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배, 감정과 음악

경배, 감정과 음악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 지어다"(대상 16:29; 시 29:2, 96:9)

진정한 경배

경배는 진정한 거룩함의 중심적인 부분이다.
또한 거룩함은 진정한 경배의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신실한 형태의 예배는 제사와 헌금이 아닌 순종이다(삼상 15:22).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삶으로 드려지지 않는 예배는 거부하실 것이다(암 5:21-27, 말 1:10 참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경배는 진실한 마음과 순종하는 삶에서 나오는 경배이다.
우리는 신령(사람의 영혼, 열심을 의미하는 말)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
이 관점에서, 이 책의 전 내용은 경배와 아주 깊은 연관이 있다.
그 이유로, 성경적인 경배에 대한 짧은 이야기들을 몇 가지 포함하는 것이 독자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이 책의 나머지 부분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하는가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이 장에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들의 외적인 표현과 감정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하는가에 대하여 나누고자 한다.
왜냐하면 음악은 경배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성경 속에서나 오늘날이나 마찬가지로).
또한 음악을 생각하면서, 세상적인 음악에 대해서도 논의하고자 한다.

감정과 표현

성경 속의 경배들에서 가장 놀라운 사실들 중의 하나는, 그것이 사람의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데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라고 요구하신다(막 12:30).
이것은 감정적, 영적, 지적 요소와 동시에 인간의 육체적 요소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경배는 명백히 그것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것들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우리가 헌신하고 드리는 우리의 의지이지, 단순한 감정이나 자연적인 이해는 아닌 것이다.

어떤 이들은 감정과 외적인 표현은 경배에 있어서 아주 미미한 요소만을 담당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른 이들은 자신들이 선천적으로 감정적이거나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물론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개성을 타고난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한 경배가 사람 안에 존재하고 있는 감정적인 요소를 포함한 사람의 모든 것을 포함한다고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감정적인 분이다

전 성경을 통해서 그분은 사랑과 기쁨, 슬픔과 노를 보이셨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나타나셨을 때, 우리는 그분이 자신의 친구였던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던 것을 알 수 있다(요 11:35).
그리고 또한 예루살렘을 위하여서도 우셨다(눅 19:41).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하나님과 같은 감정을 나누고 있다(창 1:27).
교회에 올 때 자신들은 감정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보통 집에서는 이성을 잃고 자녀들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애꿎은 개를 걷어차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미식축구 경기를 구경하면서 괴성을 내지른다.
그들은 격렬하게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많은 다른 것들에 대해서 논쟁한다.
그들은 버스나 택시를 타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을 떠민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난리를 피운다.
그들은 자신의 연인을 위해서는 애정 표현을 하고 끌어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교회 안에서 감정이 있을 곳은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습관적인 예식을 주장한다.
사실 우리는 모두 감정적인 존재이다.
감정은 우리의 모든 우리의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왜 교회에서는 아닌가?
물론 감정은 경배의 유일한 요소는 아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이성도 또한 중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의지가, 믿음과 하나님의 뜻이 그것을 제어하는 데로, 경배를 주장해야 한다.
그럼에도, 감정은 우리 경배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감정은 외적인 표현으로 나타난다

격한 감정을 느끼면서 그것을 감춘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외적인 표현은, 그것 자체로는, 경배에 있어 아주 작은 요소에 불과하다.
사실상,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다" (딤전 4:8).
그러나 외적인 표현은 감정의 자연적이고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하나님께로부터 감동을 받은 진실한 마음에 따라서, 외적인 표현은 경배의 중요한 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감정과 표현은 외적인 경배에 있어서 기본적인 요소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신·구약을 다 찾아 볼 수 있다.
시편은 경배의 표현들과 예들로서 꽉 차 있다.
시편기자는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의 회와 공회 중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라고 말하였다(시 111:1).
어떻게 그가 공회 중(예배중)에서 하나님을 찬양했는가?
여기에 시편에서 볼 수 있는 몇 가지 예들이 있다: 손을 듦으로(141:2),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함으로(33:2-3), 즐거운 소리를 외침으로(95:1,2), 손뼉을 침으로(47:1), 그리고 춤을 춤으로(149:3).
시편 98:4은 즐거운 소리, 큰 소리를 외치고 즐거워하며 찬양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꺼리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시편기자는 "호홉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라고 말하고 있다(시 150:6).

경배의 예들

구약은 경배와 기도의 예들로 가득 차 있다.
솔로몬은 그의 손을 들고 있을 때, 무릎을 꿇고 있을 때 기도했다(왕상 8:22, 54).
하나님의 법괴가 예루살렘에 돌와왔을 때, 다윗은 너무 기뻐한 나머지 자신의 어의를 벗고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춤을 추었다.
성경은 "다윗이 주 앞에서 온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소리를 치며 뛰었다.
그의 아내 미갈이 그것을 보았을 때 다윗을 마음속에서 업신여겼다.
왜냐하면 그녀는 다윗이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의 격을 낮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그것을 가지고 다윗을 책망했을 때, 그는 심지어 더 "낮아지고 천해"지겠다고 맹세했다.
그 결과로서 미갈은 죽을 때까지 아이를 낳지 못했다(삼하 6:14-23).
다윗은 큰 권력과 위엄을 가진 동방의 왕이었으나,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괴가 들어왔을 때는 자유롭게 춤을 추었다.
진정한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가운데 있을 때, 우리도 왜 그와 같이 할 수 없겠는가?(느헤미아 8:6-9, 9:3-5 참고).

신약을 살펴보아도 같은 종류의 경배를 볼 수 있다.
오순절 날에 120명의 신도들이 성령을 받았을 때, 그들은 기뻐했고 많은 소리를 내서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들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신도들은 자신들의 감정을 숨김없이 나타냈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그들이 술에 취하였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행 2:13).
술 취한 사람들이 어떤 모습을 하는 지는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어떤 신자들은 춤을 추고 있었고 다른 이들은 소리를 지르고 있었으며 어떤 이들은 울거나 웃으며 다른 이들은 비틀거리거나 기절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같은 성령을 받았다면, 왜 우리의 경험이 그들과 달라야 하는가?

이러한 종류의 경험은 계속적으로 일어났다.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났을 때, 그는 성전에 걸으며 뛰며 찬양하며 들어갔다(행 3:8)
요한이 밧모섬에서 주를 보았을 때, 그는 죽은 자처럼 엎드렸다(계 1:17).
다메섹 도상의 바울이나 빌립보의 간수는 둘 다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떨었다(행 9:6, 16:29-30).
베드로가 주를 부인한 것을 회개했을 때, 그는 서럽게 울었다(눅 22:62).
세리는 가슴을 치며 회개했다(눅 18:13).
그리고 죄를 지은 여인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회개와 기쁨, 그리고 사랑의 눈물을 흘렸다(눅 7:37-47).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교회들에 보내야 했던 책망의 편지들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고후 2:4).
초대 교회가 모였을 때, 그들은 모두 함께 모여 소리를 높여 기도했고 건물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흔들렸다(행 4:24-31).
서신서에서, 바울은 성령이 탄식하시는 것과(롬 8:26),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노래하는 것(고전 14:15), 그리고 손을 드는 것(딤전 2:8)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이러한 보편적인 찬양의 방법들과 거룩함과의 연관성에 대하여 주의하라.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이러한 모든 예들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배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자유롭게 나타낸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모든 사람이 같은 방법으로 예배하고 반응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외적인 감정을 더 많이 표현하나, 모든 이들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경배는 다양하고 또 자유로운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진실히 경배한다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감동시키실 때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고, 그렇지 않을 때는 잠잠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 진정으로 애통해 한다면, 당신은 눈물을 흘릴 것이다.
만약 목회자가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자신의 도시를 위해 애통해할 것이다.

성령을 소멸시키는 것

우리는 우리의 경배 중에 성령을 소멸시켜서는 안된다(살전 5:19).
이것은 비성경적인 전통과 형식주의에 의해서 때때로 일어난다.
어떤 이들은 부흥회 때는 자유롭게 경배하나, 다른 예배들에서는 이전의 형식주의로 돌아가 성령을 소멸시킨다.
특히 주일 아침예배에서 말이다.
많은 이들이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우리의 하나님의 역사를 강요하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된다.
만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면, 모든 것들이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이루어질 것이다(고전 14:26).
그것들은 혼란이 아닌, 평화와 적절함 그리고 질서 가운데 이루어질 것이다(고전 14:33-40).
인도자와 목자로서의 감독의 역할 중 하나는 교회 안의 질서를 지키고 혼란이 일어나는 것을 막는 것이다.
위선적인 경배와 육체적인 모습을 내는 곳에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

교회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정해진 곳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때 감정을 억누른 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만약 교회가 성도들이 울고 찬양하고 경배하는 곳이라면, 그곳은 사람들이 항상 하나님을 찾고 성령을 받는 장소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감정에 메마르고, 형식적인 분위기에서는 성령을 받거나 축복을 받는 일이 드물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모든 것은 당신이 경배 중에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분은 나머지 것들을 책임져 주실 것이다.
당신 안에 있는 성령이 그 뜻을 이루도록 허락하라.
성령께서 당신이 기도하고 흐느끼고 또 기뻐하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감정은 결코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사용하시도록 할 일이다.

성령이 충만한 교외의 찬양을 이해하는 방법은 이것이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성령께서는 우리들에게 경배할 자유와 개개인마다 다른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류를 허락하신다.

경배의 음악

음악은 걱정과 악한 생각을 몰아내고 평화와 격려, 그리고 하나님께로 다가가는데 도움을 준다.
시편에서 지적한 것처럼, 음악은 찬양의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사실상, 시편 자체는 이스라엘의 찬양을 위해 쓰여졌다).
우리는 노래하면서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가고, 감사의 제사로서 그분의 문에 들어가며, 찬양으로 그분의 궁전에 들어가게 된다(시편 100편).
시편 안의 많은 구절이 노래와 악기로서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교훈하고 있다.
시편 150편은 경배에 사용되는 많은 악기들을 예로서 들고 있다: 트럼펫, 현악기, 하프, 탬버린, 오르간, 큰 수금, 높은 소리내는 수금
구약을 살펴보면, 악기에 맞추어 노래하는 것이 얼마나 사람들이 경배하고 하나님의 성령에 반응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다윗의 음악은 사울 왕을 위로했고 그를 괴롭히던 악령을 몰아 내었다(삼상 16:23).
다윗이 왕이 된 다음에는, 그는 하나님의 집에서 음악을 연주할 음악가들을 임명했다(왕상 6:31-47).
그는 노래하는 이들과 현악을 연주하는 이들, 하프를 연주하는 이들과 심벌을 연주하는 이들을 세워서 하나님의 성괴 앞에서 노래하게 했다(대상 15:16).
당시에는 288명의 잘 훈련된 가수를 비롯한 4000명의 음악가들이 있었다(대상 23:5, 25:7).
우리는 또한 하프를 가지고 예언하던 여두둔에 대하여 읽을 수 있다(대상 25:3).
그후,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했을 때, 그는 심벌즈 및 다른 악기와 더불어서 노래할 찬양자들과 트럼펫을 준비하였다.
그들이 한 박자로 그 노래를 불렀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온 집을 채웠다.
하나님의 임재는 너무나 강한 것이어서, 제사장이 섬기기 위해 집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였다(역대하 5:13-44).
유다 왕 여호사밧이 선지자 엘리사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보여달라고 부탁했을 때, 엘리사는 먼저 거문고 연주자가 올 것을 청하였다.
"거문고 타는 자가 거문고를 탈 때에 여호와께서 엘리사를 감동시키니"(왕하 3:15).
그때, 엘리사는 하나님의 계획을 나타낼 수 있었고 유다는 모압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는 것을 준비하기 위해 음악이 엘리사의 마음에 먼저 필요했다는 것을 주의하여 보라.
여호사밧 자신도 경배와 음악의 위력을 일찍이 알고 있었다.
한 때는, 그가 암몬과 모압과의 전쟁에 직면했을 때, 그는 주 앞에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찬양대를 조직했다.
그들이 노래하기 시작했을 때, 주께서는 적을 무찌르셨다(대하 20:21-22).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이 노래하고 경배하기 시작할 때 역사하신다.

신약을 보면, 음악적인 경배에 많은 강조가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최후의 성찬 때 찬양을 불렀다(마 26:30).
바울과 실라가 매를 맞은 후 빌립보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들은 기도하고 자정 녘에 찬양을 불렀다.
하나님의 대답이 무었이었는가?
그분은 지진이 일어나게 해서 그들을 자유케 하였고 또 간수를 침례 주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셨다.
바울은 여러 번 어떻게 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에 대하여 설명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 5:19).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 3:16)
"찬미와 신령한 노래"가 다른 찬송들을 의미하는 반면, "시"는 의심할 바 없이 구약성경의 시편을 의미한다.
즐거운 소리와 손뼉을 치는 것, 손을 들고 춤추고 악기를 연주하면서 주님을 찬양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형태의 경배를 명하는 시편을 노래하는 데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바울은 그의 경배가 시편에서 명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염려도 하지 않았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성령으로 노래하는 것(방언으로 노래하는 것)과 개인적인 헌신의 일부로서 자신의 노래를 이해하면서 노래하는 것을 인정했다(고전 14:15).
노래하는 것은 우리의 경배와 일상생활에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야만 한다(고전 14:26, 약 5:13).

음악이 경배에 매우 강력한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음악을 경배에 사용하고 우리의 기쁨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 안의 음악에 대하여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교회는 무대이며, 회중은 관중이고 음악가들은 배우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은 뒤에서 연주를 지시하는 분이라고 오해한다.
사실상은 회중이 배우(경배자)가 되어야 하고, 음악가가 연주 신호를 보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관전하시는 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 안의 연주자들은 두 가지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들의 주된 목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음을 창출해 내면서,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그들의 다른 하나의 기능은 회중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경배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영감 있는 찬양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다시 헌신할 수 있었고 제단에 기도하러 나올 수 있었다.

이것은 음악가들과 찬양을 인도하는 이들은 막중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예배를 잘 인도할 수도 있고 반대로 망칠 수도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배의 축복을 위해 그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금식하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단지 자신의 재능을 자랑하려 하는 이들은 필요치 않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또 회중에 유익을 주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오늘날 많은 음악 그룹들이 전문적이고 아름다운 음악을 선보이고 있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경배 앞에 여흥을 앞세운다면,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지 않는다.
나는 아름다운 하모니로 노래하고 아름다운 배경음악을 내는 그룹들을 좋아하지만, 오히려 그들이 노래할 때, 하나님을 느끼고 경배하기를 원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들은 연주회에나 적합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고 영혼들이 위험에 처해있는 동안에 예배를 위한 음악은 아닌 것이 된다.

음악가와 노래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인의 좋은 모범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경배를 촉진시키기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고 회중의 모범으로서 세워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그것을 반영해야 한다.
그들은 성경과 목회자의 가르침에 따라서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회중은 노래하는 이의 신실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노래하는 이가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노래를 한다거나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청중이 알게 되는 것만큼 경배의 분위기를 흐리는 일은 없다.

교회 안에서 노래하고 연주하는 것은 특권이다.
만약 당신이 재능이 있다면 당신은 그것을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
이것이 당신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드리는 방법이다.
이러한 이유로, 가수와 성가대원들 그리고 음악 연주자들은 그들의 교회에서 보수를 받아서는 안된다.
그렇게 한다면 그들로부터 하나님을 경배하는 기회를 빼앗아 가는 셈이 된다.
물론, 전적으로나 직업의 일부로서 음악을 지도하는 이들은 보수를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직업이기 때문이다.

회중의 노래는 분명히 경배이다.
그런 때에는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우리는 각각의 예배를 위해서 마음에 부담을 가지고 있는 찬양 인도자가 필요하다.
그는 성령에 민감해야 하고, 음악을 인도할 수 있는 재능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는 회중 전체가 찬양을 드릴 때이다.
음악을 인도하는 사람의 일은 경배에 영감을 받게 하며,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열 수 있도록 돕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를 하게 돕는 것이다.
찬송 인도자는 성령의 역사를 따를 수 있는데 자유로와야 한다.
예를 들자면, 후렴을 반복해서 부른 다든지, 찬송을 바꾼다든지 미리 준비하지 않았던 찬송을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특정한 예배에 특정한 찬송을 사용하셔서 사람들에게 영감을 끼치시거나 예배를 축복하곤 하신다.
찬송 인도자는 하나님께서 언제 이러한 일을 행하실 지 민감하게 준비하여야 한다.
그는 예배를 위해 준비하여야 하고, 또한 자신의 계획을 바꿀 준비도 항상 되어 있어야 한다.
물론, 그는 목사와 협력하고 그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때때로 우리는 아주 짧고 간단한 후렴부를 부른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이해하기도 쉽고 배우기도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회중은 책을 읽는 것보다는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시킬 수 있다.
그러한 노래들을 많이 부르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여러 종류의 예배에 도움을 주는 분위기를 조성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노래들로서 진정한 경배를 촉진시키는 것이 쉬워진다.

경배에 적합한 여러 종류들의 찬양들이 있다.
그것들은, 예배의 정신과 성도들의 필요, 그리고 문화적인 배경에 따라서 달라진다.
많은 문화와 배경을 포함한 회중은 모든 이들의 취향과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음악적인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그러한 경우에는 많은 스타일의 곡들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주 앞에 새 노래로 찬양해야 할 때도 있다(시 96:1).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인 음악적 취향에 맞지 않는 곡이라고 다른 이들의 취향에는 맞을 수 있고 또 적절한 찬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노래와 연주가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 되어야 하고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스타일의 노래들은 특정한 문화적 집단에 좋을 수 있으나 다른 이들에게는 무성의하게 보이거나 부적절하고 심지어는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다.
다양한 음악의 스타일은 교회 안의 예배에 받아들이는 데에는 한가지 예외가 있다.
우리는 직접적으로나 절대적으로 인간의 감각적이고 육신적인 본성에 호소하는 음악은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이 말을 하면서 우리는 하드 록 음악을 지적하고자 한다.
우리가 이것을 예로 드는 이유는 이 음악이 우리의 취향에 맞지 않거나 세상에서 많은 인기를 얻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교회 역사를 통해서, 각 시대의 찬양들은 당시대의 음악적인 조류를 반영해 왔다.
우리는 이 하드 록 음악이 그 음악 자체로서 너무 쉽게 감정을 일으키고 또 경배와 찬양에는 어울리지 않는 욕구들을 불러일으키므로 이 음악을 제외하는 것이다.
다음 부분에서 이것을 더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현대의 음악

경배를 위한 음악을 제외하고, 거룩함에서의 입장은 일반적인 음악들에 대하여 무엇이라 이야기하는가?
명백히, 그리스도인들은 비종교적인 음악과 노래들도 즐길 수가 있다.
많은 종류들의 음악을 연주하 거나 또 들을 수 있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이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선 모든 종류의 음악이 가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여기서 우리는 개인적인 확신과 성령의 주시는 음성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고 우리의 귀를 쓰레기를 가지고 채우기를 원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노래는 가사 자체나 혹은 음악 때문에 불경건하게 될 수 있다.
만약 가사가 악하다면 어떤 종류의 노래라도 악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모든 현대 음악들의 문제이다.
팝 음악은 듣기도 쉽고 곡도 아름답지만 가사가 선정적일 때가 많다.
많은 컨츄리 음악과 서구의 음악이 간음이나 음행, 이혼이나 음주와 같은 불경건한 주제에 머무른다.
록 음악은 옳지 않은 성행위와 마약, 반항심을 조장하는 것과 신비주의, 심지어는 사탄숭배까지 찬양하고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신이 그들의 음악적 스타일을 즐긴다 해도, 그러한 불경건한 가사를 계속 듣다보면 당신은 거룩함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나는 어떤 젊은이들이 음악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간음이나 음행, 심지어는 마약사용에 관한 노래들을 듣고 따라 부르는 것을 보아왔다.
그들은 사실상 그러한 것들을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중에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부지중이라도 그러한 가사들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얼마나 많은 경우에 여러분은 같은 가사를 계속 들었기 때문에, 그것을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 경험을 가지고 있는가?
그 노래가 찬양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만일 그것이 악한 노래라면 얼마나 위험한 일이겠는가?
그 메시지들은 당신의 마음과 영혼에 심겨져서 신앙이 연약해 지고 시험을 받을 때 표면에 나타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죄를 찬양하는 노래나 라디오 방송을 듣는다면, 안전하고 거룩한 방어책은 그것을 끄는 것이다.

어떤 음악은 단순히 가사로서가 아니라 음악 자체로서도 악을 고취시킬 수 있다.
하드 록 음악이 그러한 예이다.
록 음악과 디스코 음악은 사람에게 육신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뇌하수체와 성선을 자극하는 것이다.
강한 박자는 감정, 특히 성적 욕구를 격앙시킨다.
하드 록 음악의 영향은 긴장과, 스트레스, 방향감 상실과 자제심의 상실이다.
이에 대한 증거로서, 록 콘서트장의 관객들과, 무희들의 동작들 그리고 젊은 록 팬들의 이성을 잃은 광란을 지켜보라.
록 음악의 박자를 부두교와 사탄 숭배자 그리고 세계 각지의 우상 숭배자들의 음악과 비교하여 보라.
그들은 서로 특이하리만큼 유사한데,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 모두는 사탄에 의하여 이용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하드 록이나 디스코 같은 음악을 사용할 수 있겠는가?
그것보다도 더, 그것을 듣는 사람들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흥분하게 되고, 그것은 거룩한 것이 될 수 없다.

이 주제와 연관해서 읽을 많나 좋은 책은 과거에 록 음악가였던 봅 라르슨이 쓴 '음악이 죽는 날- The Day Music Died'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록 음악과 그 연주자들 삶의 영적인 영향과 함께 여러 종류의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록 음악의 영향을 다루고 있다.
그는 몇몇 주요 록 그룹을 다루며, 춤추는 것에 대하여도 다루고 있다.

우리는 음악이 찬양으로도 개인적인 즐거움을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교회 예배에서, 우리는 음악이 우리의 즐거움이 아니라 찬양이 되도록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서, 우리는 세상의 더러움이 스며드는 몇몇 종류의 음악들을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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