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인 거듭남 - 제4장 물과 성령으로 남
제4장 물과 성령으로 남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요3:5, 새번역)
거듭남
예수님은 요한복음 3:5에서 거듭남을 처음으로 가르치셨다. 중생(regeneration), 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을 언급할 때 그 내용들은 이 가르침 위에 세워진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왔을 때 주님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물론 그리스도께서 여기에 사용하셨던 말씀은 '위로부터 나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 경우에 기본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새로이 나는 것'을 말한다. 니고데모는 어떻게 사람이 두번째 어미니의 모태에 들어가서 다시 날 수 있겠느냐고 예수님께 물었다. 그 때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함을 의미한다는 것을 설명해 주셨다. 즉, 두번째 육체적으로 출생한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새 생명을 부여하는 경험임을 설명해 주셨다. 니고데모는 이 말씀 역시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요 3:9)라고 물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던 신생의 교리는 유대인들에게 완전히 낮선 교리가 아니었어야 했다. 그는 에스겔 36:25-26의 언약을 의지하고 있다.
우리는 신생이 두 가지 부분들로 이루어졌지만 하나의 경험인 것을 알아야 한다. 다른 부분이 없는 한 면만으로는 불완전하다. 이것은 두번이 아닌 오직 한번 경험하는 출생이다.
물로 남
(1)물은 자연적 출생을 의미하는데, 이 출생은 물로 된 양수가 유출됨으로 동반된다.(2)물로 나는 것은 성령으로 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3)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영적 정결함을 언급한다.(4)물은 물침례를 의미한다.
자연적 출생?
이 해석은 여러가지 이유들을 볼 때 전혀 타당하지 않다.
(1)이것은 자연적 출생을 기술하는데 너무도 이상한 방법일 것이다. 특히 이러한 기술 방법은 성경 그 어디에도 나타나 있지 않으며 일상적으로 말할 때에도 이런 방법은 쓰지 않는다.
(2)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신생은 자연적 출생이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라고 명확히 알려 주셨다.
(3)물로 난다는 말이 자연적 출생을 뜻한다면 니고데모가 던진 질문은 타당한 질문이었으며 예수님은 그를 책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4)모든 사람들은 분명히 이 세상에서 출생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 출생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불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5)물로 나는 것이 실제로 자연적 출생을 의미한다면 왜 예수님은 신생에 두 가지 요소가 있다고 지적하셨는가? 요한복음 3장 본문 말씀에서 물로 나는 것 자체는 자연적 출생이 아님을 확증하고 있다.
물로 나는 것이 성령으로 나는 것과 동일한가?
이 견해를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께서 "너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하신 것이 "너는 물 곧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라는 의미였다고 주장한다.
물론 몇몇 성경 구절들은 성령을 물에 비유하기도 한다(요 4:14; 7:38). 그러나 이같이 물이 성령을 상징하기도 한다는 것을 요한복음 3:5에 적용하려고 하기에는 몇 가지 곤란한 점들이 있다.
(1)이 구절을 자연스럽고 평이하게 읽어 볼 때 물과 성령과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2)다른 많은 구절들에서 볼 때 '물'과 '성령'은 복음 메시지 안에 두 가지 구별되는 면들인 것을 가리키고 있다.
(3)요한복음 저자가 후기에 쓴 글들을 보면 요한은 물과 성령이 구원과 관계된 것으로 그 사이에 구별되는 점이 있음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요일 5:8).
말씀으로 깨끗케 함?
이 견해는 주로 에베소서 5:26에 의존하는데, 이 말씀은 교회가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되어 거룩해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요한복음 3:5이 침례를 말하고 있다면 에베소서 5:26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베푸는 물침례를 언급한 것일 것이다.
요한복음 3:5의 '물'이 실제로 '말씀'이라고 보는 견해에는 몇 가지 심각한 난점들이 있다.
(1)이것은 물이라는 문자적 의미는 무시해 버리고 본문의 전후 문맥에서 볼 때 전혀 뒷받침을 받지 못하는 상징적 의미를 선택한 것이다. 왜 예수님은 성령은 상징적으로 표현하시지 않았는가? 그는 왜 거듭남의 한 면은 문자적으로 설명하고 다른 한 면은 상징적으로 설명하셨는가?
(2)이 상징적인 표현은 구약이나 예수님의 가르침 어느 곳에도 나타나 있지 않은데 어떻게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그것을 이해하기를 기대하실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니고데모가 살던 시대나 그 이전에도 물로써 상징화된 적이 없었는데 왜 예수님은 그에게 이해가 부족하다고 책망하셨는가?
(3)전후 문맥이 하나니의 말씀을 의미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상징적 해석을 해서는 안된다. 확실히 문자적 의미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4)하나님의 말씀은 거듭남 그 자체의 일부라고 보기보다는 수태(受胎)를 일으키는 원동력으로 보는 것이 한층 타당하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의 근원이다.
수태(受胎)를 일으키는 씨이다. 그러나 거듭남 그 자체는 물과 성령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가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고 적용할 때 이루어진다.
물침례
우리는 이 마지막 견해가 옳다고 믿는데 물침례를 받으므로 하나님께서 죄를 사해 주실 때 물로 거듭나게 된다. 전 교회사를 걸쳐 많은 신학자들은 이 해석을 지지했는데 특히 초대 교회 교부들과 초기의 루터파 사람들이 그러했다.
(1)성경을 솔직하게 그리고 문자적으로 읽게 될 때 결과적으로 이러한 견해를 낳게 된다. 침례는 신약 교회 안에서 유일하게 물을 사용하는 중요한 의식이다. 그래서 물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물침례를 가리키게 된다. 초대 교회는 일반적으로 물을 침례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했다(행 10:47; 요일 5:8).
(2)요한복음 3:5의 문맥은 강력히 물침례를 시사하고 있다. 요 1:25-34과 3:23은 침례를 베풀어야 할 요한의 사역을 말한다. 요한복음 3:22과 요한복음 4:1-2은 예수님의 권위 위에서 그의 제자들이 베풀게 된 침례를 설명한다. 22절에 예수님에 의해 실행된 물침례가 언급된 것을 비추어 볼 때, 물과 성령이라는 단어들을 연결지어 기독교의 침례를 설명하는 말씀으로 해석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이 기독교의 침례에는 죄를 깨끗케 하는 것과 성령을 부여해 주는 것이 두 가지를 필수적인 기본 요소로 하고 있다.
(3)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가 물침례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셨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종교적인 지도자로서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받는 침례 뿐만 아니라 구약의 종교적 정결 의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더우기 중요한 것은 그는 침례 요한이 행한 일들을 지켜본 목격자였다.
(4)성령으로 나는 것은 성령침례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문법적으로 말해서 물로 나는 것은 물침례를 의미하는 것이 확실하다.
(5)성경에는 오직 하나의 침례만이 있는데(엡 4:5) 성경은 분명하게 물침례와 성령침례, 두 가지를 가르친다. 우리는 물침례와 성령침례가 전체적인 하나를 이루는 두 부분인 것과 다른 한 쪽이 없이 한 부분만으로는 불완전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이 외형적 모순은 사라진다. 한 쪽이 신생의 일부라면 다른 쪽도 신생의 일부임이 분명하다.
(6)하나님께서는 물로 침례를 받을 때 죄를 사하신다. 그러므로 침례는 분명 신생의 일부이다. 왜냐하면 죄 가운데 있는 옛 생명이 제거되지 않고서 어찌 새롭고도 영적인 생명이 있을 수 있겠는가? 죄와 죄로 인한 형벌을 씻기까지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릴 영생을 얻을 수 없다.
(7)디도서 3:5은 요한복음 3:5과 짝을 이루는 구절인데 이 구절은 분명 물침례를 가리킨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중생은 단순히 신생을 의미하므로 이것은 신생과 함께 물과 성령과 관계된 두번째 구절이다. 이 구절이 말하는 바가 다른 어떤 구절보다도 물침례를 강력히 가리키고 있으며 씻음의 특유한 행위를 성령의 사역과 구별하여 설명한다. 이 씻음의 행위는 죄를 씻는 것인데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지시한 말을 상기시켜 준다.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행 22:16). '중생의 씻음'은 '물로 새롭게 나는 신생'을 의미하며 물침례를 받음으로 죄를 씻는 것이다.
(8)다른 여러 구절들이 구원의 메시지에 있어서 물과 성령침례를 결합시키고 있으며 구원을 얻는데 침례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물이 침례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흔히 물침례가 구원과 관계가 있다면 결과적으로 구원은 오직 은혜와 믿음에 의해서 얻는다는 것을 부정하게 된다고 항변한다.
물론 죄를 회개하지 않거나 그리스도의 죽음을 믿지 않고서는 물침례가 아무런 가치가 없다. 물침례를 받을 때 물 자체나 인간의 행위에는 아무런 구원하는 능력이 없다. 물로 나는 것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죄를 사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행위인 것이다. 물침례 자체 안에서나 물침례만으로 구원의 행위가 되지는 못한다. 따라서 물로 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한다. 디도서 3:5은 침례가 하나님께 구원을 위한 충분한 믿음을 나타낼 수 있으며, 여전히 신생에 있어서 물침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구원의 모든 역사에 걸쳐 하나님은 항상 믿음의 일부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것을 요구하셨다.
물침례가 구원의 과정이라는 것이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결코 상충되지 않는다. 물침례 안에서의 하나님의 역사를 물로 나는 탄생이라고 본다고 해서 우리의 유일한 구주이신 주님의 은혜를 부정하거나 그의 주권을 손상시키는 것은 아니다.
두번째 이의(異意)는 구약의 성도들은 오늘날 우리와 같이 물로 침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우리처럼 성령을 받지 못했다(요 7:38-39). 구약의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신약의 교회를 위해 말씀하셨고 제정하셨던 그런 의미로 거듭나지는 않았다.
성령으로 남
성령으로 나는 것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행하시는 성령의 역사이다. 이러한 뜻은 요한복음 3:5-8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때 이해되는데 아무도 심하게 이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성령으로 나는 것이 하나님의 성령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성령이 그의 생명 속에 거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는데는 동의하지만 그것이 성령침례와 동일하다는데는 다소 견해 차이가 있다. 대부분의 개신교도들은 비록 일반적으로 방언을 말하는 표적은 거부하지만 성령침례로써 성령을 받는다는 것에는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신약의 교회에서는 성령으로 남, 성령의 선물, 성령을 받는 것, 성령침례 등이 모두 하나임을 가리키며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1)예수님은 자신이 성령으로 나는 것에 대하여 의미하는 바를 니고데모가 이해하기를 바라셨는데, 분명 성령 부어주심에 관한 구약의 예언에 근거를 둔 말씀이었다. 베드로는 오순절날 요엘의 예언을 성령침례에 적용하였다(행 2:16-18).
(2)침례 요한은 분명하게 성령침례의 약속에 대해 말했다(막 1:8).
(3)사도행전은 우리가 성령으로 침례를 받을 때 성령을 받는다는 것을 가르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했는데, 그는 그 약속을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다(행 1:4-8). 오순절날 이 약속이 이루어졌고 제자들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다(행 2:4). 베드로는 그 날 회개하는 구경꾼들에게 이와 똑같은 체험의 약속에 대해 말했는데, 그는 그 체험을 '성령의 선물'이라고 불렀다(행 2:38-39). 고넬료와 그의 가족이 바로 그와 같은 체험을 했을 때 성경은 그것을 몇 가지로 나타낸다. '그들에게 내려진 성령'은 '성령의 선물로 부어졌'으며 그들은 '성령을 받았다'(행 10:44-48). 베드로는 그것을 성령의 선물이며, 성령침례라고 확증했다(행 11:15-17). 사도행전은 성령의 구원 사역을 말하는 모든 내용을 성령침례로 나타내고 있다.
(4)어떤 사람은 성령으로 나는 것은 성령침례가 아니고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령을 받지 않았는데 그 사람 속에 성령이 거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뭔가 모순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성령의 내주하심이 성령을 받고 충만하여 성령으로 침례를 받음으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5)고린도전서 12:13은 구원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은 성령침례라고 증거한다.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6)다른 많은 구절들이 성령침례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고 성령침례를 구원의 메시지의 일부로서 물침례와 연관시켜서 말하고 있다.
완전한 거듭남
우리는 거듭남이 하나의 완성된 체험임을 강조해야 한다. 사람이 거듭났든지 거듭나지 못했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반쪽만 태어나는 일은 없다. 예수님은 두 가지 요소 -물과 성령- 를 증거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신생을 말씀하셨다. 성령과 물과 피는 모두 합하여 하나이다(요일 5:8). 오직 하나의 침례만 있으며(엡 4:5) 물과 성령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새 생명 가운데 일어나기 위해 침례를 받으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내며,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고(갈 3:27), 침례를 받음으로 영적 할례를 받는다는 것(골 2:11-13)을 성경이 가르칠 때, 성경은 물침례와 성령침례 둘 다 포함하고 있다(롬 6:3-4). 회개와 물침례와 성령침례가 개별적으로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전체적인 구원의 역사는 이 셋이 합쳐짐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성경은 세 가지 모두 -회개, 물침례, 성령의 산물- 를 경험하는 것이다(행 2:38).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지만 아직 그들은 성령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행 8:15-17). 비록 고넬료가 이미 성령을 받았지만 베드로는 그가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명했다(행 10:44-48).
이상적으로는 세 가지 모두가 실제적으로 동시에 일어나든지 혹은 지체함이 없이 연속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행 2:38은 사람이 회개하고 침례를 받으면 이 세 가지 부분들 사이에 지체함 없이 성령을 받으리라고 약속했다.
특히 사람들은 믿음을 사용한다면 회개하고 침례를 받자 마자 성령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에베소에 있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있었던 일이었다(행 19:1-6). 에디오피아 내시와 빌립보 감옥의 간수는 침례를 받고 난 후에 기쁨이 충만한 체험을 했었는데, 이는 외적으로 나타난 성령침례였다(행 8:36-39; 16:31-34). 하나님은 완전한 신생의 과정이 한번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계획하셨다.
첫번째 출생과 두번째 출생의 비교
우리는 각각을 하나의 사건으로 볼 수 있지만, 그러나 각각은 또한 여러 가지 구성 요소를 가지고 이루어진 하나의 과정이다.
자연적 출생: 잉태 - 아기가 모태에서 나옴 - 아기가 첫 숨을 내쉼
신생: 복음을 들음(믿음의 시작) - 물침례- 성령침례
그리스도의 보혈은 언제 적용되는가?
거듭남은 하나이면서도 각 부분들로 이루어진 전체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이 신생의 전 과정에 걸쳐 적용된다고 믿는다. 성경이 예수님의 보혈을 말할 때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의 구원의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구속하셨다. 그리스도의 속죄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찾지도 못하고 온전히 회개할 수도 없으며 침례를 받음으로서 죄사함을 얻지도 못하며 성령을 받지도 못할 것이다.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회개와 물침례와 성령침례를 받아서 구원을 얻는데 유효하게 한다.
피는 처음 복음을 들을 때 우리의 마음에 적용되어 하나님을 찾도록 하며, 회개할 때 우리가 죄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도록 하며, 물침례를 받을 때 죄사함을 받을 수 있게 하며 성령침례를 받을 때 하나님의 영을 받을 수 있게 해 준다. 우리는 신생 후에 보혈의 능력을 힘입어 지속적으로 승리하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위하여 재림하실 때까지 말씀을 처음 들을 때부터 시작하여 적용된다.
거듭난 신자의 특징
요한은 그의 서신서를 죄인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 가르치기 위해서 쓴 것이 아니라 침례 받고 성령 충만한 신자들이 어떻게 그들의 거듭난 현재의 상태를 확신할 수 있는지, 그리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지를 가르치기 위해 썼다.
거듭난 신자는 (1) 예수님이 육체로 오심을 시인한다. (2)사랑을 가지고 있다. (3)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시인한다. (4)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 (5)세상을 이긴다. (6)계속해서 죄를 짓지 않는다. (7)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 (8)성령을 모시고 있다. (9)성령과 물과 피의 증거를 가진다.
신자(信者)는 물과 성령으로 침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의 피가 적용된다. 신자(信者)가 시인하고, 사랑하고, 믿으며, 세상과 죄를 이기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한 구원의 확신을 가진다.
구약의 성도들은 우리처럼 거듭나지 않았다
옛 언약 아래 있었던 성도들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과 같이 거듭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중생은 새로운 언약 안에 있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새 언약의 일부로써 하나님은 당신의 법을 그의 백성의 심중에 기록하며 (렘 31:31-34) 그들에게 새 영을 주겠다고 언약하셨다(겔 11:19). 옛 언약은 하나님의 도덕법을 보여 주었지만 죄성을 이기고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영적 권능을 주지는 못했다(롬 7:7-25; 8:3). 그러나 새 언약 아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율법을 대신하며 항상 죄를 이길 능력을 부여하는 새로우 성품 -하나님의 성령- 을 받는다(롬 8:2-4; 갈 5:16-18).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제 '의문(儀文)의 묵은 것'이 아닌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롬 7:6).
율법 아래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있기까지 죄를 미루어 두었을 뿐이었다(롬 3:25). 피의 희생은 죄의 대가를 앞으로 미루어 보내기 위해 계속해서 드려져야만 했으나 그리스도의 희생은 새 언약 속에서 죄사하을 영원한 실재(實在)로 만들었다(히 10:1-18). 오직 새 언약 아래에서 우리는 즉각적으로 영원한 죄사함을 얻는다(렘 31:31-34; 히 10:14-18). 구약의 성도들은 신약적 관념 안에서 거듭나지 못했다. 그 이유는 (1)영원한 죄사함도 (2)영원히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인해 얻게 되는 새로운 성품도 그들은 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1)죄사함을 위한 예수 이름의 침례도 (2)성령의 침례도 구약에는 존재치 않았다는 사실과 상응한다.
결론
우리는 거듭난다는 것이 물과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다는 것을 뜻한다고 결론짓는다. 기독교의 4가지의 중요한 개념 -구원, 믿음, 복음, 신생- 들을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이제 완전한 복음은 회개와, 예수 이름의 물침례와, 성령침례를 받는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