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인 거듭남 - 제2장 은혜와 믿음
제2장 은혜와 믿음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엡2:8-9, 새번역)
은혜란 무엇인가?
은혜란 아무런 공로 없이 주어지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호의(好意)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며, 인간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은혜라는 단어도 받을 자격도 없고 값을 주고 살 수도 없는 복을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다는 것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구원하는데 필요한 모든 일을 스스로 행하신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을 도울 수도 없으며 자신의 구원에 어떤 기여도 할 수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과 또 기꺼이 행하고자 하시는 일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거부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온다
에베소서 2:8-9은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오는 것이지 인간 편에서 행하는 어떤 행위들에 의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구원이 우리에게 유효(有效)하도록 하셨다(롬 3:24-25).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그의 아들을 죽음에 내어 주고 그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구원을 얻도록 해 주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우리의 구원을 지키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롬 8:32).
빌립보서 2:12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두려움과 경외함과 주의함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라고 권고한다. 그 다음 구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구원할 수도 없고 구원하는데 도움을 줄 수도 없으며, 다만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순복(純服)하든지 아니면 거절할 수는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권리를 주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우리가 구원을 받고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이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선택까지도 무시하고 우리의 구원을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은혜와 행위
우리는 선행(善行)으로 구원을 얻거나 구원받을 만 하다든지 혹은 구원을 획득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행위'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선한 행실과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이끌어 줄 것이다. 에베소서 2:8-9에서 구원이 은혜의 의한 것이지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님을 강력히 가르친 후, 이어서 다음 구절에서는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가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고후 9:8).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어떻게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사는가를 알려 주고 우리에게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준다(딛 2:11-12).
은혜는 죄를 짓도록 허락하지 않는다(롬 6:15). 반대로 은혜는 성령의 능력이 우리에게 나타나게끔 해 준다.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하면, 모세의 율법이 요구는 하지만 줄 수는 없는 모든 의를 성령 안에서 이룰 수 있다(롬 8:3-4).
하나님의 은혜는 의롭게 살 수 있는 능력 뿐만 아니라 거저 주시는 선물인 구원을 가져다 준다. 비록 우리가 구원의 선물을 행위의 대가로 얻을 수는 없지만 일단 은혜를 받으면 우리의 삶은 변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선한 일들을 하게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의롭고 경건한 자세를 분명하게 나타내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혜가 우리 안에서 역사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은혜와 그리스도께 헌신하며 순종하는 삶을 서로 분리할 수 없다.
은혜와 믿음
은혜가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에 대하여 모든 일을 하신다'고 가르친다며 모든 인간은 저절로 구원받지 않겠는가?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심판 때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므로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계 20:11-15). 은혜가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을 베푸시는 일에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면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어떤 사람들을 선택하여 그들의 태도나 반응과는 상관없이 구원하시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시는 분이 아니므로 그것도 옳지 못하다(행 10:34).
'믿음'은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수단이다(롬 3:21-31; 엡 2:8).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을 베푸시는 것을 도울 수는 없으나 하나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하는데 대하여 책임을 가진다.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그분의 구원의 행위를 받아들이는 반응을 성경은 '믿음'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에게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은 둘 다 구원에 필수적이다. 카리스(charis, 은혜)에는 '아무 공로없이 주신다는 것'과 '감사함으로 받는다'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믿음에 의한 칭의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간주하시거나 혹은 선언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분명하게 믿음에 의한 칭의(稱義)를 가리치고 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롬 1:17; 갈 3:11; 히 10:38).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믿음에 의한 칭의를 강조하였다(롬 3:20-25; 갈 2:16).
아무도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거나 선한 행위를 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는 이것이다. 대신에 구원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위한 그의 희생을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이것을 확증하고 난 후에 우리는 다음으로 무엇이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 믿음을 소유할 수 있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믿음에 의한 칭의는 올바로 행하는 것 없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우리 자신들의 공로 대신 은혜의 보좌 앞에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주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의 근원
"믿음의 근원은 무엇인가?" 만일 사람이 자기 스스로 믿음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는 겉보기에는, 적어도 부분적으로, 자신 스스로가 구원자가 될 것이다. 믿음을 소유하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잠재된 믿음을 주셨지만 그 믿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에 적용할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는 그들 개인에게 맡겨 두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지만 모두 다 하나님을 믿기로 선택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창조 가운데 자신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두셨기에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며 그분을 믿지 않는 것에 대해 변명하지 못할 것이다(롬 1:19-20).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믿을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셨으므로 그분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근원이시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시다(히 12:2). 거듭난 이후에도 성령은 위기의 순간에 초자연적인 은사로서, 그리고 매일의 그리스도인 생활의 요소로서 믿음을 지속적으로 공급하여 주신다(고전 12:9; 갈 5:22).
죄성(罪性)때문에 우리들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능력이 없이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었다(요 3:27; 6:44; 롬 3:10-12).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으면 누구도 믿음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온 세상을 위해 죽으셨으므로 모든 이에게 은혜를 주실 수 있게 되었다(요 3:16). 비록 인간 자신이 완전히 타락하여 죄 가운데 있어 스스로 하나님을 선택할 수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그분을 찾고 그분에게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성경은 보편적인 은혜(universal grace)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 주고 격려하므로 구원에 선행(先行)하여 주어진다고 가르친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딛 2:11). 하나님께서는 어디든지 사라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시며(행 17:30) 그분이 요구하시는 것을 준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빌 2:13; 요일 5:3). 하나님은 모두가 회개하기를 원하시며 모두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롬 2:4).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인자와 은혜를 베푸셔서 회개에 이르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부르시지만(마 11:28; 계 22:17), 그러나 오직 그 부름에 응답하는 자들만이 구원을 얻는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마 20:16; 22:14).
우리는 또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온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롬 10:17). 성경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생긴다고 기록한 많은 예들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최초의 믿음의 분량을 얻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해 우리 믿음을 배가시킬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믿음을 개발(改發)하시게 하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 마음 가운데 두신 믿음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미 '믿음'이 인간이 하나님께 보이는 적극적인 반응이며,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수단인 것을 확인하였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항복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분이 우리 안에서 구원의 역사를 행하시도록 허용하는 수단이다. 이것은 믿음의 기능을 말하는 것이다.
TAB(The Amplified Bible: 상술성경)의 저자 서언에는 believe(믿다)라는 단어에 대한 의미심장한 글이 실려 있다. 이 글이 지적하고 있는 바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영어 단어의 일반적 의미로서는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살아 계셨고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죄인들을 구원하시려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믿는다. 그러나 TAB에 따르면, 영어에서는 어떤 단어도 헬라어 pisteuo(피스튜오)가 의도하는 의미를 적절하게 전할 수 없는데, 대부분의 번역본들은 believe(믿다)로 표현하고 있다. TAB의 pisteuo(피스튜오)에 대한 정의는 이렇다. "이 말은 '고수하다, 신뢰하다, 믿다, 의존하다'의 뜻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라는 말은 정말로 개인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서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믿는다. 또한 설득되다. 그러므로 확신을 두고 신뢰하다. 단지 신임(信任)할 뿐만 아니라 의지하는 것을 나타낸다.
pistis(피스티스)를 주로 '확신, 듣는 것에 근거한 확고한 신념'으로 정의한다.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완전한 시인과, 그분에 대한 개인적인 굴복과, 그럼으로 인해 성령의 감동을 받게 되는 생활양식 등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1)굳은 확신. 예를 들어 데살로니가후서 2:11, 12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게시 혹은 진리에 대한 완전한 시인 (2)요 1:12에서 그분께 대한 개인적인 굴복 (3)고후 5:7에서 그러한 굴복으로 인하여 성령의 감동을 받는 행동. 순전히 자연적 사고의 작용으로 갖는 신뢰(belief)와는 대조적이다. 성경적인 믿음은 한 개인의 신뢰와 순종과 거룩한 행실 속에 비추어진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관계를 포함한다.
"믿음이 단지 교리(敎理)나 신조(信條)를 반복하는 것에 대한 동의만을 의미한다면, 그래서 이것을 옳게 받아들이는 것은 그 믿음을 생각해 볼 때 어리석고 부당하나, 그러나 믿음은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묘사한다. 신자(信者)에게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와 순종과 사랑을 의미하며 그러한 신뢰와 순종과 사랑은 필연적으로 정결함과 거룩함과 이기적이지 않은 봉사의 생활의 결과이다."
"구원이 단순히 침례나 공개적인 믿음의 확인을 통하여, 혹은 계약 공동체(교회)안에서의 출생에 의해 구원을 확신하는 천국행 패스포트가 되어 버린 이단적인 싸구려 은혜"를 말하고 있다. 싸구려 은혜의 개념에 반대하여 "거져 주시는 구원의 선물은 단순히 외적인 지적 동의나 자발적으로 복음에 복종하는 것 뿐만 아니라 십자가 밑에서의 완전한 의탁과 일생의 제자도를 요구한다"고 진술한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 전인의 철저한 의탁, 즉 인식(지식)과 신뢰와 순종이 수반되는 의탁"으로 나타내고 있다.
구원하는 믿음의 세 가지 구성요소
구원하는 믿음은 정신적 인식이나 동의(同意) 이상을 의미한다. 구원의 믿음의 세 가지 구성요소들 -인식, 동의, 전유(專有-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무엇을 전적으로 사용하거나 소유하는 것, 적용하는 것)이다.
무엇인가에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개인이 먼저 어느 정도의 인식하고 지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무엇을 믿고 고백할 것인지 알아야 한다. 구원하는 믿음이 하나님, 혹은 생명에 대한 모든 것을 이해하도록 요구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우리가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구주임을 아는 것을 요구한다.
믿음을 가지려면 동의 내지 정신적 수용이 있어야 한다.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어떤 제안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아직 그것을 믿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해하는 것에 덧붙여 그 신앙 고백이 옳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결국 믿는 것을 전유(專有)해야 한다. 진리의 실제적인 적용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의 말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하는 믿음은 지적으로 그를 구주로서 인정하는 것 이상의 것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의 복음에 순종하며 그와 연합하고 그에게 우리 자신들을 완전히 위탁하므로, 그리고 그에 대한 완전한 신뢰의 관계를 세우고 충성하고 의지함으로 이것을 적용해야 한다.
헬라어 pistis(피스티스)와 pisteuo(피스튜오)의 연구는 이 세번째 요소를 강조하였다. 그것이 없이는 구원하는 믿음은 없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가 주와 구주되심을 인정할 것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복음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비록 그들이 인식하고 동의했다 할지라도 그들의 삶에 복음을 적용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진리로 행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맡기지 않았고 그와 연합하지 않았다. 구원하는 믿음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의존(依存)하는 것이다.
불충분한 믿음의 예들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믿음은 있었으나 구원받지는 못한 사람들의 많은 실례들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것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서 지적으로 믿을 수는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순종하거나 의지하지도 않으며 구원에 관하여 자신을 그에게 맡기지도 않을 수 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는 기적들을 보고서 그를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아셨기 때문에 자신을 그들에게 의탁하시지 않으셨다(요 2:23-25).
이와 비슷한 예로 많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도 예수를 믿었으나 회당에서 출회(出會)당할까 두려워하여 예수를 시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다(요 12:42-43).
예수님의 말씀대로, 어떤 이들이 예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부한다면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마 7:21-27). 믿음은 있지만 구원하는 믿음은 없을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빌립이 전한 말씀을 믿고 침례를 받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이 오기까지는 성령을 받지 못했다(행 8:12-17). 마술사 시몬은 침례를 받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는 후에 영적 능력과 축복들을 돈으로 살려고 했었다(행 8:18-19).
심지어 마귀들도 한 분 하나님을 믿는데 있어서(약 2:19) 어떤 사람들의 믿음, 그 이상이다. 그들은 믿을 뿐만 아니라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한다(마 8:29). 그러나 그들은 믿고 시인함에도 불구하고 구원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러한 각각의 경우들 속에 지적인 이해와 동의는 있으나 역시 예수님께 완전히 맡기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결여되어 있다. 구원하는 믿음은 순종과 불가분하게 연관되어 있다.
믿음과 순종
바울은 다른 어느 저자보다도 믿음에 의한 칭의(稱義)를 강조하였지만, 그러나 그는 또한 구원하는 믿음이 불가분하게 순종과 관련되어 있음을 강력히 주장하였다(롬 16:26). 하나님의 은혜는 '믿어 순종하게' 하신다(로마서 1:5). 그리스도는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위하여 바울을 통해 역사하셨다(롬 15:18). 누가는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가 "그 믿음에 복종하였다"고 기록했다(행 6:7). 믿음과 순종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은 것은 믿음이 없다는 증거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다(마 7:21). 오직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라야 구원을 얻을 것이다(마 7:24-27). 예수님은 또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요 14:23)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치 않는" 자들을 영원한 멸망으로 형벌을 주실 것이다(살후 1:7-10). 그리스도는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히 5:9). 베드로는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라고 말했다(벧전 4:17). 오직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 때만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케 된다. 진정한 신자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할 것이고 따라서 그에게 사랑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요일 5:1-3).
하나님께서 죽음의 천사를 보내어 애굽의 모든 집들로 가게 하셨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단순히 그들의 정신적 자세에 근거하여 저절로 보호하심을 입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의 문설주에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발라 그 피를 적용해야 했다(출 12장). 오직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을 통하여 그들의 믿음을 나타내었을 때만이 안전하였다.
오늘날에도 구원하는 믿음은 적극적인 순종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회개와 예수 이름의 물침례와 성령을 받는 그의 복음에 순종함으로 우리의 삶에 어린양의 피를 적용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되게 믿는 사람이라면 그 말씀에 순종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물침례를 가르치고 있으므로 성경을 믿는 사람은 침례를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선물을 약속하고 있으므로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이 선물을 바라고 구하여 받게 될 것이다.
믿음에 담겨 있는 의미는 사실 한 구절에 집중되어 있다. 예수는 주님이시다(고전 12:3). 그러므로 믿음으로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말하는 것은 또한 자신을 순종함으로 의탁하는 것이다. 사실을 믿는 것은 그 사실 속에 담겨 있는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오직 순종 속에서 인정된다. 바울에게는 바로 불순종이 믿음의 결여(缺如)이듯이, 순종은 믿음과 동일한 것이다. 디트리히 본훼퍼(Dietrich Bonhoeffe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직 믿는 자가 순종하고 오직 순종하는 자가 믿는다."
믿음과 행함
성경이 또 가르치는 것은 믿음이 선행(善行)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이다(딛 3:8).
믿음이 행하고 별개이거나, 혹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은 분리될 수 없다고 쓰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과 행함에 관한 야고보의 가르침이 서로 상반된다고 여긴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야고보서를 싫어하였고, 야고보서가 믿음에 의한 칭의(稱義)에 모순된다고 생각하였기에 심지어 야고보서가 성경에 포함되어야 하는 지조차 의문시하였다.
그러나 바울의 서신들과 야고보의 서신은 동등하게 하나님의 말씀의 일부분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자체로 모순되지 않는다. 바울과 야고보의 글들은 서로 보완하고 함께 조화되어 하나의 온전한 전체를 이룬다.
바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 우리의 행위로서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속(救贖)하셨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 특히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의식을 준수하는 것이 자체로서 죄를 깨끗케 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야고보는 구원을 포함하여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내려 온다"는 것을 깨달았다(약 1:17). 그는 구원하는 그러한 믿음은 필연적으로 행함을 낳으리라는 것을 지적했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믿음을 행함과 분리시켜 증명할 수 없다. 하나님이나 혹은 그 외의 어떤 사람이 우리의 믿음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반응을 통해서이다. 믿음은 단지 하나의 정신 상태가 아니라 생을 바꾸는 힘이다.
바울은 믿음에 의한 칭의(稱義)의 한 예로써 아브라함을 인용하였다(창 15:6; 롬 4:1-3). 야고보는 같은 인물을 예로 들며 믿음은 오직 행함으로 증명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아브라함이 행함이 없었다면 그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 그는 인간의 한계를 생각지 않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았으며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전적으로 확신하였다(롬 4:18-21). 이 말씀은 행함은 제쳐 놓은 정신적 동의를 묘사한다기 보다는 수많은 세월동안 그의 행동 속에서 그를 지지하는 믿음, 즉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고 완전히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의탁하도록 했던 믿음을 설명하고 있다.
로마서에는 믿음은 이에 수반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믿음을 의미한다. 야고보서에는 믿음은 행동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정신적 동의만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진실되지 못하며 전혀 살아있는 믿음이 아니다. 로마서에서 행위(행함)는 믿음과는 상관없이 행해지는 죽은 행위를 의미한다. 야고보서에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행하여질 수 있고, 믿음이 있음을 입증할 수 있을 산 행위(행함)를 의미한다. 로마서에는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하여 의롭다고 선언된 것'을 의미하며 야고보서에서는 '의로움이 밝혀진다'는 뜻이다.
바울과 야고보 모두는 구원의 믿음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삶이 변화되며 행함으로서 입증되어질 것이라는 것에 의견을 일치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바울은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다. 야고보는 구원하는 믿음은 행함을 낳고 오직 행함으로 증명되어질 수 있다고 가르쳤다. 행함이 개인의 믿음과 동반되지 않는다면 그의 믿음에는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과 행함 간의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훌륭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장의 주된 목적은 믿음이 얼마나 필수적인지 그리고 믿음은 무엇을 낳게 될 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구약의 많은 위인(偉人)들의 이름을 나열하고 있는데 '믿음으로' 행했던 그들의 행동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 말씀은, 믿음은 항상 행함을 낳게 될 것이며 행함으로 믿음이 보여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저자가 어떤 이의 믿음을 설명할 때마다 매번 믿음에서 연유된 그들의 행동들을 열거하고 있다. 우리는 분명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구원하는 믿음은 행동하는 산 믿음이다.
지속적인 믿음
구원하는 믿음은 단지 일시적인 조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지속적인 관계이다. 우리는 단지 한 순간에 가지는 믿음만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오히려 성경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이다"(롬 1:17; 갈 3:11; 합2:4) 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영접한 것 같이 지속적으로 그를 믿어야 한다. 구원은 단지 과거의 경험만이 아니다. 그것은 영생으로 인도하는 현재의 관계이다. 우리가 결국에 가서 구원을 받기 위하여 매일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믿음은 점진적인 것이다. 믿음은 우리를 더욱 더 깊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인도한다.
믿음의 대상
믿음의 대상이 없는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다. 믿음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인간의 믿음 그 자체가 가치가 있다면 믿음에 의한 칭의(稱義)는 단순히 자신 스스로를 구원하는 인간의 또다른 형태일 것이다.
믿음의 가치는 전적으로 믿음의 대상에 달려 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분에 의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지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그 조건만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바울이 아브라함을 믿음에 의한 칭의의 한 예로 들었을 때, 그는 아브라함이 당신의 언약을 성취하시는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을 지적했다(롬 4:16-17). 이방 종교인들도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는 있겠지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다. 구원은 오직 예수를 통하여 오기 때문에 그를 믿는 것이 극히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그의 말씀도 믿어야 함을 뜻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확언하는 어떤 종교 조직들에 대하여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의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복음에 기초하지 않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다. 우리는 영으로 뿐만 아니라 진리로서 하나님께 예배해야 한다(요 4:24).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7:38).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에 일치하여 믿어야 한다. 예수와 그의 말씀에 대한 신뢰와 순종을 제외한 사람의 정신적인 믿음에는 구원의 능력이 없다.
믿음과 회개
믿음과 회개는 구원 안에서 함께 작용한다. 예수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전파하셨다(막 1:15). 사람이 회개하기 위해서는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한다. 죄는 잘못된 것이며, 회개는 가능하고 필수적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아무도 회개하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을 받을 것이며, 어느 곳에 있는 사람이든지 회개하여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다(눅 13:3; 행17:30). 그래서 분명히 하나님을 말씀을 믿는 믿음은 회개에 이르게 할 것이다.
믿음을 어떤 한 시점일 뿐만 아니라 연속적인 과정으로 본다면 믿음은 회개에 선행하며 또한 믿음 후에 따라 온다. 이 관점을 성경이 지지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비록 그 순간에 구원을 이룬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 들을 때부터 시작될 수 있다. 우리는 개인이 구원에 앞서 어느 정도의 믿음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성경적인 예들을 살펴 보았다. 사람이 믿기 시작하는 처음 그 순간에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히려 구원은 믿음이 성숙해지므로 믿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통제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와 복음에 적극적인 응답을 하도록 하여 회개와 물침례와 성령의 선물을 구하고 받음으로 성경 말씀을 순종하도록 한다.
그래서 믿는 첫 순간부터 회개가 따르게 되지만 회개는 구원하는 믿음이 완전히 표현되기(거듭남의 체험) 전에 나타나게 된다. 아마 회개를 복음에 대하여 갖는 첫번째 '믿음의 반응'으로 말하는 것이 가장 좋을 듯 하다. 왜냐하면 회개는 믿음의 생활을 시작하는 때부터 나타나며 회개 자체가 믿음의 내적 행동이기 때문이다.
믿음과 물침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또한 물침례를 받도록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막 16:16)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분명히 믿음이 침례에 이르게 하리라는 것을 가르쳤고 초대 교회의 역사가 이 진리를 확인해 주고 있다. 오순절날 베드로가 설교한 후에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았다"(행 2:41). 사마리아 사람들이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았다"(행 8:12). 빌립보 간수는 바울이 그에게 믿으라고 권고한 바로 그 시간에 믿고 세례를 받았다(행 16:31-34). 바울이 고린도에서 말씀을 전파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믿고 세례를 받았다"(행 18:8).
다른 여러 경우들에서도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받아들였을 때(행 8:36; 9:18; 10:47-48; 16:14-15; 19:5)는 언제나 침례를 받았다. 우리는 물침례가 믿음의 행동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반응- 이라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믿는 진정한 믿음은 믿는 자로 하여금 물침례에 순종하도록 할 것이다.
믿음과 성령
믿음은 또한 성령의 선물을 받도록 이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7:38). 베드로는 성령의 선물, 혹은 성령침례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고넬료 가족의 경험이 오순절날 성령침례와 동일함을 인정했고 다음과 같이 물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행 11:15-17). 따라서 베드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성령으로 침례 받는 것과 동일시했다.
바울 또는 모든 믿는 자는 성령을 받으리라는 것을 기대했다. 그가 에베소에 있는 침례요한의 제자들을 만났을 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라고 질문했다(행 19:2).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성령을 받는다고 좀 더 깊이있게 가르쳤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 3:14).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믿음이 결국 성령을 받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즉, 참으로 믿는 자는 성령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성령의 선물을 주실 때 비로소 그의 믿음이 진실하며 완전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회개와 물침례와 행위
회개와 물침례는 행위로 분류될 수 있는가? 그것들은 사람이 그의 구원을 얻는데 일조(一助)하고자 행하는 일들의 의미로서의 행위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이다. 구원하는 믿음은 필연적으로 그 자체가 회개와 물침례와 성령을 받는 것을 통하여 표현된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죄로부터 돌이킬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나 하나님은 그를 회개로 이끄시고 회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하나님은 인간이 회개하도록 역사하셔서 그의 마음과 방향이 바뀌도록 하신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사람이 침례를 받을 때 죄를 사하신다.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그의 역사 가운데 있는 믿음이 없다면 침례는 무의미한 종교 의식에 불과하다. 결국, 성령을 받는 것은 분명히 인간 편에서 행하는 행위가 아니다. 성령은 개인이 믿음으로 받게 되는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다.
이 모든 것 가운데서 사람의 역할은 단순히 복음을 믿고 회개를 하고 물침례에 순종하며 하나님이 성령으로 채우시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구원하는 믿음에 필연적으로 포함되는 반응, 위임, 의지, 순종 등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인간의 입장에서의 이 '믿음의 반응'은 구원을 얻거나 그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을 받기 위한 필수적인 반응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기초 위에서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구원을 주시지만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나타내는 자들만이 구원을 받는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과 순종에 의해>구원의 역사를 수행하시도록 허용하든지 <불신과 불순종으로>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거절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부르시고, 그 사람을 하나님 자신에게로 이끄시며, 사람의 마음과 방향을 바꾸시며(회개), 그의 죄들을 씻으시고(물침례시), 성령으로 그에게 침례를 베푸시고, 그를 하나님 자신의 은혜 안에 두시고, 거룩한 생활을 위하여 능력을 부여하신다. 하나님 편에서의 이러한 행동은 현 세대 속에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구성하고 있다.
시인, 믿음, 그리고 구원
구원하는 믿음에 관한 이러한 결론이 로마서 10:8-10의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라고 하신 말씀과 모순되는가?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을 사람이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을 정신적으로 동의하고 입술로 그를 주라고 시인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 해석은 구원하는 믿음에는 전유(專有, 적용)와 순종이 포함되어 있다는 진리와 모순된다.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하나님을 위해 살고 있지도 않는 많은 사람들도 구원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 계신 것을 알며 입술로 그를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믿기 때문이다(마 8:29; 약 2:19). 따라서 로마서 10:8-10에 대해 그러한 표면적 이해는 부적당하다.
이 말씀은 로마서 10장을 계속해서 읽어 나갈 때 그 의미가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13절에 말하기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한다. 이것이 예수의 이름을 말로서 표현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인가? 분명히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의 이름은 단지 마술적 주문이 되어버릴 것이다. 무엇보다도, 16절은 순종이 결여된 것은 곧 믿음이 결여된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믿음의 구두적 시인에도 불구하고 그가 복음을 순종치 아니한다면 그에게 구원의 믿음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서 10:8-10절의 바른 해석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는 바울이 이미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의 독자들은 이미 중생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는 거듭남에 대해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구원의 기초는 여전히 그리스도와 복음에 관한 믿음에 있으며,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공개적으로 이 믿음을 시인하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신명기 30:14절을 읽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구절을 바울이 로마서 10:8절에 인용했기 때문이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내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결국 이 구절은 하나님을 시인하고 믿는 것에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음을 증명한다.
셋째로, "네 입으로 주 예수를 시인하는 것'은 그가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진실되게 구두(口頭)로 고백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고백이 진실된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주님이신 예수께 우리의 삶을 드리고 그에게 순종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언제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물침례시 그의 이름을 부를 때(행 22:16)와 성령침례시 방언을 말할 때(행 2:4) 입으로 시인하게 된다. 결국, 성령에 의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를 주로 시인할 수 없다(고전 12:3).
이 구절의 완전한 의미로 본다면 성령을 받고 그 성령의 능력으로 살기까지는 아무도 진정으로 예수를 그의 생명의 주로서 시인할 수 없다.
넷째,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에 믿는다는 것은 참된 믿음을 의미하는데, 이 믿음은 의지(reliance)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유효하게 하며(롬 4:25)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도록 하기 위해서는(롬 5:10; 6:4-5; 8:9-11) 부활을 의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참된 믿음은 우리의 삶에 그의 구속을 적용하며 그의 성령을 받도록 우리를 이끌어 줄 것이다.
주의 이름을 부름
로마서 10:13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할 때, 그것은 예수 이름의 단순한 입술의 고백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믿음 자체가 필요 없을 것이다. 구원하는 믿음은 입으로 시인하는 행위만으로는 충분치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입으로 시인하는 것 그 이상의 것이다(마 7:21). 분명히 로마서 10:13은 예수를 믿는 사람의 진실한 마음의 부르짖음을 나타내고 있다. 구두적 시인은 그러한 과정 중의 한 단계이지만 산 믿음과 순종이 이 고백을 유효하게 하기 위해 요구된다.
로마서 10:13에서의 주요 논점은 구원을 위한 식문(式文)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임을 가르치는 것이다. 강조하는 것은 '누구든지'이다. 이 인용 구절은 원래 요엘서 2:32절에 나타나 있는데 이 구절은 말세에 모든 육쳉 성령의 부어주심(욜 2:28-29)과 말세의 심판(30-31절)에 관한 요엘의 예언에 이어져 있다. 요엘서 2:32절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은 이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베드로는 이 예언을 오순절 날에 일어났던 성령의 부어주심에 적용했다(행 2:21). 더우기 아나니아는 바울(로마서의 저자)에게 물침례시에 주의 이름을 부르라고 명령했다(행 22:16).
요약해서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름'에 관해 두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먼저 그것은 '간단한 믿음론(easy believism)'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은 그를 찾고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값없이 주어질 수 있다는 것과 둘째로, 진실로 주를 부른다면 그는 하나님의 성령을 받으며 침례시 그의 이름을 부를 것이라는 점이다.
구원을 위한 한 가지 계획
우리는 하나님께서 항상 하나의 계획을 따라, 즉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기초한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인류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는다. 하나님은 전 시대에 걸쳐 여러가지 방법으로 인간을 다루어 오셨지만 궁극적으로 그분이 다루신 모든 방법은 이 하나의 계획에 기초를 두고 있다. 비록 우리가 이 시대를 은혜 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시대에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지만(요 1:17), 모든 시대에 있어서 구원은 인간 행위의 산물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이었다. 인간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었다면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우리는 이 시대를 믿음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갈 3:23-25), 그러나 하나님은 어느 시대에나 항상 믿음을 요구해 오셨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갈 3:6). 설령 어떤 유대인들은 그들의 구원이 율법의 행위에 있다고 생각했을지라도 믿음이 없이 율법을 준수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마 23:23; 롬 2:29; 4:11-16; 9:30-33). 물론 믿음은 항상 순종을 포함한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일부로서 아브라함은 그의 본토를 떠나라는 명령을 순종했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으며 하나님께 받은 그의 아들 이삭을 다시 바쳤다(롬 4:16-22; 히 11:8-10; 17-18; 약 2:20-24).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일부로서 유대인들은 피의 희생 제도(히 11:28-29)를 포함하여 모세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법을 준수했다. 믿음의 일부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한다. 이 모든 순종은 과거에도 필수적이었고 오늘날도 필수적이지만 모든 시대에 있어서 구원은 행위가 아닌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결국 모든 시대에 있어서 구원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기초해 왔다. 그가 일찌기 죄를 사할 수 있었던 유일한 희생제물이셨다(히 9:22; 10:1-18). 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든 시대의 죄를 구속했다.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미래의 구속 계획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그들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희생 제도에 순종함으로써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러한 믿음을 나타내었다. 신약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과거의 구속 계획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함으로 그 믿음을 표현한다. 할례와 피의 희생과 같은 그러한 구약의 순종의 요구들은 믿음에 의한 칭의(稱義)의 원리와 양립했으며, 회개와 물침례와 같은 그러한 신약의 순종의 요구들도 또한 믿음에 의한 칭의(稱義)와 양립한다.
구원하는 믿음
우리 시대에 있어서 구원하는 믿음의 정의는 무엇인가? 구원하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수단으로 받아들이며 복음이 요구하는 것을 순종함으로 우리의 삶에 그 복음을 전유(專有, 적용)하는 것이다. 구원하는 믿음은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당하신 그의 희생적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의 말씀과 교훈들에 근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이다(고전 15:1-4). 우리는 회개와 예수 이름의 물침례와 성령의 선물을 받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하는 역사와 연합한다- 우리의 삶에 그 복음을 적용한다(롬 6:3-5).
은혜와 믿음의 비유
“내일 아침 열 시에 은행에서 나를 찾아라. 나를 만나면 내가 네게 1억을 주겠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응답하여 회개를 하고 물침례로 죄사함을 받고 성령침례를 받아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으면 우리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그 책임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있게 될 것이다.
은혜, 믿음, 그리고 거듭남
은혜와 믿음의 교리들은 거듭남의 필요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경험하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은혜의 교리는 거듭남이 우리가 돈으로 값을 주고 사지도 못하며 받을 자격도 없는데도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값없이 주신 선물임을 가르친다. 믿음의 교리는 우리가 전적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만 의지함으로 중생을 얻는다는 것을 가르친다.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에게 굴복하며, 그가 우리 안에서 구원의 역사를 행하시도록 허용하는 수단이다.
하나님을 믿는 진정한 믿음은 언제나 그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포함한다. 우리가 예수를 진정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회개하고 침례를 받으라는 그의 명령에 순종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의 대속적 죽음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물침례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실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우리는 단지 침례를 받을 대 몸에 물만 적시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성경에 이르는 대로 예수를 믿는다면, 그는 우리에게 그의 성령으로 채워 주실 것이다. 이렇게 한 후에 믿음은, 거듭난 신자가 자기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순종하며 거룩한 사람을 사는 것을 포함하는, 그리스도와의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시켜 줄 것이다. 요약컨대, 거듭남의 경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얻게 되는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