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인의 교육의 중심은 하나님

선생님이 있어야 하는 이유

유태인 교육은 다른 나라의 교육과 별다른 것이 없다. 그러나 유태인을 유태인 되게 하며 세계인이 되게 하는 것은 그들의 종교교육이다. 그들의 종교는 하나님 중심, 회당 중심, 랍비 중심인 유대교이다.
랍비들은 그들의 학생을 정말 사랑한다. 랍비들은 스스로 이런 질문을 한다.

‘나는 과연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내가 가르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와 기초는 사랑인가?
억지로 하는 의무감인가?
무슨 목표를 가지고 학생들 앞에 서는가?
내 앞에 있는 학생은 나의 학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인식하고 학생들 앞에 서는가?
무엇을 가르치든지 하나님께서 그 자녀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사람으로 교육하는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진정 학생들을 사랑하는가?’

랍비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학생을 사랑하면서 “선생님이 존재하는 이유는 학생으로 하여금 알게 하는 것이지!”라고 말한다.

‘배운다’는 말과 ‘가르친다’는 말

‘배운다’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라마드’이다. ‘배운다’는 말은 ‘새로운 것을 경험하여 알게 된다.’는 말인데, ‘안다’는 것은 ‘닮는다’는 말로 ‘표현하여 나타낸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배워 안다는 말은, 하나님을 닮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그리고 ‘가르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리메이드’인데 배운다는 말과 뿌리가 같은 단어이다. 히브리어에서 ‘가르치다’는 ‘배우고 배우고 배운다’는 의미로 계속하여 배운다는 말이다. 더 많이 배운다는 말은 배우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가르친다는 말은 학생들에게 보여준다는 의미로, 보여주어서 따라오게 하는 것이 가르치다의 의미이다.
신명기 6:4-9절은 유대교 교육 헌장으로 4-6절은 교육의 내용을 말하며, 7-9절은 교육의 방법을 말한다. 7절은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라고 기록한다. 이 말씀은 앞에서 가르친 교육의 내용을 네 자녀들에게 최선을 다하여 보여주어 따라 하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유대교 교육의 중심인 토라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다르면 잘못된 교육이다. 바른 교육은 배워서 아는 대로 행하도록 하여야 한다. 보여준 대로 따를 수 있도록 인도하는 교사가 귀하고 훌륭한 교사이다. 그러므로 유대교의 교육철학에서 말하는 교육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가르치는 사람인 ‘선생님’이다.
유태인들은 “배우는 것이 바로 유대교의 중심이다”고 말한다. 배운다는 것 자체가 자기들의 종교의 의무이다. 배운다는 것은 어떤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원천이다. 배운다는 것은 예배의 한 형태이다.
일반적인 의미로 교육은 ‘자기를 계발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교육을 받으며 배우게 되는 것’으로 교육은 ‘자기 자신의 영광이나 자기가 소속하고 있는 나라나 단체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대교의 교육 목표는 토라를 배우고 토라를 가르치는 것이다. 토라의 내용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여 보여주고, 알려주며, 가르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유태인들의 문화 자체가 종교이며 유대교는 토라를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의 공동체이며, 문화 공동체이다. 따라서 유태인들은 종교와 문화를 구분해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르게 가르치면 모든 교육은 바르게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이렇게 섬겨라! 하나님을 이렇게 예배하라! 하나님을 이렇게 믿어라!” 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너는 이렇게 살아라!”를 가르친다.
여기서 ‘이렇게’ 라는 말은 ‘하나님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유대교 교육의 핵심이며 정신이다.

유대교 교육을 담당하는 선생님

선생님의 자격은 인내하는 성품과 사랑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유태인들은 선생님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타고나야 한다고 말한다.

선생님은 부르심을 받아야 합니다.

어떤 대상에게 어떤 것을 교육하려면 본질적인 요소와 부가적인 요소가 있다. 그런데 유대교에서는 본질적인 요소들 가운데 선생님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유대교에서 ‘선생님이 되기 위하여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말의 뜻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자신을 부르신 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철저히 교육받고, 선생님으로 학생들 앞에 서기까지 많은 준비를 하였다는 말이다.
유태인 부모들이 모이기만 하면 즐겨 하는 말이 있다. 유태인들 중 자녀들을 둔 부모들이 모이면 “좋은 선생님을 만나야 하는데…” 하면서 그 일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준비된 좋은 선생님이 중요한 이유는, 선생님의 인격적인 행함에 많은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유대교에서 훌륭한 선생님을 말할 때 제일 먼저 ‘가르치는 자의 행함’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유태인들이 요구하는 가르치는 자의 행함이란 인격과 행함 안에서 구체화되는 가르침이며 배움을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친히 행하심으로 그리고 자신의 삶과 인격을 통해서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가르치는 자의 삶과 인격과 행함에 있어서 종교, 도덕, 행위는 완전히 분리될 수가 없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 날마다의 삶 속에서 믿음과 행함이, 가르침과 행함이, 배움과 행함이 하나로 나타나야 한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이러한 삶을 살 때, 세상 사람들은 믿는 자를 통하여, 가르치는 자로 인하여 하나님을 보게 되어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되며 그들 또한 보고 듣고 배운 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증인된 삶을 사는 것이다.

탈무드에서 말하는 겸손한 선생님이란,

  1. 자기보다 더 현명한 사람 앞에서는 말을 하지 않는다.
  2. 동료의 말을 가로막지 않고 서둘러 대답하지 않는다.
  3. 그 주제와 상관이 없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4. 그 포인트에 어긋나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5. 마지막 주제를 처음 주제에 말하지 않는다.
  6.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7. 진리를 안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의 모든 진리는 하나님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모두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8. 학자들, 또는 가르치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이해하는 것에 있어서 그 자신이 양심적이어야 한다.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내놓는 것이 진정한 겸손이다. 과장하거나 축소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이 겸손이다. 우리는 무엇을 배우든지, 무엇을 하든지, 어떤 일을 하든지, 누가 무엇을 요구하든지, 요구하는 그 사람이 평화를 가지게 하라! 이것이 그들의 선생 된 자의 최우선 원칙이다라고 한다.

현명한 학생인 선생님

“ '아마'를 사랑하며, 네가 알지 못하는 것을 그럴듯하게 꾸며 아는 척하는 것을 미워하라.”
이 말은 확실하지 않은 것은 선생님의 권위 때문에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다. 선생님도 끊임없이 배우고 연구하는 학생이지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다.
선생님 또는 학자를 뜻하는 히브리어는 ‘탈미드 하함’이다. 여기서 탈미드는 ‘학생’, 하함은 ‘현명한’을 뜻한다. 즉 ‘현명한 학생’이다.
끊임없이 연구하는 학생이 학자이며 선생님이라는 놀라운 의미를 가르치는 말이다. 그러므로 유대교 교육의 대원칙은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구별이 없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선생님의 삶 가운데 나타나는 유대교 교육 원리

유대교 교육에서는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은 삶의 본질이며 하나님을 향한 의무라는 것을 강조한다. 사람은 교육을 받아 좋아질 수 있고, 교육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계속 되어야 한다. 그리고 배움과 행함은 한결같이 같아야 한다. 또한 배움은 사회적이어야 하는데, 이 말은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고 인류 사회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교육은 어릴 때부터 하는 것이 좋으며 교육에서 개인의 차이, 개인의 특기는 인정되어야 하고, 개인의 특기를 찾는 교육을 해야 한다. 교육에 대한 책임과 의무는 부모와 공동체에게 있다.

선생님의 행함을 통하여 나타나는 교육 원리

선생은 보여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하여 찾아나가는 사람이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인정 받는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 그리고 선생들의 삶 그 자체가 토라가 가르치는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삶이어야만 선생으로서 자격이 있다.

배우는 사람 앞서 행하며 가르치는 사람

우리의 환경이 어떠하더라도 우리는 가르치기 위해서 끝없이 배워야 한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은 분리할 수 없다. 그리고 선생은 학생의 질문에 신실하게 답해야 한다. ‘신실하다’는 것은 성의를 다해서 하라는 말이다. 아는 것은 확실하게,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답해야 한다. 그리고 모르는 것은 반드시 언제까지 알아서 알려주겠다는 확실한 시간적 여유를 주어야 한다.
그리고 학생이 모를 때는 400번이고, 800번이고 알 때까지 가르친다. 우리가 맡은 학생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는 몇 번을 반복하든지 알 수 있을 때까지 가르쳐서 한 영혼을 살려야 한다. 그래서 그 학생이 알고 실천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하여 가르친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사람은 현실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고 움직여서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 즉 말씀을 가르쳤다면 그 말씀으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그런데 말씀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인도하려면 가르친 선생이 말씀대로 생활해야만 된다.

“토라가 없는 곳에는 삶이 없다. 그리고 삶이 없는 곳에는 토라가 없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곳에는 삶도 없으며, 실천하는 삶이 없는 곳에는 하나님의 말씀도 없다는 것이다. 힐렐이라는 랍비는 이렇게 말하였다. “빈 머리를 가진 사람은 죄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무식한 사람이 진실로 경건한 신앙의 사람이 될 수가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이 진정으로 경건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배움이 없이는 행동이 있을 수 없으며, 배움은 바로 실천을 만들어내는 연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학생과 선생님 사이는 찌꺼기는 걸러내고 알맹이만 주는 사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바른 인생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누가 선생이 될 수 있는가? 아는 대로 행하면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어 바른 길을 따라오게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아는 것을 행하는 사람이 선생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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