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인 거듭남- 제6장 물침례
제6장 물침례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것이다. (막16:16, 새번역)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용서를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행2:38, 새번역)
물침례란 무엇인가?
기독교의 물침례는 죄를 회개한 사람이 죄사함을 얻기 위하여 예수 이름으로 물에 잠기는 한 의식(儀式)이다.
요한의 침례
하나님께서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보내신 침례 요한은 죄사함을 위한 침례를 전파하라고 베풀었다(막 1:2-4; 눅 3:3-4). 그는 이스라엘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하여 침례를 베풀었다(요 1:31). 그가 베푼 침례는 그리스도의 전하실 말씀과 그리스도인의 받을 침례에 관해 유대인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마련된 일시적인 것이었다. 요한은 유대인의 율법을 폐하려고 하지 않았고 그것을 보충해 주었다. 그리고 그를 청종한 회심자들이 율법에서 이르는 바와 같이 도덕적으로 바른 회개의 생활을 하며 성령으로 그들에게 침례를 베푸실 분을 기다리기를 바랐다. 사실 요한의 제자들은 오순절날 이후 예수의 이름으로 재침례(再浸禮)를 받았다(행 19:1-5).
요한의 침례는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회개의 침례였다. 그는 외형적으로는 침례의 식문(式文)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나는 너히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라고 말했다(마 3:11). 그의 침례는 회개를 촉구하는 것임과 동시에 회개했음을 외적으로 나타내는 것이었다. 회심자들은 침례를 받을 때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자복했다(마 3:6; 막 1:5).
요한의 침례가 '죄사함을 위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절대적인 죄사함도 줄 수 없었고 미래의 죄도 처리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모든 죄사함이라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속죄를 위한 죽음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의 침례
예수님 자신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셨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히 4:15), 우리는 그가 회개함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든가 죄사함 받기를 기대하고 침례를 받은 것이 아님을 안다. 대신 그는 자신이 성령으로 침례를 베푸는 자이며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아이신 것을 이스라엘에게 나타내시기 위하여 침례를 받으셨다(요 1:31-34). 그는 '모든 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순순히 침례를 받으셨다(마 3:15).
(1)그리스도는 자신을 공개적으로 알리며 그의 공생애(公生涯)를 새롭게 시작하기 위하여 침례를 받으셨다.
(2)그리스도는 요한의 침례와 회개, 물침례, 성령침례의 메시지를 확증하였다.
(3)그리스도는 우리가 따를 본을 제시해 주셨다.
(4)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의를 이루시기 위해서 침례를 받으셨기 때문에 침례를 단순한 의식이나 종교 의식으로만 여기시지 않았다.
제자들이 행한 초기의 침례
그리스도의 초기 공생애 동안에 그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권위 하에서 많은 회심자들에게 침례를 주었다(요 3:22; 4:1-3). 어떤 저자들은 이것이 예수 이름으로 베푼 침례였다고 말하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근본적으로 요한의 침례의 연속이었다고 믿는다.
(1)이 침례는 요한의 침례와 함께 언급되어진다.
(2)제자들은 아직 복음의 메시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3)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의 회개의 메시지와 장차 도래할 천국 및 앞으로 주어질 성령침례를 전파하셨다.
(4)기독교의 침례는 예수님의 장사와 연합하는 것인데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 전에 그것이 어떤 형태로 존재했겠는가 하는 것은 의심스럽다.
그리스도의 명령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하시기 직전에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모든 세계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고 제자를 삼고 그들에게 침례를 주라고 명령하셨다(마 28:19). 그는 모든 믿는 사람들이 침례 받기를 원하셨고,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셨다(막 16:16).
초기 기독교의 침례
사도행전의 교회는 침례에 관하여 주님의 기대와 명령을 잘 이행하였다. 교회의 첫번째 설교에서 베드로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고 명하였다(행 2:38). 사마리아 사람들이 빌립의 전한 말씀을 믿었을 때 그들도 역시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다(행 8:12, 16). 에디오피아 내시, 다소의 사울, 고넬료, 두아디라의 루디아, 빌립보의 간수, 고린도 사람들, 에베소에 있었던 요한의 제자들, 이들 모두가 전한 복음을 듣고 믿었을 때 침례를 받았다(행 8:35-38; 9:18; 10:47-48; 16:15; 16:33; 18:8; 19:5).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이 성령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였다(행 10:47-48).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명하여 주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고 하였다(행 22:16).
침례 방식: 침수세례
침례는 문자적인 의미대로 물을 사용하는 것이다(요 3:23; 행 8:36; 10:47-48). baptism(침례)이란 말은 '잠기다'라는 의미를 가진 bapto(밥토)라는 헬라어에서 온 말이다. 바인(W. E. Vine)은 침례를 '물에 잠기었다가 나오는 과정'으로 정의한다. 물을 뿌린다는 뜻을 가리키는 단어가 있었지만 하나님은 침수세례(浸水洗禮)를 가리키는 단어를 선택하셨다.
침수세례(immersion)는 성경이 기록하는 유일한 침례 방식이다. 요한이 요단강과(막 1:5, 9)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준 이유는 거기 물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요 3:23). 요한은 예수님에게 침수세례를 주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마 3:16).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갈라짐과… "(막 1:10).
빌립은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침수세례를 베풀었다: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둘이 물에서 올라갈 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행 8:38-39).
바울은 침례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롬 6:4; 골 2:12). 이 구절들은 침례가 침수세례에 의한 것임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읽은 사람이 이것을 이해하도록 해 주고 있다. 어느 누구도 몸 위에 흙을 조금 뿌리거나 부어서는 매장되지 않고 완전히 땅 속에 묻혀야 장사 되는 것이다.
성경이 쓰여진 시대 이후 물침례의 다른 방식이 생겨났는데 바로 물을 뿌리는 것(살수, 撒水)과 붓는 것(관수, 灌水)이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러한 방식들이 결코 나타나 있지 않다. 몇몇 구약의 정결의식에서는 물을 뿌리는 것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것이 기독교의 침례를 예시해 준다고 하더라도 정확한 침례의 방식을 가리키고 있다고는 기대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뿌리는 것과 붓는 것은 편리함을 위해 생겨났는데 (1)유아세례, (2)몇몇 삼위일체론자들에 의해 행해진 삼위일체 세례, (3)(자신의 인생을 온통 죄를 짓고 살다가 그래도 구원만은 받으려는 계산으로)임종(臨終)때까지 세례를 연기하는 행위 등 3가지의 비성경적 세례 의식들이 출현한 이후 침수세례는 유달리 불편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침례 방식이 중요한가?
(1)침례는 성경적인 명령이며 우리는 성경적인 방식을 따라야 한다.
(2)예수님은 우리가 따라야 할 본으로써 침례를 받으셔서 침수세례를 따르셨는데 더더욱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침례가 중요한 것이라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행했던 그 방법으로 행하는 것도 중요하다.
(3)어떤 다른 세례 방식도 비성경적 전통(傳統)에서 유래된 것이며 전통은 성경적 가르침을 대신한 빈약한 대용품이었다.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났을 때 예수님은 아주 강하게 전통을 비판하셨다. 그는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막 7:8).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 15:6)고 하셨다.
(4)물을 뿌리는 약식세례가 가지는 잇점은 단지 편리하다는 것인데 그것은 또한 성경을 따르지 않는데 대한 어리숙한 변명에 불과하다.
(5)침수세례는 하나님께 복종하며 그분의 말씀을 경외(敬畏)하는 것을 증명해 준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해 진실한 경외감을 가지고 있다면 성경적 방식에 만족해 할 것이며 그것을 무시하거나 거절하지 않고 순종하여야 할 것이다.
(6)우리는 오직 침수세례에 의해서만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된다는 침례의 의미를 지킬 수 있다.
침례를 받을 때 죄사함을 얻는다
요한은 '죄사함을 받게 하는 세례'를 전파하며(막 1:4; 눅 3:3) 하나님께서 기독교적인 물침례로써 죄를 사하시는 때를 증거하였다. 침례를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로부터 구하시며, 우리 죄를 씻으시고, 지우셔서 말소시키신다.
죄를 지은 죄인들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행 2:37)라고 질문했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대답했을 때, 그들에게 원하면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을 설명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죄사함을 받기 위하여 무엇이 필요한지 설명한 것이었다. 그는 "회개하라 그리고 너희는 이미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침례를 받으라"는 뜻으로 말하지 않았다.
침례를 반복해서 줄 수 있는가?
성경은 '침례의 반복'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물과 그 의식(儀式) 자체가 구원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각하는 믿음과 회개가 따르지 않는다면 영적으로 전혀 무가치하다. 침례는 단지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제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침례없이 죄를 사하는 것을 선택하실 수 있었겠지만 그러나 신약 교회에서 하나님은 침례의 순간에 죄를 사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침례를 받을 때의 우리의 행위 자체가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을 얻거나 주지 못한다. 하나님 한 분만이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근거하여 죄를 사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물침례를 받는데 순종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하는 믿음을 받으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신다.
침례-거듭남의 일부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요 3:5). 우리는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구원을 받는다(딛 3:5). 이 구절들은 물침례를 중생의 과정 속에 놓고 있다.
믿고 침례를 받으면 구원을 얻는다
예수님은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니"라고 말씀하셨다(막 16:16). 예수님은 구원의 약속 가운데 믿음과 침례를 함께 연결하면서 둘 다 필수적임을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믿지만' 침례는 거부하는 사람의 상황을 논하시지 않으셨는데, 어떤 사람이 믿지 않는다면 침례를 받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며 침례를 받아도 믿음없이 받는 침례는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될 것임을 예수님은 아셨다. 그는 진정한 신자는 침례를 받으리라는 것을 아셨다.
죄 씻음
사도행전 22:16에서는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이름을 불러 침례를 받을 때 죄를 씻어 주신다.
구원의 일부
베드로는 노아의 날에 '여덟 명이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을 상기했다(벧전 3:20). 그는 계속해서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벧전 3:21).
실제로 홍수 때 노아 시대의 사람들을 멸망시킨 그 물이 반대로 방주 안에 있는 8명의 노아 가족에게는 구원의 도구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들은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는데 물은 오늘날 침례의 역할을 상징하는 것이다. 침례는 우리에게 구원의 수단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우리 육체에서 더러운 것을 씻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을 우리에게 주기 때문이다. 침례를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죄를 씻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침례를 통해 죄책감 없는 양심을 얻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침례의 물 그 자체가 구원하는 효능을 지녔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홍수의 물만으로 8명의 노아 가족을 구원한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물만으로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구원은 방주 안에서 찾을 수 있었고 오직 방주로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사람만이 구원을 받았다. 이와 같이 물침례를 받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자신을 안전한 장소에 있게 한다. 바꾸어 말하면 침례는 홍수 때의 물과 같이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는 매개체에 불과하나 예수님 자신은 구원의 방주인 것이다. 분명 침례를 받으므로 우리가 구원을 얻지만 단순히 외적 의식(儀式)에 의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외적이며 가시적 의식은 내적이며 영적인 은혜와 구별하여서는 구원을 얻게 하지 못한다. 전자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제정된 외적 표식이기에 필수적이다. 하지만 후자가 결여되어서는 구원을 얻게 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됨
바울은 침례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롬 6:3-4; 골 2:12). 옛 사람은 침례시에 장사된다. 옛 사람은 고쳐질 수 없는 생활방식이며, 과거 지의 기록부이며, 죄의 주관자이다. 바울 서신들에 기록된 침례에 관한 이 구절과 다른 구절들을 보면 그가 침례를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선택의 자유가 있는 부수물로 여기지 않았으며 '침례받지 않은 신자'의 경우란 고려해 보지도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음
바울은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는다고 가르쳤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는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갈 3:27). 우리는 이 구절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하게 하는 하나의 물과 성령의 침례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영적 할례(割禮)
바울은 침례를 구약의 할례에 비유했다. “그분 안에서 여러분도 손으로 행하지 않은 할례, 곧 육신의 몸을 벗어버리는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한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또 여러분은 죄를 지은 것과 육신이 할례를 받지 않은 것 때문에 죽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골2:11-13, 새번역)
이 구절은 물과 성령의 침례를 언급하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옛 사람이 장사되고 새 사람이 부활하는 것, 두 가지를 포함하고 있다. 물침례는 죄로부터 구별되며 죄성(罪性)의 지배를 제거하고 죄의 용서를 가져오는 영적 할례이다. 성령침례는 새로운 영적 생명을 부여하여 할례의 과정을 완성한다.
구약의 할례는 유대인의 남성들이 유대 교의 일원이 되며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의 상속인이 되게 하는 수단이었다(창 17:10, 14). 하나님께 응하는 믿음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순종 없이 할례만으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롬 2:25; 4:12). 그러나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문자 그대로 할례를 행할 것을 명령하셨다(출 4:24-26; 수 5:2-9).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는 유월절 만찬에 참여할 수 없었다(출 12:43-44). 이와 같이 침례를 받을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의 옛 죄를 없이 하시고 그를 하나님의 백성에 연합시키신다. 할례를 받지 않은 이스라엘 남성은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이 되지 못했으며 죽음의 형벌에 처해져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 참여할 수 없었다.
모형론 안에서의 침례
(1)홍해가 갈라짐.
(2)율법 수여시 이스라엘 백성의 물로 씻음과 뿌림.
(3)회막 뜰에 있는 물두멍.
(4)제사장 위임식 때 제사장을 물로 씻김.
(5)짐승의 희생제물을 물로 씻음.
(6)고침을 받은 문둥병자를 물로 씻기고 물을 뿌림.
(7)부정한 자의 씻는 의식.
(8)전쟁에서 노획한 전리품과 병사의 옷을 물로 씻음.
(9)노아의 홍수.
(10)할례.
(11)여호와 앞에서 봉사하는 레위인들은 정결하게 하는 물을 뿌림으로 봉헌되었다(민 8:7).
(12)속죄일에 대제사장은 두 차례 물로 씻어야 했다(레 16:4; 24).
(13)문둥병자 나아만은 엘리사의 명령에 순종하여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담근 후에 고침을 받았다(왕하 5:10-14).
이것들은 죄를 깨끗케 하는 침례의 역할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사장은 회막에 들어가기 전에 물두멍에서 씻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들을 죽이신다. 하나님은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라고 명하셨다(출 30:20). 이것은 '부정을 깨끗케 하는 물… 속죄제'였으며(민 19:9), 또는 '죄에서 정결케 되기 위한… 깨끗케 하는 물'(NIV)이었다. 만일 부정한 사람이 이러한 규례대로 씻기를 거부하면 그는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것이다(레 17:16; 민 19:13; 민 19:20).
그리고 피가 물이라는 도구에 의해 적용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물침례 가운데 그리스도의 피가 죄사함에 적용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시내산에서 율법이 수여된 후 모세는 피와 물을 섞어 백성들에게 뿌렸다(히 9:19). 전에 문둥병자였던 사람을 정결케 할 때 제사장은 새의 피를 물과 섞어 그 사람에게 뿌렸다(레 14:1-7). 부정한 사람을 위한 정결케 하는 물을 준비하기 위하여 제사장은 붉은 암송아지를 죽여 피가 든 채로 희생물을 불살랐다(민 19:1-5). 재는 부정을 정결케 하는 매개물로써 피에 상당하였으며(히 9:13) 부정을 깨끗케 하는 물을 만들기 위하여 물과 섞었다(민 19:9).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물은 대속의 피를 적용하는 도구였다.
물침례는 공중 앞에서의 시인(是認)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침례를 받을 때 죄가 사해진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침례는 단지 공중 앞에서 믿음을 시인하는 것에 불과하거나 가시적인 교회에 입교함을 공식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의 여러 말씀들은 그것이 근본적으로 공식적 시인이나 이미 얻은 죄사함에 대한 선언이 아니라는 것을 가리킨다. 침례가 단지 즉각적으로 필요치 않은 공식적인 의식에 불과했다면 분명 그들은 바울과 실라가 어느 정도 상처가 회복될 때까지 기다렸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날이 밝을 때까지는 기다렸을 것이다. 요한의 제자들은 한 때 이미 침례를 받았었고 공중 앞에서 시인을 했었다. 그러나 침례는 너무나 중한 것이기에 바울은 그들에게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다시 베풀었다(행 19:1-5).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은 이미 성령을 받아 모든 사람들 앞에 공공연한 증거로써 방언을 말하였지만 베드로는 여전히 물침례를 베풀라고 명하였다(행 10:47-48).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침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어떤 이들은 침례의 중요성을 격감시키고자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침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고전 1:17)라고 말한 바울의 진술을 인용한다. 바로 이 구절에 앞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당을 지어 어떤 이들은 바울을 따르라고 주장하고, 어떤 이들은 아볼로를, 어떤 이들은 게바를,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고전 1:11-13). 바울은 그들 중 몇 명에게만 개인적으로 침례를 베풀었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라는 특별한 부르심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에게는 침례를 베푸는 것보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오는 것이지 위대한 지도자들을 통하여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침례를 베풀었던 인물들을 바라보는 것 대신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을 바라볼 필요가 있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14-17절 가운데 침례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그가 의식 자체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한 것이 아니고 침례를 베푼 사람의 신분이 중요치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고린도 교회의 모든 신자들이 침례를 받았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바로 잡으려고 한 노력은 복음의 일부인 침례의 중요성을 결코 격감하지 않았으며 바울은 다른 여러 말씀들 가운데서 침례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침례 안에 있는 인간의 요소
어떤 사람들은 침례가 인간의 행위에 의해 얻는 구원을 의미하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것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침례가 믿음의 행위임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회개한 신자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선택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영적인 역사를 수행하시기 전에 사람 편에서 가시적인 믿음의 반응을 자주 요구하신다. 구약의 할례의 요구, 피의 희생 제사, 정결 의식 등은 믿음에 의한 칭의와 모순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시기 전에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기를 요구하셨다(요 2:7).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죽음에서 일으키시기 전에 구경하는 자들로 하여금 돌을 굴려 놓으라고 요구하셨다(요 11:39). 그는 그러한 도움 없이도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었겠지만 그러나 믿음과 순종을 나타낼 것을 요구하셨다.
어떤 한 사람이 다른 이에게 침례를 베푼다고 해서 사람이 사람을 구원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람이 죄를 사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복음을 전할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구원의 메시지를 다른 이들에게 가져다 주기 위하여 인간을 사용하신다.
우리가 그것은 '행위'이니까 침례 받으라는 명령을 무시할 수 있다면 회개하라는 명령 또한 무시할 수 있다. 이것은 사람이 회개하지 않고서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견해를 낳게 한다.
용서(Forgiveness)와 사함(Remission)
어떤 사람들은 용서와 죄사함이 명확히 구별되는 두 가지 사건으로써 전자는 회개시에 이루어지며 후자는 침례시에 주어진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영어 성경에서도 용서하다와 사하다가 자주 서로 바뀌어 사용된다. 더우기 중요한 것은 헬라어에서는 용서와 사함 사이에 구별이 없다는 점이다. aphesis(아페시스)라는 하나의 헬라어가 흠정역 성경(KJV)에서 때로는 '용서'(행 5:31)로, 때로는 '사함'(행 2:38)으로 번역되고 있다.
구약은 용서를 대속적인 희생으로 생각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했을 뿐 아니라 용서를 얻기 위하여 피를 흘리는 희생제물도 드려야 했었다. 레 4:13-35; 5:7-18; 6:1-7; 19:22, 민 15:22-28, 신 21:1-8.
다른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회개하면 용서해 주시겠다고 언약하셨고(대하 7:14; 렘 36:3) 그의 백성은 여러번 용서를 구했었다(시 25:18; 단 9:19; 암 7:2). 그러나 어디에도 위선됨이 없이 진실하게 드려지는 피의 희생 제사가 필요치 않다고 하는 구절은 없다. 우리는 회개한 자의 부르짖음은 어제든지 성전의 희생제물과 연결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히브리서 9:22은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진술한다. 비록 짐승의 희생제물 그 자체가 용서를 주지 못했지만 그것들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이었다.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희생 제사의 계획에 순종하므로 자신들의 믿음을 입증하였다.
신약에서는 두 사람이 분명히 물침례를 받지 않고서도 용서를 받았다. -중풍병자와 그리스도의 발을 씻었던 여인(마 9:2-6; 눅 7:47-49)- 두 경우는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동안에 발생했었는데 그 때는 아직 신약 교회가 세워지기 전이었고 기독교적인 침례가 있기 전이었다. 심지어 십자가상에서 회개한 강도도 그의 대제사장이시며 희생제물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옛 언약 아래서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신약의 교회에서 우리는 회개하고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받음으로 죄를 온전히 용서 받는데, 용서는 예수님의 보혈에 의해 가능해지며 그 효력을 나타낸다.
믿음은 침례시 필수적이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진실로 믿게 될 때에 침례를 받게 된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침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으며 침례도 예외는 아니다(히 11:6). 예수 이름으로 행하는 침례는 그것을 받을 자가 실질적으로 예수님과 그의 이름에 의해 나타나는 능력을 믿지 않는다면 아무런 효력이 없다(행 10:43).
회개와 침례는 모두 필수적이다
사도행전 2:38과 성경의 다른 구절들에 따르면 용서 내지 죄사함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 성경은 회개와 물침례 두 가지를 취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회개시에 현재의 죄의 결과를 처리하시고 침례시 영원한 결과를 처리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회개는 용서함을 받는데 지극히 중대한 역할을 하지만 우리가 회개만으로 온전한 용서를 받는다고 말하기보다는 회개하고 물침례를 함께 받고 난 후에 용서함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성경적이다.
회개는 침례에 앞서 일어나야 한다. 요한은 먼저 회개를 전파했고 그의 회심자들은 침례를 받을 때 하나님께 자신들의 죄를 자백했다(마 3:6; 막1:5). 사라들이 침례를 받으러 왔을 때 요한은 그들이 먼저 회개하고 회개의 증거를 보여주기를 요구했다(마 3:8; 눅3:8). 침례는 과거의 죄를 장사지내는 것이지만 이 장사가 의미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회개함으로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침례를 받을 때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죄를 회개해야 한다.
먼저 회개하지 않고 받은 침례
성경은 회개가 침례에 선행해야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사역자는 침례를 받으려는 후보자에게 신중하게 회개를 설명해 줘야 한다. 사역자는 만일 침례 받을 자가 회개하지 않았음을 밝힌다면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침례 주기를 거절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사역자는 그에게 높은 영적 성숙의 수준을 요구할 수는 없다. 그것은 시간을 필요로 하고 발전을 위한 가르침을 필요로 한다. 궁극적으로 각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 대답해야 하며 그래서 사역자는 일반적으로 회개에 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 회개했다고 말하는 진실한 고백을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사역자가 침례 받을 자에게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지 여부를 질문하는 것은 성경적이다.
사람이 침례를 받고 난 후에 그때까지도 아직 어떤 죄들을 회개하지 않았다고 자백할 경우에 성경은 특별히 어떻게 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 한 가지 선택은 그에게 다시 침례를 베푸는 것이겠지만 성경은 이것을 가르치고 있지 않으며, 또는 그러한 이유로 재침례(再浸禮)를 받았다는 것도 기록하고 있지 않다. 침례는 본질적으로 믿음의 행위이기 때문에 원래 베풀었던 침례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그를 위해 살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 동기가 되어 행해졌다면 재침례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믿음과 하나님을 향한 소망은 회개의 척도를 나타낸다. 침례의 합법성은 믿음에 달려 있으며 믿음은 자신이 지은 죄를 모두 다 열거하는 것이 아니고 죄를 인정하고 십자가를 마음에 영접하는 것이다.
(1)유아는 믿음을 나타낼 수 없으므로 유아세례는 성경적이지 못하다. 유아는 나이가 들고나서 말씀을 이해하고 믿음을 갖고 회개를 했다고 증명한 후에 재침례를 받아야 한다.
(2)성인이 영적인 이유보다도 사회적인 이유로 침례를 받는다면 그는 개인적인 믿음을 갖고 회개를 한 후에 재침례를 받아야 한다.
(3)한 성인이 하나님의 필요성을 알고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열망을 느끼고서 침례를 받았는데 후에 자신의 죄악된 생활 양식을 완전히 회개하지 않았었음을 깨달았을 때 그는 굳이 재침례를 받을 필요는 없다. 이후에 그는 이러한 죄들을 충분히 회개하고 성령을 받아야 한다. 그의 침례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행위였기 때문에 다시 받을 필요가 없다. 비록 그의 침례가 그 당시에는 회개치 아니한 죄들을 사하지는 못했더라도 후에 그가 회개했을 때 그 죄를 사하는 효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4)어떤 사람이 회개하고 침례를 받고 성령을 받고 난 후에 다시 죄의 생활로 돌아갔다가 후일 그 죄의 삶에서 돌이킬 때 다시 침례를 받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가 받았던 침례가 그가 회개했을 때, 계속해서 지은 죄들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받는다면 단 한번의 침례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침례 전이든지 후든지)어떠한 죄라도 그 죄를 회개하지 않고서는 사함을 받지 못한다. 침례의 적법성은 침례 받는 자의 회개와 그리스도를 믿는 개인적 믿음에 달려 있다.
유아세(침)례
유아세(침)례는 불분명한 것이며 유아는 의식적인 믿음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인생에 있어서 후에 효력을 나타낼 수 없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인 믿음의 원천이신 반면에 인간은 그 믿음을 사용할 책임이 있으며 사용할 것인지 사용치 않을 것인지의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구원하는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의식적이며 자발적인 응답이다. 성경은 오직 믿는 자(막 16:16; 행 8:37)와 회개한 자만(눅 3:8; 행 2:38)을 위하여 침례를 가르치고 있다. 유아는 믿거나 회개할 수 없으며 성경은 유아세(침)례의 어떠한 사례도 기록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유아도 구약에서 할례를 받았다는 근거에서 유아세(침)례를 가르친다. 그러나 침례는 육적인 할례가 아니라 영적인 할례이며, 육신적으로 깨끗케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정결케 하는 것이다. 과거의 죄와 옛 생활 방식이 청산되는데는 의식적인 믿음과 회개가 필요하다. 영적 할례로써 침례를 설명하고 있는 골로새서 2:11-12의 구절은 이 영적 역사가 하나님의 역사하심 속에서 우리의 믿음을 통해 발생한다고 가르친다. 할례는 물과 성령침례 두 가지의 모형이다. 물침례를 받고자 하는 후보자는 성령을 받을 준비도 해야 한다.
죽은 자를 위한 침례
죽은 자를 위한 침례란 성경적이지 못하다. 죽은 자는 구원하는 믿음을 가질 수 없으며 회개할 수도 없다. 죽은 자에게 때는 너무 늦었다. "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성경은 사람이 죽은 후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으며 특히 죽은 자들을 위해 사람들이 벌이는 어떤 행위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죽은 자를 위한 침례 의식은 고린도전서 15:29를 그릇되게 해석한데서 기인한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예수의 부활과 죽은 자의 미래의 부활을 가르쳤다. 그는 논증의 일부로써 본질적인 질문을 하였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은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바울이 의미한 것에 대하여 몇 가지 이론이 있지만 이 구절이 죽은 자를 위한 침례를 가르치거나 인정하는 것은 아닌데, 그 이유는 특히 이러한 해석은 성경의 다른 모든 내용과 상충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침례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죽은 자'는 헬라어로 복수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으나 회개함으로 죽었던 옛 자아(自我)를 의미할 수 있다. 침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를 장사지내므로 그리스도께서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처럼 그들도 새 생명 가운데서 일으키심을 입을 수 있다(롬 6:3-5). 이러한 뜻으로 이해된다면 침례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믿음의 고백이 되는 것인데, 부활은 바울이 15장 전체 속에서 확언했던 것이다.
침례 후에 지은 죄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침례 이후에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요일 2:1).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가 회개하고 우리의 죄를 자백하기를 요구하신다(요일 1:9). 하나님은 두번째 침례를 요구하시지 않는다. 우리가 받았던 침례는 우리가 하나님께 회개하여 지은 죄들을 자백할 때 침례 이후에 지은 죄들에 관하여도 죄사함의 효력을 갖는다.
하나님은 왜 침례를 선택하셨는가?
하나님은 그의 뜻대로 통치하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하신 뜻에 대하여 반문할 아무런 권리가 없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순종해야 할 우리의 의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물침례를 제정하시고 그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만드셨는지 어느 정도 그 이유들을 이해할 수 있다.
첫째, 물은 죽음과 관련된다. 노아의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불신의 세상을 죽음에 처하게 하기 위하여 물을 사용하셨다.
둘째, 물은 보편적으로 씻고 깨끗케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셋째, 물은 생명 그 자체를 의미한다. 어떤 식물이나 동물, 인간도 물이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이들 물에 관한 세 가지의 중요한 진리는 독특하게도 침례를 받을 때 나타나는 것을 상징하는데 적합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가 침례의 물에 잠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옛 사람을 멸하시고, 익사시키시며, 장사지내신다. 침례를 받는 동안,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는 피를 적용하시어 죄로부터 우리를 깨끗케 하신다. 침례를 받고 물에서 나올 때 우리는 성령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을 준비가 된 것이다.
물침례와 성령침례 사이의 구별
비록 물침례와 성령침례가 결합하여 하나의 침례를 형성하지만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똑같은 일로 취급했듯이 두 가지 사건을 동일한 것으로 다루어서는 안된다. 침례를 받고 물에서 나오자마자 성령을 받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이러한 일이 항상 일어나지는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사람들이 회개는 하였지만 아직 물로 침례를 받기 전인데 성령을 받는다. 고넬료가 좋은 예이다(행 10:44-48). 성경은 비록 거듭남이라는 하나의 목적에 일치하지만, 물과 성령의 침례를 두 가지 별개의 사건으로 설명한다.
침례는 필수적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으며 이 시대에 죄사함을 기독교의 침례와 분리하여 가르칠 수 있는 아무런 권한도 없다. 죄사함을 위한 침례를 전파하고 실행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물침례의 중요성
(1)하나님은 물침례시에 죄를 사하신다(행 2:38; 22:16). 어떠한 죄라도 용서받는다. 우리의 죄가 영원히 씻겨져 없어진다. 하나님의 사하심은 언제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우리가 회개한 모든 죄에 적용된다. 죄사함은 오직 침례를 받은 자가 믿고 회개할 때에만 있으며 합법적이며 유효한 침례가 되는 것(침례의 합법성)은 침례를 받는 자 외에 다른 사람(침례를 베푸는 사람 등과 같이)의 영적인 조건에 달려 있지 않다.
(2)물침례는 중생의 일부이다. 침례를 받은 사람은 물로 거듭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서 행하신 영적인 작업을 의미한다(요 3:5; 딛 3:5).
(3)침례는 우리를 예수님의 죽음과 장사에 연합시킨다(롬 6:1-4; 골 2:12). 그것은 우리가 회개함으로 죄에 대하여 죽었고 우리의 과거의 죄 뿐만 아니라 '옛 사람' -죄와 죄악된 생활 양식의 지배- 이 장사되는 것을 가리킨다.
(4)물침례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게 만드는 물과 성령의 침례 중 일부이다(롬 6:3-4; 갈 3:27). 침례는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연합이며 그의 가족이 되는 과정의 일부이다.
(5)물침례는 영적 침례의 일부이다(골 2:11-13). 침례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는 새로운 언약의 관계를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