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제와 연합
교제와 연합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엡 5:11)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후 6:14)
세상과의 교제
세상으로부터의 구분은 진정한 거룩함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1장, 4장 참고).
앞의 여러 장들에서 우리는, 거룩함은 우리를 더럽힐 수 있는 세상의 것들을 피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을 보았다.
지금부터 우리는 거룩함을 추구하기 위해서 일단의 사람들을 피해야 하는 경우를 살펴보고자 한다.
성경은 우리가 어떤 사람들과 사귀느냐 하는 문제를 중요시하고 있다.
잠언 22:24-25절은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그 행위를 본받아서 네 영혼을 올무에 빠칠까 두려움이니라" 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성경구절들은,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과 교제하면서도 거룩함을 지켜갈 수 있다고 하는 이들의 주장을 반박한다.
명백히, 당신이 교제하는 사람의 태도와 영혼은 당신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바울은 강한 어조로 말했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고전 15:33).
다른 말로, 악한 친구들은 도덕성을 떨어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악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지속하기를 계속 고집한다면, 당신이 악한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것은 성경이 보장하는 바이다.
이것이 우리가 모든 죄인들을 피해야 한다는 이야기인가?
아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는지에 관한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과 함께 식사를 하신다고 비난 받으셨을 때에, 그는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설명하셨다(눅 5:30-32).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혼을 얻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들과 어느 정도는 관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영혼을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은 친구가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죄인들과 상대하고 대화하는 것은 생활의 일부로서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세상 안에 살고 있다.
바울은 우리가 간음하는 사람들과 교제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으나, 바로 뒤에 세상에 살면서 세상 사람들과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다고 이야기한다(고전5:9-10).
이것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는 아직도 선을 그어야 하는 영역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에베소서 5장 11절에 의하면, 우리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가 죄를 묵인하거나 그 행위 가운데 참여해 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는 사람들이 세상적인 일 가운데 빠져들 때, 우리는 정중하게 물러서야 한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인과 그의 세상적인 친구들 사이에는 항상 분명한 장벽이 있게 된다.
그들은 좋은 친구가 될 수는 있으나, 어느정도까지만이다.
항상 그리스도인이 참가해서는 안되는 일들이 있고, 또 항상 불신자친구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신자의 경험이 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친구들과 너무 가깝게 지냄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불신자의 세상적인 일들에 참여하거나 그들의 태도를 같이 가지는 것으로 오해하게 해서는 안된다.
"사람을 알려면 그 친구를 보라"라는 속담이나"유유상종"이라는 말도 있다.
우리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거나 어떤 일을 참여하게 될 때 이것을 염두에 두어야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불신자의 영혼을 얻기 위해서 혹은 일상생활의 일부로서 항상 세상의 죄인들과 접하게 된다.
이러한 관계에서 제한되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이 죄스러운 일들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또 타인에게 세상적인 것들과 동화된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반적인 고려들 외에도, 성경은 두 가지의 분명한 지침을 준다.
먼저 성경은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나 삶 속에 명백한 죄를 짓고 있는 사람들을 상대하지 말 것을 가르친다.
둘째, 우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문제를 하나하나 살펴보고자 한다.
교회 내 죄인들과의 교제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3장에서 기독교 즉 말하자면 외적인 교회는 죄인과 의인을 같이 가지고 있다는 비유를 많이 드셨다.
천국은 알곡과 가라지를 같이 포함하고 있는 밭과 온갖 종류의 새가 깃들이는 무화과나무에도 비유되었고, 모든 종류의 물고기를 담은 그물에도 비유되었다.
요점은 기독교를 표방하는 모든 이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외적인 교회는 거짓 선지자도 가지고 있고 마귀의 가르침을 가르치는 선생들도 포함하고 있다.
사실상, 오늘날 종교적 기구로서의 기독교는 계시록 3:14-22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비교될 수 있다.
우리는 오늘날이 마지막 때이고 라오디게아는 마지막 교회시대를 나타낸 것이라고 믿는다.
오늘날의 교회들은 아름다운 건물을 가지고 있고, 아주 재능 있는 성가대와 정교한 의식을 수행하고 있으나 그리스도는 우리가 문을 열기를 기다리며 바깥에 서 계신다.
이것이 오늘날의 일반적인 교회들을 말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아직도 불붙어 있고 거짓 선지자를 구분하는 교회가 있다.
오늘날에도 어떤 교회들은 사도적인 가르침을 고수하고 있고 또 하나님의 성령을 그 가운데 모시고 있다.
우리는 항상, 많은 조직과 종교적인 전통들이 완전한 복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기독교를 표방하는 모든 이들을 받아들이거나 그들을 거듭난 신자로서 생각하고 교제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우리는 구원 얻기 위해서는 어떤 특정한 교단에 속해야 한다고 믿지는 않는다.
모든 집단에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나 삶에서 전혀 그것을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특정한 경우들에 있어서, 교회는 이러한 사람들을 심판하고 교회의 교제에서 제외시키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마 18:17-18, 고전5:5, 12-13 또한 7장 참조).
만약 그런 사람이 심판을 받고 교제 가운데서 제외된다면, 다른 성도들과 목회자들은, 성경에 따르자면, 그와 교제할 수 없다.
만일 그들이 그와 교제한다면, 그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판단을 교회의 판단 앞에 놓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이러한 심판의 한 목적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 데 있다.
즉 온빵에 번지기 전에 누룩을 제하는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그와 계속 관계를 이어간다면, 그들은 자신들을 해하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출교된 사람을 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제재행위의 또 다른 목적은 잘못한 사랍을 포용하고 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교제를 하고 위안 올 받는다면, 그는 이러한 교훈을 배우지 못하고 불성실하고 위선적으로 되고 말 것이다.
많은 경우에 교제에서 제외된 사람이, 회개하거나 용서를 구하지 않은 채로 자신의 교회를 옮기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러한 행위를 돕는 사람은 그의 잘못을 용인하는 것이며 또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물리게 될 것이다(요이 11).
성경은 출교해야 할 사람들을 명시하고 있다.
만약 어떤 이가 성경에 나온 이유로 출교되었는데, 다른 사람이 그와 교제를 계속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직접적으로 반항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공적으로 출교가 결정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가 그런 종류의 성품이나 죄를 보인다면, 바울은 우리가 그들과 상종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다.
특히 그는 말한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 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전 5:11).
이러한 가르침은 아주 철저해서 우리는 그런 이들과 함께 먹을 수도 없다.
그리고 이러한 경우는 위에 열거된 죄들을 지으면서도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자들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것은 세상에 있는 그러한 사람들을 접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고전 5: 9-10).
그러한 경우에 해당되는 죄들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1.간음하는 자-어떤 종류이든 불법적인 성적 죄를 짓는 자(9장 참고)
2.탐람하는 자-다른 이들이 가진 것을 욕심내는 자.
특히 탐욕과 동의어이다.
사람은 돈이나 옷이나 심지어는 교회내의 위치도 탐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주로 시기나 증오 그리고 수군거림의 형태로 나타 난다.
3.우상 숭배하는 자-우상에게 경배를 하는 사람(손으로 만든 상들)
4.욕하는 사람-타인을 언어로서 욕보이는 사람.
이것은 끝없는 비판과 중상모략으로 타인에 대해 악한 것을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4장 참고).
5.술 취하는 자-습관적으로 술을 마시는 자들을 의미한다.
6.토색하는 자-돈이나 이권, 약속 같은 것을 억지나 협박 혹은 불법적인 압력을 넣어서 취하는 사람(4장 참고).
이러한 교회 안의 여섯 종류의 위선자들 외에도, 일하지 않고 일만 만들며 규모없이 행하는 사랍들을 피하라고 성경은 명하고 있다(살후 3:6, 11, 14).
1.규모없이 행하는 사람들-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에 주어진 지침에 반하여 행동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바울은 자신의 서신을 배척하는 사람과는 함께 하지 말라고 말한다(l4절).
다른 성경구절에서는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을 피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2.일하지 않는 자들-게으른 이들을 말한다.
정직하게 일하면서 살 수 있으나 그러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3.일만 만드는 사람들-다른 사람들의 일에 끼여들거나, 자신의 권위가 미치지 않는 영역까지도 상가하는 사람들(3장 참고).
성경은 또한 거짓 선생들과 시기, 쟁투, 수군거림과 악한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을 멀리하라고 가르친다(딤전 6:3-5)
1.거짓 선생들-우리는 잘못된 교리를 전하는 사람들과 교제할 수 없다.
그들이 진리를 배울 수 있도록 도와줄 수는 있으나, 그들과 아주 가까이 지내거나 그들을 교회의 지도자로 삼아서는 안된다.
2.질투-위치나, 책임 혹은 돈은 부러워하는 사람들을 포함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것들을 부러워함으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을 것이다(3장 참고).
3.쟁투-부조화와 이견, 논쟁과 다툼을 통해 더 좋은 위치를 차지하려하거나 파당을 짓고 혹은 개인적인 다툼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것들이 교회 안에서 설자리는 없다.
4.악한 계획-타인에 대해서 악한 것을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쉽게 남에 대해 결론 내려 버리거나, 악한 것들을 상상하거나 타인에게 악한 동기를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비판과 수군거림을 통해서 외적으로 표출된다.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은 자신이 목격하거나 들은 사소한 일들을 가지고 무고한 사람들을 비판한다.
마지막으로, 요한 2서 9-11절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받지도 말고 돕지도 말라고 가르친다.
만약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가진 것이다(9절).
그는 예수께서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오신 영원하신 하나님임을 인정할 것이다.
요한은 누구든 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는 그를 우리의 집에 초대하거나, 그의 사역을 도울 수 없다고 말한다.
심지어 우리는 "하나님이 도우시길"이라는 축복을 그에게 해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그의 악한 일에 참예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든 거짓 선생들을 도울 수 없다.
심지어는 그들의 성공을 바라는 말조차 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 당시에는, 대부분의 교회들은 가정에서 모였다.
그래서 요한은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선생들이 교회의 예배를 주관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지금껏 말한 것들은 하나님께서 왜 그러한 사람들을 멀리하라고 명하셨는가에 대한 좋은 이유들이 된다.
그러한 사람들은 위험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
만일 당신이 시기나 질투, 험담과 악의, 잘못된 교리나 음행을 회하지 않은 사람들과 가까이 지낸다면, 사실상 당신은 그의 태도를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은 당신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악한 태도가 성경을 따라 사는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을 굴복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러한 사람들과 교제한다면, 당신은 성경말씀을 무시한 것이고 하나님의 뜻에 반하게 행동한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벌써 하나님의 권위 아래에서 한 발짝 나온 것이고, 그러므로 이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
그 결과로서 그러한 태도는 쉽게 당신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이러한 사람들과 교제를 하고 있다면, 당신은 자신을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과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함
이것은 세상으로부터의 구분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바울은 다섯 가지 질문을 던짐으로서 이것을 설명한다(고후 6:14-16).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어찌 조화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와 벨리알(무가치함을 뜻하는 사탄의 이름중 하나)이 어찌 하나될 수 있는가?
신자와 불신자가 무엇을 공유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조화될 수 있는가?
한편은 의와 빛, 그리스도와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이고, 다른 한편은 불의와 어두움, 사탄과 불신, 그리고 우상 숭배이다.
이러한 것들은 서로 상반되고 절대로 조화롭게 공존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17절).
이 명령은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의 약속을 가져다준다.
만약 우리가 그들로부터 분리되어서 함께 멍에를 메는 것을 거부한다면, 주께서는 우리를 받아주시고 우리의 아버지가 되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실 것이다.
이 성경구절의 실제적인 적용은 무엇일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멍에를 멘다는 것이 무엇이고 불신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아야 한다.
멍에를 벤다(to be yoked)는 것은 함께 연결되어서 가까이 있는 것을 뜻한다.
원래의 뜻으로는 이 단어는 소같이 짝지어 져서 함께 일하는 동물들을 의미했다.
웹스터 사전은 다음의 것들을 멍에를 함께 메는 부류로서 예시했다: 속박, 굴종, 형제됨 그리고 결혼.
그리고 '짝'이라는 단어의 뜻으로서 배우자, 파트너, 친구, 남편이나 아내를 들었다.
그러므로 함께 멍에를 멘다는 것은 한편이 다른 편을 심각하게 영향을 줄 수 있고, 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대신 이야기 할 수 있으며 책임을 함께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가장 분명한 관계는 결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정한 경우에는 사업 상의 합작과 조합에 가입하는 것이 이러한 관계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결혼은 확실히 멍에를 함께 메는 관계이다.
왜냐하면 그것보다 더 가까운 인간관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이 성경의 구절이 결혼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적용되는 다른 것을 찾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결혼은 삶 전체를 통한 연합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구원에 대한 문제 이외에서는 부부를 한 단위로 생각하신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으나, 주 안에서만 하라고 했다-그 말은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하라는 말이다(고전 7:39).
사용자와 고용인의 관계는 멍에를 메는 관계라기 보다는 어느 한 편도 깰 수 있는 상명하복의 관계이다.
사업상의 동업관계는 만약 양쪽이 같은 결정권을 가지고 있고 상대방의 결정에 따라서 매일 수 있다면 멍에가 될 수 있다.
조합의 관계는 그 구성원들이 어느 정도까지 연합되고 서로 도와야 하느냐에 따라서 멍에가 될 수 있다.
신자의 정의
신자로서 우리는 위에 언급된 어떤 방식으로든 불신자와 멍에를 같이 메서는 안된다.
그러면 한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신자와 불신자는 어떻게 성경적으로 정의될 수 있는가?
단지 신앙을 입으로 시인하거나 지적으로 동의한다고 해서 신자가 될 수는 없다.
신앙의 성경적인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하는 것이다(요일 2:3; 5:1-3).
로마서 10:16은 순종의 결핍은 신앙의 결핍이라고 말한다.
요한복음 7:38-39에 의하면, 진정으로 성경을 믿는 사람은 성령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가복음 16:16-18은, 신자는 침례를 받을 것이고, 그 예표 중 하나는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고넬료와 그의 온 집은 그들이 믿었을 때, 방언 말함이 수반되는 성령의 침례를 받았다(행 10:44-48, 11:17).
빌립보의 간수는 바울의 말을 믿고 침례를 받았는데, 그때는 자정이 더 지난 시간이었다(행 16: 31-33).
물론 믿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 시작되는 것이고 또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동안 계속되는 하나의 과정이다.
성경이 '신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을 때는, 하나님의 온전한 구원계획을 체험한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행 2:38).
어떤 경우들에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까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만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순종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일도 있다.
그 결과로서, 그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 이라고 불릴 수 없다.
여기에 성경적인 예들이 있다: 마귀들(약 2:19)과 예루살렘의 많은 사람들(요 2:23-25) 그리고 많은 종교 지도자들(요 12:42)과 많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마 7:21-23), 베드로의 설교를 듣기 이전의 고넬료(행 10:1-6, 11:14), 마술사 시몬(행 8:13, 20-23)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이 복음을 전하기 이전의 사마리아 사람들(행 8:12-16).
이러한 예들이 말해주는 것은 사람이 단순히 예수님의 존재를 믿는다고 진정한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또한 올바른 기초를 가져야만 한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순종해야 하며 믿는 이들에게 따르는 표적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만일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이들이 올바른 신앙의 기초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거룩한 삶을 추구하고 있지 않다면 그들과 함께 멍에를 메서는 안된다.
구약성경의 예들
우리가 믿지 않는 이들과 함께 멍에를 메서는 안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로 세상과 타협하게 하기 때문이다.
모든 시대들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세상으로부터 분리될 것을 명령하셨다(1장, 4장 참고).
아브라함은 그의 나라와 가족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창 12:1).
그는 이삭이 이방인 아내를 취하지 않도록 계획을 세웠고, 이삭은 또한 야곱을 위해서 똑같은 일을 하였다(창 24:2-3, 27:46, 28:2)에서는 믿지 않는 여인과 결혼함으로서 그의 부모들의 마음을 슬프게 하였다(창 26:34-3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방의 풍습과 이방인과의 결혼을 멀리하라고 명령하셨다(신 7:3).
발람은 약삭빠르게도 이스라엘을 망치게 하기 위해 모압인들을 이용해 이스라엘이 족외혼을 하게 하고 우상숭배에 빠지게까지 하였다(민 25:1-3, 31:16).
삼손의 타락은 블레셋 여인 때문이었다(삿 14:2-3, 16:4-5), 그리고 솔로몬의 이방 아내들은 그로 죄짓게 만들었다(왕상 11:4-8).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사용하시기 이전에 여러 번 그들의 잘못된 결혼을 정결케 하셔야 했다(민 25, 에스라 10, 느헤미아 13:23-31).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6장의 가르침은 구별됨에 관한 가르침의 일부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새로운 개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기본적인 원칙이다.
결혼
그러면 이것이 제시하는 몇 가지 실제적인 질문들을 결혼이라는 측면에서 다루어 보기로 하자.
그리스도인이 불신자(하나님의 말씀대로 구원 얻지 못한 자)와 결혼할 수 있는가?
대답은 '아니다' 이다.
만일 그가 결혼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이 된다.
그럼 불신자가 불신자와 결혼할 수 있는가?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똑같이 멍에를 메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직자가 믿지 않는 두 사람의 결혼식을 집전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만약 그가 신자와 불신자와의 결혼식을 집례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것이고 따라서 타인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을 돕는 것이 된다.
그가 자신이 하는 일을 잘 모르고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는 삯꾼 목자가 된다.
그럼 그리스도인이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을까?
대답은 '아니다'이다.
그들은 같은 기본적인 경험과 신앙을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같은 멍에를 메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탄은 믿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들과 함께 멍에 메는 것을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신자가 믿지 않는 배우자를 가지고 있다면 물론 그들과의 결혼 생활을 지속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혼인의 서약을 존중해 주시고 그것이 깨지기를 원치 않으신다(고전 7:10-13, 39).
이러한 경우에 신자는 불신자 배우자를 거룩하게 할 수 있다(l4절).
이것은 그러한 결혼관계가 합법적인 것이고 또한 신자는 자신의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영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경우에 신자의 의무는 기도와 거룩한 삶으로서 믿지 않는 배우자를 주께로 인도하는 것이다(벧전 3:1-2).
어떤 이들은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은 주께로 영혼을 인도하는 좋은 방법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간과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술집에 들어가 술을 마시며 전도하는 것과 마찬가지 주장이다.
우리는 우리의 기준을 내리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서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가 없다
-그러한 결혼이 성사되는 대부분의 경우에 불신자인 배우자는 결코 주께로 오지 않는다.
만약 불신자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결혼하기 전에 신자가 되었을 것이다.
만약 그가 결혼 전에 성령의 침례를 받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는 결코 성령을 받지 못할 것이다.
사실상, 불신자가 믿게 되는 것보다 믿는 배우자가 타락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솔로몬왕의 이야기가 대표적인 예이다 보통, 신자는 자신의 믿음과 타협하게 된다.
최소한 믿는 배우자는 결혼상태를 지속시키기 위해서 몇몇 부분에 있어서는 타협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신자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을 위해서 완전히 헌신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헌신할 시간도 줄어들게 될 것이다.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자녀들은 믿지 않는 부모를 따라 행동되고 구원 얻지 못할 것이다.
데이트
믿지 않는 자와 이성으로서 사귀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뜻한다.
앞에서 다룬 말씀들을 생각할 때, 성령으로 충만한 젊은이가 어떻게 교회 안에 있지 않은 남자 친구나 여자 친구와 지속적으로 사귈 수 있겠는가?
아마 당신은 사귀는 사람과 결혼하게 될지도 모른다.
만일 신자가 불신자와 결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결혼으로 귀착될 지도 모르는 친밀한 관계를 불신자와 맺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겠는가?
어떤 일상적인 관계들이나 교제들, 혹은 그리스도인의 모임으로서 함께 어울리는 것은 적절한 일이고 또 불신자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데이트의 관계가 시작된다면 불신자를 인도하게 되는 가능성은 둘 사이의 애정에 빌려 부차적인 일이 되고 만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자신의 확신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이고 특히 유혹에 빠지고 상처받기 쉽게 될 것이다.
이렇게 데이트를 하다보면 그리스도인의 품위를 지키기가 힘들어 질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이 진전되다 보면, 그리스도인의 측면에서는 그 관계를 깨어버려야 하는 고통스러운 결정을 내리던가 아니면 불신자와 결혼함으로 해서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결과가 기다리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 자신을 방치해서는 안될 것이다.
비록 그가 영적으로 확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주의하라"(고전 10:12).
만약 당신이 문제와 유혹을 자초한다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견디지 못할 시험은 허락지 아니하신다는 약속을 기대할 수가 없다.
당신은 하나님의 뜻에 반해서 가라고 유혹하는 유혹이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되고 자신을 제어할 수 없게 될 때까지 자신을 방치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데이트로 인해서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에 가장 선한 뜻을 이루어 주셨다고 하신 약속을 저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은 불신자와 사귀면서 당신을 위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배필을 만나지 못하고 당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좌절시키게도 할 수 있다.
마지막 권면으로서, 특히 지도자를 위한 것으로서 결코 이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 일이다!
당신은 그러한 결혼이 가져다 줄 결과에 대해서 결코 이야기 할 수 없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할 일 이다.
때때로 사람들은 주께로 인도되고 때때로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단지 어떤 경우에 좋은 결과가 일어날 가능성이 많다고 해서, 그것을 자신하거나 주장하려고 하지 말라.
그럼으로써 당신은 영혼을 가지고 도박을 하는 것이다.
또한 기억하라.
결과가 방법을 정당화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을… 비록 결과가 좋다고 하더라도, 만약 방법이 잘못되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무리하게 추측하거나 그분보다 더 지혜로우려 하지 말라.
우리가 그분의 보호와 축복을 원한다면, 그분의 말씀을 따라야 하고 그분의 뜻을 쫓아야 한다.
해결책은 그분의 뜻을 찾게 될 때까지 구하고 기도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금식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한다면, 그러면 다른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것이다(마 6:33).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을 위해 마련해 놓으신 가장 완벽한 계획을 구하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엡 5:11)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후 6:14)
세상과의 교제
세상으로부터의 구분은 진정한 거룩함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1장, 4장 참고).
앞의 여러 장들에서 우리는, 거룩함은 우리를 더럽힐 수 있는 세상의 것들을 피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을 보았다.
지금부터 우리는 거룩함을 추구하기 위해서 일단의 사람들을 피해야 하는 경우를 살펴보고자 한다.
성경은 우리가 어떤 사람들과 사귀느냐 하는 문제를 중요시하고 있다.
잠언 22:24-25절은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그 행위를 본받아서 네 영혼을 올무에 빠칠까 두려움이니라" 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성경구절들은,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과 교제하면서도 거룩함을 지켜갈 수 있다고 하는 이들의 주장을 반박한다.
명백히, 당신이 교제하는 사람의 태도와 영혼은 당신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바울은 강한 어조로 말했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고전 15:33).
다른 말로, 악한 친구들은 도덕성을 떨어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악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지속하기를 계속 고집한다면, 당신이 악한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것은 성경이 보장하는 바이다.
이것이 우리가 모든 죄인들을 피해야 한다는 이야기인가?
아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는지에 관한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과 함께 식사를 하신다고 비난 받으셨을 때에, 그는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설명하셨다(눅 5:30-32).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혼을 얻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들과 어느 정도는 관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영혼을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은 친구가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죄인들과 상대하고 대화하는 것은 생활의 일부로서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세상 안에 살고 있다.
바울은 우리가 간음하는 사람들과 교제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으나, 바로 뒤에 세상에 살면서 세상 사람들과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다고 이야기한다(고전5:9-10).
이것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는 아직도 선을 그어야 하는 영역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에베소서 5장 11절에 의하면, 우리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가 죄를 묵인하거나 그 행위 가운데 참여해 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는 사람들이 세상적인 일 가운데 빠져들 때, 우리는 정중하게 물러서야 한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인과 그의 세상적인 친구들 사이에는 항상 분명한 장벽이 있게 된다.
그들은 좋은 친구가 될 수는 있으나, 어느정도까지만이다.
항상 그리스도인이 참가해서는 안되는 일들이 있고, 또 항상 불신자친구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신자의 경험이 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친구들과 너무 가깝게 지냄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불신자의 세상적인 일들에 참여하거나 그들의 태도를 같이 가지는 것으로 오해하게 해서는 안된다.
"사람을 알려면 그 친구를 보라"라는 속담이나"유유상종"이라는 말도 있다.
우리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거나 어떤 일을 참여하게 될 때 이것을 염두에 두어야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불신자의 영혼을 얻기 위해서 혹은 일상생활의 일부로서 항상 세상의 죄인들과 접하게 된다.
이러한 관계에서 제한되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이 죄스러운 일들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또 타인에게 세상적인 것들과 동화된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반적인 고려들 외에도, 성경은 두 가지의 분명한 지침을 준다.
먼저 성경은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나 삶 속에 명백한 죄를 짓고 있는 사람들을 상대하지 말 것을 가르친다.
둘째, 우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문제를 하나하나 살펴보고자 한다.
교회 내 죄인들과의 교제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3장에서 기독교 즉 말하자면 외적인 교회는 죄인과 의인을 같이 가지고 있다는 비유를 많이 드셨다.
천국은 알곡과 가라지를 같이 포함하고 있는 밭과 온갖 종류의 새가 깃들이는 무화과나무에도 비유되었고, 모든 종류의 물고기를 담은 그물에도 비유되었다.
요점은 기독교를 표방하는 모든 이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외적인 교회는 거짓 선지자도 가지고 있고 마귀의 가르침을 가르치는 선생들도 포함하고 있다.
사실상, 오늘날 종교적 기구로서의 기독교는 계시록 3:14-22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비교될 수 있다.
우리는 오늘날이 마지막 때이고 라오디게아는 마지막 교회시대를 나타낸 것이라고 믿는다.
오늘날의 교회들은 아름다운 건물을 가지고 있고, 아주 재능 있는 성가대와 정교한 의식을 수행하고 있으나 그리스도는 우리가 문을 열기를 기다리며 바깥에 서 계신다.
이것이 오늘날의 일반적인 교회들을 말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아직도 불붙어 있고 거짓 선지자를 구분하는 교회가 있다.
오늘날에도 어떤 교회들은 사도적인 가르침을 고수하고 있고 또 하나님의 성령을 그 가운데 모시고 있다.
우리는 항상, 많은 조직과 종교적인 전통들이 완전한 복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기독교를 표방하는 모든 이들을 받아들이거나 그들을 거듭난 신자로서 생각하고 교제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우리는 구원 얻기 위해서는 어떤 특정한 교단에 속해야 한다고 믿지는 않는다.
모든 집단에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나 삶에서 전혀 그것을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특정한 경우들에 있어서, 교회는 이러한 사람들을 심판하고 교회의 교제에서 제외시키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마 18:17-18, 고전5:5, 12-13 또한 7장 참조).
만약 그런 사람이 심판을 받고 교제 가운데서 제외된다면, 다른 성도들과 목회자들은, 성경에 따르자면, 그와 교제할 수 없다.
만일 그들이 그와 교제한다면, 그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판단을 교회의 판단 앞에 놓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이러한 심판의 한 목적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 데 있다.
즉 온빵에 번지기 전에 누룩을 제하는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그와 계속 관계를 이어간다면, 그들은 자신들을 해하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출교된 사람을 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제재행위의 또 다른 목적은 잘못한 사랍을 포용하고 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교제를 하고 위안 올 받는다면, 그는 이러한 교훈을 배우지 못하고 불성실하고 위선적으로 되고 말 것이다.
많은 경우에 교제에서 제외된 사람이, 회개하거나 용서를 구하지 않은 채로 자신의 교회를 옮기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러한 행위를 돕는 사람은 그의 잘못을 용인하는 것이며 또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물리게 될 것이다(요이 11).
성경은 출교해야 할 사람들을 명시하고 있다.
만약 어떤 이가 성경에 나온 이유로 출교되었는데, 다른 사람이 그와 교제를 계속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직접적으로 반항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공적으로 출교가 결정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가 그런 종류의 성품이나 죄를 보인다면, 바울은 우리가 그들과 상종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다.
특히 그는 말한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 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전 5:11).
이러한 가르침은 아주 철저해서 우리는 그런 이들과 함께 먹을 수도 없다.
그리고 이러한 경우는 위에 열거된 죄들을 지으면서도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자들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것은 세상에 있는 그러한 사람들을 접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고전 5: 9-10).
그러한 경우에 해당되는 죄들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1.간음하는 자-어떤 종류이든 불법적인 성적 죄를 짓는 자(9장 참고)
2.탐람하는 자-다른 이들이 가진 것을 욕심내는 자.
특히 탐욕과 동의어이다.
사람은 돈이나 옷이나 심지어는 교회내의 위치도 탐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주로 시기나 증오 그리고 수군거림의 형태로 나타 난다.
3.우상 숭배하는 자-우상에게 경배를 하는 사람(손으로 만든 상들)
4.욕하는 사람-타인을 언어로서 욕보이는 사람.
이것은 끝없는 비판과 중상모략으로 타인에 대해 악한 것을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4장 참고).
5.술 취하는 자-습관적으로 술을 마시는 자들을 의미한다.
6.토색하는 자-돈이나 이권, 약속 같은 것을 억지나 협박 혹은 불법적인 압력을 넣어서 취하는 사람(4장 참고).
이러한 교회 안의 여섯 종류의 위선자들 외에도, 일하지 않고 일만 만들며 규모없이 행하는 사랍들을 피하라고 성경은 명하고 있다(살후 3:6, 11, 14).
1.규모없이 행하는 사람들-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에 주어진 지침에 반하여 행동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바울은 자신의 서신을 배척하는 사람과는 함께 하지 말라고 말한다(l4절).
다른 성경구절에서는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을 피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2.일하지 않는 자들-게으른 이들을 말한다.
정직하게 일하면서 살 수 있으나 그러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3.일만 만드는 사람들-다른 사람들의 일에 끼여들거나, 자신의 권위가 미치지 않는 영역까지도 상가하는 사람들(3장 참고).
성경은 또한 거짓 선생들과 시기, 쟁투, 수군거림과 악한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을 멀리하라고 가르친다(딤전 6:3-5)
1.거짓 선생들-우리는 잘못된 교리를 전하는 사람들과 교제할 수 없다.
그들이 진리를 배울 수 있도록 도와줄 수는 있으나, 그들과 아주 가까이 지내거나 그들을 교회의 지도자로 삼아서는 안된다.
2.질투-위치나, 책임 혹은 돈은 부러워하는 사람들을 포함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것들을 부러워함으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을 것이다(3장 참고).
3.쟁투-부조화와 이견, 논쟁과 다툼을 통해 더 좋은 위치를 차지하려하거나 파당을 짓고 혹은 개인적인 다툼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것들이 교회 안에서 설자리는 없다.
4.악한 계획-타인에 대해서 악한 것을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쉽게 남에 대해 결론 내려 버리거나, 악한 것들을 상상하거나 타인에게 악한 동기를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비판과 수군거림을 통해서 외적으로 표출된다.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은 자신이 목격하거나 들은 사소한 일들을 가지고 무고한 사람들을 비판한다.
마지막으로, 요한 2서 9-11절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받지도 말고 돕지도 말라고 가르친다.
만약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가진 것이다(9절).
그는 예수께서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오신 영원하신 하나님임을 인정할 것이다.
요한은 누구든 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는 그를 우리의 집에 초대하거나, 그의 사역을 도울 수 없다고 말한다.
심지어 우리는 "하나님이 도우시길"이라는 축복을 그에게 해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그의 악한 일에 참예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든 거짓 선생들을 도울 수 없다.
심지어는 그들의 성공을 바라는 말조차 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 당시에는, 대부분의 교회들은 가정에서 모였다.
그래서 요한은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선생들이 교회의 예배를 주관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지금껏 말한 것들은 하나님께서 왜 그러한 사람들을 멀리하라고 명하셨는가에 대한 좋은 이유들이 된다.
그러한 사람들은 위험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
만일 당신이 시기나 질투, 험담과 악의, 잘못된 교리나 음행을 회하지 않은 사람들과 가까이 지낸다면, 사실상 당신은 그의 태도를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은 당신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악한 태도가 성경을 따라 사는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을 굴복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러한 사람들과 교제한다면, 당신은 성경말씀을 무시한 것이고 하나님의 뜻에 반하게 행동한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벌써 하나님의 권위 아래에서 한 발짝 나온 것이고, 그러므로 이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
그 결과로서 그러한 태도는 쉽게 당신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이러한 사람들과 교제를 하고 있다면, 당신은 자신을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과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함
이것은 세상으로부터의 구분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바울은 다섯 가지 질문을 던짐으로서 이것을 설명한다(고후 6:14-16).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어찌 조화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와 벨리알(무가치함을 뜻하는 사탄의 이름중 하나)이 어찌 하나될 수 있는가?
신자와 불신자가 무엇을 공유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조화될 수 있는가?
한편은 의와 빛, 그리스도와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이고, 다른 한편은 불의와 어두움, 사탄과 불신, 그리고 우상 숭배이다.
이러한 것들은 서로 상반되고 절대로 조화롭게 공존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17절).
이 명령은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의 약속을 가져다준다.
만약 우리가 그들로부터 분리되어서 함께 멍에를 메는 것을 거부한다면, 주께서는 우리를 받아주시고 우리의 아버지가 되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실 것이다.
이 성경구절의 실제적인 적용은 무엇일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멍에를 멘다는 것이 무엇이고 불신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아야 한다.
멍에를 벤다(to be yoked)는 것은 함께 연결되어서 가까이 있는 것을 뜻한다.
원래의 뜻으로는 이 단어는 소같이 짝지어 져서 함께 일하는 동물들을 의미했다.
웹스터 사전은 다음의 것들을 멍에를 함께 메는 부류로서 예시했다: 속박, 굴종, 형제됨 그리고 결혼.
그리고 '짝'이라는 단어의 뜻으로서 배우자, 파트너, 친구, 남편이나 아내를 들었다.
그러므로 함께 멍에를 멘다는 것은 한편이 다른 편을 심각하게 영향을 줄 수 있고, 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대신 이야기 할 수 있으며 책임을 함께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가장 분명한 관계는 결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정한 경우에는 사업 상의 합작과 조합에 가입하는 것이 이러한 관계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결혼은 확실히 멍에를 함께 메는 관계이다.
왜냐하면 그것보다 더 가까운 인간관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이 성경의 구절이 결혼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적용되는 다른 것을 찾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결혼은 삶 전체를 통한 연합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구원에 대한 문제 이외에서는 부부를 한 단위로 생각하신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으나, 주 안에서만 하라고 했다-그 말은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하라는 말이다(고전 7:39).
사용자와 고용인의 관계는 멍에를 메는 관계라기 보다는 어느 한 편도 깰 수 있는 상명하복의 관계이다.
사업상의 동업관계는 만약 양쪽이 같은 결정권을 가지고 있고 상대방의 결정에 따라서 매일 수 있다면 멍에가 될 수 있다.
조합의 관계는 그 구성원들이 어느 정도까지 연합되고 서로 도와야 하느냐에 따라서 멍에가 될 수 있다.
신자의 정의
신자로서 우리는 위에 언급된 어떤 방식으로든 불신자와 멍에를 같이 메서는 안된다.
그러면 한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신자와 불신자는 어떻게 성경적으로 정의될 수 있는가?
단지 신앙을 입으로 시인하거나 지적으로 동의한다고 해서 신자가 될 수는 없다.
신앙의 성경적인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하는 것이다(요일 2:3; 5:1-3).
로마서 10:16은 순종의 결핍은 신앙의 결핍이라고 말한다.
요한복음 7:38-39에 의하면, 진정으로 성경을 믿는 사람은 성령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가복음 16:16-18은, 신자는 침례를 받을 것이고, 그 예표 중 하나는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고넬료와 그의 온 집은 그들이 믿었을 때, 방언 말함이 수반되는 성령의 침례를 받았다(행 10:44-48, 11:17).
빌립보의 간수는 바울의 말을 믿고 침례를 받았는데, 그때는 자정이 더 지난 시간이었다(행 16: 31-33).
물론 믿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 시작되는 것이고 또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동안 계속되는 하나의 과정이다.
성경이 '신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을 때는, 하나님의 온전한 구원계획을 체험한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행 2:38).
어떤 경우들에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까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만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순종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일도 있다.
그 결과로서, 그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 이라고 불릴 수 없다.
여기에 성경적인 예들이 있다: 마귀들(약 2:19)과 예루살렘의 많은 사람들(요 2:23-25) 그리고 많은 종교 지도자들(요 12:42)과 많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마 7:21-23), 베드로의 설교를 듣기 이전의 고넬료(행 10:1-6, 11:14), 마술사 시몬(행 8:13, 20-23)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이 복음을 전하기 이전의 사마리아 사람들(행 8:12-16).
이러한 예들이 말해주는 것은 사람이 단순히 예수님의 존재를 믿는다고 진정한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또한 올바른 기초를 가져야만 한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순종해야 하며 믿는 이들에게 따르는 표적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만일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이들이 올바른 신앙의 기초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거룩한 삶을 추구하고 있지 않다면 그들과 함께 멍에를 메서는 안된다.
구약성경의 예들
우리가 믿지 않는 이들과 함께 멍에를 메서는 안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로 세상과 타협하게 하기 때문이다.
모든 시대들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세상으로부터 분리될 것을 명령하셨다(1장, 4장 참고).
아브라함은 그의 나라와 가족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창 12:1).
그는 이삭이 이방인 아내를 취하지 않도록 계획을 세웠고, 이삭은 또한 야곱을 위해서 똑같은 일을 하였다(창 24:2-3, 27:46, 28:2)에서는 믿지 않는 여인과 결혼함으로서 그의 부모들의 마음을 슬프게 하였다(창 26:34-3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방의 풍습과 이방인과의 결혼을 멀리하라고 명령하셨다(신 7:3).
발람은 약삭빠르게도 이스라엘을 망치게 하기 위해 모압인들을 이용해 이스라엘이 족외혼을 하게 하고 우상숭배에 빠지게까지 하였다(민 25:1-3, 31:16).
삼손의 타락은 블레셋 여인 때문이었다(삿 14:2-3, 16:4-5), 그리고 솔로몬의 이방 아내들은 그로 죄짓게 만들었다(왕상 11:4-8).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사용하시기 이전에 여러 번 그들의 잘못된 결혼을 정결케 하셔야 했다(민 25, 에스라 10, 느헤미아 13:23-31).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6장의 가르침은 구별됨에 관한 가르침의 일부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새로운 개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기본적인 원칙이다.
결혼
그러면 이것이 제시하는 몇 가지 실제적인 질문들을 결혼이라는 측면에서 다루어 보기로 하자.
그리스도인이 불신자(하나님의 말씀대로 구원 얻지 못한 자)와 결혼할 수 있는가?
대답은 '아니다' 이다.
만일 그가 결혼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이 된다.
그럼 불신자가 불신자와 결혼할 수 있는가?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똑같이 멍에를 메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직자가 믿지 않는 두 사람의 결혼식을 집전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만약 그가 신자와 불신자와의 결혼식을 집례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것이고 따라서 타인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을 돕는 것이 된다.
그가 자신이 하는 일을 잘 모르고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는 삯꾼 목자가 된다.
그럼 그리스도인이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을까?
대답은 '아니다'이다.
그들은 같은 기본적인 경험과 신앙을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같은 멍에를 메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탄은 믿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들과 함께 멍에 메는 것을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신자가 믿지 않는 배우자를 가지고 있다면 물론 그들과의 결혼 생활을 지속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혼인의 서약을 존중해 주시고 그것이 깨지기를 원치 않으신다(고전 7:10-13, 39).
이러한 경우에 신자는 불신자 배우자를 거룩하게 할 수 있다(l4절).
이것은 그러한 결혼관계가 합법적인 것이고 또한 신자는 자신의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영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경우에 신자의 의무는 기도와 거룩한 삶으로서 믿지 않는 배우자를 주께로 인도하는 것이다(벧전 3:1-2).
어떤 이들은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은 주께로 영혼을 인도하는 좋은 방법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간과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술집에 들어가 술을 마시며 전도하는 것과 마찬가지 주장이다.
우리는 우리의 기준을 내리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서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가 없다
-그러한 결혼이 성사되는 대부분의 경우에 불신자인 배우자는 결코 주께로 오지 않는다.
만약 불신자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결혼하기 전에 신자가 되었을 것이다.
만약 그가 결혼 전에 성령의 침례를 받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는 결코 성령을 받지 못할 것이다.
사실상, 불신자가 믿게 되는 것보다 믿는 배우자가 타락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솔로몬왕의 이야기가 대표적인 예이다 보통, 신자는 자신의 믿음과 타협하게 된다.
최소한 믿는 배우자는 결혼상태를 지속시키기 위해서 몇몇 부분에 있어서는 타협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신자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을 위해서 완전히 헌신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헌신할 시간도 줄어들게 될 것이다.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자녀들은 믿지 않는 부모를 따라 행동되고 구원 얻지 못할 것이다.
데이트
믿지 않는 자와 이성으로서 사귀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뜻한다.
앞에서 다룬 말씀들을 생각할 때, 성령으로 충만한 젊은이가 어떻게 교회 안에 있지 않은 남자 친구나 여자 친구와 지속적으로 사귈 수 있겠는가?
아마 당신은 사귀는 사람과 결혼하게 될지도 모른다.
만일 신자가 불신자와 결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결혼으로 귀착될 지도 모르는 친밀한 관계를 불신자와 맺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겠는가?
어떤 일상적인 관계들이나 교제들, 혹은 그리스도인의 모임으로서 함께 어울리는 것은 적절한 일이고 또 불신자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데이트의 관계가 시작된다면 불신자를 인도하게 되는 가능성은 둘 사이의 애정에 빌려 부차적인 일이 되고 만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자신의 확신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이고 특히 유혹에 빠지고 상처받기 쉽게 될 것이다.
이렇게 데이트를 하다보면 그리스도인의 품위를 지키기가 힘들어 질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이 진전되다 보면, 그리스도인의 측면에서는 그 관계를 깨어버려야 하는 고통스러운 결정을 내리던가 아니면 불신자와 결혼함으로 해서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결과가 기다리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 자신을 방치해서는 안될 것이다.
비록 그가 영적으로 확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주의하라"(고전 10:12).
만약 당신이 문제와 유혹을 자초한다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견디지 못할 시험은 허락지 아니하신다는 약속을 기대할 수가 없다.
당신은 하나님의 뜻에 반해서 가라고 유혹하는 유혹이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되고 자신을 제어할 수 없게 될 때까지 자신을 방치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데이트로 인해서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에 가장 선한 뜻을 이루어 주셨다고 하신 약속을 저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은 불신자와 사귀면서 당신을 위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배필을 만나지 못하고 당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좌절시키게도 할 수 있다.
마지막 권면으로서, 특히 지도자를 위한 것으로서 결코 이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 일이다!
당신은 그러한 결혼이 가져다 줄 결과에 대해서 결코 이야기 할 수 없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할 일 이다.
때때로 사람들은 주께로 인도되고 때때로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단지 어떤 경우에 좋은 결과가 일어날 가능성이 많다고 해서, 그것을 자신하거나 주장하려고 하지 말라.
그럼으로써 당신은 영혼을 가지고 도박을 하는 것이다.
또한 기억하라.
결과가 방법을 정당화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을… 비록 결과가 좋다고 하더라도, 만약 방법이 잘못되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무리하게 추측하거나 그분보다 더 지혜로우려 하지 말라.
우리가 그분의 보호와 축복을 원한다면, 그분의 말씀을 따라야 하고 그분의 뜻을 쫓아야 한다.
해결책은 그분의 뜻을 찾게 될 때까지 구하고 기도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금식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한다면, 그러면 다른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것이다(마 6:33).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을 위해 마련해 놓으신 가장 완벽한 계획을 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