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흘림을 피함
피흘림을 피함
"살인하지 말지니라"(출 20:13)
"피를 멀리하라"(행 15:20)
기본적인 율법
하나님의 율법 중 가장 기본적인 것 중의 하나는 사람이 타인의 생명을 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살인을 금지하는 율법의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피를 흘리는 모든 피조물을 정죄하신, 창세기 9: 5-6에서 노아에게 주어졌다.
십계명은 모든 종류의 죽임을 포함하고 있다(출 20:13).
그리고 신약성경의 교회가 이 가르침을 재확인했다(행 15:20).(위 구절에 대한 검토는 8장에 자세히 나와 있음)
다른 많은 구절들이 살인을 죄로서 규정하고 있다(마 5:19, 막 7:21, 갈 5:21).
살인
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죄가 되는가?
먼저 그것은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께 대한 범죄이다(창 9:6).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해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의 삶에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계 시다.
각 개인은 모두 유일무이하고 다른 어떤 이도 대신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개개인이 각각의 방법으로 그분을 찬양하기를 원하신다.
살인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개인의 찬양을 빼앗고 또한 하나님의 계획으로부터 그 개인의 영역을 사라지게 한다.
살인은 또한 그 가족에 대한 범죄이다.
가족, 친구들과 다른 사랑하는 이들은 그들이 사랑했고 또 그들을 부양했던 한 사람의 죽음에 의해 모두 고통을 받는다.
마지막으로, 살인은 희생자에 대한 죄악이다.
그것은 희생자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할 의무를 다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만일 그가 죄인이라면, 그는 더 이상 하나님께 대해 배울 기회도 없고 또 회개할 기회도 잃어버리게 된다.
이 상황에서는, 살인자는 그의 희생자를 영원한 형벌로 보내게 된다.
만약 그가 더 살았다면, 아마도 그는 하나님께 대해 배울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는 선한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의 삶에 좋은 영향을 끼쳤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른 이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사람은 이러한 가능성을 그에게서 빼앗아 갈 권리가 없다.
아무도 다른 이들을 영원으로 보낼 권리가 없고 또한 그가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거나 하나님을 섬길 기회를 박탈할 권리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같은 질문을 한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인에게 죽이라고 명령했는가?
따라서 전시에는 적을 죽일 수도 있지 않은가?"
이것에 올바르게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구약 안의 몇 가지 기본적인 사실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는 한 나라를 선택하셨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창조하셨고 모든 사람들이 그 분을 섬기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일부의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했다.
그런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언약과 약속들을 주셨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만을 경배하기로 약속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그를 통해서 큰 나라를 일으키리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을 때는 그들에게 땅을 약속하셨다.
약속된 땅의 목적은 이스라엘인들이 세상으로부터 구분되어 거룩한 삶을 사는 장소를 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들에게 등불과 본보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여주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다른 모든 나라들이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획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람들을 다루시고 국가적인 구원을 위한 방법을 주시는 것이었다.
이것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어떤 나라들을 멸망시키라고 이스라엘에 명하셨는지 알 수 있다.
국가적인 차원으로, 그들은 이스라엘의 존재를 부정하고 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부정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그 시대의 구원계획을 위협했으므로, 이러한 나라들은 멸망 받아야 했다.
둘째로, 그들은 완전히 하나님을 부정했고 그들의 심판의 때가 이르렀던 것이다.
단순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그들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이다.
이 나라들은 벌써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정죄를 받은 것이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국가적인 차원이 아닌 개인적인 차원에서 사람들을 다루신다.
이제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완전히 개인적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21).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은 이제 자신의 존재를 위해 싸워야 하는 한 나라가 아니고 모든 나라들에서 선택되고 영적으로 세상으로부터 구분된 개개인의 모임이다.
모세의 율법 항에서는, 심판은 즉각적이었고 죄인은 자신이 범한 죄의 대가를 받았다.
때때로는 즉각적인 죽음의 형벌이 내려지기도 했다.
은혜시대에서는, 심판은 유예되었고, 이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은총이 허락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사람들을 다루시고 심판하시고 형벌을 내리신다.
우리는 아무도 판단할 수 없다(마 7:1).
결론적으로 구약성경의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오늘날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은혜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훨씬 높은 수준의 경건한 삶이 요구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율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가르쳤다.
율법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다(마 5:38,43).
예수께서 오셨을 때, 그분은 우리가 다른 쪽 뺨도 돌려대야 하며, 우리의 원수를 사랑해야 하며,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행을 하고, 우리를 속이고 이용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마 5:39, 44).
우리가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성령의 침례나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은혜를 누리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러한 '완전하라'라는 기준을 만족시킬 능력이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육체적인 전쟁을 하도록 허락하셨지만, 지금 우리가 싸워야 될 전쟁은 영에 속한 것이고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다(엡 6:12).
우리는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의 완전한 기준에 따라 살아야할 책임이 있다(마5:48).
우리는 어떤 이유로든 다른 인간을 죽일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원수를 죽이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없고, 그들은 영원한 정죄로서 저주한다면,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우리는 하나님께 의지하는 마음으로, 다른 이들의 생명을 취하려는 생각을 가지게 될 만한 상황으로부터 우리를 구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행하는 자들을 위해서 그분의 말씀과 뜻을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것을 신뢰할 수 있다.
우리는 신중히 행동함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생사를 주관할만한 자리에 자신을 놓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전쟁과 자기방어
이것은 전쟁과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타인을 죽이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우리가 마태복음 5장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도 상대방을 죽일 수가 없다.
스데반이 돌을 맞았을 때, 그는 맞받아서 돌을 던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를 죽이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했다(행 7:55-60).
베드로가 칼로서 예수님을 지키려고 했을 때, 주께서는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를 꾸짖었다(마 26:52).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방어를 위해서 살상용 무기를 가지고 다닐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무슨 목적으로 그것을 가지고 다니는가?
만약 당신이 그 무기를 사용해야 할 상황에 처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만일 당신이 누군가를 죽인다면 무엇을 느끼겠는가?
당신은 정말로 타인을 죽일 것인가?
당신은 살상 무기를 가지고 다니기로 결정하기 전에 이같은 질문들을 먼저 답해야 할 것이다.
군 복무와 관련해서, 우리는 애국심과 성경이 말하는 권세에 순복하는 것을 믿는다(벧전 2:13-17, 롬 13:1-7).
우리는 조국을 위해서 일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 때문에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
전시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의료요원으로서 혹은 다른 일 가운데서 그들의 삶을 희생했다.
우리는 이 가르침이 초대교회의 역사에서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일 대학의 역사학자에 의하면, "군 복무는 허락되었지만, 전투에 참가하는 것은 거부되었다. 이것은 히포리투스(hippolytus)의 경전에서 발견되었는데, 그리스도인은 군인이 될 수 있지만 죽일 수는 없다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로랜드 배인튼의 초대 기독교역사, 프린스톤의 밴 노스트란드 출판사 1960, 54페이지).
같은 책의 50페이지에는, "검투사들의 결투는 금지되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그 싸움의 중인이 될 수 없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사형을 선고해야할 어떤 관료직도 맡을 수가 없었다"라는 내용이 실려있다.
미움
살인의 의미는 요한일서 3:15에서 크게 확장된다.
여기서 우리는 살인자에게는 영생이 없다는 말을 듣는다.
이 구절의 시작부분은 먼저 미움을 살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 형제나 이웃을 미워하는 자는 마치 정말로 그를 죽인 것처럼 그의 피에 대한 죄가 있다.
미움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시작될 때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낙태
사람을 죽일 수 없는 모든 이유가 낙태에 있어서도 같이 적용된다.
임신의 순간에 정자와 난자가 결합해서 살아있는 생명체가 된다는 것은 생물학적인 사실이다.
임신 후 한 달이면, 눈과 발 그리고 머리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아이는 벌써 호홉을 하게 되며 어머니를 통해서 양분을 공급받는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가 영원한 영혼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는다.
만약 임신의 순간에 영혼이 탄생하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에 영혼이 생길까?
분명히, 태아가 사람으로 구분될 수 있는 때인 임신 40일 정도면 아이는 영혼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타임지 1977년 5월 14일자).
만약 영혼이 임신 후 9개월 이후에 탄생한다면 미숙아로 태어난 아이들은 어떻게 된 것일까?
만약 아이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올 때 영혼이 생겨난다면, 시험관 아기는 어떻게 된 것인가?
성경은 관련된 모든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뱃속에 있는 태아를 자녀로 규정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부터 거룩하게 구별하셨다(렘 1:5).
다윗은 주께서는 그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그의 하나님이었다고 언급했다(시 22:10).
그는 또한, 자신이 잉태되었을 때 사람의 죄성을 물려받았다는 의미로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말했다(시51:5).
계획적으로 아이를 낙태하는 것은 그 살아있는 아이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뱃속에서 몇 달된 아이를 죽이는 것과 태어난 후 몇 달된 아이를 죽이는 것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뱃속에 있다가 죽음을 당한 아이 와 미숙아로 태어나서 살도록 허락된 아이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어떤 아이는 영혼을 가지고 어떤 아이는 영혼이 없다는 말인가?
우리는 특정한 기한을 못박아 말하고 그 이전 시기의 태아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어떤 아이는 영혼이 있으므로 사람이고 어떤 아이는 아니라고 한다면 그래서 어떤 아이는 살아야 하고 어떤 아이는 죽일 수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가지고 장난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임신은 출산의 일부이다.
남자와 여자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그 창조에 관여하고 계시는 것이다.
임신이 이루어진 후에는 사람이 태아에 대해서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인 인생의 고매함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살 권리가 상황을 주도해야 하는 것이다.
자연적 낙태(유산)는 단순히, 병이 있거나 살 가능성이 없는 아이를 자연이 거부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살인이 아니고 몸이 태아를 제거하는 것이다.
만약 어머니의 몸이 약하다면, 그녀는 아이를 낳는데 어려움을 가질 것이고 또한 아이를 다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계획적인 낙태(인공적인 낙태)는 인간을 죽이는 행위이다.
이것은 가르쳐야 하고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를 잃어버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낙태를 행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 의해서 정당화될 수 없다.
낙태를 하지 않고 가족 계획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계획적인 임신은 이미 임신된 개인을 멸망시키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용인될 수 있다.
태아가 임신되었을 때는, 결정을 할 수 있는 시기는 이미 지난 것이다.
산모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을 경우에는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이며 또한 치료자이심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는 의로운 여인을 해산의 시간에서 구하실 것이라고 약속했다(담전2:15).
의사인 윌크부부는 이 주제에 대해 매우 도움이 되는 "낙태에 대한 편람"을 출간했다(1975년 오하이오주의 해이즈 출판사간).
이 책에 의하면, 태아가 임신된지 8주이면 모든 인간의 신체구조가 형성된다고 한다.
18일에서 25일 사이면 심장의 박동소리도 감지될 수 있다.
뇌파는 40일 안에 발견된다.
이 책은 낙태에 대한 거의 모든 질문들을 답하고 있다.
6주, 8주, 10주된 태아의 컬러사진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소금 중독과, 흡입, 그리고 절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낙태의 사진들도 담고 있다.
태아들은 비록 작기는 하지만 완전한 사람들의 모습을하고 있다.
이 주제에 대한 또 하나의 좋은 책은,'낙태, 성경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는 도널드 슈메이커의 책이다(미시간그랜드 레피드 소재, 베이커 출판사).
이 책은 경제적인 어려움과 사회적인 낭패나 정신적 육체적인 결함의 가능성, 산모의 건강, 강간이나 근친상간으로 인한 낙태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강간피해자의 임신을 막기 위해 DES 호르몬(diethylstilbesterol)을 사용하는 것을 알고 있다.
임신 이전에 이 조치를 취하는 것은 가능하다.
요약하자면, 낙태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대답해야 할 두 가지 질문이 있다.
무슨 권리로 우리가 타인의 실수로 생겨난 죄 없는 생명을 취할 수 있는가?
만약 낙태가 무슨 이유로든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면, 무엇 때문에 우 리는 새로 태어난 아이나, 정신 장애자나, 신체 장애자나, 고아나 늙은 사람들을 같은 이유를 가지고 제거하지 않는가?
자살
자살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된다.
하나님은 타인의 피를 흘리든지 자기 자신의 피를 흘리든지 그 피값을 요구하실 것이다(창 9:5)
자살을 기도하는, 정신이 온전한 사람은 하나님의 목전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생명을 버릴 권리가 없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자살을 생각도 해서는 안된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행복과 기쁨과 평안을 주실 것이다(갈 5:22).
만일 우리가 감당하거나 처리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긴다면, 그때는 바로 기도하고 금식할 때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시험 밖에는 허락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이 우리에게 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피할 길을 내실 것이다(고전 10:13).
자살은 사실상 문제와 책임을 회피하는 경우이다.
사실 그것은 성공하는 도피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심판의 날에 진실을 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 삶에서 우리의 문제와 유혹들을 이기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해결할 기회를 다시는 가지지 못할 것이며 그 결과의 고통을 영원히 받게 될 것이다.
자살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하시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그는 하나님께서 삶과 죽음을 주관하실 권리를 빼앗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가지고 계신 계획과 목적에 반역하는 것이다.
결론으로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그분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고 또한 개개인을 위한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생명을 고의적으로 해하는 것은 죄악이다.
"살인하지 말지니라"(출 20:13)
"피를 멀리하라"(행 15:20)
기본적인 율법
하나님의 율법 중 가장 기본적인 것 중의 하나는 사람이 타인의 생명을 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살인을 금지하는 율법의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피를 흘리는 모든 피조물을 정죄하신, 창세기 9: 5-6에서 노아에게 주어졌다.
십계명은 모든 종류의 죽임을 포함하고 있다(출 20:13).
그리고 신약성경의 교회가 이 가르침을 재확인했다(행 15:20).(위 구절에 대한 검토는 8장에 자세히 나와 있음)
다른 많은 구절들이 살인을 죄로서 규정하고 있다(마 5:19, 막 7:21, 갈 5:21).
살인
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죄가 되는가?
먼저 그것은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께 대한 범죄이다(창 9:6).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해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의 삶에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계 시다.
각 개인은 모두 유일무이하고 다른 어떤 이도 대신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개개인이 각각의 방법으로 그분을 찬양하기를 원하신다.
살인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개인의 찬양을 빼앗고 또한 하나님의 계획으로부터 그 개인의 영역을 사라지게 한다.
살인은 또한 그 가족에 대한 범죄이다.
가족, 친구들과 다른 사랑하는 이들은 그들이 사랑했고 또 그들을 부양했던 한 사람의 죽음에 의해 모두 고통을 받는다.
마지막으로, 살인은 희생자에 대한 죄악이다.
그것은 희생자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할 의무를 다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만일 그가 죄인이라면, 그는 더 이상 하나님께 대해 배울 기회도 없고 또 회개할 기회도 잃어버리게 된다.
이 상황에서는, 살인자는 그의 희생자를 영원한 형벌로 보내게 된다.
만약 그가 더 살았다면, 아마도 그는 하나님께 대해 배울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는 선한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의 삶에 좋은 영향을 끼쳤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른 이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사람은 이러한 가능성을 그에게서 빼앗아 갈 권리가 없다.
아무도 다른 이들을 영원으로 보낼 권리가 없고 또한 그가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거나 하나님을 섬길 기회를 박탈할 권리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같은 질문을 한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인에게 죽이라고 명령했는가?
따라서 전시에는 적을 죽일 수도 있지 않은가?"
이것에 올바르게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구약 안의 몇 가지 기본적인 사실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는 한 나라를 선택하셨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창조하셨고 모든 사람들이 그 분을 섬기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일부의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했다.
그런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언약과 약속들을 주셨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만을 경배하기로 약속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그를 통해서 큰 나라를 일으키리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을 때는 그들에게 땅을 약속하셨다.
약속된 땅의 목적은 이스라엘인들이 세상으로부터 구분되어 거룩한 삶을 사는 장소를 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들에게 등불과 본보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여주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다른 모든 나라들이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획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람들을 다루시고 국가적인 구원을 위한 방법을 주시는 것이었다.
이것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어떤 나라들을 멸망시키라고 이스라엘에 명하셨는지 알 수 있다.
국가적인 차원으로, 그들은 이스라엘의 존재를 부정하고 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부정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그 시대의 구원계획을 위협했으므로, 이러한 나라들은 멸망 받아야 했다.
둘째로, 그들은 완전히 하나님을 부정했고 그들의 심판의 때가 이르렀던 것이다.
단순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그들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이다.
이 나라들은 벌써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정죄를 받은 것이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국가적인 차원이 아닌 개인적인 차원에서 사람들을 다루신다.
이제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완전히 개인적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21).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은 이제 자신의 존재를 위해 싸워야 하는 한 나라가 아니고 모든 나라들에서 선택되고 영적으로 세상으로부터 구분된 개개인의 모임이다.
모세의 율법 항에서는, 심판은 즉각적이었고 죄인은 자신이 범한 죄의 대가를 받았다.
때때로는 즉각적인 죽음의 형벌이 내려지기도 했다.
은혜시대에서는, 심판은 유예되었고, 이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은총이 허락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사람들을 다루시고 심판하시고 형벌을 내리신다.
우리는 아무도 판단할 수 없다(마 7:1).
결론적으로 구약성경의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오늘날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은혜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훨씬 높은 수준의 경건한 삶이 요구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율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가르쳤다.
율법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다(마 5:38,43).
예수께서 오셨을 때, 그분은 우리가 다른 쪽 뺨도 돌려대야 하며, 우리의 원수를 사랑해야 하며,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행을 하고, 우리를 속이고 이용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마 5:39, 44).
우리가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성령의 침례나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은혜를 누리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러한 '완전하라'라는 기준을 만족시킬 능력이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육체적인 전쟁을 하도록 허락하셨지만, 지금 우리가 싸워야 될 전쟁은 영에 속한 것이고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다(엡 6:12).
우리는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의 완전한 기준에 따라 살아야할 책임이 있다(마5:48).
우리는 어떤 이유로든 다른 인간을 죽일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원수를 죽이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없고, 그들은 영원한 정죄로서 저주한다면,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우리는 하나님께 의지하는 마음으로, 다른 이들의 생명을 취하려는 생각을 가지게 될 만한 상황으로부터 우리를 구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행하는 자들을 위해서 그분의 말씀과 뜻을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것을 신뢰할 수 있다.
우리는 신중히 행동함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생사를 주관할만한 자리에 자신을 놓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전쟁과 자기방어
이것은 전쟁과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타인을 죽이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우리가 마태복음 5장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도 상대방을 죽일 수가 없다.
스데반이 돌을 맞았을 때, 그는 맞받아서 돌을 던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를 죽이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했다(행 7:55-60).
베드로가 칼로서 예수님을 지키려고 했을 때, 주께서는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를 꾸짖었다(마 26:52).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방어를 위해서 살상용 무기를 가지고 다닐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무슨 목적으로 그것을 가지고 다니는가?
만약 당신이 그 무기를 사용해야 할 상황에 처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만일 당신이 누군가를 죽인다면 무엇을 느끼겠는가?
당신은 정말로 타인을 죽일 것인가?
당신은 살상 무기를 가지고 다니기로 결정하기 전에 이같은 질문들을 먼저 답해야 할 것이다.
군 복무와 관련해서, 우리는 애국심과 성경이 말하는 권세에 순복하는 것을 믿는다(벧전 2:13-17, 롬 13:1-7).
우리는 조국을 위해서 일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 때문에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
전시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의료요원으로서 혹은 다른 일 가운데서 그들의 삶을 희생했다.
우리는 이 가르침이 초대교회의 역사에서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일 대학의 역사학자에 의하면, "군 복무는 허락되었지만, 전투에 참가하는 것은 거부되었다. 이것은 히포리투스(hippolytus)의 경전에서 발견되었는데, 그리스도인은 군인이 될 수 있지만 죽일 수는 없다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로랜드 배인튼의 초대 기독교역사, 프린스톤의 밴 노스트란드 출판사 1960, 54페이지).
같은 책의 50페이지에는, "검투사들의 결투는 금지되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그 싸움의 중인이 될 수 없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사형을 선고해야할 어떤 관료직도 맡을 수가 없었다"라는 내용이 실려있다.
미움
살인의 의미는 요한일서 3:15에서 크게 확장된다.
여기서 우리는 살인자에게는 영생이 없다는 말을 듣는다.
이 구절의 시작부분은 먼저 미움을 살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 형제나 이웃을 미워하는 자는 마치 정말로 그를 죽인 것처럼 그의 피에 대한 죄가 있다.
미움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시작될 때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낙태
사람을 죽일 수 없는 모든 이유가 낙태에 있어서도 같이 적용된다.
임신의 순간에 정자와 난자가 결합해서 살아있는 생명체가 된다는 것은 생물학적인 사실이다.
임신 후 한 달이면, 눈과 발 그리고 머리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아이는 벌써 호홉을 하게 되며 어머니를 통해서 양분을 공급받는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가 영원한 영혼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는다.
만약 임신의 순간에 영혼이 탄생하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에 영혼이 생길까?
분명히, 태아가 사람으로 구분될 수 있는 때인 임신 40일 정도면 아이는 영혼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타임지 1977년 5월 14일자).
만약 영혼이 임신 후 9개월 이후에 탄생한다면 미숙아로 태어난 아이들은 어떻게 된 것일까?
만약 아이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올 때 영혼이 생겨난다면, 시험관 아기는 어떻게 된 것인가?
성경은 관련된 모든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뱃속에 있는 태아를 자녀로 규정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부터 거룩하게 구별하셨다(렘 1:5).
다윗은 주께서는 그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그의 하나님이었다고 언급했다(시 22:10).
그는 또한, 자신이 잉태되었을 때 사람의 죄성을 물려받았다는 의미로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말했다(시51:5).
계획적으로 아이를 낙태하는 것은 그 살아있는 아이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뱃속에서 몇 달된 아이를 죽이는 것과 태어난 후 몇 달된 아이를 죽이는 것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뱃속에 있다가 죽음을 당한 아이 와 미숙아로 태어나서 살도록 허락된 아이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어떤 아이는 영혼을 가지고 어떤 아이는 영혼이 없다는 말인가?
우리는 특정한 기한을 못박아 말하고 그 이전 시기의 태아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어떤 아이는 영혼이 있으므로 사람이고 어떤 아이는 아니라고 한다면 그래서 어떤 아이는 살아야 하고 어떤 아이는 죽일 수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가지고 장난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임신은 출산의 일부이다.
남자와 여자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그 창조에 관여하고 계시는 것이다.
임신이 이루어진 후에는 사람이 태아에 대해서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인 인생의 고매함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살 권리가 상황을 주도해야 하는 것이다.
자연적 낙태(유산)는 단순히, 병이 있거나 살 가능성이 없는 아이를 자연이 거부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살인이 아니고 몸이 태아를 제거하는 것이다.
만약 어머니의 몸이 약하다면, 그녀는 아이를 낳는데 어려움을 가질 것이고 또한 아이를 다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계획적인 낙태(인공적인 낙태)는 인간을 죽이는 행위이다.
이것은 가르쳐야 하고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를 잃어버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낙태를 행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 의해서 정당화될 수 없다.
낙태를 하지 않고 가족 계획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계획적인 임신은 이미 임신된 개인을 멸망시키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용인될 수 있다.
태아가 임신되었을 때는, 결정을 할 수 있는 시기는 이미 지난 것이다.
산모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을 경우에는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이며 또한 치료자이심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는 의로운 여인을 해산의 시간에서 구하실 것이라고 약속했다(담전2:15).
의사인 윌크부부는 이 주제에 대해 매우 도움이 되는 "낙태에 대한 편람"을 출간했다(1975년 오하이오주의 해이즈 출판사간).
이 책에 의하면, 태아가 임신된지 8주이면 모든 인간의 신체구조가 형성된다고 한다.
18일에서 25일 사이면 심장의 박동소리도 감지될 수 있다.
뇌파는 40일 안에 발견된다.
이 책은 낙태에 대한 거의 모든 질문들을 답하고 있다.
6주, 8주, 10주된 태아의 컬러사진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소금 중독과, 흡입, 그리고 절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낙태의 사진들도 담고 있다.
태아들은 비록 작기는 하지만 완전한 사람들의 모습을하고 있다.
이 주제에 대한 또 하나의 좋은 책은,'낙태, 성경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는 도널드 슈메이커의 책이다(미시간그랜드 레피드 소재, 베이커 출판사).
이 책은 경제적인 어려움과 사회적인 낭패나 정신적 육체적인 결함의 가능성, 산모의 건강, 강간이나 근친상간으로 인한 낙태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강간피해자의 임신을 막기 위해 DES 호르몬(diethylstilbesterol)을 사용하는 것을 알고 있다.
임신 이전에 이 조치를 취하는 것은 가능하다.
요약하자면, 낙태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대답해야 할 두 가지 질문이 있다.
무슨 권리로 우리가 타인의 실수로 생겨난 죄 없는 생명을 취할 수 있는가?
만약 낙태가 무슨 이유로든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면, 무엇 때문에 우 리는 새로 태어난 아이나, 정신 장애자나, 신체 장애자나, 고아나 늙은 사람들을 같은 이유를 가지고 제거하지 않는가?
자살
자살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된다.
하나님은 타인의 피를 흘리든지 자기 자신의 피를 흘리든지 그 피값을 요구하실 것이다(창 9:5)
자살을 기도하는, 정신이 온전한 사람은 하나님의 목전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생명을 버릴 권리가 없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자살을 생각도 해서는 안된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행복과 기쁨과 평안을 주실 것이다(갈 5:22).
만일 우리가 감당하거나 처리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긴다면, 그때는 바로 기도하고 금식할 때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시험 밖에는 허락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이 우리에게 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피할 길을 내실 것이다(고전 10:13).
자살은 사실상 문제와 책임을 회피하는 경우이다.
사실 그것은 성공하는 도피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심판의 날에 진실을 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 삶에서 우리의 문제와 유혹들을 이기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해결할 기회를 다시는 가지지 못할 것이며 그 결과의 고통을 영원히 받게 될 것이다.
자살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하시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그는 하나님께서 삶과 죽음을 주관하실 권리를 빼앗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가지고 계신 계획과 목적에 반역하는 것이다.
결론으로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그분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고 또한 개개인을 위한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생명을 고의적으로 해하는 것은 죄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