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세상적인 것들
오늘날의 세상적인 것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
지침
지난 장들서 우리는 거룩함의 중요한 사항들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살펴보았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사항들 외에 거룩함의 영역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신약성경이 쓰여진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현대의 그리스도인이 접하는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오늘날 세상에는 근본주의적이고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적이라고 간주하는 많은 것들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들은 단순한 전통들인가 아니면 거기에는 거룩함에 연관된 원칙들이 있는 것인가?
이 장에서 언급될 몇몇 특정 문제들은, 관련된 성경 구절을 찾을 수 없는 것들도 있다.
그러한 경우에는,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기본적인 거룩함의 원칙들을 따르고 또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한다.
우리는 형제로서 혹은 목사로서 혹은 개인으로서 어디다가 선을 그어야할 것인지 정해야한다.
우리는 이미 1장에서 각각의 개인이 얼마나 개인적인 확신을 가져야 하는지를 살펴보았다.
고전 8:1-13, 10:23-33과 롬 14:1-23에서 배운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함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책임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성경구절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언급하지 않은 의심이 가는 영역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 가르쳐준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주시는 확신을 따라야한다.
동시에, 우리는 다른 형제들이 오해하거나 시험에 들고 혹은 넘어지게 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우리가 서로를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과 타인의 확신을 과소평가하거나 우리의 자유를 남용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문제에 있어서(8장참조), 우리는 비록 아무런 해가 없는 음식이라도 믿음이 연약한 형제나 불신자에게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았다.
외적인 모습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하나님과 사람의 목전에 다 중요한 일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많은 것들에 대해 분명히 경고하고 있고 또 죄로 정하고 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고 할 수 있는 일들도 많다.
문제는 애매한 영역에서 온다.
우리의 안전철학은"의심이 생길 때는, 삼가라"는 것이다.
"믿음으로 쫓아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이다(롬 14:23).
우리가 묻고자 하는 것은, "예수라면 어떻게 할것인가?"
, "만일 예수께서 육체척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우리의 구원을 유지하면서 세상에 될 수 있는 데로 가까이 접근하는 것이나 타락한 사람으로 생각되지 않으면서 얼마나 많은 세상적인 일들을 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불신자에게 하나님의 좋은 증인이 되느냐 하는 데에 관심을 두고 있다.
유혹과 죄의 가능성이 있는 곳에는, "나중에 후회하는 것보다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낫다."
또한, 우리가 기도와 헌신 그리고 거룩한 삶으로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 우리를 세상과 친하게 만드는 것이 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아니하는 것은 행하지 않게 될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이 세상적인 것이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인지 알 필요가 있다.
성경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세상의 체제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세인의 태도, 욕망, 사랑, 걱정 그리고 거듭나지 못한 죄인들의 우선순위들.
더 자세한 정의를 내리는 것은 힘든 일이나,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면 많은 경우들에 있어서 세상적인 것들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 개념을 세상적인 오락과, 세상적인 분위기 그리고 세상적인 모습들로서 구분해 볼 것이다.
세상적인 오락
하나님께서는 오락 자체를 반대하시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게임들이나 운동들 그 자체로서 잘못된 것은 없다.
기쁨이나, 즐기는 것, 웃는 것과 재미 있게 지내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우리는 중세 기독교와 청교도 주의에서 종종 발견되는, 기쁨을 주는 모든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개념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육신이 혼자서나 타인들과 함께 즐거움을 알 수 있도록 창조하셨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생명을 누리고 더 풍성히 가지게 하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것은 우리가 원기 왕성하고 즐거운 삶을 누리는 것을 뜻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은 즐거움을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을 잊어 왔다.
어떤 것이든 당신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어떤 것이든 교회를 출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나, 기도를 막거나, 성경을 읽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 의 뜻이 아니다.
성경은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연락에 심취해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잊어버릴 것이라고 경고한다.
노아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결혼하는 일에 열중하는라 주께서 오시는 날에 준비되지 못할 것이다(마 24:37-39).
이러한 행위들은 그 자체로서 악한 것은 아니나, 이러한 일들을 하나님을 잊은 채 하거나 세상에 오염되어서 할 때 악하다는 것을 주의하여 보라.
마지막 날의 주된 표적은"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하는"것이다(딤전 3:2, 4).
이러한 성경구절들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이 즐겨서는 안되는 일들이 있고 또 정도를 벗어난 쾌락의 추구는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딛 3:3, 히 11:25 참고).
세상적인 분위기
어떤 행동들은 건전할 수도 있으나 종종 세상에 의해 오염된다.
정욕의 영이나 쾌락에 취하는 것, 다수의 폭력이 세상에 침투해서 그리스도인들을 괴롭게 하고 있다.
이것은 많은 파티나 놀이들, 관전하 는 운동경기들 그리고 여러 종류의 쇼들에서 나타나고 있다.
다음의 것들은 세상적인 분위기를 띠는 몇몇 예들이다:
쇼, 놀이들, 외설적인 암시와 부도덕한 유혹이 오가는 파티들;
콘서트들, 마약으로 가득 찬 공연들, 음주, 폭력, 외설들, 다툼, 군중심리;
그리고 담배연기로 가득 찬 오락실들, 평판이 나쁜 인격들 그리고 도박들이다.
때때로, 세상은 순수하게 즐길 수 있는 것들을 상기와 같은 것들로 오염시킨다.
한번 참가하는 것이 죄는 아닐 지는 모르나, 그러한 분위기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만일 자기 양심의 인도를 받는다면 그 자리를 불편해할 것이다.
만일 그가 계속하여 그러한 모임에 참가한다면, 그는 결과적으로 자신의 영성을 잃고 영적 감각을 잊을 것이다.
그 때부터는 그는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분할 수 없게 되고 이러한 영역들에서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외적 모습들
아마 어떤 모임들은 그리 세상적이지도 않고 분위기도 괜찮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거기에 참가하는 것은 타인의 눈에 세속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많은 이들이 근본주의자들과 오순절 교인들이 무엇을 믿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눈여겨본다.
그들은 당신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알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주 확신을 가지거나 가책을 느끼며, 당신이 범하는 아주 작은 실수 하나라도 걸고 넘어져 그들의 죄를 합리화시키는데 사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형제들에게 거치는 행동을 하지 않고 또 우리의 간증에 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만일 당신이 상관을 위해 담배를 산다면, 그 사실을 모르는 목격자는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만약 당신의 아는 사람이 당신이 카드놀이를 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도박과 연관지어 생각하지는 않을까?
이러한 영역들은 각자 조심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행해야 할 부분들이다.
우리는 규칙들에 의존할 수 없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과 세상에 잃어버린 바 된 이들을 향한 진정한 사랑에 동기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처한 상황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도박
그리스도교의 일반적인 견해는 도박을 반대한다.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도박이 그리스도인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비록 성경구절이 그것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도박은 세상적인 즐거움과 분위기 그리고 세상적인 것들의 외적인 모습과 직접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다.
도박은 항상 속이는 것과 폭력, 그리고 조직적인 범죄와 연관을 가져왔다.
또한 그것은 죄 없는 가정들의 파탄과 금전적인 어려움의 원인이 되어왔다.
도박은 중독성이 있다(알코올 중독자의 치료 모임과 유사한 도박 중독자들의 치료 모임이 그것을 증명한다).
성경은 이러한 것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롬 6:16).
성경은 또한 우리가 갚을 수 없거나 갚지 않으려 작정한 빚을 지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있다(롬 13:8).
그리고 우리 자신의 가족을 부양하는 것의 중대성을 성경은 강조한다(딤전 5:8).
이러한 성경의 원칙들을 깨는 것을 피하고 또 악의 모양을 취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도박을 피해야 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굳건히 서고 또 모든 악의 모양을 버리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종류의 돈을 거는 것과 또 복권 등을 사는 행동을 삼가야 한다.
춤추는 것
사교춤의 가장 주된 동기가 성(性)적인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볼륨 춤의 육체적 접근은 춤추는 사람들을 성적으로 자극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들이 록이나 디스코에 맞추어 춤추는 것을 본 사람이라면, 그러한 몸의 움직임들이 성적인 흥분을 자극하고 또 도발적이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춤추는 이들의 동작은, 비록 무의식 적일지는 모르나, 성적인 관심에 의해서 정해진 것이다.
춤은 결혼하지 않은 이들 사이의 정욕을 불러일으키고, 때때로 유혹과 죄로 연결된다.
또한 현대의 춤들은 이기주의와 자기 자랑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춤의 정신적 육체적, 영적인 영향을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과거에 전문적으로 록 음악을 연주하던 봅 라르손(Bob Larson)이 저술한"음악이 죽은 날" 이라는 책의"춤의 위험"이라는 장을 참고하라.
음악
세상적인 음악에 관한 논의는 14장을 참고하라.
운동경기들
자체에 잘못된 것은 전혀 없다.
그것들은 몸의 건강과 우정을 도모하고 또 즐거운 여흥이 될 수 있으며 성격도야에도 도움이 된다.
우정이 있고 또 그리스도인다운 분위기에서 축구나 야구, 농구 같은 운동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직접 운동을 하거나 고등학교, 대학교, 프로 운동경기 둥을 구경을 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운동경기를 하다보면,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시간이나 헌신과 상충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교회 출석이나, 기도 혹은 하나님의 성도들과의 교제를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때로 함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전혀 불경건한 사람일 수도 있고 또 그렇다면 그들의 관심사는 그리스도인과 전혀 다르게 된다.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성경적인 가르침에 위배되는 옷을 입어야할지도 모른다(6장 참고).
과거의 경험들을 살펴볼 때, 그러한 운동에 심각하게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신앙을 타협하게 되거나 아니면 아예 신앙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구경하는 이들과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다른 중요한 요소는 태도와 운동경기의 분위기에 관한것이다.
큰 경기들에서는, 집단적 폭력의 영이 존재한다.
관중들은 싸움을 시작하거나, 물건을 집어던지고, 욕을 하고 내기를 걸며 술을 마신다.
그리고 운동을 하는 선수들마저도 상대팀을 미워하게 된다.
때때로 그들은 상대편에 의도적으로 부상을 입히기도 한다.
심지어는 경기의 전략이 상대편의 대표선수를 부상시키는데 두기도 한다.
어떤 관객들은 일부러 피 흘리는 것이나, 부상 사고를 보러 오기도 한다.
권투나 아이스 하키, 그리고 자동차 경주 같은 것들은 이러한 사실들이 적용되는 좋은 예들이다.
때때로 관중들은 옛 로마의 검투사가 그랬던 것처럼 폭력을 더 사용하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많은 경우들에 있어서, 관중들은 이성을 잃고 폭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국제적인 경기에서는, 축구를 예로 들자면, 폭동이 더 자주 일어난다.
많은 유명한 감독들과 선수들이 페어 플레이 정신의 결여와 급한 성격으로 인해서 유명하다.
싸움과 온갖 다툼들이 선수나 감독, 관중들에 의해서 일어난다.
이러한 태도들은 그리스도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분위기에서 불편함을 느낀다.
심지어는 세상도 이러한 문제들을 의식하고 있다.
다음은 1977년의 리더스 다이제스트지에 실린 기사이다.
"운동경기장의 야만성"(Savagery on the palying fields)
이 기사는 원래 "의사와 운동정신"(The Physician and Sportsmanship)이라는 전문지의 l977년 5월 호 기사를 요약한 것이다.
l.관람석의 폭력과 악의의 증가는 운동경기장의 그것의 증가에 기인한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2.1974년도의 미식축구 리그 경기중의 중상들은 25%나 증가하였다.
3.미국내의 고교, 대학 프로 축구선수들의 부상확률은 광부들의 그것보다 200배나 높다.
4.피츠버그 스틸러팀의 린 스완(Lynn Swann)은 “불필요한 폭력이 증가하고 있으나 거기에 대한 아무런 대책이 세워지지 않고 있다”라고 말한다.
5.하키 스타인 보비 훌(Bobby Hull)은 한때, 자신의 두 아들을 포함한 아동들에게 미치는 하키 폭력의 영향을 고려해, 운동을 그만두었다.
6.의사들은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는 프로 경기들의 폭력장면들이 아동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걱정하고 있다.
l978년에는, 한 스포츠 신문이(Sports Illustrated) "잔인성-Brutality"이라는 미 연재기사를 실었다.
그 기사는 똑 같은 내용들을 이야기하였다.
1978년 8월의 기사는 얼마나 많은 선수들이 고통을 잊고 더 공격적으로 되기 위해서 약을 복용하는지 밝히고 있다.
이것이 폭력과 부상 그리고 입장권을 만들어냈다.
우리의 결론은, 대부분의 단체경기들, 특히 큰 고등학교나 대학 프로 운동경기들의 분위기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것들을 참가하거나 혹은 구경하면서 영성을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운동 자체로서는 나쁜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죄성이 있는 사람들은 운동을 오염시켰다 .
만약 스포츠들이 그리스도인다운 분위기에서 이루어진다면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이것은 관중들이 차분한 가운데 관전하고, 상대편일지라도 온유한 태도를 유지하며 모든 참가가들에 의해 좋은 스포츠맨 정신이 유지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자신이 세상적인 운동들에 의해서 너무 정신이 팔려서 그들의 자세를 닮지 않도록 하자.
다른 게임들
그리스도인은 몇몇 다른 종류의 게임들에 대해서도 분명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러한 게임들이 세상적인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거나, 혹은 좋지 못한 인간 관계의 원인이 되고 악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통, 게임들이 건전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지고, 또 세상의 죄와 관련이 없는 것이라면 문제가 없다.
개인적인 본이 된다는 측면에서 우리는 카드놀이나 주사위 놀이를 멀리해 왔다 왜냐하면 그것들 은 도박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노폴리(Monopoly)게임 (한국의 윷놀이와 비슷한 서양의 가족놀이-역자 柱)을 할 때는 주사위를 사용한다.
그러한 게임에서는 문제가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른 이들이 오해받거나 상처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때때로 스피너(서양의윷)를 사용한다.
마지막 분석으로, 우리는 우리가 즐겁게 교제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분위기, 적어도 세상의 난잡스러운 죄가 들어올 수 없는 가족적인 분위기를 원한다.
우리는 그러한 분위기에 참가하거나 악의 모양을 취함으로서 우리 자신이나 교회에 불명예가 돌아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고 성령이 충만한 목사의 지도를 받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다른 모임들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그들의 목사에 의해서 세워진 지침들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기억하라, 완전함에는 여러 가지 다른 차원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하시는 일을 하신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교회가 특별한 필요가 있거나 혹은 특정한 상황 가운데 처해 있거나 혹은 특정한 사역을 감당해야 할 때 목사를 인도하셔서 지침들을 세우실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가지고 비교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 스스로를 비추어 보아야 할 것이다.
마술, 무속(Witchcraft)
이것은 세상을 이끄는 힘이 되어 왔고 심지어는 기독교계 내에도 흘러 들어온 매우 위험한 행동이다.
모든 형태의 무속들은 성경에 의해서 매우 강한 어조로 금지되고 있다.
율법은 무속하는 이들을 죽이라고 명한다(출 22:18).
신명기 18:9-12절은 다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목전에서 가중한 자라고 밝히고 있다:
l.인신제사를 바치는 이들(Those Who practice human sacrifice);
2.점을 보는 사람들-신비적인 통찰이나 미래를 말하는 것;
3.운수 좋은 때를 정하는 사람들-미신적이고, 운이 좋은 날과 나쁜 날, 표적 혹은 행동을 구분하는 이들;
4.마술사를-사람들을 혹하게 하는 이들;
5.마녀들-악한 영과 교합에서 여러 종류의 마술을 행하는 사람들;
6.저주하는 이들-타인에게 저주를 내리거나 내리려 시도하는 이들;
7.점을 보러 가는 이들-악한 영과 교통하거나 하려고 하는 이들;
8.마법사들-남자마법사들;
9.무당들-죽은 이들과 교통을 시도하는 이들
모든 가증한 이들과, 마술사와 우상숭배자는 불못에 참예하게 될 것이다(계 21:8).
마법은 육체의 일중의 하나이다(갈5:19-21).
바울은 이러한 모든 것들이 마귀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예언하던 어떤 소녀가‘악령’에 의해서 잡혀 있다는 것을 알았고 예수의 이름으로 그 귀신을 몰아냈다(행 16:16-18).
그는 또한 에베소에서 50,000근의 은에 해당하는 마술에 대한 책을 불태우는 행사를 집행했다(행 19:18-20).
현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마술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해 왔으나, 사실상은 그 반대이다.
미국과 다른 나라들을 살펴볼 때, 이러한 악한 행동은 늘어나는 추세이다.
사탄주의와, 동방종교, 이교와 신비주의가 번성하는 추세를 보라.
또 점치는 이들과 마술에 관한 책들과 별점을 치는 것들이 급격히 증가하는 것을 보라.
이러한 모든 것들은 사탄에 의해서 영향 받은 마술을 되살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점성학에 분명히 적용된다.
성경은 별점을 치는자들과 전조로 예언하는자들은 우리를 도울 수 없고 또 불로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사 47:12-15).
예레미야 10:2은 이방인들처럼 하늘의 표적들을 보 고 놀라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두 성경구절은 점성학과 I2궁도의 표적들을 가지고 자문을 구하거나 미래를 예측하려 하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점성술사와, 마술사들과, 점치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느브갓네 살왕과 벨사살에게 알리는데 실패했다.
하나님의 진정한 메시지를 전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단2:27, 5:15).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이러한 행위들을 미워하시는가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들은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다.
그것들은 행하는 자들은 사실상 사탄을 경배하는 것이다.
그 결과로서, 그리스도인은 마술과 연관된 어떠한 것들도 해서는 안된다.
점성학을 믿거나, 점성술을 신뢰하거나, 점치는 이나 손금보는 이를 방문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타로카드나 점판이나, 12궁도 같은 것들은 사용해서는 안된다.
심지어는 게임이나 장난으로도 말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사탄주의를 나타낸다.
그것들은 사람의 마음을 악마에게 열고 악마가 더 자유로이 활동하도록 돕는다.
같은 이유로 그리스도인은 장난으로라도 강신회(Seance)같은 곳에 참여해서는 안된다.
‘성공적인’강신회에서 사실상 일어나는 일은 악령이 접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양의 무술을 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운동들이 신비주의나 동양철학, 그리고 악령을 경배하는 것은 아닌가 주의하여야 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운동을 하지 않도록 주의할 일이다.
요가와 초월주의 명상은 영적으로 위험 할 수 있다.
그것들은 힌두교와 불교에 뿌리를 두고 있고 악령들에 대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열 수 있다.
많은 의미 없는 단어들이 그러한 시도 가운데 사용되고 그것들은 사실상 이방의 신돌(악령들)을 발동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영적인 세계에 여러분의 마음을 여는 것에 대하여 주의하라.
그러한 악령들은 당신에게 영향을 끼치고 해를 끼치게 된다.
많은 이들이 록 음악이나, 마약, 혹은 명상으로 자신을 이러한 영들에게 노출시켰다.
심지어는 하나님께 마음을 두거나 자신을 제어하지 않고 방언으로 기도하거나 이야기하는 것도 위험할 수도 있다.
또한 예언하는 영도 예언자의 제어를 받아야 한다(고전 14:32).
미신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들어와서는 안되는 비슷한 악이다.
운이 좋거나 나쁘거나 한 날이나 숫자, 행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전조를 읽거나나 부적을 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다.
성경 은 하나님께서 모든 일들을 주관하사고 그분이 자신의 백성을 지키시고 또 모든 것들을 성도의 유익을 위해서 행하실 것이라고 하였다(엡 1:11, 시 91:9-12, 롬 8:28을 보라).
사탄은 하나님이 허락하시기 전에는 욥의 재산이 나 건강에 손댈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그 이후에도, 사탄은 욥의 생명을 해할 수가 없었다(욥 1:9-12).
저주와 마술, 흉조나 사람들의 죽음은 하나님의 권세와 그분의 교회나 자녀에 대항할 능력이 없다.
사탄의 능력
우리는 사탄도 어느 정도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마술사나 무당은 그의 힘으로 놀라운 일을 행한다.
이집트의 마술사들은 이적을 행했으나 모세는 그들을 압도했다.
그들의 힘은 하나님 앞에서 무력했다는 것이 밝혀졌다(출 7:10-12, 22, 8:7, 18-19).
예수께서는 거짓 선지자가 큰 기적과 기사로서 올 것이라고 하였다(마 24:24).
적그리스도는 능력을 가질 것이고 기적과 거짓 기사로서 사탄의 일을 행할 것이다(살후 2:9).
적그리스도의 체제 하에 있는 거짓 선지자가 하늘에서부터 불을 불러서 우상의 형상으로 말하게 만들 것이다(계 13:11-15).
사탄의 영은 기적을 행할 것이다(계 16:13-14).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놀라서는 안된다.
율법 아래에서 거짓 선지자를 구분하는 방법은 그가 이적을 행하느냐 못하느냐를 구분하는 데 있지 않고 그가 하나님을 경배하느냐 안 하느냐를 보는 것이었다.
만약 그가 꿈이나 기사나 기적을 행하나, 백성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면 그는 죽음을 당해야 했다(신 1-5).
우리는 사탄도 사람들로 하여금 기적을 일으키게 할 수 있다는 것으로 결론짓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더 크고 사탄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성령 받은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아무 권세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요 10:29, 약 4:7, 요일 4:4).
물론, 귀신은 성수나, 표적, 십자가나 주문이나 예식으로 쫓아낼 수 없고 오직 믿음을 동반한 예수의 이름으로만 쫓아낼 수 있다(막 16:17, 행 19:13-17).
우리는 많은 예언자들과 마술사들, 영매들 같은 이들이 단순히 속이는 자들이고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무지한 자들을 속이고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경배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행위 중에 사탄 뜻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마술에 관한 우리의 논의에서, 눈의 착시 현상이나 수학적인 사실, 참여간의 은밀한 대화를 이용한 악의 없는 속임수는 제외 하고자 한다.
성경에 사용된 단어 ‘마술’은 사탄의 힘을 이용한 행위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탄주의에 연관이 없는 거실에서 할 수 있는 놀이나 무대에서 보여주는 눈속임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요약
결론적으로, 마술의 영이 우리에게 스며들지 않도록 주의하도록 하자.
모든 종류의 미신이나 비슷한 행위에 대하여 경계하자.
특히, 외적으로 아무런 해가 없어 보이나 사탄의 영향을 받고 있는 점성학에 대하여 경 계하여야 한다.
또한, “불순종은 사술의 죄와 같다”는 사실을 기억할 일이다(삼상 15:23).
모든 형태의 마술, 외적으로나 혹은 미신적인 마음이나 이방인의 습관이거나 아니면 반항적인 마음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들을 피할 결심을 하도록 하자.
이 장은 우리의 삶에 적용되는 많은 것들을 다루었다.
중요한 점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의 목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삶을 자세히 주의하여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든 간에 그것이 세속적인 영에 의한 것이 아닌가를 살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영에 맞서 승리하고 악의 모양들을 피할 능력을 가지었다.
성령과 성경, 그리고 우리의 교재와 부드러운 양심이 합력하여 의의 길에서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단지 우리는 우리의 삶을 그것들의 영향과 가르침, 그리고 리더십에 호응시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
지침
지난 장들서 우리는 거룩함의 중요한 사항들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살펴보았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사항들 외에 거룩함의 영역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신약성경이 쓰여진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현대의 그리스도인이 접하는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오늘날 세상에는 근본주의적이고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적이라고 간주하는 많은 것들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들은 단순한 전통들인가 아니면 거기에는 거룩함에 연관된 원칙들이 있는 것인가?
이 장에서 언급될 몇몇 특정 문제들은, 관련된 성경 구절을 찾을 수 없는 것들도 있다.
그러한 경우에는,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기본적인 거룩함의 원칙들을 따르고 또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한다.
우리는 형제로서 혹은 목사로서 혹은 개인으로서 어디다가 선을 그어야할 것인지 정해야한다.
우리는 이미 1장에서 각각의 개인이 얼마나 개인적인 확신을 가져야 하는지를 살펴보았다.
고전 8:1-13, 10:23-33과 롬 14:1-23에서 배운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함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책임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성경구절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언급하지 않은 의심이 가는 영역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 가르쳐준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주시는 확신을 따라야한다.
동시에, 우리는 다른 형제들이 오해하거나 시험에 들고 혹은 넘어지게 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우리가 서로를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과 타인의 확신을 과소평가하거나 우리의 자유를 남용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문제에 있어서(8장참조), 우리는 비록 아무런 해가 없는 음식이라도 믿음이 연약한 형제나 불신자에게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았다.
외적인 모습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하나님과 사람의 목전에 다 중요한 일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많은 것들에 대해 분명히 경고하고 있고 또 죄로 정하고 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고 할 수 있는 일들도 많다.
문제는 애매한 영역에서 온다.
우리의 안전철학은"의심이 생길 때는, 삼가라"는 것이다.
"믿음으로 쫓아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이다(롬 14:23).
우리가 묻고자 하는 것은, "예수라면 어떻게 할것인가?"
, "만일 예수께서 육체척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우리의 구원을 유지하면서 세상에 될 수 있는 데로 가까이 접근하는 것이나 타락한 사람으로 생각되지 않으면서 얼마나 많은 세상적인 일들을 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불신자에게 하나님의 좋은 증인이 되느냐 하는 데에 관심을 두고 있다.
유혹과 죄의 가능성이 있는 곳에는, "나중에 후회하는 것보다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낫다."
또한, 우리가 기도와 헌신 그리고 거룩한 삶으로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 우리를 세상과 친하게 만드는 것이 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아니하는 것은 행하지 않게 될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이 세상적인 것이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인지 알 필요가 있다.
성경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세상의 체제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세인의 태도, 욕망, 사랑, 걱정 그리고 거듭나지 못한 죄인들의 우선순위들.
더 자세한 정의를 내리는 것은 힘든 일이나,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면 많은 경우들에 있어서 세상적인 것들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 개념을 세상적인 오락과, 세상적인 분위기 그리고 세상적인 모습들로서 구분해 볼 것이다.
세상적인 오락
하나님께서는 오락 자체를 반대하시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게임들이나 운동들 그 자체로서 잘못된 것은 없다.
기쁨이나, 즐기는 것, 웃는 것과 재미 있게 지내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우리는 중세 기독교와 청교도 주의에서 종종 발견되는, 기쁨을 주는 모든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개념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육신이 혼자서나 타인들과 함께 즐거움을 알 수 있도록 창조하셨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생명을 누리고 더 풍성히 가지게 하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것은 우리가 원기 왕성하고 즐거운 삶을 누리는 것을 뜻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은 즐거움을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을 잊어 왔다.
어떤 것이든 당신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어떤 것이든 교회를 출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나, 기도를 막거나, 성경을 읽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 의 뜻이 아니다.
성경은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연락에 심취해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잊어버릴 것이라고 경고한다.
노아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결혼하는 일에 열중하는라 주께서 오시는 날에 준비되지 못할 것이다(마 24:37-39).
이러한 행위들은 그 자체로서 악한 것은 아니나, 이러한 일들을 하나님을 잊은 채 하거나 세상에 오염되어서 할 때 악하다는 것을 주의하여 보라.
마지막 날의 주된 표적은"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하는"것이다(딤전 3:2, 4).
이러한 성경구절들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이 즐겨서는 안되는 일들이 있고 또 정도를 벗어난 쾌락의 추구는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딛 3:3, 히 11:25 참고).
세상적인 분위기
어떤 행동들은 건전할 수도 있으나 종종 세상에 의해 오염된다.
정욕의 영이나 쾌락에 취하는 것, 다수의 폭력이 세상에 침투해서 그리스도인들을 괴롭게 하고 있다.
이것은 많은 파티나 놀이들, 관전하 는 운동경기들 그리고 여러 종류의 쇼들에서 나타나고 있다.
다음의 것들은 세상적인 분위기를 띠는 몇몇 예들이다:
쇼, 놀이들, 외설적인 암시와 부도덕한 유혹이 오가는 파티들;
콘서트들, 마약으로 가득 찬 공연들, 음주, 폭력, 외설들, 다툼, 군중심리;
그리고 담배연기로 가득 찬 오락실들, 평판이 나쁜 인격들 그리고 도박들이다.
때때로, 세상은 순수하게 즐길 수 있는 것들을 상기와 같은 것들로 오염시킨다.
한번 참가하는 것이 죄는 아닐 지는 모르나, 그러한 분위기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만일 자기 양심의 인도를 받는다면 그 자리를 불편해할 것이다.
만일 그가 계속하여 그러한 모임에 참가한다면, 그는 결과적으로 자신의 영성을 잃고 영적 감각을 잊을 것이다.
그 때부터는 그는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분할 수 없게 되고 이러한 영역들에서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외적 모습들
아마 어떤 모임들은 그리 세상적이지도 않고 분위기도 괜찮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거기에 참가하는 것은 타인의 눈에 세속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많은 이들이 근본주의자들과 오순절 교인들이 무엇을 믿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눈여겨본다.
그들은 당신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알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주 확신을 가지거나 가책을 느끼며, 당신이 범하는 아주 작은 실수 하나라도 걸고 넘어져 그들의 죄를 합리화시키는데 사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형제들에게 거치는 행동을 하지 않고 또 우리의 간증에 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만일 당신이 상관을 위해 담배를 산다면, 그 사실을 모르는 목격자는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만약 당신의 아는 사람이 당신이 카드놀이를 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도박과 연관지어 생각하지는 않을까?
이러한 영역들은 각자 조심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행해야 할 부분들이다.
우리는 규칙들에 의존할 수 없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과 세상에 잃어버린 바 된 이들을 향한 진정한 사랑에 동기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처한 상황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도박
그리스도교의 일반적인 견해는 도박을 반대한다.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도박이 그리스도인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비록 성경구절이 그것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도박은 세상적인 즐거움과 분위기 그리고 세상적인 것들의 외적인 모습과 직접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다.
도박은 항상 속이는 것과 폭력, 그리고 조직적인 범죄와 연관을 가져왔다.
또한 그것은 죄 없는 가정들의 파탄과 금전적인 어려움의 원인이 되어왔다.
도박은 중독성이 있다(알코올 중독자의 치료 모임과 유사한 도박 중독자들의 치료 모임이 그것을 증명한다).
성경은 이러한 것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롬 6:16).
성경은 또한 우리가 갚을 수 없거나 갚지 않으려 작정한 빚을 지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있다(롬 13:8).
그리고 우리 자신의 가족을 부양하는 것의 중대성을 성경은 강조한다(딤전 5:8).
이러한 성경의 원칙들을 깨는 것을 피하고 또 악의 모양을 취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도박을 피해야 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굳건히 서고 또 모든 악의 모양을 버리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종류의 돈을 거는 것과 또 복권 등을 사는 행동을 삼가야 한다.
춤추는 것
사교춤의 가장 주된 동기가 성(性)적인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볼륨 춤의 육체적 접근은 춤추는 사람들을 성적으로 자극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들이 록이나 디스코에 맞추어 춤추는 것을 본 사람이라면, 그러한 몸의 움직임들이 성적인 흥분을 자극하고 또 도발적이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춤추는 이들의 동작은, 비록 무의식 적일지는 모르나, 성적인 관심에 의해서 정해진 것이다.
춤은 결혼하지 않은 이들 사이의 정욕을 불러일으키고, 때때로 유혹과 죄로 연결된다.
또한 현대의 춤들은 이기주의와 자기 자랑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춤의 정신적 육체적, 영적인 영향을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과거에 전문적으로 록 음악을 연주하던 봅 라르손(Bob Larson)이 저술한"음악이 죽은 날" 이라는 책의"춤의 위험"이라는 장을 참고하라.
음악
세상적인 음악에 관한 논의는 14장을 참고하라.
운동경기들
자체에 잘못된 것은 전혀 없다.
그것들은 몸의 건강과 우정을 도모하고 또 즐거운 여흥이 될 수 있으며 성격도야에도 도움이 된다.
우정이 있고 또 그리스도인다운 분위기에서 축구나 야구, 농구 같은 운동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직접 운동을 하거나 고등학교, 대학교, 프로 운동경기 둥을 구경을 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운동경기를 하다보면,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시간이나 헌신과 상충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교회 출석이나, 기도 혹은 하나님의 성도들과의 교제를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때로 함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전혀 불경건한 사람일 수도 있고 또 그렇다면 그들의 관심사는 그리스도인과 전혀 다르게 된다.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성경적인 가르침에 위배되는 옷을 입어야할지도 모른다(6장 참고).
과거의 경험들을 살펴볼 때, 그러한 운동에 심각하게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신앙을 타협하게 되거나 아니면 아예 신앙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구경하는 이들과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다른 중요한 요소는 태도와 운동경기의 분위기에 관한것이다.
큰 경기들에서는, 집단적 폭력의 영이 존재한다.
관중들은 싸움을 시작하거나, 물건을 집어던지고, 욕을 하고 내기를 걸며 술을 마신다.
그리고 운동을 하는 선수들마저도 상대팀을 미워하게 된다.
때때로 그들은 상대편에 의도적으로 부상을 입히기도 한다.
심지어는 경기의 전략이 상대편의 대표선수를 부상시키는데 두기도 한다.
어떤 관객들은 일부러 피 흘리는 것이나, 부상 사고를 보러 오기도 한다.
권투나 아이스 하키, 그리고 자동차 경주 같은 것들은 이러한 사실들이 적용되는 좋은 예들이다.
때때로 관중들은 옛 로마의 검투사가 그랬던 것처럼 폭력을 더 사용하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많은 경우들에 있어서, 관중들은 이성을 잃고 폭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국제적인 경기에서는, 축구를 예로 들자면, 폭동이 더 자주 일어난다.
많은 유명한 감독들과 선수들이 페어 플레이 정신의 결여와 급한 성격으로 인해서 유명하다.
싸움과 온갖 다툼들이 선수나 감독, 관중들에 의해서 일어난다.
이러한 태도들은 그리스도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분위기에서 불편함을 느낀다.
심지어는 세상도 이러한 문제들을 의식하고 있다.
다음은 1977년의 리더스 다이제스트지에 실린 기사이다.
"운동경기장의 야만성"(Savagery on the palying fields)
이 기사는 원래 "의사와 운동정신"(The Physician and Sportsmanship)이라는 전문지의 l977년 5월 호 기사를 요약한 것이다.
l.관람석의 폭력과 악의의 증가는 운동경기장의 그것의 증가에 기인한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2.1974년도의 미식축구 리그 경기중의 중상들은 25%나 증가하였다.
3.미국내의 고교, 대학 프로 축구선수들의 부상확률은 광부들의 그것보다 200배나 높다.
4.피츠버그 스틸러팀의 린 스완(Lynn Swann)은 “불필요한 폭력이 증가하고 있으나 거기에 대한 아무런 대책이 세워지지 않고 있다”라고 말한다.
5.하키 스타인 보비 훌(Bobby Hull)은 한때, 자신의 두 아들을 포함한 아동들에게 미치는 하키 폭력의 영향을 고려해, 운동을 그만두었다.
6.의사들은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는 프로 경기들의 폭력장면들이 아동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걱정하고 있다.
l978년에는, 한 스포츠 신문이(Sports Illustrated) "잔인성-Brutality"이라는 미 연재기사를 실었다.
그 기사는 똑 같은 내용들을 이야기하였다.
1978년 8월의 기사는 얼마나 많은 선수들이 고통을 잊고 더 공격적으로 되기 위해서 약을 복용하는지 밝히고 있다.
이것이 폭력과 부상 그리고 입장권을 만들어냈다.
우리의 결론은, 대부분의 단체경기들, 특히 큰 고등학교나 대학 프로 운동경기들의 분위기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것들을 참가하거나 혹은 구경하면서 영성을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운동 자체로서는 나쁜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죄성이 있는 사람들은 운동을 오염시켰다 .
만약 스포츠들이 그리스도인다운 분위기에서 이루어진다면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이것은 관중들이 차분한 가운데 관전하고, 상대편일지라도 온유한 태도를 유지하며 모든 참가가들에 의해 좋은 스포츠맨 정신이 유지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자신이 세상적인 운동들에 의해서 너무 정신이 팔려서 그들의 자세를 닮지 않도록 하자.
다른 게임들
그리스도인은 몇몇 다른 종류의 게임들에 대해서도 분명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러한 게임들이 세상적인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거나, 혹은 좋지 못한 인간 관계의 원인이 되고 악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통, 게임들이 건전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지고, 또 세상의 죄와 관련이 없는 것이라면 문제가 없다.
개인적인 본이 된다는 측면에서 우리는 카드놀이나 주사위 놀이를 멀리해 왔다 왜냐하면 그것들 은 도박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노폴리(Monopoly)게임 (한국의 윷놀이와 비슷한 서양의 가족놀이-역자 柱)을 할 때는 주사위를 사용한다.
그러한 게임에서는 문제가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른 이들이 오해받거나 상처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때때로 스피너(서양의윷)를 사용한다.
마지막 분석으로, 우리는 우리가 즐겁게 교제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분위기, 적어도 세상의 난잡스러운 죄가 들어올 수 없는 가족적인 분위기를 원한다.
우리는 그러한 분위기에 참가하거나 악의 모양을 취함으로서 우리 자신이나 교회에 불명예가 돌아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고 성령이 충만한 목사의 지도를 받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다른 모임들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그들의 목사에 의해서 세워진 지침들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기억하라, 완전함에는 여러 가지 다른 차원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하시는 일을 하신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교회가 특별한 필요가 있거나 혹은 특정한 상황 가운데 처해 있거나 혹은 특정한 사역을 감당해야 할 때 목사를 인도하셔서 지침들을 세우실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가지고 비교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 스스로를 비추어 보아야 할 것이다.
마술, 무속(Witchcraft)
이것은 세상을 이끄는 힘이 되어 왔고 심지어는 기독교계 내에도 흘러 들어온 매우 위험한 행동이다.
모든 형태의 무속들은 성경에 의해서 매우 강한 어조로 금지되고 있다.
율법은 무속하는 이들을 죽이라고 명한다(출 22:18).
신명기 18:9-12절은 다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목전에서 가중한 자라고 밝히고 있다:
l.인신제사를 바치는 이들(Those Who practice human sacrifice);
2.점을 보는 사람들-신비적인 통찰이나 미래를 말하는 것;
3.운수 좋은 때를 정하는 사람들-미신적이고, 운이 좋은 날과 나쁜 날, 표적 혹은 행동을 구분하는 이들;
4.마술사를-사람들을 혹하게 하는 이들;
5.마녀들-악한 영과 교합에서 여러 종류의 마술을 행하는 사람들;
6.저주하는 이들-타인에게 저주를 내리거나 내리려 시도하는 이들;
7.점을 보러 가는 이들-악한 영과 교통하거나 하려고 하는 이들;
8.마법사들-남자마법사들;
9.무당들-죽은 이들과 교통을 시도하는 이들
모든 가증한 이들과, 마술사와 우상숭배자는 불못에 참예하게 될 것이다(계 21:8).
마법은 육체의 일중의 하나이다(갈5:19-21).
바울은 이러한 모든 것들이 마귀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예언하던 어떤 소녀가‘악령’에 의해서 잡혀 있다는 것을 알았고 예수의 이름으로 그 귀신을 몰아냈다(행 16:16-18).
그는 또한 에베소에서 50,000근의 은에 해당하는 마술에 대한 책을 불태우는 행사를 집행했다(행 19:18-20).
현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마술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해 왔으나, 사실상은 그 반대이다.
미국과 다른 나라들을 살펴볼 때, 이러한 악한 행동은 늘어나는 추세이다.
사탄주의와, 동방종교, 이교와 신비주의가 번성하는 추세를 보라.
또 점치는 이들과 마술에 관한 책들과 별점을 치는 것들이 급격히 증가하는 것을 보라.
이러한 모든 것들은 사탄에 의해서 영향 받은 마술을 되살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점성학에 분명히 적용된다.
성경은 별점을 치는자들과 전조로 예언하는자들은 우리를 도울 수 없고 또 불로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사 47:12-15).
예레미야 10:2은 이방인들처럼 하늘의 표적들을 보 고 놀라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두 성경구절은 점성학과 I2궁도의 표적들을 가지고 자문을 구하거나 미래를 예측하려 하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점성술사와, 마술사들과, 점치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느브갓네 살왕과 벨사살에게 알리는데 실패했다.
하나님의 진정한 메시지를 전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단2:27, 5:15).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이러한 행위들을 미워하시는가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들은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다.
그것들은 행하는 자들은 사실상 사탄을 경배하는 것이다.
그 결과로서, 그리스도인은 마술과 연관된 어떠한 것들도 해서는 안된다.
점성학을 믿거나, 점성술을 신뢰하거나, 점치는 이나 손금보는 이를 방문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타로카드나 점판이나, 12궁도 같은 것들은 사용해서는 안된다.
심지어는 게임이나 장난으로도 말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사탄주의를 나타낸다.
그것들은 사람의 마음을 악마에게 열고 악마가 더 자유로이 활동하도록 돕는다.
같은 이유로 그리스도인은 장난으로라도 강신회(Seance)같은 곳에 참여해서는 안된다.
‘성공적인’강신회에서 사실상 일어나는 일은 악령이 접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양의 무술을 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운동들이 신비주의나 동양철학, 그리고 악령을 경배하는 것은 아닌가 주의하여야 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운동을 하지 않도록 주의할 일이다.
요가와 초월주의 명상은 영적으로 위험 할 수 있다.
그것들은 힌두교와 불교에 뿌리를 두고 있고 악령들에 대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열 수 있다.
많은 의미 없는 단어들이 그러한 시도 가운데 사용되고 그것들은 사실상 이방의 신돌(악령들)을 발동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영적인 세계에 여러분의 마음을 여는 것에 대하여 주의하라.
그러한 악령들은 당신에게 영향을 끼치고 해를 끼치게 된다.
많은 이들이 록 음악이나, 마약, 혹은 명상으로 자신을 이러한 영들에게 노출시켰다.
심지어는 하나님께 마음을 두거나 자신을 제어하지 않고 방언으로 기도하거나 이야기하는 것도 위험할 수도 있다.
또한 예언하는 영도 예언자의 제어를 받아야 한다(고전 14:32).
미신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들어와서는 안되는 비슷한 악이다.
운이 좋거나 나쁘거나 한 날이나 숫자, 행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전조를 읽거나나 부적을 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다.
성경 은 하나님께서 모든 일들을 주관하사고 그분이 자신의 백성을 지키시고 또 모든 것들을 성도의 유익을 위해서 행하실 것이라고 하였다(엡 1:11, 시 91:9-12, 롬 8:28을 보라).
사탄은 하나님이 허락하시기 전에는 욥의 재산이 나 건강에 손댈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그 이후에도, 사탄은 욥의 생명을 해할 수가 없었다(욥 1:9-12).
저주와 마술, 흉조나 사람들의 죽음은 하나님의 권세와 그분의 교회나 자녀에 대항할 능력이 없다.
사탄의 능력
우리는 사탄도 어느 정도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마술사나 무당은 그의 힘으로 놀라운 일을 행한다.
이집트의 마술사들은 이적을 행했으나 모세는 그들을 압도했다.
그들의 힘은 하나님 앞에서 무력했다는 것이 밝혀졌다(출 7:10-12, 22, 8:7, 18-19).
예수께서는 거짓 선지자가 큰 기적과 기사로서 올 것이라고 하였다(마 24:24).
적그리스도는 능력을 가질 것이고 기적과 거짓 기사로서 사탄의 일을 행할 것이다(살후 2:9).
적그리스도의 체제 하에 있는 거짓 선지자가 하늘에서부터 불을 불러서 우상의 형상으로 말하게 만들 것이다(계 13:11-15).
사탄의 영은 기적을 행할 것이다(계 16:13-14).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놀라서는 안된다.
율법 아래에서 거짓 선지자를 구분하는 방법은 그가 이적을 행하느냐 못하느냐를 구분하는 데 있지 않고 그가 하나님을 경배하느냐 안 하느냐를 보는 것이었다.
만약 그가 꿈이나 기사나 기적을 행하나, 백성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면 그는 죽음을 당해야 했다(신 1-5).
우리는 사탄도 사람들로 하여금 기적을 일으키게 할 수 있다는 것으로 결론짓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더 크고 사탄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성령 받은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아무 권세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요 10:29, 약 4:7, 요일 4:4).
물론, 귀신은 성수나, 표적, 십자가나 주문이나 예식으로 쫓아낼 수 없고 오직 믿음을 동반한 예수의 이름으로만 쫓아낼 수 있다(막 16:17, 행 19:13-17).
우리는 많은 예언자들과 마술사들, 영매들 같은 이들이 단순히 속이는 자들이고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무지한 자들을 속이고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경배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행위 중에 사탄 뜻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마술에 관한 우리의 논의에서, 눈의 착시 현상이나 수학적인 사실, 참여간의 은밀한 대화를 이용한 악의 없는 속임수는 제외 하고자 한다.
성경에 사용된 단어 ‘마술’은 사탄의 힘을 이용한 행위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탄주의에 연관이 없는 거실에서 할 수 있는 놀이나 무대에서 보여주는 눈속임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요약
결론적으로, 마술의 영이 우리에게 스며들지 않도록 주의하도록 하자.
모든 종류의 미신이나 비슷한 행위에 대하여 경계하자.
특히, 외적으로 아무런 해가 없어 보이나 사탄의 영향을 받고 있는 점성학에 대하여 경 계하여야 한다.
또한, “불순종은 사술의 죄와 같다”는 사실을 기억할 일이다(삼상 15:23).
모든 형태의 마술, 외적으로나 혹은 미신적인 마음이나 이방인의 습관이거나 아니면 반항적인 마음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들을 피할 결심을 하도록 하자.
이 장은 우리의 삶에 적용되는 많은 것들을 다루었다.
중요한 점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의 목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삶을 자세히 주의하여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든 간에 그것이 세속적인 영에 의한 것이 아닌가를 살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영에 맞서 승리하고 악의 모양들을 피할 능력을 가지었다.
성령과 성경, 그리고 우리의 교재와 부드러운 양심이 합력하여 의의 길에서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단지 우리는 우리의 삶을 그것들의 영향과 가르침, 그리고 리더십에 호응시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