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성전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린도전서 6:19; 3:17)

우리의 몸

위에 인용된 두 성경 구절은 우리의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몸을 더럽혀서는 안되며 거룩하게 보존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몸으로 지을 수 있는 모든 죄에 적용된다.
이 장에서 우리는, 우리의 육신을 손상시키고 또 더럽히는 몇 가지 실제적인 것들에 대해서 논의하고자 한다.
위의 성경구절들은 더 많은것들을 포괄하고 있겠지만, 특히 육신적으로 우리를 더럽힐 수 있는 것들을 의미할 수 있다.
이 장에서 우리는 음식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과, 술, 담배 그리고 마약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음식

창조 직후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식물과 곡식 그리고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제외한 다양한 과일들을 음식으로 주셨다.
모든 녹색 풀들은 동물들의 먹이로 주어졌다(창 1:29-30, 2:16-17).
홍수 이후에는,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식물과 동물까지도 포함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식량으로 주셨다.
단 한가지의 제한은 피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다(창 9:1-4).
하나님께서 식량을 식물로 주셨을 때 한 가지의 열매를 제한함으로서 하나님의 주 되심과 또 아담에게 그 관계를 기억하게 하셨다는 것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동물들을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하실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분만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제한을 두셨다.
그것은 바로 피였다.

레위기 l1장과 신명기 l4장에서 주어진 모세의 율법은 생활에 관한 다양한 규칙을 포함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이스라엘인들은 되새김질을 하고 굽이 갈라진 모든 동물들을 먹을 수 있었다(레 11:3).
이 제한에서 금지된 동물들은 낙타와 토끼, 산토끼 그리고 돼지였다.
비늘과 지느러미가 없는 물고기 또한 부정했다(레 11:10).
썩은 고기를 먹거나 다른 짐승들을 잡아먹는 스무 종류의 새들도 부정한 것으로 기록되었다(레 11:13-19).
메뚜기와 딱정벌레, 베짱이를 제외한 모든 날아다니는 곤충들도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음식에 관한 율법의 주된 목적은 이스라엘 사람을 다른 나라 사람들로부터 구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율법들의 또 다른 목적은 불결한 음식을 먹지 않게 함으로서 그들이 병에 걸리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자면, 돼지고기는 병균에 감염되거나 올바로 조리되지 않았을 때는 선모충병의 원인이 되었다.
당시에는, 도살과 조리, 소독이 우리의 상황과는 많이 달랐기 때문에, 음식에 관한 율법은 의학적으로 유익이 있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우리는 신약의 교회가 모여 유대인의 음식에 관한 율법이 그 당시의 교인들에게 적용되는 가를 의논하기 위해 모인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방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네 가지 규칙을 발견할 수 있다.
1.우상의 죄악으로부터 멀리할 것.
이것은 우리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과 우상 숭배시에 성행하던 성적인 타락 등, 우상숭배와는 아무런 연관도 가지지 말라는 것을 의미한다.
2.음행을 멀리할 것.
여기서 사용된 '음행'이라는 말은 간음과 동성연애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성적인 죄악을 의미한다(9장 참고).
3.목을 매달아 죽인 것을 멀리할 것.
여기에 관한 언급은 레위기 17:13-14 절이다.
동물을 죽일 때는 항상 도살해서 짐승의 몸에서 피가 흘러나오도록 해야 했다.
만일 동물을 목을 매달아 죽인다면, 피가 그 안에 남게 되므로 그 고기를 먹는 사람은 금지된 피를 같이 먹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4.피를 멀리할 것.
피에 관한 것을 포함하고 있는 모든 율법은 여기에 포함된다.
피를 먹는 것만 금지되는 것이 아니라, 살인이나 자살 같은 모든 피 흘림은 같이 금지되어 있다(10장 참조).

그 결과로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피를 포함한 음식을 먹지 않고, 또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지 않으면 된다.
부정한 음식에 대해서 언급된 레위기의 율법 중 어떤 것도 사도행전 15장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바울은 음식에 관한 율법들은 장차 올 것의 그림자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것들은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을 미리 나타낸 것이다.
특정한 모세의 음식에 관한 율법에서, 바울은 말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으로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골 2:16-17).



피를 마시는 것과 피를 포함하고 있는 고기를 먹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식생활에서 금지된 두 가지 것들 중의 하나이다.
왜 그런가?
우리는 이 법칙이 모세의 율법수여 이전에 제정되었고 또한 계속된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안에서 여러 번 피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다(창 9:4; 레 7:26; 17:10-14; 신 12:23-25; 행 15:20,29; 21:25).
그 이유는 동물과 사람의 생명은 피에 있기 때문이다(레 17:14).
현대과학은 피가 산소와 영양분을 몸의 각 부분에 전달해 준다고 밝힘으로서 그 사실을 증명하였다.
모든 세대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피를 통해 생명을 나타내셨고 또 죄를 속하는 도구로 사용하셨다(히 9:22).
결과적으로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피를 먹어서는 안된다.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또 한가지의 제한점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8:1-13과 10:23-33에서 이 주제에 대해서 가르친다.
이 구절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음식간의 관계이다.
바울의 기본적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사람은 우상과 우상의 제물에 관해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며, 다만 한분의 하나님만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도 아무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상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고전 8:4).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몇 가지 원칙들을 고수함으로서 다른 이들이 우리를 오해하지 않도록 해야한다.
우리는 식사시에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은 먹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우상의 제물을 준비하는 것을 도와서도 안된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우상 숭배자들에게 우리가 그들의 우상숭배를 묵인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만일 믿음이 연약한 형제가 이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을 본다면, 이것은 그에게 거치는 반석이 될 수가 있다.
두가지 경우에 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가지고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치게 된다(고전 8:7-9).
이런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우상이나 다른 영에게 음식을 바치는 행사에 참여해서는 안된다.

이제, 어떤 이가 그리스도인이 출처를 알지 못하는, 그러나 사실은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을 가져다준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스도인이 그것을 먹으면 죄를 짓게 되는 것인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상이 아무것도아닌 줄을 알기 때문이다.
바울의 시대에는, 상당량의 고기가 이방인의 재단에 바쳐졌고 그 제사장들은 그것들을 먹을 수 없었으므로, 제사 후에 남은 음식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그것을 먹는 것이 죄인가 하는 질문이 일어났다.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시장에서 파는 음식이 우상에게 바쳐졌던 것인가 구분할 수 있다는 말인가?
바울의 대답은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전 10:25)였다.
만일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이 제공될 법한 잔치에 초대받아 가게 되었을 때는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바울은 가르친다(27절).
만일 그 음식이 그 잔치에서 우상에게 바쳐졌거나, 어떤 사람이 그 음식이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이라고 말을 해준다면, 그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은 그 그리스도인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28-29절).
우리는 또한 우상숭배는 사실은 사탄을 숭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상숭배와는 아무런 연관도 맺지 말아야 한다(20절).

마지막 때에는, 어떤 선생들이 일어나서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딤전 4:3)이라고 했다.
그러한 결혼이나 특정한 종류의 음식을 반대하는 가르침은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된다.
결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해 지고 음식은 기도와 감사에 의해서 정결하게 된다(4-5절).
신약성경에는 특정한 종류의 음식에 관한 제한은 없다.

절제와 폭식

우리는 식사 습관에서 항상 절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성령의 전이고 우리의 몸을 더럽혀서는 안된다.
우리가 무엇을 먹을 수 있고 무엇을 먹을 수 없는지에 대한 목록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성령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우리를 인도하실 수 있다.
실제적인 문제로서, 우리는 몸에 맞지 않는 음식들은 피해야 한다.
만일 어떤 음식이 당신의 몸을 괴롭게 하거나 아프게 한다면, 그것을 피하라!

우리는 음식을 탐해서는 안된다.
과도한 식탐은 죄가 될 수도 있다(잠 25:16).
예수께서는 우리가 폭식으로 비만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는 토하기 직전까지 먹기도 한다(눅 21:34).
어떤 이들은 건강을 이유로 술, 담배는 하지 않으면서 건강에 치명척인 수준으로 폭식을 하기도 한다.
과식과 적절하지 못한 식사 습관은 많은 병의 원인이 되고 결국은 생명을 단축시키게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남용하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신자들의 절제 못함을 비판하면서 자신 스스로는 식사 습관의 영역에서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다면, 그것을 바라보는 불신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겠는가?
목회자가 너무 많이 먹고 또 운동 부족으로 뚱뚱 하다면 어떤 인상을 남기겠는가?
우리는 음식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가지고 있지만, 또한 상식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한다.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삼가야 한다.

절제는 중용과 자기통제를 뜻한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형태로든 육체의 운동이나 감정적인 활동을 할 때 우리의 슬로건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영역에서 자신을 지배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모든 일에 절제하는 것에서 가능해 진다(고전 9:25).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잠 16:32).
자신의 마옴을 지키지 못하는 자는 마치 성벽이 없는 성과 같다(잠 25:28).
우리는 우리의 몸을 복종시켜야 한다(고전9:27).
우리는 오순절 날에 일어났던 일처럼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성령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에도 복종시켜서는 안된다(롬 6:12-13).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우리는, 우리를 중독시킬 만한 것이나 술 취하게 할 만한 것같이, 우리 스스로를 자제하지 못하게 하는 어떤 것들도 허용해서는 안된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한다면 죄에 대한 저항력도 약해질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대로 우리를 사용하실 수 없게 된다.

음료

율법은 음료에 대해서는 자유로웠으나(신 14:26), 구약성경 내에서도 하나님께서 독한 술을 정죄하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잠 20:1, 사 5:11).
신약은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이야기한다(고전 10:31).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생각하면서, "이것을 먹거나 마시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 될까"하고 자문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를 중독 되게 하거나 자제력을 잃게 만드는 것들을 먹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고전 6:12).

커피와 차, 그리고 탄산음료
이러한 음료들은 카페인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자극이 약한 각성제가 된다.
이것은 몸에 해롭거나 중독성이 아닌 이상 꼭 나쁜 것은 아니다.
만일 당신이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를 한잔 마시지 못해서, 신경과민이 된다거나 짜증이 난다거나 혹은 몸이 아프거나 한다면 당신은 그 습관을 깨 버리는 것이 좋다.
우리는 아무것도 우리를 제어하거나 지배하게 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몸은 성령의 소유이다.
만일 우리가 그 외에 다른 것에 굴복한다면, 우리는 그것의 종이 된다(롬 6:16).
결론은 다음과 같다:
만일 커피나 차, 콜라나 다른 어떤 것이라도 몸에 해롭거나 습관성이 된다면, 그것들을 제어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알코올이 섞인 음료

성경은 술취하는 것에 대한 경고로 가득 차 있는데 특히 포도주에 대해서 경고한다.
잠언은 포도주와 다른 독주에 대해서 몇 가지 정죄를 하고 있다.
"포도주는 거만케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잠 20:1).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잠 23:31).
두 번째 구절은 명백히 발효가 된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는 것에 대한 경고이다.
포도주와 혼합된 술의 결과는 고뇌와 슬픔, 말다툼과 수다, 상처와 충혈된 눈, 성적 범죄와 점잖지 못한 대화, 비틀거림과 무신경 그리고 중독이다(잠언 23:29-35).
포도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부해지지 못할 것이다(잠 21:17).

구약성경을 통틀어서, 하나님께 헌신되고 구별된 사람들은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못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나실인들은 그것을 마실 수가 없었다(민 6:3, 삿 13:7).
세례요한도 술을 마시지 않았다(눅 1:15).
왕과 그의 자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술은 그들로 하나님의 법을 잊게 만들고 정의를 배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잠 31:4-5).
제사장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성막에서 섬길 때에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레 10:9, 겔 44:21).
오늘날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구분된 사람들이다.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들이며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다(계 1:6, 벧전 2:9, 롬 12:1).
그러므로, 우리가 독주를 마셔서 되겠는가?

포도주를 마심으로 기인한 죄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노아는 술에 취해서 자신의 몸을 욕되게 했으며 또한 다른 사람들을 당황시키고 죄를 짓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다(창 9:20-25).
롯은 술에 취해서 자신들의 친딸들과 근친상간을 저질렀다(창 19:32-38).
다른 많은 구약의 성경구절들이 술취하는 것을 정죄한다.
이사야는 술취함을 정죄하였다(사 5:11).
그는 또한 독주가 사람들과 제사장들 그리고 선지자들을 실수하게 만들고, 길을 잃게 하고 결국은 영적인 통찰력을 잃게 한다고 말했다.
포도주는 마치 창녀가 그러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다(호 4:11).
하박국은 이웃으로 술 취하게 하는 자에게 화가 있다고 선포하였다(합 2:15).

신약성경에서는, 술취함은 사람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죄로서 간주되고 있다(고전 6:10, 갈 5:19-21).
예수님과 바울과 베드로는 술취함에 대해 경고하였다(눅 21:34, 롬 13:13, 엡 5:18, 벧전 4:3).
감독과 집사와 나이든 부녀들은 특히 술을 마시지 말라는 요구를 받았다(딤전 3:3,8; 딛 1:7, 2:3).
이러한 모든 구절들을 살펴보면, 그리스도인들이 알코올이 포함된 술을 마시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은 명백해 진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포도주 마시는 것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성경구절들을 오용함으로서 자신들의 음주를 정당화하려고 시도한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포도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공부하는 것이 좋다.
아래의 연구는 스트롱의 히브리어 및 갈대어 사전과 신약 헬라어 사전에 기초를 두고 있다.

구약성경에서 '포도주'라고 번역되는 두 가지 중요한 히브리 단어가 있다.
다른 아홉 가지의 '포도주'를 나타내는 단어들은 아주 제한된 경우에만 사용되었을 뿐이다.
야인(Yayin)은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인데, 그것은 모든 종류의 포도주를 포괄적으로 의미한다.
그것은 주로 발효된 포도주를 의미한다.
야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몇몇 구절들은 분명히 발효된 포도주를 말하고 있다(창 9:21; 19:31; 삼하 13:28; 에 1:10; 잠 20:1; 23:31; 31:4).
또 야인은 신선하게 만들어진 발효되지 않은 포도주스를 의미한다(사 16:10, 렘 48:33).

포도주를 의미하는 자주 사용되던 또 다른 히브리 단어는 티로쉬(tiyrosh)이다.
티로쉬는 거의 모든 경우에 방금 만든, 발효가 되지 않은 포도주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십일조로 드려지던 포도주를 의미하는 경우에만 사용 되었다-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발효가 이루어지기 전에 포도주의 십일조를 먼저 원하셨기 때문이다(신 12:17, 14:23, 느 13:5).
이 단어는 "곡식과 포도주"라는 어구에서 사용되었다(창 27:28, 37, 신 7:13 외).
그것은 많은 장소들에서 "새 포도주"라고 번역되었다(잠 3:10, 욜 1:10 외).
그리고 다른 한 곳에서는 "단 포도주"라고 번역되었다(미가 6:15).
1956년 성경전서 한글 개역판에서는 그냥 '포도주'라고 번역하였다.(역자주-이 단어는 또한 이사야서 65장 8절에서 사용되었는데 "포도송이의 즙"을 말하고 있다).
이 구절들로 볼 때, 포도주나 새 포도주라고 번역된 티로쉬라는 단어는 발효되지 않은 포도즙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헬라어 오이노스(oinos)는 신약성경에서 포도주를 말하는 원래 단어이다.
그것은 보통 발효된 포도주를 의미하나 히브리 단어처럼 발효시키지 않은 포도즙도 의미할 수 있다.
적어도 세 군데 이상의 신약 성경구절에서 오이노스를 이와 같은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다(마태 9:17; 막 2:22; 녹 5:37).
이러한 성경구절들은 발효되지 않는 새 포도주는 헌 부대에 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포도주가 발효될 때는 헌 포도주를 터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글레우코스(gleukos)라는 헬라어 단어는 새 포도주라고 번역되어(행 2:13) 단 한 번만 사용되었다.
그것은 방금 만든 포도주(포도즙)나 단 포도주를 의미한다.

우리가 살펴본 결과로서, "포도주"라고 신구약에서 나온 단어는 발효되거나 발효되지 않은 포도주 모두를 의미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또한 신약성경 당시의 역사로부터, 포도주는 가정에서 음용되기 전에 많은 비율로서 희석되었고 또 포도즙을 보관하는 방법도 잘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과 또한 성경이 포도주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는 사실로 비추어 볼 때, 성경 속의 포도주에 대한 언급들이 강한 술을 마시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고는 보기 힘들다.

우리는 구약성경 속의 사람들이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증명하려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술을 마셨다.
그리고 또한 많은 해로운 결과가 따라 온 것도 알 수 있다.
또한, 그들은 율법 아래에 있었으므로 그것을 극복할 힘이 없었다.
율법은 단지 사람들이 얼마나 죄 가운데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줄 뿐이었다.
만약 율법이 완벽한 것이었다면, 은혜시대는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준에 맞추어 살아야 하고 또 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기적을 가지고 그들이 술을 마시는 것을 합리화한다(요 2:1-11).
하지만 예수께서 만드신 포도주가 술 취하게 하는 것이라는 증거가 없다는 것을 주목하라.
10절에서 손님들 이 취했다는 언급은 없다.
단지 앞서서 주인이 내온 포도주 때문에 취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술취함은 죄이고 하나님께서는 싹도 죄짓기를 원하지 않으신다(갈 5:21, 약 1:13).

또한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충고는 어떤 이들을 혼동시킨다.
"이제부터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전 5:23).
바울은 디모데에게 물만 마시지 말고 포도즙을 마셔서 원기를 회복하고 위통을 다스리라고 충고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비위생적인 물을 마시지 말라고 충고했음직하다.
아니면 순전히 의학적인 목적으로 포도주를 사용하라고 권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바울은 디모데에게 몸에게 오히려 해를 주기만 할 강한 술을 마시라고 권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이 예수님의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에서 포도주가 사용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대신에 "포도나무에서 난 것"이라고 나와있다(마 26:29, 막 14:25, 눈 22:18).
의심할 바 없이, 이러한 단어들은 성령의 뜻에 따라 선택되었다.
결과적으로, 마지막 만찬에서 포도즙이 아닌 발효된 포도주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사실상,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을 사용하는 것은 발효되지 않은 포도즙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이유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빵을 누룩을 넣는 것은 술이 발효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양쪽 다 곰팡이의 일종인 누룩에 의해서 화학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고린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취하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성찬예배 전의 그들의 만찬에서였다(고전 11:20-22).
이것은 각각의 사람들이 자신의 음식을 가져왔던 식사모임이었다(21절).
그리고 몇몇은 명백히 발효된 포도주를 가지고 왔다.
어떤 경우든지, 성경은 그들의 알코올이 함유된 음료를 마시는 것을 인정하고 않고 만일 어떤 언급이 있다면 정죄하고 있는 말뿐이다.
이 말씀의 목적은 성찬예배의 형식을 규정하자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이들도 성찬예식을 술취하는 빌미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포도주"라는 단어는 신구약 전체에서 발효된 것과 발효되지 않은 포도즙 둘 다를 의미할 수 있다는 것과 여러 구절들에서 둘 중에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명백히 구분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이러한 구절들이 해석되는가에 관계없이, 두 가지 사실은 명백하다.
먼저, 술취함은 육체의 일이고 또 술취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둘째는, 알코올의 해악이 성경 속에서와 또 오늘날의 사회에서 잘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가난함과 병, 시간과 돈의 낭비, 속병과 폭력, 악한생각과 가정 파탄, 성적인 죄와 육체적 정신적 상해, 그리고 그것이 원인이 되는 죽음.
증거로서, 1978년에 미국 보건국이 국회에 제출한 보고서를 보면(텍사스 신문 l978년 9월 18일 택사스 오스틴시), 7%의 미국인이 알코올 중독자라고 밝히고 있다.
알코올은 매년 20만 명의 미국인을 죽게 하는 주원인으로 밝혀져 있고 교통사고와 살인사건 원인의 반과 자살 원인의 삼분지 일을 차지한다.
그것은 간 경화와 뇌 손상, 그리고 최근에는 구강암과 인후암, 식도암, 간암, 폐암의 원인으로 규명되었다.
그것은 또한 지능 지체를 포함한 미숙아 출산의 주 요인이 되고 있다.
생산 감소와 병원비를 포함해서 연간 약 430억 달러가 알코올 때문에 낭비되고 있다.
알코올이 사람들로 얼마나 죄를 부추기는 지는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우리는 그것을 매일 볼 뿐이다.
분명히, 이것에 대한 성경의 경고는 잠언 23:29-35절의 내용과 21:17절의 이야기가 정말임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성경뿐만이 아니고 사회도 알코올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조금만 마시는 것은 상관없지 않을까요?"라고 묻는다.
개개인은 저마다의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다음의 이유들로 인해 술을 마시지 않는다.
먼저, 어떤 사람이든지 술을 아주 조금만 마셔서 정신적으로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거나 전혀 취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피할 수 없게, 술을 마신 사람의 행동과 태도는 어느 정도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면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완벽히 제어할 수 없게 되고 때때로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게 된다.
그는 죄와 유혹으로부터 더 이상 자신을 완전히 지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술의 종이(그리고는 사탄의 종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몸을 그것에 굴복시켰기 때문이다(롬 6:16).
우리의 몸은 성령의 거하시는 전이므로, 우리는 다른 어떤 것도 우리를 주관하기를 원치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몸에 해롭고 우리를 쇠약하게 만드는 어떤 것도 사용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몸을 더럽히는 일이다.

둘째로, 모든 사람이 술 때문에 생기는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아주 적은 양의 술이라고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아예 만지지도 않는 것이다.
만일 스스로 술을 잘 다룰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 지라도 그는 쉽게 자신의 형제를 시험 들게 하고 넘어지게 할 수 있다.
이것 자체만으로도 로마서 14장 21절의 절제하는 이유가 된다.
어린이들이나 십대 청소년들, 그리고 연약한 지체들은 좋은 모범으로부터 유익을 받을 것이고, 나쁜 모범들로부터 상처를 입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모든 모양의 악을 버리라고 이야기하고 있다(살전 5:22).
술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이것을 순종하는 방법은 아예 처음부터 피하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의 우리 자신을 생각해야 하고 또한 세상이 교회를 바라보는 눈에도 주의해야 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아예 피하는 것이 극단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술로 생기는 모든 문제에 대한 근원적인 예방책이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다면 이것온 매우 힘들거나 혹은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령이 함께 하실 때 이것은 힘든 일이 아니다.
성령은 우리가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사랑과 욕구로서 우리는 완전한 새 피조물로 만드신다(고후 5:17).
그분은 술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사라지게 함으로서, 우리가 아예 그것을 마시기를 원하지도 않게 하실 수 있다.
또한, 성령은 우리에게 모든 기쁨과, 안식과 만족을 주신다(롬 14:17).
술은 일시적인 쾌락과 일시적인 문제 회피는 줄 지 모르나, 성령께서는 영원한 기쁨과 우리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신다.

마약과 다른 약물들

우리가 하고 있는 술의 해악에 관한 논의는 마약에도 적용된다.
왜냐하면 술 자체가 마약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마리화나를 예로 들자면 술과 같은 종류의 해악을 가져다준다.
그것을 사용하면, 자신을 제어할 수 없게 되고 정신적 육체적인 중독을 가져온다.
그리고 또한 더 심한 마약을 사용하도록 인도한다.
이것의 정신적 육체적인 해악을 살펴보기 위해서 1979년 l2월 호 리더스 다이제스트지의 "마리화나 주의보: 1.뇌와 성(性)에 미치는 폐해들, 2 젊음의 적"이라는 기사를 읽어 보라.
강한 마약들은 명백히 중독적이고육체적인 손상을 가져온다.
그리고 범죄의 주요원인이 된다.
기본적으로, 어떤 마약이든지 술취함과 같은 효과를 가져오게 할 수 있고(자신의 통제력을 잃는 것), 죄에 빠지게 할 수 있고, 육체적인 손상과 정신적인 의존증을 가져오게 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 아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우리는 이 논의를 불법적 마약으로부터 일반 의약품에까지 확산시켜야 한다.
우리는 절제와 자기 통제력을 길러야 하고, 두통약과 수면제 그리고 다른 약들을 혹 사용하게 될 때라도 남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담배

한때는 기독교내의 모든 종파가 흡연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었다.
오늘날에는 다른 일들에서와 마찬가지로 타협하는 태도가 많은 교회 내에 팽배해 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흡연을 거부한다.
왜일까?

우리의 몸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전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전을 더럽히지 말라고 명령하신다(고전6:19, 3:17).
더럽힌다는 것은, 지저분하게 하거나 모욕하는 것, 완전함을 망치거나 오염시키는 것을 말한다.
명백히 담배는 우리의 몸을 더럽힌다.
오랫동안 성직자들은 담배가 사람을 더럽게 만들고 몸에도 해악을 끼친다는 사실을 인지해 왔다.
성령께서 과학이 증명하기 오래 전에 그것이 해로움을 가르쳐 주었다.
물론, 성경이 쓰여질 당시에는 담배가 없었기 때문에 성경은 담배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담배는 컬럼버스의 미 대륙 발견 후 미국 인디언들에 의해서 소개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필요적절할 때에 그분의 영으로 충만한 교회를 통해서 기준을 세우셨다(마 18:18, 행 15:28).
이 구절은 담배와 마약의 경우에 적용된다.

현대 과학은 사실상 담배가 몸에 해롭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미국 텔레비전에서의 담배광고는 금지되었다.
모든 담뱃갑과 담배광고에는"경고: 담배는 당신의 건강에 해롭습니다"라는 문구를 넣도록 의무화되어 있다.
흡연은 폐암과 폐기종의 주요 발병원인이다.
흡연은 또한 다른 많은 암들과 호홉기 질환, 뇌졸중과 심장질환 등의 원인이 된다.
미 공중 위생국 장관의 보고에 의하면 약 35만 명의 미국인이 매년 담배로 인해 사망한다고 밝히고 있다(1979년 리더스 다이제스트 4월 호).
영국의 왕립의사학회는 최근의 조사에서 '담배 한 개비는 흡연자의 수명에서 5분 l5초를 단축시킨다'고 발표했다(1977년 7월 5일 텍사스 휴스톤의 휴스톤 연대기 참고).
같은 연구는 흡연자 3명중 1명은 결국 흡연으로 인해 사망한다고 밝혔다.
대략 만 시간 정도의 근무기간이 이 흡연으로 인한 병으로 인해 낭비된다고 한다.
흡연으로 인한 질병으로 인해 약 275만 달러가 매년 미국에서 낭비되고 있다(뉴 잉글랜드 의학지 1978년 3월 9일).
심지어는 세상마저도 담배가 사람의 몸을 더럽히고 해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게다가, 앞부분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흡연은 하나님의 뜻에 반해서 형성하게 되는 습관들 중의 하나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습관을 끊어 버리고자 노력하지만 하나님의 도움없이 실패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이유들로 인해서 우리는 어떤 형태의 흡연도 하지 않는다.

결론

"그런즉…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7: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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