. 그들은 "침례는 용서와 새로운 삶을 가져다 주므로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다." 라고 말했다.
침례를 받을 때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신다고 가르쳤던 다른 초기 신학자들은 순교자 저스티(Justin Martyr), 이레니우스(Irenaeus), 오리겐(Origen), 터툴리안(Tertullian), 어거스틴(Augustine)등이었다. 요한복은 3:5에 나오는 물로 거듭나는 것으로 설명하였으며 히폴리투스와 씨프리안은 물침례를 디도서 3:5에 있는 중생의 씻음(the laver of regeneration)과 동일시하였다. 거룩한 사도의 법(the Constitutions of the Holy Apostles)은 요한복음 3:5을 "물과 성령의 침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라고 의역하고 있다. 터툴리안은 침례를 받을 때 신자는 그의 죄를 씻게 되고 물로 거듭나 성령을 받을 준비가 되어진다고 가르쳤다.
이 인물들과 글들은 여러 가지 신학적 분파를 대표하고 있어서 우리는 그들의 모든 교리들을 채택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있는 것은 그들 모두가 침례의 필수성에는 의견이 일치했다는 점이다. 3세기에 있었던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이단적인 침례에 대한 논쟁은 당시의 모든 기독교도가 "오직 하나의 침례만 있으며 이 침례는 구원에 필수적이다"는데 동의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은 항상 침례의 본질을 가르쳐 왔지만 개인의 믿음과 회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유아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필요성과 타당성을 가르침으로 침례의 본질을 믿음의 행위에서 성례전(聖禮典)의 행위로 변질시켜 버렸다. 그들은 거듭남(중생)이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가 아닌 의식(儀式) 자체의 능력에서 나온다는 그릇된 견해를 가졌었다.
개신교도들 중 마틴 루터는 침례가 구원의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주장했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조(the Augsburg Confession:역자주- 1530년 루터와 멜란히톤(Melanchthon)이 공동으로 기초하여 Augsburg의 의회에 제출한 신교의 신조:초기 루터교 신조>의 제 9항은 "침례는 구원에 필수적이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루터교의 교리 문답에는 "침례는 사소한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것이며… 침례를 받아야 하며 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장 엄숙하게 명하여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루터가 강조한 믿음에 의한 칭의에 따르면 침례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유효하며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물침례를 받는 순간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신다고 주장했다.
루터 이후 대부분의 개신교들은 침례는 단지 상징적인 것이라고 가르치기 시작했지만 이러한 견해는 오히려 교회사 속에서 상당히 새로운 교리이며 모든 개신교도들이 이 이론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 외에도 그리스도의 교회(the Churches of Christ)는 죄 사함을 얻기 위해서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연합 교회(United Church of Christ)의 신학자인 도날드 블로에쉬(Donald Bloesch)는 "개종의 상징만은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또한 "신약의 전반적인 증거로 볼 때 침례 그 자체가 구원에 필수 불가결한 것은 아니라고 보일 수 있지만 회개와 믿음이 결합된 침례는 중생의 선물을 얻는 수단이 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최초의 식문(式文)
초기 속사도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식문으로 예수 이름을 사용하여 침례를 베풀었다. 하이크에 따르면 "처음에는 침례가 예수 이름으로 행해졌지만 점차 삼위일체 하나님-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는 저스틴의 저서에 있는 글에서 약 A.D. 130-140년 사이에 삼위일체의 침례 식문이 점차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결론을 이끌어 냈다. 최초의 알려진 식문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거나 또는 어떤 유사한 문구였다. 이것은 사도행전에서 발견되며 아마 헤르메스에 의해 여전히 사용되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순교자 저스틴 시대에서 삼위일체 식문이 일반화 되었다. 더 오래된 식문은 고립된 집단에서 잔존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것을 증명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는 현재 없다."
1세기와 2세기
헤스팅스의 성경 사전은 역사적 증거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끌어낼 수 있으리라는 것을 인정한다. "원래의 용어의 형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으로' 또는 '주 예수'였다. 삼위일체의 이름 안으로 행하는 침례는 후에 발전한 것이었다. 마태복음 28:19에서 삼위일체의 식문이 한번 언급된 이후에는 순교자 저스틴 때까지 다시 그 식문을 찾을 수 없으며 그의 식문은 마태복음에 있는 식문과 동일하지 않다."
대부분의 다른 교회 역사가들은 예수 이름의 침례가 더 오래된 식문이었다는데 동의한다. 2세기 초의 헤르메스는 '주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으로' 베푸는 침례에 관하여 글을 썼다. 그는 그 이름을 사용하기 때문에 침례가 생활 가운데 본질적인 변화를 일으킨다고 가르쳤지만 그러나 그 이름은 마술적인 식문이 아니며 그리스도인의 덕행이 결여되면 효과적일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록하기를 "만약 당신이 그의 이름을 가지고 있어도 그의 능력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그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또다른 2세기의 기독교 문서인 디다케에서는 '주의 이름 안으로' 베푸는 침례를 말하고 있지만 또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안으로' 베푸는 침례를 말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디다케가 두 가지 식문을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고 결론 짓는다. 그러나 우리는 원문을 수정해 넣었을 가능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학자들이 디다케의 기록 연대를 A.D 120년에서 200년으로 다양하게 추정하고 있지만 유일하게 현존하는 헬라어 필사본은 1,056의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디다케는 침수세례와, 침례전 금식, 3중 침수 세례, 그리고 달리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 물을 붓는 것과 관련된 비성경적 관행도 가르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A.D 150년에 쓰여진 순교자 저스틴의 첫 번째 변증(First Apology)는 삼위일체 식문에 대한 가장 오래된 언급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아버지시며 만유의 주되신 하나님의 이름과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이름으로 물로 씻음을 받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스틴이 현대 삼위일체의 식문을 암송하지 않았으며 정확하게 예수 이름을 포함했다는데 주의해야 한다. 아마 그것은 더 오래된 관행을 존중한 때문일 것이다.
사실 현대의 삼위일체 교리는 니케아 회의(325)와 콘스탄티노플(381)때까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따라서 초기에 현대 삼위일체 식문의 일반적인 사용에 관해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리용(Lyons)의 감독인 이레니우스(Irenaeus)는 "우리는 주님을 불러 신성한 물로 깨끗함을 받는다"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주요 저서는 분명히 저스틴의 것과 동일한 침례 식문을 기술하고 있다.
침례 식문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신성에 관한 교리이다. 익나티우스(Ignatius),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폴리갑(Polycarp), 헤르메스(Hermas)와 같은 초기 속사도 지도자들은 분명히 삼위일체론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예수를 유일하신 하나님과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으로 믿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글에서 삼위일체적인 침례 식문에 관한 어떤 언급도 발견할 수 없는데 이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이단자 말씨온(Marcion)은 그때 당시 교회에서 떨어져 나왔고 그의 추종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푸는 옛 침례를 고수하였다. 아시아의 한 장로에 의해 쓰여진 바울과 테클라의 행전(the Acts of Paul and 쏟침)은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침례를 담은 기사를 말해준다.
3세기
중요한 것은 저스틴 시대 이후에도 계속해서 예수 이름의 침례를 언급한 내용을 여전히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3세기에 '이단자'가 베푼 침례가 유효한지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다. 로마의 감독 스티븐(Stephen:로마 카톨릭은 그를 교황으로 여긴다)은 이단자의 침례도 유효하다고 주장했지만 반면에 북아프리카의 신학자인 씨프리안(Cyprian)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씨프리안은 이단자들은 아버지를 부인하고 그를 신성을 모독했기 때문에 예수 이름으로만 베푸는 침례는 그들을 구원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씨프리안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심지어 이단자에 의해 침례가 베풀어진다 할지라도 예수 이름에 능력이 있기 때문에 예수 이름의 침례는 언제나 유효하다고 주장하였다. 갑바도기아(Cappadocia)에 있는 가이사랴(Caesarea)의 감독인 퍼밀리안(Firmilian)은 256년에 씨프리안에게 서한을 보냈다. 그는 스티븐(Stephen)이 말한 "그리스도의 이름은 믿음과 침례의 거룩함에 이르게 하는 큰 유익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누구나 어디서든지 언제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면 즉시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얻는다" 라는 글을 인용하였다.
모든 논쟁은 많은 사람들이 3세기 동안에 예수 이름의 침례를 행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익명의 저자가 쓴 재침례에 관한 논문(A Treatise on Re-Baptism by An Anonymous Writer)에서 입증이 된다. 이 논문은 "비록 이단자로서 침례를 받았다 할지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고… " 또 논문은 이단에서 돌이켜 카톨릭 교회로 돌아온 사람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거론하면서 재침례를 필요하지 않다고 결론짓는다. "이미 물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은 이단자들은 오직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야 한다."
4세기
니케아 회의(the Council of Nicea) 이후로도 예수 이름의 침례에 대한 언급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예수 이름의 침례가 여전히 살아 있는 쟁점이 되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암브로스(Ambrose: 340-398)는 비록 삼위일체론자였지만 삼위일체 중 한 인격(person)의 이름으로 행하는 침례가 모든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행하는 침례와 일반이라는 근거 위에 분명히 예수 이름의 침례도 합법적이라고 생각했다.
381년에 콘스탄티노플 회의(the Council of Constantinople)에서는 특히 사벨리우스의 침례를 정죄했는데, 그 침례는 갈라디아(Galatia)에서 널리 행해진 것으로 기술하였다. 거룩한 사도의 법(the Constitutions of the Holy Apostles)은 덧붙여 4세기와 5세기에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죽음 안으로 주어지는, 한 번만 물에 잠기는 침례'를 행하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삼위일체 식문으로 세 번 물에 잠기는 침례를 행하도록 요구한다.
중세시대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교회는 약 450년 경 안디옥(Antioch)에 보내는 편지에서 사벨리우스의 침례를 정죄했고, 529년(비잔틴 제국)의 저스틴 법전(the Justinian Code)은 반삼위일체론과 재침례론에 대해 사형의 형벌을 포고했다. 553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다시 사벨리우스의 침례를 정죄했고, 브라가(Braga)의 감독인 마틴 다미언(Martin Damiun:579년 사망)은 계속해서 '하나의 이름으로 한 번 침수 세례를 행하는' 사벨리우스 침례를 정죄했다. 예수 이름의 식문을 언급한 다른 중세의 저자들은 피터 롬바르드(Peter Lombard: 1160년 사망), 휴고 빅터(Hugo Victor: 1141년 사망),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등이었다.
이 증거로부터 우리는 다음의 결론을 내린다. (1)교회 역사를 통하여 어떤 사람들은 예수 이름의 식문을 알고 있었다. (2)많은 신학자들은 예수 이름의 식문을 합법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3)반복해서 쟁점으로 다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여러 시대의 사람들은 분명히 그 관행을 계속해서 유지했다는 것이 명백하다.
종교 개혁 이후
마틴 루터는 그 당시에 예수 이름의 식문에 대한 논쟁에 직면했었다. 16세기와 17세기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주었다. 예를 들자면 1572년 죠지 스코만(George Schomann)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다. 영국의 토마스 에드워즈(Thomas Edwards)는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이란 말을 사용하는 세례는 인간이 만든 전통이며 기독교의 침례는 '오직 예수 이름으로' 주어야 한다고 가르친 어떤 '이단자들?'에 대해 글을 썼다. 19세기에는 다른 몇 영국의 단체들 뿐만 아니라 많은 플리머스 형제단(Plymouth Brethren)도 사도행전 2:38의 말씀의 권위로 침례는 예수 이름으로만 행해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역사를 통하여 본 유일신 신자들
역사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유일성의 교리(위(person)를 구별하지 않고, 육신을 입으시고 예수로 오신 한 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확신해 왔다. 이들 유일신 신자들은 삼위일체를 부정하였기 때문에 비록 역사적인 기록들은 보통 그 주제에 대해 침묵하고 있지만 추측컨대 대부분이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주었을 것이다. 다음은 예수님의 신성을 믿고 아마 그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었을 역사 속에 기록된 비삼위일체론자들의 요약된 명단이다.
(1)니케아 회의 이전(Ante-Nicene era): 속사도 교부들(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폴리갑(Polycarp), 헤르메스(Hermas), 익나티우스(Ignatius) 등을 포함, 아마도 이레니우스(Irenaeus), 몇몇 몬타누스파(Montanists), 노에투스(Noetus), 프락세아스(Praxeas), 에피고누스(Epigonus), 클레오메네스(Cleomenes), 아마도 로마 감독인 칼리스투스(Callistus)와 제피리누스(Zephyrinus), 터툴리안(Tertullian) 시대의 '대다수의 신자들', 사벨리우스(Sabellius).
(2)니케아 시대(Nicene era): 앤씨라(Ancyra)의 마르셀루스(Marcellus), 포티누스(Photinus), 코모디안(Comodian), 프리씰리안(Priscillian), 사벨리안주의자들(Sabellians).
(3)중세 시대(Medieval era): 사벨리안주의자들(Sabellians), 프리씰리안주의자들(Priscillianists), 아마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 삼위일체론자들로부터 '이단'으로 불리운 사람들.
(4)종교 개혁 시대(Reformation era): 미카엘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그의 교리는 루터와 쯔빙글리(Zwingli), 칼빈(Calvin)에게 알려졌고 칼빈의 승인으로 화형을 당하였다>, 임마누엘 스웨덴보르그(Emmanuel Swedenborg:그는 삼위일체의 오류를 인정했지만 이상하고 비성경적인 교리들을 가르쳤다), 몇몇 재침례교도들(Anabaptists), 많은 반삼위일체론자들(antitrinitarians), 윌리암 펜(Willian Penn), 많은 초기 퀘이커 교도들(Quakers).
(5)19세기: 죤 클라우스(John Clowes:영국), 죤 밀러(John Miller:미국), 몇몇 영국 회중교회 신자들(Congregationalists).
(6)20세기: 유일신 오순절 신자들, 소수의 안식일 신자들(Sabbatarians), 몇몇 은사주의자들(charismatics).
20세기
금세기에서 우리는 예수 이름의 위대한 부흥을 보아 왔다. 현대 오순절 운동은 1901년 1월 1일에 시작되었고 첫 지도자인 챨스 파햄(Charles Parham)은 이미 1901년∼1902년에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주기 시작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예수 이름으로 주는 침례에 관한 이유를 들었다. "침례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에 연합시키며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신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야 한다."
유명한 오순절 전도자인 앤드류 어션(Andrew Urshan)은 1910년에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기 시작했다. 1913년이 시작되면서 프랭크 에와르트(Frank Ewart), 알. 이. 맥알리스터(R. E. McAlister), 글렌 쿡(Glenn Cook)과 다른 여러 사람들의 지도 아래 예수 이름의 침례와 하나님의 유일성의 교리가 북아메리카 오순절 운동을 휩쓸기 시작했다. 각 사건(파햄, 어션, 1913년의 부흥)은 모두 서로 연관성이 없이 독립적인 것이었다. 매 경우가 간절한 성경 연구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조명해 주시는 특별한 경험과 함께 시작되었다.
1915년, 앤드류 어션은 오순절의 메시지를 러시아에 가져 갔는데 어션과 다른 사람들이 이미 이 진리를 발견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는데도 그곳에서 그의 몇몇 개종자들은 자신들에게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어주기를 요구했다. 이 일은 그 땅에서 오순절 운동을 일으켰다. 몇 년 후, 한 무리의 중국 그리스도인 단체가 세상에서 자신들 외에 누가 그 교리를 믿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단지 그들이 읽은 성경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유일성과 예수 이름의 침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1917년, 그들은 참 예수 교회(True Jesus Church)를 조직했는데, 오늘날에도 중국과 대만에 존재하고 있다.
초기 오순절 운동에서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포함한 많은 뛰어난 지도자들이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다. A. H. 아규(A. H. Argue), 프랭크 바틀멘(Frank Bartleman:아주사 거리의 집회 참석자이며 역사가), 이. 엔. 벨(E. N. Bell: 하나님의 성회의 두 창립자 중 한 사람이며 초대 총회장), 윌리암 부쓰-클리본(William Booth-Clibborn), 글렌 쿡(Glenn Cook), 에이. 지. 가르(A. G. Garr), 프랭크 에와르트(Frank Ewart: 초기 윌리엄 두럼(William Durham)의 협력자이며 뛰어난 부흥사), 하워드 고스(Howard Goss: 하나님의 성회의 조직자 중 한 사람이며 집행 위원회 임원들 중 한 사람), 엘. 씨. 홀(L. C. Hall), 지. 티. 헤이우드(G. T. Haywood: 유명한 흑인 지도자), 로렌스(B. F. Lawrence), 헤리 반 룬(Harry van Loon), 맥알리스터(R. E. McAlister: 유명한 전도자), 에이미 셈플 맥퍼슨(Aimee Semple McPherson), 오퍼맨(D. C. Opperman: 하나님의 성회 집행 위원회 임원), 로져스(H. G. Rodgers).
벨(Bell)은 나중에 그의 삼위일체주의 동료들로부터 압력을 받아 예수 이름의 침례를 포기해 버렸다. 처음 그는 그가 '슬픈 새로운 논쟁(The Sad New Issue)'이라 불렀던 것을 거부했지만 그 때 그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근거를 대며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었다. (1)하나님은 한동안 예수 이름의 침례에 관하여 개인적으로 자신에게 역사하셨다. (2)하나님은 그가 순종하고자 할 때까지 그의 설교의 모든 메시지를 제거하셨다. (3)이것은 사도들에게 가르치고 행했던 것이다. 벨은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이 붙은 강력한 기사에서 그가 예수 이름으로 다시 침례를 받은 사실을 밝혔지만 발간에 앞서 하나님의 성회(The Assemblies of God)는 그 기사의 상당 부분을 삭제해 버렸고 그의 재침례 사실도 삭제해 버렸다. 이 기사는 예수님이 진정으로 누구인지에 대한 그의 '새로운 비전(brand new vision)'과 그의 새로운 깨달음과 침례를 수반한 강렬한 흥분의 경험을 나타냈다. 그러나 결국 벨은 하나님의 성회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의 새로운 침례 실행을 철회하였고 1920년 두 번째로 하나님의 성회 총회장이 되었다.
이 쟁점에 대한 하나님의 성회는 1915년 예수 이름의 침례가 합법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얼마 후 하나님의 성회는 마태복음 28:19과 사도행전 2:38의 문구를 포함한 절충적인 식문을 적극 권장하였다. 결국 1916년, 이 교단은 예수 이름의 식문을 거부하고 모두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칭호를 사용하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하였다.
루이지애나(Louisiana)주에서는 하나님의 성회 교역자들 중 한 사람만 제외하고 모두가 예수 이름의 침례를 받아들였다. 마찬가지로 캐나다 오순절 성회(the Pentecostal Assemblies of Canada)도 설립자들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초기 캐나다 오순절 지도자들도 예수 이름의 침례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1919년 캐나다 오순절 성회는 하나님의 유일성을 포기하고 다시 삼위일체론으로 돌아섰고 하나님의 성회와 교제하였다.
미국 오순절 계통의 교파 중 약 25%가 하나님의 유일성을 믿고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베푼다.
게다가 몇몇 삼위일체 오순절 교단들도 침례는 예수 이름으로 베푼다.
결론
예수 이름의 침례는 분명히 교회 역사를 통하여 존재해 왔고 이제는 엄청난 부흥을 누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