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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인 관계들

성적인 관계들

"(너는) 간음하지 말지니라"(출 20:14)

"음행과…멀리하라"(행 15:20)

성경은 결혼과 성적 관계에 대한 가르침에서 아주 분명한 선을 긋고 있다.
신구약의 많은 성경구절들이 간음과 음행을 정죄하고 있다.
일반적인 의미로서 이 두 단어는 모든 불법적인 성적 관계를 의미한다.
기본적으로 성경은 모든 종류의 혼외 성관계를 금지하고 있다.

결혼

먼저 그 기원과 목적, 그리고 본질을 살펴보기로 하자.
결혼은 처음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다.
그는 하와를 창조하신 후 아담에게 아내로 주었다.
하나님이 결혼을 제정하신 목적은 남자에게 돕는 배필을 주기 위함이고, 남편과 아내 사이의 교제를 허락하기 위함이었고 또한 재생산을 위함이었다(창 2:20, 2:24, 2:18).
그분의 계획은 남녀가 자신의 집을 떠나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창 2:24).
이 연합은 인생 전체에 걸쳐서 단 한 번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짝지어 주셨기 때문이다.
율법 아래에서 이혼이 허락된 것은 사람의 완악한 마음 때문이었다.
마태복음 19:3∼9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원래의 계획과 모세의 율법을 대체시키셨다.
그 성경구절에 따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시험하려고 이혼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만일 예수께서 유대인이 가르친 것처럼 사람이 자신의 아내를 떠나 이혼하는 것을 허락하셨다면,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자로 정죄할 참이었다.
반대로 만일 예수께서 이혼을 정죄하셨다면, 그들은 예수를 모세의 율법을 무시하는 자로 고발할 계획이었다.
그들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라고 대답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에서 이혼을 싫어하신다고 말씀하셨다(말 2:15,16).
성경은 왕과 성직자, 집사들에게 항상 일부일처제를 강조한다(신 17:7; 딤전 3:2, 12; 딛 1:6).
일부다처제는 성경 속에서 두 번째 살인자로 기록된 라멕에 의해 창시되었다(창 4:19,23).

논의를 계속하기 전에, 성적인 연합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남성과 여성을 창조하셨고 또한 그들 사이에 흡인력도 생기게 하셨다.
기독교 내의 어떤 전통들은 성을 품위 없고 비천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 가르침은 성을 인류의 맥을 잇기 위한 필요악이며 그것을 누려서는 안되고 더욱이 거룩한 사람들은 그것에 몰입하면 안된다고 가르쳤다.
그것은 단지 사실이 아니다.
성적 관계의 목적은 재생산 외에도 결혼의 완성이고 남녀사이의 연합을 공고히 하는 것이다.
결혼을 금지하는 사람은 잘못된 교리를 전파하는 것이다(딤전 4:1-3).
히브리서 13장 4절은 성적 관계에 대한 진리를 말해주고 있다.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 13:4).
레위기의 율법에 의하면, 많은 종류의 성적인 범죄들이 죽음으로 다스려졌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죄악을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데 대한 좋은 증거가 된다.
모든 죄가 위험한 것이고 사람을 불 못으로 던질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성적인 죄에는 특히 더 심각한 점이 있다.
왜냐하면, 성적인 죄는 혼인의 신성함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음행을 하는 자들은 한 육체로 합하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결혼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목적하신 것과 같은 결과이다(고전 6:15-16).
성과 결혼은 두 사람의 연합을 포함하고 또 자녀양육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신성한 것이다.
남녀의 결합에 의해서 아이가 태어난다.
한 아이는 남녀가 연합함과 동시에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영혼으로 말미암아 사람과 하나님이 만드는 합작품이다.
그 연합에 의한 결과로서, 그 영혼은 영원한 존재로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온전한 결혼 가운데서 정상적인 형태로 이루어지길 원하신다.
이것이 결혼을 신성하게, 그리고 성적 범죄를 다론 범죄보다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다른 죄와는 달리 성적인 죄가 한 번 이루어지면 그것을 완전히 회복하거나 죄인을 원래의 순수한 상태로 되돌릴 길은 없다.
예를 들어, 도둑은 자신이 훔친 것을 돌려줄 수가 있을 것이다.
거짓말쟁이는 자신의 거짓말을 정정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서 곧 잊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적인 죄는 돌이켜질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때때로 당사자의 평생을 따라다닌다.
예를 들어서 목회자가 그런 과거가 있다면, 그는 목회자로서 부적격하다.
왜냐하면 그는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 하고 좋은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딤전 3:2,7; 딛 1:6; 눅 9:62).
이것은 그러한 죄는 다른 죄보다 더 용서받기 힘들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그 죄의 결과가 다른 죄와는 달리 회복하거나 그 결과를 돌이키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이 주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들을 생각해 보자.
신약성경에 있었던 최초 교회 지도자들의 회의에서 구약성경의 혼외정사에 대한 교훈이 모두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유대 율법에 뿌리를 두고 있는 4가지 교훈 중에 '음행을 피하라'는 교훈이 들어간 것은 성령과 교회 지도자들에게 당연하게 보였다(행15:19-29, 21:25).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것처럼, 음행은 모든 불법적인 성적행동을 포함한다.

간음은 많은 성경구절에서 금지되었다(출 20:14, 레 18:20, 신 5:18).
결혼한 부녀와 간음하는 것에 대한 벌은 연관된 두 사람의 죽음이었다(레 20:10, 신 22:22).
구체적이거나 혹은 한정된 의미로 사용될 경우에, 간음이라는 말은 양자 중 적어도 어느 한 쪽이 결혼을 한 상태에서 성관계를 행한 경우를 일컫는 것이지, 그 외에 다른 성관계의 경우를 일컫지는 않는다.
간통은 인간이 지올 수 있는 모든 죄악들 중의 하나이다(마 15:19-20; 고전 6:9-11; 갈 5:19-20).

음행

한정적인 의미로 사용하자면, 음행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이 범하는 성적 죄를 의미한다.
율법은 음행의 대가를 죽음으로 정하고 있다(신 22:20-21).
결혼은 음행의 유혹을 피하기 위해 제안된 방법이기도 하다(고전 7:2).
음행은 신약성경에서 자주 언급되고 금지되었다(고전 6:13-18; 갈 5:19; 엠 5:3; 골 3:5; 살전 4:3).

근친상간은 가까운 친척간에 일어나는 간음을 의미한다.
이것을 금지하는 율법은 스무 가지나 있다(레 18:6-18, 신 22:30).
아버지의 아내와 간음을 범한 자는 율법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레 20:11).
이 죄는 고린도 교회에서도 있었다(고전 5).

수간

수간은 짐승과 성행위를 가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죄는 사람뿐만 아니라 관련된 동물 모두 다 죽음으로 다스려졌다(출 22:19, 레 18:23, 20:15-16, 신 17:21).

강간도 죽음으로 다스려 졌다(신 22:23-27).

불결함은 순결함과 반대되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고후 12:21, 갈 5:19, 엡 4:19, 5:3, 골 3:5, 살전 4:7, 벧후 2:10).
그것은 모든 종류의 성적 도착을 의미하는데, 로마서 1장 24절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또한 아동학대 같이 다른 곳에서 언급되지 않은 것들을 의미한다.

호색은 모든 종류의 부정한 행위와, 음란하고 외설적인 것들을 의미한다(막 7:22, 고후 12:21, 갈 5:19).
음란한 마음을 부추기는 것과 정욕과 성적인 죄를 조장하는 것들은 실제로 성적인 죄가 일어났는가에 관계없이 다 이 범주 가운데 속한다.
그러므로 정욕적인 환경과 세상적인 활동이 벌어지는 장소들은 다 이 정의 가운데 포함된다.
영화들과 텔레비전 방송, 춤추는 것, 음탕한 이야기들이나 농담들, 음화들은 호색함을 부추기는 것들의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어떤 책들과 노래들, 어떤 음악들도 또한 음란한 것이 될 수 있다.
음란한 욕망을 품는 것과 정욕적 생각을 하는 것이 죄임을 우리는 항상 기억하여야 한다.
예수께서는 정욕을 품고 여인을 바라보는 것도 간음이라고 말씀하셨다(마 5:28).
그러나, 유혹이 마음속에 들어올지라도 그것을 즐기거나 생각 중에 정욕으로 발전하지 않는다면 죄가 아니다(약 1:14-15, 마 4:1-11).

여기서, 페팅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한다.
강하게 포옹하는 것은 명백히 성적으로 자극적이고 유혹적이다.
이러한 페팅은 음탕한 생각으로 발전할 수 있고 또한 음행으로까지도 이어질 수 있다.
만일 그 목적이 육체적인 즐거움을 주고 욕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라면 이러한 페팅은 피해야만 한다.
그것의 예를 들자면, 이성 친구 사이에서의 페팅을 들 수 있다.
심지어는 약혼한 사이에서도 키스와 끌어안는 것은 절제되어야 한다.
연애와 페팅 그리고 성적인 자제력에 대해서는 허버트 마일이 쓴 '결혼 전에 가져야 하는 성적인 이해'(Sexual Understanding Before Marriage)라는 책에 잘 나타나 있다(존 더반 출판사 1971년).

수음

자위행위를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인가?
이것은 오늘날 매우 일반적이고 또 중요한 논의이다.
성경은 이 특정한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 않으므로 우리는 일반적인 성에 관한 성경의 말씀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이것은 각자가 그의 마음에서 대답해야 할 문제이다.

마태복음 5:28에서 예수께서 가르치셨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
바울은 디모데에게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며 깨끗한 마음을 가지라고 충고하였다(딤전1:19, 2:22).
우리는 방금 전에 욕정적이고 음탕한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됨을 보았다.
수음이 자주 성적인 환상과 연관되므로, 우리는 스스로에게 마음속에 음욕을 품거나 부적절한 환상을 하지 않고 수음을 할 수 있는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적어도, 당신의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의 성적인 관계를 상상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에 반대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또한 우리는 자위행위가 우리의 몸이나 마음이나 양심을 더럽힌다고 느끼게 만드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것이 죄의식과 의심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가?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을 우리 삶 속에서 해결해야만 한다.

또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성교의 목적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남편과 아내간의 밀접한 관계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계획하셨다.
성교는 기쁨과 사랑의 표현을 나누는 것이다.
자위행위는 이 조건을 만족시키지 않는다.
이것이 습관적으로 자주 하는 수음이나 수음에 정신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한다.

팀 스태포드(존더반 출판사)에 의해서 쓰여진 러브 스토리는 이 문제에 대한 좋은 방법을 제시한다.
독신인 저자는 성경구절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심리적인 필요와 죄의식, 환상 그리고 습관적인 수음을 피하는 방법을 말해준다.

이 문제에 대한 결론으로서, 당신은 당신의 생각과 유혹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다.
성경은 우리가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고후 10:5).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올바른 대답을 주실 것을 믿고 또한 죄를 이기며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으로 믿자.

남색하는 것(남자의 여성스러움)

남색은 고전 6:9-10에 사람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죄로 규정되었다.
그것은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동성애와 자주 병행한다.
흠정역 성경은 '남색하는 자'와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하는 자'를 위의 구절에 같이 나열하고 있다.
헬라어로, 전자는 말라코스(malacos)이고 후자는 아르세노코이테스(arsenokoites)라고 한다.
성경이 같은 구절에서 다른 두 가지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서, 그것은 서로 다른 것으로 보인다.
영어-헬라어 신약 주석은 전자를'쾌락에 빠진 사람'이라고, 후자를 '남색자, 비역질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였다.
스트롱 사전은 말라코스를 '보들보들한 옷, 비유적으로 미동'이라고 정의하였다.
미동은 성적 도착을 만족시키는 소년을 의미한다.
다른 구절에서, 이 단어는 부드러운 옷이나 망토를 의미하는 '부드러운'이라고 번역된다(마 11:8,눅 7:25).
성경은 여자처럼 행동하는 남자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여자처럼 옷 입는 남자들과 여자를 위해 만들어진 옷을 입는 사람들을 포함한다.
이러한 행위는 복장도착(Transvestism)의 가장 난잡한 형태이다.
또한 이것은 신명기 22장 5절에서 명백히 정죄되었다.
이 구절은 남자와 여자 모두가 상대방 성에 속하는 옷을 입는 것을 금하고 있다(6장 참조).
그리고 바울은 남자가 머리를 길게 기르는 것과 여자가 짧은 머리를 한 것을 금지하고 있다(고전 11:14-15; 7장 참고).
이러한 성경구절들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두 성 사이에 구분을 두시고자 하신 것은 분명하다.
남자는 여성스러워서는 안되고 여성은 행동이나 습관, 옷 입는 것에서 남자 같아서는 안된다.

동성연애

동성연애(Homosexuality)는 남색(Sodomy)이라고도 불리고, 여성의 동성애는 레즈비어니즘(Lesbianism)이라고 불린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서 명백히 기술하고 있으며 또한 아주 여러 군데에서 이것을 정죄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에 크게 대두되는 문제이므로, 그것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들을 살펴보자.
율법은 동성애를 죽음으로서 정죄하고 있다(레 20:13).
그것은 가증한 것이라고 불러지는데, 가증한 것이란 사람을 천국에 가지 못하게 하는 것들 중의 하나이다(레 18:22, 계21:27).
창녀와 동성애자는, 그들이 그러한 행위로 번 돈은 하나님의 전에 가지고 오지도 못할 정도로 멸시되었다(신 23:17-18).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이 성경구절에서 남창이나 동성연애자가 번 돈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을 금지하는 대목에 사용된 말이다.
구약성경의 동성연애를 금하는 가르침은, 음행을 피하라고 이야기한 신약성경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는데 음행은 모든 불법적인 성적인 행동들을 의미한다(행 15:19-29).

동성애에 관해 가장 눈에 예는 창세기의 소돔성에 대한 이야기에 잘 나타나 있다(창 19:4-11).
사람의 형태를 한 두 천사가 롯의 집을 방문했을 때, 소돔 사람들은 그들을 강간하려고 했다.
그들은 "그들을 상관할 수 있도록" 롯에게 손님들을 내보내라고 요구했다.
안다(Know)라는 말은 성관계를 완곡하게 이야기하는 성경의 표현이다.
롯이 그것을 거절했을 때, 그들은 방문객들에게 보다 롯에게 더한 해를 가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들은 천사들 대신에 롯의 두 처녀 딸을 취하기도 거부했다.
마침내, 천사들이 롯을 집안으로 잡아 이끌고 문을 닫은 후, 그들을 눈멀게 했다.
심지어는 그 때에도 그 사람들은 "문을 찾느라고 곤비"하였다.
물론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 성을 멸망시키시게 한 죄악들 중의 하나였다.
어떤 이들은 그 성 사람들의 죄는 동성애가 아니고 이방인에 대한 불친절이라고 주장한다.
이 견해는, 유다서 7장에서 그들의 죄는 "다른 색을 따라 가는 것"이라는 동성애에 대한 명백한 언급에 의해서 반박된다.
사실상 유다는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주변 성들이 멸망당한 이유는 그들의 음행과 동성애 때문이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벧후 2:6-22참조).
또한 하나님께서는 천사가 그 성으로 들어가기 이전부터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셨다.

비슷한 이야기가 사사기 19:22∼25에서 발견된다.
성경에 "비류의 자식"이라고 불린 베냐민 길브아의 어떤 사람들이 자신들의 마을에 방문한 한 남자를 공격하려고 한다.
그들은 그 남자의 첩을 빼앗은 후에야 물러섰다.
그리고 그들은 그 첩을 죽을 때까지 강간했다.
다른 지파들은 이 사람들을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베냐민 지파는 그들을 감싸고 돌았다.
결과적으로 베냐민 지파를 거의 멸절시키게 하는 시민전쟁이 일어났다.

또 다른 구약성경에서는 명백히 동성애가 일어났다고 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일어났었다는 상당한 암시를 보이는 장면이 있다.
어느 날 노아는 포도주에 취해서 자신의 장막에 잠들어 있었다(창 9:20).
성경은 그의 아들 함이 노아가 벌거벗은 것을 보고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고 했다.
그의 형제인 셈과 야벳은 뒷걸음질로 걸어 들어가 그들의 아버지를 옷으로 덮었다.
노아가 깨어서 "그 작은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는 함의 자녀들은 셈과 야벳의 종이 되리라는 저주를 내린다.
노아가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인지했다는 것을 주목하라.
또한 성경의 단어들이 함이 어떤 특정한 행동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정적으로 그 저주의 강도는 얼마나 큰 죄가 범해졌는지 말해준다.
만약 함이 단지 그의 아버지를 바라보기만 했다면 그것이 무슨 큰 죄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특히 당시의 동양사회는 현재의 서양사회와는 달리 가족구성원들은 아주 친밀했고 또한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크게 강조되지 않았었다.
만약 동성연애가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함이 받은 저주를 보아 그것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구약성경에는 동성애에 대한 다른 언급들이 있다.
왕 아사와 여호사밧과 요시아는 하나님의 뜻과 또 자신들의 개혁의 일환으로 소돔인들을 유다에서부터 몰아냈다(왕상 15:12, 22:46, 왕하 23:7).
유다의 큰 죄 중에 하나는 소년들을 창남으로 팔려가게 허용하는 것이었다(욜 3:3).
이 성경구절들이 뜻하는 바는 소돔인들은 이 같은 행위를 이방신을 경배하는 방법으로 행하였다는 것이다.
당시의 이방종교는 동성애와 매춘을 그들의 경배 행위 중에 포함시켰다.
어떤 이들은 바로 그것이 동성애가 구약성경에서 정죄받은 유일한 이유라고 주장한다.
아무튼 이러한 주장은 신약성경의 그것을 금하는 구절들, 특히 로마서의 구절들을 반박할 수 없다.

바울은 로마서의 첫 장에서 인류가 점차로 배교를 향해 가는 과정을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그는 먼저 모든 사람이 두 가지-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결과적으로 사람은 핑계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롬 1:20).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도 않았고 또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도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 대신에 그분이 만드신 피조물의 형상을 경배하는 죄를 범했다(21∼23절).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더러움 가운데 내버려두었고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다(24절).
그들은 창조자보다 피조물들을 경배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정욕가운데 내버려두었다.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역리대로 썼다(26절).
마찬가지로,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같은 남자들을 향하여 음욕이 불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그릇된 일을" 하였다(27절).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버려진 마음가운데 두셨다(28절).

이 구절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동성연애가 사람이 하나님을 안 후에 타락해서 이를 수 있는 마지막 단계임을 배운다.
그것은 사람의 몸인 피조물을 찬양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본성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것이다.
결혼의 목적을 다시 돌아볼 때, 동성애가 출산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그것은 여자가 남자의 돕는 배필이 되는 방법도 아니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가 한 육체가 되 는 것도 아니고 또한 일부일처제가 지켜지는 것도 아니다.

로마서의 말씀은 동성애와 레즈비어니즘이 죄라는 것을 명백히 하고 또 배교의 열매라는 것을 이야기 해준다.
이것은 동성연애자가 배교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한 개인으로서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죄인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지금의 시대는 배교의 시대라는 것을, 그리고 배교의 시대에는 더 많은 동성애가 벌어진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는 이 죄악이 더 관영한다.
그것은 사회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결혼이 깨어지면 깨어질수록, 여성이 남성의 역할을 빼앗을 수록, 남성이 자신의 역할을 빼앗을수록, 그리고 악령이 더 활동할수록 이 사회에서 유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동성애는 극단적인 개인적 악의 증거라기보다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악한 시대의 산물인 것이다.

신약성경 또한 동성연애를 죄로 정하고 있다.
어떤 남색자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는 없다(고전 6:9).
여기서 사용된 단어는 흠정역 성경에서는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짓을 하는 자(abusers of themselves with mankind)"이고 미어표준번역에서는 "동성연애자(homosexuals)"이고, 주석성경에서는 "동성애에 참여하는 자(those who participates in homosexuality)"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리고 헬라어-영어 대조 성경에서는 "소돔인-Sodomites(동성연애자를 이르는 말)"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위의 말들은 결코 모호하지 않으며 오히려 명백한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다른 성경들은 "남색하는 자" 와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와 같은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다(딤전 1:10, 담후 3:3).
두 번째 성경구절은 말세에 세상에서 관영하게 될 현상들을 열거한 구절이다.
이것과 연관지어서, 예루살렘은 환란기에 소돔과 애굽의 도시라고 불리게 될 것이다(계 11:8).
다시 말해, 예루살렘은 성적 타락과 영적 간옴의 본부가 될 것이다.
결정적으로 우리는 '불결함'이라는 말이 성경 속의 모든 종류의 부도덕과, 성적 타락, 그리고 동성연애에 사용되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후 12:21, 갈 5:19, 엡 4:19, 5:3, 골 3:5, 살전 4:7, 벧후 2:10).
이것은 롬 1:24이 분명히 말해준다.

우리는 동성연애가 거짓말하는 것이나 훔치는 것과 같이 죄라고 결론을 지을 수 있다.
그것은 병도 아니고 다른 삶의 선택도 아니다.
그것이 오늘날 아주 유행하고 자주 눈에 뜨인다 해도,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먼저, 우리는 그 행동의 결과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물론, 그것은 개인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한 행동의 결과이다.
그것은 사람의 죄성과 사탄이 반항적인 사람들을 유혹해서 생긴 일이다.
아무튼, 그것에 대한 영적인 고려 이외에도, 어떤 이들을 다른 죄들보다는 더 동성애로 이끌 수 있는 몇 가지 요소가 있다.
문화의 특성이 있을 수 있고, 개인의 특성도 있을 수 있고, 더 상처받기 쉬운 신체적 특성도 있을 수 있다.
마치 어떤 이들은 더 쉽게 알코올 중독이 되듯이 말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극복할 수가 있다.
그리고 명백히, 동성애가 유전적이라는 증거는 전혀 없다.
과학적 조사에 따르면 동성애는 유전적인 것이 아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그랬어"라든가 "하나님께서 나를 그런 식으로 만들었어"라고 말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이든 그런 식으로 만드시고 또 그것 때문에 벌을 내리신다면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분일 것이다.
동성애의 경향들은 많은 경우에 심리와 환경의 결과로서 생긴 것이다.
우리는 동성애를 막고 또한 동성애자들을 도울 수 있도록 이것들을 알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요소들이, 습관적 죄와 알코올 중독과 습관적인 거짓말과 매춘 같은 행위로 사람들을 이끌기 때문이다.

인류학자들에 의해 조사된 원시사회를 포함한 모든 사회는 동성애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물론, 다른 죄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많은 사회들 가운데, 여자의 동성애는 매우 드물었고 또한 남색의 경우에도 그 것이 평생동안 지속되는 예는 사실상 없었다는 사실을 알면 흥미롭다.
또 알아야할 것은 여자 같음과 동성애는 똑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많은 동성애자들이 여자 같은 성격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또한 많은 동성애자들이 사실상은 여성관계를 가질 수 있고 또한 관계를 가졌었다는 사실이다.

심리학자들은 동성애로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밝혀 냈다.
기본적으로, 만일 아이가 다른 성의 부모를 항상 흉내낸다면 그 아이는 동성애자가 될 가능성이 많다.
이것은 주로 동성의 부모를 흉내낼 수 없는 경우에 일어난다.
예를 들자면, 아버지가 집에 거의 함께 지내지 않는다거나, 아주 아이를 학대하거나, 매우 몸이 아프거나, 아니면 아이가 두려워하거나 한다면 그의 아들이 어머니를 흉내낼 가능성이 아주 많아진다.
이것은 또한 어머니가 아주 애정이 깊고 아이를 압제하거나 제어하려 할 때 일어날 수도 있다.
이것은 아이에게 무의식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는 이런 영향들로 인해 사실상 다른 성의 부모의 역할을 배우게 될지 모른다.
그로 인해 그는 다른 여자들과 접촉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될 수도 있다.
그는 어머니의 압제를 싫어하고 또 어머니에게 적응하지 못하게 되어 다른 여자들에게도 이러한 감정을 가지게 될 수도 있고, 다른 여자들을 모두 어머니 같이 만질 수 없는 성인같이 보게 될 지도 모른다.
아니면, 어머니에게 너무 충성한 나머지 다른 여자들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가질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이러한 모든 반응들이 동성애로 이어지게 할 수 있는 것들이다.

다른 하나의 중요한 영향은, 첫 번째 경험과 성에 대한 인식이다.
어린 나이에 동성애를 접하게 된다면 그것이 습관으로 굳어지기도 한다.
특히 만약에 그 경험이 즐거운 기억으로 남는다면 더욱 가능성이 커진다.
어릴 때 가지는 이성과의 경험이 비참하게 끝나거나 또 사생아가 태어나기도 하고 또 낙태가 이루어 질 수도 있기 때문에, 이성과의 성경험에 반발감과 죄의식, 두려움을 느낀 젊은이들을 이성으로부터 멀리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육체적인 무능감이 같은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결정적으로, 소년기의 소외는 큰 영향을 끼친다.
적절한 동성의 친구가 없거나, 동성간의 적절한 교제와 활동이 없다면 나중에 이러한 요구는 동성애에 의해서 충족되게 될 수도 있다.
동년배들로부터의 따돌림과 놀림이 젊은이를 자신에게 쉽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동성애자와 친구가 되게 할 수도 있다.

목사가 이러한 영향들을 이해하고 있으면, 이런 불건전한 상황들을 예방하고 고치고, 그렇지 않다면 최소한 대처할 수는 있을 것이다.
만일 성도 중 하나가 이런 징후를 보인다면 상담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만일 그가 자신이 그런 식으로 태어나지 않았고 그는 단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면, 그는 그것들을 어떻게 고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것을 벗어날 수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또한 부모들로 어떻게 자식을 올바른 환경 가운데서 기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빛을 준다.
특히, 우리는 아버지가 그의 아들과 따뜻한 부자의 관계를 맺고, 어머니가 가정의 권위를 가지고 흔드는 것을 자제하고, 아들이 동년배의 친구들과 올바른 우정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 알 수 있다.
아들은, 특히 어머니에 의해 너무 과보호를 받으며 응석받이로 키워져서는 안된다.
우리는 또한 이런 관점에서, 더 이상 사회나 학교체제가 동성애에 관해 우리의 자녀에게 올바른 가치를 심어줄 것이라고 신뢰해서는 안된다.

부모와 교회가 성의 차이와 성 역할의 차이, 그리고 이성간의 올바른 예절에 대해 필요한 교육을 시켜야한다.
우리의 자녀들과 젊은이들은 어떤 상황을 피해야 하고 어떻게 그것들을 피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
그들은 그런 상황들과, 중대한 시기에 있는 그들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해로운 사람들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

그리고 환경에 의한 영향들이 동성애에 대한 정당화로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왜냐하면 먼저, 모든 다른 습관적인 죄들도 환경의 압박이나 나쁜 경험의 영향을 받아서 범해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람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고 자신의 행동을 선택할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 관련된 영적인 힘을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환경가운데서, 심지어는 가족중의 일부가 비슷한 환경으로 동성애자가 된 경우에도, 그것들을 극복했다.
더욱이 사람이 순종하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그것들을 이길 힘을 공급하실 것이다.

동성애는 오늘날 매우 득세하고 있다.
먼저, 어린 시절의 그러한 경험은 지우기가 힘들기 때문이고 또, 그것은 개인의 삶 속에 오랫동안 발전해서 깊이 배어들기 때문이다.
다는 아닐지 몰라도 많은 경우에, 동성애에는 영적인 개입이 있다.
그 사람은 진정으로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할지라도 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동성애가 악한 영들과 가까운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많은 것들이 증거한다.
먼저, 동성애는 극복하기가 매우 어렵다.
둘째, 말세와 이방종교의 경배에 유행하는 동성애는 최근에 더 날뛰는 악령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셋째, 정상적인 성생활을 하던 그리스도인이 타락하고 나서 동성애자가 되는 경우가 그것을 말해준다.
그들은 원래 그런 기질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타락함으로 모든 지옥의 영들에게 자신의 문을 열어주게 된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동성애자들은 다른 동성연애자들을 아무런 대화도 없이 바로 알아본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동성애자들을 알아보는 통찰력이 늘어난다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동성애는 사회적으로 뿐만 아니고 또한 영적으로 다루어 져야하는 강한 습관임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것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또한 어렵다.
다른 모든 습관적인 죄와 마 찬가지로, 어떤 이들이 불필요한 유혹을 피하기 위해 극도로 조심해야 하는 반면에 어떤 이들은 그것에 대해 완전한 승리를 거두고 다시는 고통을 받지 않는다.
그것을 이기는 길은 기도와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이다.
완전한 승리는 쟁취될 수 있고 또한 쟁취되어야 한다.
그것을 이기기 위해서는 참을성과 결단력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필요하다.
시편 37:4이 여기서 적용될 수 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첫 번째 단계는 동성애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동성애는 행위로서 규정된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더 이상 그 행위를 하지 않고 또 그런 쪽으로 음란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더 이상 동성애자가 아니다.
다음 단계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가지길 원하시는, 건전한 여성적인 욕구를 그에게 주시는 것이다.
동성애자는 절대 동성애를 그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그는 그것을 후천적인 것이요 또한 자신이 선택한, 고칠 수 있는 습관이라고 보아야 한다(인식중이든 부지중이든간에).
그는 동성애를 범했기 때문에 동성애자이다.
그가 그런 행동을 그치기로 한다면 그는 더 이상 동성애자가 아니다.

동성애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똑 같은 사람일뿐이다.
그들을 대할 때는 우정과 예의, 그리스도인의 사랑으로서 동등하게 대해야하며 비웃거나 깔보아서는 안된다.
그들은 다른 죄를 짓고 있는 사람보다 더 크게 개인적으로 정죄되어서는 안된다.
동성애자도 매우 신실한 하나님에 대한 갈급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수 있으며 또한 다른 많은 면에서 매우 도덕적일 수 있다.
때때로 그들은 매우 외롭고 힘들 수도 있다.
그들은 보통 자신의 양심이 무감각해질 때까지 자기 증오와 우울증, 의기소침을 겪는다.
우리가 할 일은 그들에게 다가가 성령의 체험을 소개해 주는 것이다.
그 경험을 통해서라야 만이 그들은 그 죄를 벗어날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교인들은 그들을 정죄하거나 자신의 뜻대로 그들을 바꾸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젊은이들에게 아주 위해가 되지 않는다면 예배에서 제외되어서도 안된다.
만일 예배에서 제외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면, 원래의 신자가 동성연애를 하는 것으로 드러났고 또 자신의 행위를 회개하려 하지 않는 경우일 것이다.
위험은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일어날 때 더 크다.

동성애는 오늘날 교회 안에 아주 위험한 요소이다.
많은 큰 교단들이 동성애자를 목회자로 임명하였다.
어느 날 법원이 교회법과는 상관없이 동성애자가 선지자가 되고 목회자가 되는 권리를 주장하고 나설지도 모른다.
목회자들은 자신의 교회를 지킬 의무가 있다.
그들은 동성애를 반대해 가르치고 설교해야 한다.
남성회와 여성회에서 그리고 특히 젊은이들이 있는 모임에서 이 주제가 명백히 다루어져야 한다.
목회자는 젊은 형제들을 만 나서 연애와 애무와 음행과 동성애와 또 다른 비슷한 주제들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어야 한다.
그리고 젊은이들에게는 목회자에게 솔직한 질문을 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목회자의 사모가 젊은 자매들을 만나서 같은 시간을 가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자의 여성적인 옷차림이나 행동은 교회 안에서 결코 허용되어서는 안된다.
소위 '여성해방'에 대한 적절한 태도가 교회 안에서 가르쳐져야 한다(2장 참고).
세상의 영은 언제나 교회를 공격해 왔다.
그리고 또한 교회에 침투하려 할 것이다.
동성애와 남성의 여성다움은 오늘날 점점 우리의 교회들에서 심지어는 음행보다도 더 큰 문제거리가 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영역에 있어서 말세의 도전에 대항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의심의 영에 대해 맞서야 한다.
남자가 어떤 이들에게 여성적으로 보이는 습관과 행동양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가 동성연애자인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민감하고 가능성이 있 을지도 모른다.
사실상 많은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의 남자다움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 중에 다수가 보통 남자보다도 훨씬 남자답다.
우리는 그들을 외모로서 규정할 수는 없다.
아주 남자다운 사람도 여성스러운 남자 만큼 동성애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어떤 이도 동성애자라고 추측하거나 빗대어 말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를 건강하지 못한 환경으로부터 보호할 수는 있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양을 보호하고 죄에 대해서 경고하는 것은 목회자의 의무이다.

결론으로서, 동성애는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모든 사람은 비정상적인 습관과 경험의 기억이 사라질 수 있다면, 이성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
모든 죄들은 극복될 수가 있다.
성령께서 능력을 주실 것이다.
목사와 친구들은 참을성을 가져야 하고 그 당사자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 그 당사자는 자신의 삶을 바꾸겠다는 강한 의지와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는 욕구가 있어야 한다.
많은 이들이 동성애를 극복하였다.
음행하는 자와, 간음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동성애자들을 언급한 다음에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9-11) 라고 말한 것처럼, 모든 죄는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받는 침례와 성령의 능력으로서 극복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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