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의 중요성
이름의 중요성
-T.C. MITCHELL-
전쟁 때 이야기입니다. 전투가 막 끝나려고 할 즈음에 전쟁터에서 한 병사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를 보살피던 전우는 최선을 다했으나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 전우는 병사의 머리를 편안한 자세로 고쳐주고는 열로 인하여 메마른 입술을 수통의 물로 적셔주었습니다. 죽어가던 병사는 번득 눈을 뜨고 나서 고통으로 이가 갈리는 입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을 했습니다.
“내 아버지는 서울에 사시는데 굉장한 부자다. 나에게 지금 몇자 쓸 수 있는 힘이 있어서 내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면 너희의 친절에 대하여 아버지가 잘 보답해 주실 것이다.” 곧 그는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습니다. “아버님 보십시오. 이 편지를 가진 사람은 저의 최후 순간을 편안하게 해 준 사람이며 그는 나의 임종을 보살펴 주었습니다. 이 사람을 저 김 영철과 같이 영접해 주시고 잘 도와 주십시오.”
전쟁이 끝났을 때 그 전우는 갈갈이 헤어진 누더기 옷을 걸치고는 서울에 사는 죽은 병사의 아버지를 간신히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 남루한 모습 때문에 그는 면회를 거절당했습니다.
그 방문객은 “나는 당신에게 전할 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아들이 죽을 때 쓴 말이 적힌 것입니다. 하고 하면서 흙이 묻은 조그마한 종이를 내놓았습니다. 그리하여 그 부자가 자기 아들의 이름을 보았을 때는 모든 동작이 갑자기 달라졌습니다. 자기의 양팔을 그 군인의 두 어깨에 얹고는 힘껏 자기의 앞가슴으로 잡아 당겼습니다.
그 부자는 자기의 모든 재력이 허락하는 한 그 군인의 원하는 것을 다 이루어 주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어떤 하나의 이름이 그 얼마나 중요하던가를 말해 주고 있는 사례입니다.
이름 속에는 무엇이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름 속에 모든 힘과 권능이 들어 있다는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영국연방에서는 모든 중요한 공문서들이 법적 효력을 가지려면 여왕의 이름이 적혀져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교도소에 있는 한 죄수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차디찬 철장속에 갇혀 있는 그의 삶이란 산산히 부서진 한낱 꿈에 불과하고 낙망과 절망으로 끝날 운명인데 이때 간수의 공허한 발걸음이 감방 문쪽으로 가까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만일 죄수가 그 간수로부터 종이 한 장을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받고 보니 그것이 특사장 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바로 생명이요. 해방이요. 산산히 부서졌던 꿈을 다시 손질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 특사장은 물론 효력을 가졌습니다. 왜냐하면 특사장 밑에 하나의 이름이 서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대통령의 이름입니다. 대통령이 친히 서명한 것입니다. 그의 이름이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의 「사네드린」에서 설교한 말씀이 사도행전 4장 11절과 12절에 있습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성경을 문자대로 그 의미를 받아들인다면 이 내용이 비록 모순인 것처럼 보이지만. 「베드로」의 이 말씀은 구원에의 길을 아주 좋은 관점으로 좁혀 놓았습니다. 이 성서에 의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 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나「마호멧」 또는 「마리아」나 「바울」혹은 「베드로」나 성부나 성자의 이름 등 그 어떠한 이름도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다만 예수의 이름으로만 이루어집니다. 온 하늘과 땅을 두루 찾아보아도, 성경과 모든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을 다 찾아보아도 다만 하나의 이름 안에서만 이 구원이 있다고 되어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든지 말하거나 행할 때 예수의 이름 안에서 하라. 그 이름이 중요하기 때문이니라” 라고 한 사도의 말씀을 주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예수님의 위대한 위임이 바로 마태복음 28장 19절에 있습니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누가」도 역시 예수님의 위대한 위임을 누가복음 24장 46절과 47절에 기록하였습니다. “또 이르시되 이 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구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놓은 사람들에게는 성경이 생명에의 길이 되고 이 성경의 가르침을 그릇되게 하는 자에게는 멸망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즉 그릇된 방법은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올가미나 함정이나 파멸로 이끄는 나쁜 무기로 또는 눈이 어두워 분별을 못하거나 마음의 마비 등으로 쓰여집니다. 비록 기독교계가 오늘날 에 와서 참된 가르침과 성경의 올바른 지식과 연구에 의한 새롭고도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할지라도 그 어떤 직위나 성부란 말이 실지로 하나님 아버지를 의미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성자라고 하는 직위의 말은 아들의 이름은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다만 그들 사이의 상호 관계를 밝혀내는 직위일 뿐입니다.
모든 일들이 법적인 효력을 나타내려면 이름의 중요성을 전제하고 있기 째문에 다음의 질문을 말해 봅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이란 무엇입니까?”
초대 교회의 사도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명령을 잘 지켜 준수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어김없이 침례를 거행했던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망이후 약 300년 동안은 그 누구도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표제나 말로써 침례를 받은 일이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함께 생각해 봅시다. 해방이후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몇 사람되지 않지만 다 결혼한 사람이었으며 한 가정을 이룩한 주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자녀들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시다. 어떤 모범 죄수를 출옥시키기 위한 특사장이 대통령의 서명을 받기 위해서 대통령실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거기에 “대통령○ ○ ○”이란 이름 대신에 그냥 단순히 “아버지” 라고만 서명했다면 이 특사장이 법적 호력을 발생할 수 있겠습니까? 이 종이로 그 모범죄수가 교도소에서 석방 될 수 있겠습니까? 분명히 그것은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이 법적 효과를 가지려면 대통령 자신의 이름이 어김없이 그 특사장의 밑에 서명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위에서 잘못된 서명을 보고 바보의 짓이라고 말하겠지요? 그렇습니다. 이러한 특사장을 가지고 석방을 원하는 죄수의 손을 붙잡아 주는 것만큼, 또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거행된 그리스도인의 침례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는 것입니다.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나니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는 그 누구의 이름을 가지고 침례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그런 것은 괜찮을 것이다. 왜냐 햐면 하나님은 이것을 이해하실 것이다. ”라고 말할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그러신가요? 그러면 왜 사람들은 기도할 때마다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가요? 왜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를 물리쳤나요? 모든 일은 다 예수의 이름으로 하면서 침례만은 그렇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인가요? 당신은 모순에 빠져 있습니다. 습관과 전통 때문에 분별을 잃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하시기를 “회개와 죄 사함을 얻게하는 일이 그의 이름으로 「예루살렘」에서 전파되기 시작하리라” 「베드로」는 오순절날에 유대인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의 물음에 대답하는 설교에서 주님의 위대한 위임을 잘 성취 시켰으니 “너희는 회개하고 죄 사함을 얻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하고 했습니다.
위대한 위임은 말하기를 회개가 설교되고 전파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회개를 전파 시켰습니다? 예, 기록에서 그는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명령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위대한 위임은 말하기를 “죄 사함은 그의 이름으로 전파되어야 한다…… 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그이의 이름으로 전파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는 죄 사함을 얻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고 명령했던 것입니다.
흔히 종교계에서는 침례는 구원에 이르는 필수 조건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베드로는 말씀 하시기를 죄 사함을 얻기 위해서 침례는 예수의 이름으로 거행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름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중심의 침례를 믿고 있으나, 우리에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행하는 침례만이 그리스도인의 침례중 유일한 법적 방식이 되는 것입니다. 일반의 상식대로 모든 아들은 출생과 동시에 아버지의 이름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받았습니다. 이렇게요? …… 당신은 이렇게 물어 보겠습니까? …… 히브리 1장1절과 4절의 기록에---- “저가 천사보다 얼마만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우리는 어리석게도 예수께서 한분의 아들이라면서 그의 이름이 아버지의 그것과 다르다고 말하고 있군요. 예수 그리스도는 사생아가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다만 한 분의 법적 아들이며 하나님께서 부끄럼 없이 자기의 이름을 물려주실 수 있는 유일하신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그 이름을 받았습니까? 유전으로 받으신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교리의 역사가 점차로 끝장에 가까워지는 때에는 의욕에 불타는 마음을 가진 진실한 교인만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수 있는 것이며 이는 바로 교회의 승리를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이름을 이어 받을 신부를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은 사람 중에서 그리스도의 신부 될 사람이 그의 이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침례 의식에서 예수의 이름을 빼고서 거절한 이상 어떻게 그리스도의 신부됨을 자처할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침례에서 아들의 이름을 거절한 것은 아버지의 이름도 거절하는 것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받는 것을 반대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만 예수의 이름으로 행한 침례만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여 이름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집안에 자녀가 탄생되면 아버지의 성을 따라서 이름을 짓습니다.
아이들이 아버지의 성을 따르지 않고는 그 집안의 자녀가 될 수 없지 않습니까?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는 것에는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고 또 그것을 받아드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십니까?
사도의 정신을 파수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