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세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세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1-32)

태도는 거룩함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만약 신자가 하나님과 이웃들에 대하여 올바른 태도를 지니고 있다면, 그의 거룩함은 삶의 모든 영역에 걸쳐 나타날 것이다.
만일 그가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아무리 외적으로 거룩하게 행동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자신에게 부족한 내적 거룩함을 채울 수는 없을 것이다.
잘못된 태도는 타락의 첫걸음이며 위선의 피할 수 없는 요소이다.

사랑

사랑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세상으로부터 구별시키는 기본적인 태도이다.
모든 율법과 예언들은 다음의 두 가지 명령으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마 22:36-40, 막 12:28-31, 눅 10:27).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순종하게 한다(요 14:15-23).
사실상,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우리가 얼마나 주의 깊게 그의 말씀을 순종하느냐에 따라서 증명이 된다(요일 2:3-5).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요 15:12,17).
서로 사랑하는 것은 진정한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인 요소이다(요 13:34-35).
만일 우리가 우리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요일 4:20-21).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 된다(레 19:18, 롬 13:10, 약 2:8).
그리스도인은 원수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까지 사랑을 확장시켜야 한다(마 5:43-48).
다시 말해, 원수를 사랑하는 이러한 형태의 사랑은,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인 요소이다.
왜냐하면 죄인도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기 때문이다(마 5:46).
모든 행위와 모든 인간 관계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사랑의 필요성은 우리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는다(고전 13:8).
만일 우리가 진실로 사랑한다면 하나님과 이웃 모두와 올바른 관계를 유지할 것이다.
만일 밑바탕에 동기가 되는 사랑이 결여되어 있다면 어떤 행위나 다른 장점들도 빛을 잃고 만다(고전 13:1-3, 계 2:1-5).
다음의 두 성경 말씀은 사랑이 없이는 가치를 잃게 되고 마는 것들을 나열한다: 방언 말함, 유창한 화술, 예언, 지혜, 지식, 믿음, 희생, 봉사, 선행, 수고, 인내, 올바른 교리, 참된 리더쉽, 진정한 교제, 예수 이름에 대한 열심.

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거룩함이라는 주제에 적용해 보자.
먼저,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그분의 온전한 뜻을 순종할 정도로 사랑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 사랑한다면, 할 수 있는 한 하나님을 닮기를 원할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에 어긋나는 것들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순종하고, 또 세인들의 관점에서 불필요하고 하찮아 보이는 영역에서까지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거룩함에 대한 가르침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는 잠시 멈추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로, 만일 우리 마음 속에 다른 사람에 대한 분노나 혐오감이 있다면 우리는 아주 조심하여야 한다.
만일 우리의 거룩함과 신앙을 유지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하여 사랑하는 마음과 용서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인내하는 것, 친절하며 시기하지 아니하고 이기적이지 아니하며, 자랑치도 아니하고 예의바르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쉽게 성내지 아니하며, 타인에 대해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선한 것을 가지고 기뻐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고전 13:4-7).
우리의 행동은 하나님과 사람을 위한 이러한 종류의 사랑에 기초를 둔 것이어야 한다.
거룩함의 기준을 다른 어떤 이유로 따르는 것이나, 이러한 사랑이 없이 따르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으며 우리를 위선으로 인도할 뿐이다.

올바른 태도에 대한 중요성을 분명히 한 뒤에, 우리는 그것들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에베소서 4장31절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버려야만 할 아주 위험한 태도들에 나열되어 있다.
만일 이러한 태도들이 우리들의 삶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우리는 육체의 소욕을 채우는 것이고, 영적인 사람을 굶주리게 만드는 것이다.

증오(Bitterness)

증오는 아주 날카롭고 잔인하고 독한 것이다.
증오의 태도는 상처를 주는 말을 내뱉게 만들고 결코 들어서 좋지 않은 말들을 하게 만든다.
이것은 결코 그리스도인들에게 합당하지 않다.
어떤 이들은 영적인 사람을 잠시 내려놓고 그들의 증오심을 발산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거룩해 지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심지어는 목회자가 성도를 책망할 때에도, 개인적인 원망이나, 날카로운 잔인한 말로 해서는 안된다.
책망을 할 때가 있고 격려를 할 때가 있지만, 어떤 경우라도 결코 미움을 가져서는 안된다.

분노(Wtath)

분노는 폭력적으로 화를 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단어에는 복수를 하거나 벌을 주려는 욕구가 내포되어 있다.
우리의 육체는 언제나 복수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때로는 감정을 나타내거나 감정을 상하는 말을 함으로써 그것을 나타낸다.
우리는 때로 어떤 쟁점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분개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된다.
당신은 교리적으로 완벽할 수 있을 지는 모르나, 만일 자신을 그러한 분노에 방치한다면 당신은 역시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토론하는 다른 잘못된 태도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잘못된 감정에 이끌리기보다는 우리의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우리의 힘만으로 분노를 다스리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오직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구함으로서만이 가능하다.
특히 목회자가 성을 내거나 앙심을 품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
그런 경우에는 선도들에게 이러한 자기 통제의 부재를 설명할 방도가 없다.
우리는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다(약 1:20)

성냄(Anger)

성냄은 보통 상처나 반박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강한 불쾌감을 말한다.
단어 뜻 그 자체는 성을 내는 정도이나 그것이 외적으로 표현되는 것인지를 정확히 밝히지는 않는다.
만일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성을 낼 때는, 상대방을 비난하려는 욕망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 감정을 잘 다루고 승화시킨다면 건설적이고 심지어는 유익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예수께서는 성전을 깨끗이 하셨을 때, 죄에 대하여 분노하셨다.
그럼 어떤 때에 성내는 것이 합당하고 어떤 때에는 아니란 말인가?
사도 바울은 이야기한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 4:26).
여러분이 성냄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다른 죄를 짓게 만든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마음속에 담아두었다가 불평하게 만드는 것도 또한 잘못된 성냄이다.
이유 없는 성냄도 잘못된 것이다(마 5:22).
만일 성을 내야 할 경우가 있다면, 여러분은 그 상황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거나, 혹은 어떤 개인에게도 분을 내서는 안 될 것이다.
대신에 그러한 감정적인 힘을 잘못을 수정하는 데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관련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주고 잊어 버려야 한다.
잊기가 힘들 때는 그것을 잊을 때까지 기도할 수 있다.
어떤 상황 하에서든 간에 온유와 자기제어는 성령의 열매이고 또한 나타내어져야만 한다(갈 5:23).
목회자들이여, 만일 당신이 가르친 바를 몇몇 성도가 계속 순종하지 않는다면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겠는가?
여러분들은 개인적인 분노를 가져서는 안된다.
그들은 여러분들에게 반역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이니, 여러분들은 자신을 제어하는 힘을 잃어서는 안된다.

수군거림(Clamour)

수군거림은 크게 외치거나 불평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분은 항상 불평거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여러분은 항상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 외치지는 않는가?
어떤 어른들은 성을 내며, 마치 어린 아이가 방바닥에서 구르고 소리치고 걷어차는 것처럼 옹고집을 부리지는 않는가?
교회를 시끄럽게 하고, 끊임없이 주의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항상 요구조건을 제시하거나 교회의 발전을 가로막는다.
그들은 수군거림의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와 행위는 성경에 의해서 정죄받고 있다.

악독한 말(Evil speaking)

악독한 말은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데, 거의 시기심에서 비롯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타인들을 흉보는가?
악한 말에 의해서 얼마나 많은 문제가 일어나는가?(남의 말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4장을 보라)

악의(Malice)

악의는 고의적으로 나쁜 마음을 먹어 남을 해치려는 것을 의미한다.
악의는 남이 고난을 받게 하거나, 남이 고난받는 것을 바라봄으로서 즐거워한다.
보통 악의는 하나님의 목전에서 살인처럼 간주되는 미움의 결과이다(요일 3:15).
우리는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어떤 영역에서 죄가 정복되는 것으로 기뻐해야 하며, 그들이 설령 죄인일지라도 타인의 불행을 기뻐해서는 안된다.
사랑은 불법에서 기뻐하지 않고 진리 안에서 기뻐한다(고전 13:6).

시기와 질투(Envy and jealousy)

이러한 감정들은 증오, 분노, 악의와 깊게 연관되어 있다.
시기와 질투는 신자를 어떠한 종류의 악으로도 인도할 수 있다(약 3:16).
시기와 질투는 남의 재산이나 성공을 투덜대는 것을 의미한다.
때때로 질투와 시기는 복수심과 욕심 그리고 의심을 동반한다.
질투는 육신이 맺는 열매이고 우리를 천국에 이르지 못하게 할 것이다(갈 5:21, 약 4:5).
이러한 태도는 때때로 불쑥 불쑥 튀어나와 우리를 곤혹스럽게 한다.
어떤 신자들은 다른 형제나 자매가 교회 안에서 더 중책을 맡게 되거나, 좋은 일이 생기거나, 혹은 영적인 축복을 받게 될 때 화를 내기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시기의 영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용서(Forgiveness)

이러한 모든 잘못된 태도들 대신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서로에게 친절히 하고, 애정 어린 마음을 갖고, 용서하라고 격려 받는다.
용서는 사랑을 밑바탕에 두고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용서란 때때로 당신의 권리를 표기하고, 설사 당신이 옳을 경우에도 한 발 물러서는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는 상대방이 당신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고 느낄 때, 당신의 자존심을 뒤로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용서이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또 상징적으로 다른 뺨을 돌려대는 것을 의미한다(마 5:39).
가장 중요한 것으로 용서는 망각(Forgetting)을 포함한다.
어떤 이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용서해 주기는 하겠지만 잊을 수는 없어"
그들은 잊어버릴 수 있을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타인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을 때까지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잊어버린 척 행동하나, 후에 비슷한 일이 생길 때 불평한다.
심지어는 과거의 실수를 다시 제시함으로서 타인에 대해 유리한 위치에 서고자 하는 이들도 있다.
이것은 용서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타인을 용서해 주는 만큼만 우리를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가르쳤다(마 6:12,14-15; 18:23-35).
만일 우리 죄를 용서받기를 원한다면, 먼저 우리는 다른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쓴 뿌리(A root of bitterness)

우리가 결코 만족시킬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투덜거리고 불평한다.
결코 협조적이지도 않고 자기의 고집만 부린다.
그들은 화내기 전에는 자신의 행동을 고칠 줄 모른다.
그들은 바쁘게 돌아다니며 형제들 사이에 불화를 조성하고, 가는 곳마다 온갖 문제를 일으킨다.
도대체 그들에겐 무엇이 문제인가?
아마 그들은 히브리서 12장 15절에서 언급된 쓴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위 구절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고 그것이 없이는 주의 얼굴을 보지 못 할 것이라는 훈계 다음에 나온 것이라는 것을 유의해볼 필요가 있다(히 12:14).
이 두 구절은 함께 어우러져 다음 두 가지를 증명한다.
첫째, 거룩함은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것.
만일 신자가 거룩하지 않다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떨어지게 된다.
둘째,올바른 태도를 갖는 것은 구언에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라는 것.
신자는 쓴 뿌리에 의해서 더럽혀질 수가 있다.

쓴 뿌리는 신자의 삶 속에서 증오심의 근원이 된다.
우리의 행동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들은 마음속에 품었던 것들이다.
이 뿌리로부터 온갖 종류의 열매가 나오는데, 그것들 중 어느 하나도 성령의 열매는 아니다.
이 뿌리는 분쟁으로 인한 상대방에 대한 불평이 될 수도 있고, 특정한 상황 가운데 생긴 질투심도 될 수가 있고, 아니면 그냥 하나님께 굴복하지 않았던 어떤 마음일 수도 있다.
만일 잘못된 태도가 들고 일어나기 시작한다면, 그것의 뿌리가 무엇인지 당신의 마음속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들을 시초에 제거하라.
그리하면 훨씬 더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상대방을 판단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우리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나무의 열매를 보고있다면 당신은 그것이 사과나무인지 배나무인지 판단해야 할 필요가 없다.
열매 자체가 말해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만일 쓴 뿌리의 열매를 맺게 된다면, 타인들이 그것을 보기는 무척이나 쉬운 일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판단의 필요조차 없다.
단지, 수군거림이나 미움 그리고 이러한 근본에서 나오는 다툼을 멀리해야 할뿐이다.
만일 그러한 열매에 동참하는 사람이 된다면, 당신 자신도 그 쓴 뿌리에 더럽혀질 것이다.

어떤 일에도 상처받지 않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쓴 뿌리와 그 결과로 나타나는 나쁜 태도들과는 완전히 대조적이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시 119:165).
큰 평안은 언제나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의 결과이다(빌 4:7).
평화는 하나님에 의해서 의롭게 됨으로서 나타나는 결과이다(롬 5:1).
하나님께 진정으로 순종한다면 우리는 상처를 입지 않을 것이다.
그분의 말씀은 우리가 상처를 받아서도 안되며 또 남에게 상처를 주어도 안된다고 가르친다(마 5:29-30, 13:41; 약 3:2).
위 시편 말씀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어떤 것도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얼마나 많이 다음과 같은 말들을 들었는가:
"그들은 다른 사람들은 다 초대하고 나만 초대하지 않았어."
"그들은 나에게만 교회 안의 직분을 맡기지 않았어."
"그들은 나에게는 절대로 그런 일을 맡기지 않아."
"나는 나이로보나 직책으로보나 분명히 자격이 있는데도 그들은 그것을 나에게 주지 않았어." 라든지 "그들은 나에게 말도 걸지 않아" 같은 이야기 말이다.
얼마나 많이 우리는 책망을 받거나, 오해를 받거나, 우리가 원하는 인정을 받지 못할 때 마음의 상처를 받는가?
이러한 모든 경우에 우리는 성경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에게는 장애물이 없으리로다."
아마도 당신이 알지 못하는 다른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다.
혹은, 당신이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고 타인이 잘못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떠한 상황이든 간에 우리는 기분을 상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상대방이 용서를 구하기 전에도, 심지어는 주기도문으로 기도했다면, 당신은 당신이 남을 용서해 주는 만큼 용서해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만일 당신이 구원 얻기 원한다면, 관습이나 예의가 어긋났었다 하더라도, 당신이 옳든 그르든 간에, 상처받은 마음으로 용서하기를 거부해서는 안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아무것도 우리에게 거치는 돌이 되도록 허용해서는 안된다.
어떤 일이 생기든 간에, 우리는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사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
"나는 상처 입었어"라든가 "그 사람이 내 기분을 망쳐놓았어"라고 말하지 말고 우리가 상황을 뛰어넘어 승리할 때까지 기도하도록 하자.

책망 받을 때의 태도

우리는 책망 받거나 징계를 당할 때 다음의 각오를 굳게 지켜야 한다.
시편의 기자는 말했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시 25:4).
어떤 이들은 정반대의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마치 아무도 자신들을 책망하거나 징계하거나 권면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다.
아무튼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주권을 세우셨다(7장 참고).
최고 지위에 있는 자로부터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까지 모두들 통치 조직에 속해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베드로나 바울조차도 다른 이들의 책망을 받았다(갈 2:11-14, 행 23:3-5).
권위를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배교를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이다(벧후 2:10).
결코 마음을 높이 하여 다른 이들의 경고나 책망, 권고를 무시하지 말라.
당신이 설령 경험이 많은 그리스도인이나 연로한 목회자일지라도 당신은 구원을 위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다른 이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적절한 태도는 "나를 도와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지, "흥, 나도 당신만큼은 알아, 그리고 당신도 나보다 잘하는 것도 없잖아. 그런데 나에게 무슨 할 말이 있다고 그래?"라고 반박하는 것이 아니다.

히브리서 13장 17절은 말한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학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이 구절은 평신도나 성직자모두에게 적용된다.
그리고 또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지도자들을 세우셨다는 점이다.
그는 교회 안의 권위를 세우셨다.
둘째로,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삼상 15:22).
셋째로, 진정한 목자는 영혼을 지켜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목자는 당신이 죄를 범하거나 위험한 일을 벌이는 것을 본다면, 당신에게 경고할 의무가 있다.
만일 당신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면, 그는 당신에게 그것을 알려야 한다.
또한 당신은 그것을 화내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그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로, 인도자는 하나님 앞에 책임이 있다.
그는 당신에게 꼭 경고해야 하지만, 당신에게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당신에게 말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그와 하나님 사이의 문제이다.
당신이 그 경고를 받아들이고 행동을 바꾸느냐 아니면 자신의 길을 고집하느냐 하는 것도 당신과 하나님 사이의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심판자가 되신다는 사실이다.
그분이 후에 당신을 판단하실 때, 만일 당신이 하나님이 당신에게 내리신 권위에 대항했었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이롭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한 마디로 총명한 자를 경계하는 것이 매 백 개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히느니라"(잠 17:10).
만일 당신이 합당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단지 몇 마디의 말을 듣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스스로를 책망 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스스로가 멸시하는 태도를 가진 악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와는 달리, 당신이 만일 현명하다면 당신을 책망하는 사람을 존중하게 될 것이다(잠 9:7-8).
좋은 결과가 있기 위해서는 책망을 하는 사람과 책망을 받는 사람 모두가 올바를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러면 목회자도 책망 받을 수가 있나?
성경 어디에도 목회자가 책망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시사하고 있지는 않다.
물론, 그는 같은 귄위의 목회자나 혹은 더 큰 권위를 가진 목회자에게 책망을 받아야 한다.
사실상, 바울은 디모데에게, 죄 가운데 사는 목회자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책망을 받게함으로서 다른 모든 사람들이 배울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딤전 5:20).
그러나 많은 경우에, 책망을 받은 사람이 그의 "친구들"로부터 많은 동정과 위안을 받음으로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반항하는 마음을 가지는 일이 종종 있다.
이러한 일이 생길 때는, 아무도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예비하신 것을 배울 수가 없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3:16, 4:2).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책망과 바르게 함을 위해서 주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직자의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함으로서 교훈하고 책망하고 권고하도록 권위가 부여되어 있다.
이것을 마음에 새김으로써 우리가 경책을 받게 될 때 올바른 태도를 가지도록 하자.
우리는 다음과 같이 기도해야 한다.
"당신의 길을 보여 주옵소서.
주여, 당신의 완전한 곳으로 인도하소서.
너무 늦기 전에 저의 잘못을 깨닫게 해 주시고, 제가 주의 말씀을 듣거나 책망을 받을 때 올바른 태도를 갖게 해 주소서.
제가 핑계를 대거나 자신을 정당화시키지 않도록 하소서.
반항하지 않고 당신께 순종하는 것을 배우게 하소서.
저를 가르치고 책망할 수 있을 만큼 사랑이 많은 인도자를 허락하소서.
당신의 진리를 가르쳐 주소서."

원망과 불평함

우리의 영적인 지도자에 대한 태도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 짓기 위해, 중얼거림에 대하여 다루어야 한다.
유다서 15,16절에 의하면, 중얼거리며 불평하는 것은 불경건한 일이다.
그리스도인의 방법은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격려하고, 타이르는 것이다.
바울은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4)라고 말한다.
만일 문제가 있을 경우에, 성경적인 방법은 당신이 당신과 의견이 다른 형제에게 찾아가서 차이점을 해결하는 것이다(마 18:15).
말로나 글로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분쟁을 심는 것과 같다.(4장 참고)

평범한 사람이나 회중을 불평하게 만드는 일은 아주 쉽다.
아주 작은 불편함, 잠깐동안의 물이나 식량, 의복의 부족은 모든 사람을 시험에 처하게 할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을 지키시는 하나님이 없이는, 우리는 우리의 욕망이나 열정의 노예가 된다.
이스라엘인의 예를 들어보자.
그들은 광야에 나간지 두 달째 되는 달부터 그들의 기분을 드러내가 시작했다(출 16:1-3).
출애굽기 한 권에만 그들이 하나님의 계획과 그들의 인도자에게 내어놓았던 불평거리가 열 두 가지나 나온다.
단지 몇 달 안에 끝낼 수 있었던 여행길을 40년간이나 했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그들의 불평은 하나님에 세우신 권위에 대한 불신과 경멸에서 비롯되었다.

유다서 11절은 우리에게 고라의 반역을 범하지 말 것을 가르쳐 준다.
그는 모세를 비판하고 그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무슨일이 일어났는가?
하나님께서는 지구가 입을 열어 그와 그를 따르는 자들을 삼키게 하셨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판하였을 때, 성경은 주께서 그것을 들으셨다고 말하고 있다(민 12:2).
당시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보다 나이도 많았고 또한 그의 가족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똑같이 책망하셨다.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에 대하여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하나님께서 물으셨다.
미리암은 그 벌로서 7일간 문둥병에 걸려야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불평하고 원망해서는 안된다.
더욱이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말할 것도 없다.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빌 4:11).
만일 당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느낄 때,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못된다.
그에 대한 해답은 기도하고 그 문제를 일으킨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찾아가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다.
복수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다.
모든 갚는 것을 그분께 맡기도록 하자(롬 12:19).

올바른 태도에 대한 아주 좋은 예는 다윗과 사울 왕의 관계를 들 수 있다.
사울은 분명히 다윗에게 잘못을 했고 심지어는 그를 죽이려고까지 했다.
그는 하나님이 그를 버리는 시점까지 그의 죄를 이어갔다.
그리고 사무엘은 벌써 다윗에게 이스라엘의 다음 왕으로 기름을 부어 놓기까지 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두 번이나 사울을 죽일 수 있었는데도 그 유혹을 거절하였다.
사울이 왕인 이상은, 다윗은 그에게 해를 입히고자 하지 않고 하나님이 친히 갚아 주시기를 기다렸다.

당신은 혹, 불평하거나 원망하고 있지는 않은가?
만족하고 기도하는 것을 배우라.
만일 필요하다면, 올바른 자세를 가지고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배우라.
만일 전혀 도움이 되지 않거나, 문제를 악화시키거나, 당신이 겸손하고 용서하는 자세로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아무에게도 이야기 하지 않는 편이 차라리 낫다.
불평하는 것은 전염적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된다.

남의 일을 간섭함(Busybodies)

지금까지는 우리의 영적인 지도자들에 대한 태도를 논의했으므로, 이제부터는 우리의 이웃들, 특히 믿음의 형제 자매들에 대한 태도를 논의하고자 한다.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은 항상 타인의 일에 관심이 많고 그들이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일에 항상 바쁜 사람들이다.
베드로 전서 4장 15절은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라고 가르친다.
바울은 또한 남의 일을 참견하는 사람을 조심하고 가르친다(살후 3:11, 딤전 5:13).
잠언 20장 3절에 의하면, 참견하는 사람은 바보이다.
어떤 이는 모든 사람의 일들에 대하여 조금씩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온갖 종류의 문제에 얽혀 있다.
많은 경우에 그들은 교회의 징계 건에 뛰어들어서 목사님의 문제를 풀어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그들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문제에 기름을 더 끼얹을 뿐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이웃에 대해서는 저주이며, 교회에 있어서는 질병과 같다.
그들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들을 알려고 하며, 자신들이 중요하고 또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느낀다.
사실상 그들에게 신임이 요구되는 일들을 맡길 수는 없다.
결과적으로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은 목회자로서의 자질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참견하려는 기질이 있지는 않은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타인의 삶에 대하여 지나치게 호기심이 많다면, 하나님께, 그러한 태도를 버릴 수 있도록 구하여야 한다.

교만과 교만한 눈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눈을 미워하신다(잠 6:17).
그는 교만한 자를 멀리하시고 마음이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
교만은 사단을 타락하게 만든 죄이고, 또 그것을 마음에 품는 모든 자들의 타락과 멸망을 초래하는 것이다(사 14:12-15, 잠 16:18).
이생의 자랑은 그리스도인을 유혹하는 세상의 세가지 범주들 중의 하나이다(요일 2:16).
세례 요한과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교만을 아주 엄하게 질책하는 설교를 하였다.
이렇게 격렬한 표현들이 당시 죄인이라고 생각되던 사람들이 아니고 당신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퍼부어 졌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따라서 우리는 가장 교만의 죄에 빠지기 쉬운 사람들은 종교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이러한 태도를 가지지 않도록 아주 조심해야 한다.
거룩함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기 쉽고, 따라서 다른 이들을 비판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교만이고 위선이다.
설령 세인들이 우리를 가장 거룩한 사람들로 여기더라도, 만일 우리가 교만함으로 가득 차 있다면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옳다는 인정을 받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예로서, 바리세인의 기도와 그와 비교되는 세리의 기도에 관한 성경의 기록을 읽어 보라(눅 18:9-14).
하나님께서는 바리세인의 거룩한 기도는 거절하시고 세리의 가슴에서 우러나는 기도는 들어 주셨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것에 주의해야 한다.
첫째는, 당신이 거룩함의 기준과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결코 교만해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교만한 시선으로 타인을 바라보지 말 것이다.
목회자들은 특히 위의 두가지 잘못에 빠지기 쉽다.
하나님께서는 심지어는 교만한 눈길마저도 싫어하시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가짐과 행동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목회자들이여 당신들이 신도들에게 설교할 때 교만해 보이지는 않는가?
심지어는 성경을 들고 돌아다닐 때 교만해 보이는 것은 아닌가?

교만은 우리가 얼마나 영적이든 간에 항상 염두에 두고 주의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영적으로 승리하면 할수록 마귀는 우리를 교만하게 하기 위해 유혹한다.
우리는 겸손함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또한 가식적인 겸손함을 주의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남들에게 얼마나 겸허한 태도를 취하는가를 증명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은 자신들이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교만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스스로를 진정 겸손하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분명히 겸손 한 것이 아니다.
당신이 겸손함을 구비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 당신은 겸손함을 잃은 것이다.

교만과 교만한 시선을 멀리하는 길은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라.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라.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가치 없는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을 누려온 것을 생각해 보라.
이러한 종류의 기도는 대체로 수분동안에 끝나는 것이 아니고 몇 시간씩 걸리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기도를 통해 당신의 영혼이 변화를 받은 후에는, 일어나 당신이 기도한 것과 이러한 변화를 겪은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교만함을 멀리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기도를 주기적으로 해야만 한다.

오늘날 우리가 다루어야 할 문제들이 두 가지 더 있다.
그것들이 태도에 관한 문제라서 다루어 져야 하므로 이 장에 포함시키기로 한다.

여성 해방에 대한 태도

여성 해방 운동은 하나님의 말씀과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 몇몇 있으나 많은 면들이 그와는 상치된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성경은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여성은 남성만큼 지적이며, 또한 하나님의 계획에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안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갈 3:28).
성경 전체를 통틀어, 하나님께서는 여성들을 예언자로서, 사사로서, 교사로서, 집사로서, 복음의 일군들로서 사용하셨다(삿 4:4, 사 8:3, 행 18:26,21:9, 롬 16:1, 빌 4:3).
이것을 우리의 일상생활의 삶에 적용함에 있어서, 만일 여성이 세상에서 직업을 가지고 있고 또한 같은 직업을 가진 남성만큼 일을 한다고 한다면, 그녀는 같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또한 우리는 모든 아내가 자신의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믿는다(엡 5:22, 골 3:18, 벧전 3:1).
어떠한 구성 단위에서든지 최고의 권위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가정의 최고 권위를 남편이 가지게 하셨다.
그 권위와 더불어, 남편은 그의 가정을 부양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는 자신의 아내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는 것같이 사랑하고 아껴야 한다(엡 5:25, 골 3:19).
그렇지 않으면 그의 기도가 막히게 된다(벧전 3:7).
여자는 남자의 옆구리에서 나왔지 그의 머리나 발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아내는 남편을 인도해서도 안되고 그의 발 밑에 있어도 안된다.
아내는 돕는 배필이 되어야 한다(창 2:18).
일단 결혼한 후에 그녀의 첫 번째 책임은 남편을 돕고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다.
성경은 혼외정사와 동성애를 강하게 정죄하고 결혼과 가정의 가치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4장 참고).
이러한 이유로, 소위 많은 여성해방운동들은 성경과 대치된다.

그래도 질문은 남는다.
여성은 남성들에게 복종해야 하는가?
남성이 다른 아무 여성들에게 대해서도 자신의 권위를 주장할 수 있는가?
대답은 "아니오"이다.
여자는 자신의 남편에게만 순종하면 된다.
남편 외의 다른 남자는, 성에 관계없이 권위를 가지고 있는 직책에 있을 때라야 만이 여성에게도 권위를 가지게 된다.
바울에 의하면,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여성은 또한 자신을 주관하는 남자를 두어야 한다고 한다.
바울은 여성이 공회를 중단하고 질문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 당시에 남성들이 가진 특권들 중의 하나였다(고전 14:34-35, 딤전 2:11).
그는, 만일 남성의 권위 하에서 이루어지고 또 질서 가운데서 이루어진다면, 여성의 예언할 수 있는 권위를 인정했다(고전 11:5, 딤전 2:12).

영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여성은 성령의 충만을 받은 남편의 지도를 따라야 한다.
만일 그가 성령을 받지 못했다면, 그녀는 남편을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해서 남편의 가정내의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벧전 3:1-2).
개인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는 문제나 교리 그리고 영적인 경험들에 관해서 여성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에 충실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개인적인 차원에서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 안의 모임에서의 자세들

교회 조직이나 행정, 권위에 관한 주제는 7장에서 더 자세히 다루고 있다.
여기서는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는 최초의 총회를 분석하고 어떻게 그것이 이루어졌나 보고자 한다.
그 총회에서는, 아주 중요하고 논란의 소지가 많은 문제가 결정되어야 했다.
그것은 유대인의 율법적 행동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필요한가 하는 것이었다.
사도와 장로로 구성된 사절단들이 교회의 목사들과 지도자들을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왔다(2, 4절).
양편은 중요한 문제들을 다 이야기하고 아주 오랜 시간 논쟁을 벌였으나(7절), 마침내 몸인 교회로서 지지할 결론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들이 결정한 문제들에 대해 설명하는 편지들이 다양한 교회들에 보내졌다(15:23, 16:4).
그들이 처음에 가졌던 날카로운 의견대립에도 불구하고, 일단 결정이 된 후에는 한 지체로서 움직였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교회는 천거서를 보내고 또 특별헌금을 모을 때도 한 지체로서 움직였다(행 18:27, 고후 8:19).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고 도왔으며 심지어는 필요할 때 서로 책망하기도 했다.
바울은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않는 것을 보았을 때" 베드로와 다른 이들을 책망했다(갈 2:14).

사도행전 15장에서 일어난 일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다수의 형제들이 주도한 민주주의적 토의였다(행 28).
이 결정 후에, 교회는 그것을 따르는데 있어서 연합되었다.
오늘날 우리들은 모임을 가지면서 종종 민주주의를 오해한다.
그것은 교리적인 것들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하면서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귀를 막는 것이 아니다.
다른 대부분의 형제들이 당신이 원하지 않는 결정을 내릴 때, 당신은 그 결정을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따라야 한다.
이것은 수군대거나 불평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당신은 불화의 씨를 뿌리는 책임이 있다.
올바른 자세는 비교리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다수의 의견을 수용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의 형제들을 신뢰한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 그들 중의 다수를 인도하셨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당신의 형제들을 사랑한다면, 그들 다수의 의견을 따를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지도자들은 "내가 리더니까 당신은 시키는 대로만 하시오" 같은 태도를 가져서는 안된다.
바울은 하나님의 유업의 주인이 되지 말고 양떼의 모범이 되라고 목회자들에게 말했다(벧전 5:3).
성도들과 목회자들 모두는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형제사랑을 보여야 한다(롬 12:10).

그렇다면 모임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하나?
참여자들은 화를 내거나 선동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어떻게 그런 태도로 모임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설교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만일 서로간에도 잘 지낼 수 없다면, 어떻게 그들이 타인을 돕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모임은 업무를 다루는 장소가 되어야 하고 또한 교제와 치료, 부흥과 성령의 충만을 받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확신을 얻고 다른 이들이 우리가 사랑하는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듣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바로 그게 내가 믿는 거야"라고 우리를 말하게 만드는 성경의 진리를 다른 이들이 설명하는 것을 듣는 것은 정말 참신한 일이다.
그러한 경우에 모임은 수군거림과 불평, 논쟁이 아닌 상호간의 격려를 위한 장소가 된다.

우리는 외고집의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음, 그래도 그냥 해야지,"
"만일 그들이 내 식으로 하지 않으면 나는 빠질 거야" 혹은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사람은 필요 없어."

성결함의 가장 중요한 요소

올바른 태도는 성결함의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잊지 말도록 하자.
겸손함과 배우려는 자세,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살려는 신실한 소망은 항상 더 큰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게 한다.
내적인 거룩함은 외적인 거룩함으로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외적인 거룩함으로 내적인 거룩함을 판단할 수는 없다.
우리는 자주 이러한 사실을 잊는다.
왜냐하면 외적인 거룩함을 보고 비교하는 것은 쉬우나 내적인 거룩함을 분별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태도나 자세가 훨씬 더 제어하기 어려운데 반해서, 외적인 거룩함은 때때로 가장 처음에 순종하게 되는 초보적인 것들이다.
외적인 거룩함을 위반하거나 육체의 죄를 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태도는 당신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할 것임을 기억하라.
우리가 교만함이나 수군거림, 분쟁의 씨앗을 뿌리거나 우리의 거룩함을 손상시킬 악한 태도나 분노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살펴야 한다.
거듭났으면서도 외적인 거부감을 보이는 그리스도인, 특히 목회자로서 이러한 태도가 자신의 마음에 들어오게 허락함으로서 하나님 안에서 실패한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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