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인 거듭남 - 제11장 교회사 속에서의 증거:방언

 제11장 교회사 속에서의 증거:방언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히 12:1).


교회의 역사에서 나타난 방언을 표적으로 하는 성령의 침례에 관하여 알아 보고 역사를 통해서 나타난 완전한 사도적 복음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브리태니카 백과사전(Encyclopedia Britannica)은 "사도시대 이후의 방언 말함에 대한 기록들은 기독교회 역사 전체를 통해서 드러난다"고 하였다.


1세기와 2세기


1∼2세기의 속사도 교부들은 성령의 은사를 믿었으며 성령의 침례를 위한 안수를 시행하였고, 방언 말함을 포함한 성령의 은사들이 그 당시에 존재했었다는 것을 증거했다. '은사'라는 단어는 헬라어에서 카리스마타(Charismata)라고 표현되었는데 바울은 이 단어를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를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하였다(고전 12).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100?)는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에게 "성령의 충만하심이 너희들과 함께 하길 원하노라"라고 하였다. 익나티우스(Ignatius -107?)는 서머나 교회에게 "나 익나티우스는… 믿음과 사랑과 성령의 은사가 충만하고 거룩한 삶을 사는 하나님 아버지와 및 송축 받으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편지하노니 성령의 능력 안에서 강하고 담대하라"라고 했다. 그는 또한 폴리갑에게 "부족함이 없이 모든 은사에 충만한 자가 되라"고 충고했다. 디다케(Didache)는 "아버지께서는 모든 이들에게 은사로 충만케 하기를 원하신다"라고 기록했고 또한 예언을 하는 자들을 "성령 안에서 말하는 자"라고 설명했다.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은 "예언의 은사들은 오늘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므로… 지금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성령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을 보는 것이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리용의 감독이었던 이레니우스(Ireneus 130?-202?)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진정한 그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그분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한다… 전 세계에 퍼진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은 하나님의 은사를 세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성령의 침례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가르쳤고 또한 성령 침례의 증거로서 방언 말하는 것을 강조했다.

"사람은 아버지의 성령과 연합하는 것으로 완전해진다… 이러한 이유로 사도들은 '우리가 온전한 자들 가운데서 지혜를 말하노니' 라고 말함으로서 하나님의 성령을 받고 성령으로 온갖 종류의 방언을 하는 사람들을 '온전한 자들'이라고 불렀다. 같은 이치로 우리는 또한 교회 안의 많은 형제들이 예언의 은사를 소유하고 온갖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사도들이 또한 그들을 '영적인'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성령의 은사에 참예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교도였던 셀시우르(Celsus)는 2세기 말엽에 당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을 말했다고 기록했다. 

신학자 오리겐(Origen -254?)도 방언 말함의 존재와 효용성을 증거했고, 당시대에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났었음을 인정했다. 몬타누스파(Montaniast)라고 불리는 사람들 또한 성령을 강조했고 방언을 말했다.


3세기


기원 후 2세기가 조금 지났을 무렵에 신학자 터툴리안(Tertullian)은 이단자 말씨온(Marcion)에 대한 반박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창조자는 말세에 당신의 성령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이 마지막 시대에 성령을 부어주시는 자로 나타나셨다." 터툴리안은 특히 방언의 은사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고린도전서 12:8-11과 이사야 28:11이 그 시대에도 적용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방언을 말하는 것을 진정한 교회의 표적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말씨욘으로 하여금 그가 믿는 신에게 받은 은사로서 사람의 지각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한 예언의 은사를 보이게 하라… 그에게 찬양이나 환상이나 기도를 만들어 보이게 하라. 환상 중에서 오직 영으로만 하게 하라. 방언 통역의 은사가 일어날 때마다 그러한 은사를 일으키도록 해 보라… 이러한 모든 은사들은 어렵지 않게 내 안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노바티안(Novatian -257?)은 로마의 장로였는데 성령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바로 그분이 교회 안에 선지자를 보내시고, 교사들을 가르치시고, 방언을 말하게 하시고, 능력과 신유와 기적을 일으키시며, 영들 분별함과, 교회의 지도력과, 지혜와, 모든 성령의 은혜를 질서있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그는 모든 곳에 있는 주의 교회를 완전하게 하신다.”

사벨리우스(Sabellius)는 성령의 침례와 방언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쳤다. 비록 그의 글들이 오늘날에는 전혀 남아 있지 않지만 에피파니우스(Epiphanius)는 사벨리우스가 성령으로 중생하는 것을 가르쳤다는 것과, 아타나시우스라는 가명(Pseudo-Athanasius)를 쓰는 한 저자의 기록에 따르면 사벨리우스가 고린도 전서 12장의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가르쳤다는 사실을 말했다.

아스테리우스 어바너(Asterius Urbanus. c. 232)는 당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은사들이 교회에 영존하기를 원했다고 기록했다. 어바너는 진정한 교회에는 항상 예언의 은사들(예언, 방언과 방언의 통역)이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예언의 은사들이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이어지는 모든 교회들에 존재해야 한다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4세기와 5세기


포이티어의 감독이었던 힐러리(Hilary -367)는 방언과 방언의 통역에 대해서 하나님께 받은 '사역의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밀란의 감독이었던 암브로스(Ambrose 340-398)는 고린도 전서 12장에 나오는 모든 은사들은 기독교인들의 정상적인 경험들의 일부라고 가르쳤다. 

4세기 말엽과 5세기 초의 기독교는 로마 카톨릭 교회라는 조직으로 변했다. 명백히 방언을 말하는 역사는 타락해 가는 교회에서 대부분 자취를 감추고 말았지만 그에 대한 기억들은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었던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rm 345-407)은 고린도 전서 12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장 전체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비록 이해하기 어려우나 그 성령의 역사들이 멈춘 것은 우리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은 분명하다. 이전에는 일어났었지만 지금은 나타나지 않는 역사들… 그렇다면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누구든지 침례를 받는 사람은 방언을 말하였다… 그들은 단번에 성령을 받았다… 그들은 페르시아인의 방언과 로마인의 방언과 혹은 인도인의 방언이나 다른 언어로 말하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타인들에게 성령의 역사라는 증거가 되었다.”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은 당시대의 교회가 성령을 받을 때 방언 말하기를 기대하지는 않았으나 방언을 말하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었음을 증거했다. "성령은 안수를 받음으로서 일시적인 기적들과 함께 임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이전에 임했던 것처럼… 그 당시에 성령을 구하던 사람들에게 안수가 행해짐으로써… 그들이 방언 말함과 함께 성령을 받고는 하였다." 

어거스틴 시대에도 카톨릭에 의해 '이단자'로 정죄된 어떤 이들은 방언 말함과 함께 성령을 받는 것을 믿었다. 어거스틴은 다음의 주장들로서 그들을 반박했다. (1)방언은 사랑 없이는 아무 가치가 없다(고전 13). (2)사랑은 오직 성령으로 임한다(롬 5:5). (3)그들은 카톨릭 교회에 속하지 않았으므로 성령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4)더이상 아무도 방언 말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중세시대


중세시대에 방언 말함의 증거는 매우 희박하다. 아마도 그것은 로마 카톨릭교회가 자신들이 '이단들'로 정죄한 사람들의 입을 막는데 성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다음의 모임들 가운데서 방언을 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12세기 유럽의 왈덴파(Waldenses). 교황의 권위를 거부하고 성경의 권위를 세우고자 했던 단체.

(2)12세기 유럽의 알비겐파(Albigenses). 교황의 권위를 거부하고 정결한 삶을 강조했던 모임.

(3)13세기 유럽의 프란체스코 수도회(Franciscans)와 다른 탁발 수도사들(mendicant)의 모임. 단순한 삶의 방식을 고수했고 시골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던 천주교 수도사들.


종교개혁 이후


종교개혁 이후의 시대를 살펴보면 방언을 말하는 기록들이 현저히 증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1)두드러지게 증가한 종교적인 자유. (2)성경공부에 대한 중요성의 회복, 사도적 교리, 회심, 영적 경험들. (3)인쇄매술의 발명, 그리고 (4)근대라는 시대적 상황들이다. 

저명한 역사가들에 따르면 방언을 말하는 것은 1500년에서 1900년에 이르는 사이에 많은 모임들에 의해 행해졌다고 한다.

(1)1500년대 유럽의 재침례 교도들. 그들은 루터교회, 개혁교회, 그리고 영국 정교회와 더불어 초기 개신교 물결의 4대 조류중 하나이다. 다른 개신교도들과는 달리 재침례교도들은 사도적 경배와 삶의 방법의 회복과 개심의 경험을 하는 것, 오직 믿음에 의한 침례와 물에 완전히 잠기는 침례, 교회와 정부의 완전한 분리, 회심후 죄를 이기는 능력,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필요성 등을 강조했다. 메노파(Mennonites) 추종자들이 이끄는 유명한 재침례교 지도자 메노시몬(Menno Simon)은 방언을 말하는 것이 성령 침례의 증거라고 기록했다. 많은 초기 재침례교도들이 열렬한 경배를 올렸다. 비기독교 역사가들의 말을 빌자면, "매우 경악되고, 열렬한', 복음적인 일들… 미국인들이 '거룩한 뒹굴음'이라고 알고 있는… 때때로 회중은 큰 소리로 외치고 춤을 추기도 했다. 그리고 항상 찬송을 열심히 불렀다.” 이러한 그들이 교리와 찬양을 볼 때, 초기 재침례 교회에서 방언 말함이 행해졌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2)1500년대 영국의 예언운동(Prophecy Movement).

(3)1600년대∼1700년대 프랑스 남부의 까미사르 교도들(Camisards). 때때로 구들은 개번스의 예언자들(Prophets of the Cevennes)이라고 불렸는데 그들은 주로 농부들로 구성된 위그노(Huguenots, 프랑스의 개신교도) 들이었다. 그들은 루이14세가 로마 카톨릭 교회를 국교로 삼으려고 시도하는 것에 대항했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투옥되고, 고문을 당하고 심지어는 순교하였다. 그들은 방언을 말하였고, 심지어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어린 아이들이 왕실에서만 쓰는 불어로 예언을 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아주 열성적이었으며, 크게 경배하였고, '성령에 사로잡힌 바' 되었다.(4)1600년대 영국의 퀘이커 교도(Quakers). 그들은 영적인 체험들을 강조했고 예배 가운데 성령이 역사 하시기를 기대했다. 초기 퀘이커 신도들은 그들이 사실상 성령의 능력으로 '흔들렸기 때문에' 퀘이커 교도라고 불려졌다.

(5)1600-1700년대 프랑스의 얀센파(Jansenites), 천주교 내의 종교 개혁 운동.

(6)1600년대 후반 독일의 경건 주의자들(모라비안 교도 포함). 그들은 성령의 체험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강조했다.

(7)1700년대 초기 영국의 카미사드(Camisards) 회심자들. 그들중 일부는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가서 전도활동을 하였다.

(8)1700년대 영국의 감리교도들. 그들은 웨슬리(Wesley)와 화이트필드(Whitefield)의 부흥 운동의 열매들이었는데 나중에 미국 부흥에서도 나타났다. 웨슬리는 비록 성령의 은사들이 역사 속에서 사라지기는 했지만 완전히 회복된 교회는 그것들을 다시 소유할 것이라고 믿었다.

미들톤(Middleton)박사가 성령의 은사는 교회 역사에서 사라졌다고 저술했을 때 웨슬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1)많은 고대 기록들이 더이상 남아 있지 않고 (2)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책을 쓰지는 않았으며 (3)반 니케아 교부들이 방언이 사소들과 함께 사라졌다고 주장한 적도 없으며 (4)방언이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행해지지도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말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방언으로 말했을 것이며, 그것들이 모두 기록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그 기록들은 많은 해를 거듭하는 동안 잃어버린 바 되었다" 라고 주장했다. 방언 말함이 그의 시대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웨슬리는 "방언 말함은 여러번 들은 적이 있고, 다오피니의 계곡에서도 들을 수 있다"고 반박했다.

우리는 또한 감리교회의 부흥에서 일어났던 회개에 대한 강조와 직접적으로 눈으로 볼 수 있었던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성령의 역사에 대한 적의를 가진 한 역사가는 다음과 같이 혹평했다. "극단적인 감정적 소란함과, 몸이 꼬이는 듯한 그러한 현상들은 18세기 영국의 부흥사인 웨슬리의 부흥집회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웨슬리의 부흥 집회에서도 "극단적인 행동들과 발작들… 그리고 진동들과 고함 지름들이 일어났다" 비슷한 현상이 1700년대 미국에서 조나단 에드워드, 조지 화이트필드 및 다른 전도자들을 필두로 한 영적 대각성 운동 가운데서도 일어났다.

(9)1800년대 미국의 부흥회와 천막 집회들. 2차 영적 대각성이라고 불려지는 이후의 미국 부흥회에서도 물리적 현상들이 보고되었다. 그것은 켄터키주의 천막 집회에서 시작되었는데 나중에 미국 전체를 뒤덮었다. 이러한 천막 집회 가운데서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고, 흐느꼈으며, 발을 구르며 뛰었고, 땅으로 꼬꾸라졌고, 땅에 쓰러져 마치 죽은 자처럼 누워 있기도 했으며, 몸이 경련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때때로 그들은 '거룩한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으며, '짖거나', '경련'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울고, 비명을 지르고, 소리치고, 발작을 일으키고, 넘어지고 구르며, 달리고 춤을 추는 회중이 울며 당을 치고 회개하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집회들은 감리교도들과 침례교도들, 일부의 장로교도들, 나중에는 성결교도 들에 의해서 인도되었다. 회개와 자유로운 경배를 강조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고 방언을 말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1800-1801에는 조오지아 대학 교정을 큰 부흥의 물결이 휩쓸었다. 학생들은 "소리를 치며 알려지지 않은 방언으로 이야기하였다."

많은 경우에 방언으로 말했던 사실들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거나 그것의 중요성을 잘 몰랐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방언 말함이 다른 물리적 현상과 섞여서 잘 구별되지 않기도 했다. 어떤 역사가는 "19세기를 통틀어서 방언을 말하는 것은 나라 곳곳의 부흥회와 천막 집회 가운데서 종종 일어났으며 아마도 그 현상은 사람이 구원을 받고 거룩하게 될 때 현상의 하나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10)1800년대초 독일의 루터교회. 이 현상은 구스타프 본 벨로(Gustav von Below)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11)1800년대 영국과 미국의 어빙파(Irvingites). 영국의 스코틀랜드 교회의 유능한 목사였던 에드워드 어빙(Edward Irving)의 회중에 성령이 임했다. 마리아 켐벨(Mary Campbell), 제임스(James), 마가렛(Magaret), 맥도날드(MacDonald)를 필두로 시작된 이 모임은 곧 연합된 사도적 모임으로 발전되었다. 이 모임에서는 성령의 은사가 강조되었다. 이 부흥의 물결은 크리스챤 카톨릭 교회와 새 사도의 교회(New Apostolic Church), 그리고 어빙파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모임들은 점차 성령의 은사를 잃어가며 형식적으로 변했다. 그들의 숫자는 급격히 감소했으며 오늘날에는 거의 그 숫자가 남아있지 않다. 교회 역사가인 필립 스카프(Philip Schaff 1819-1893)는 뉴욕의 어빙파 교회에서 목격한 방언 말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수 년 전 뉴욕의 한 어빙파 교회의 예배에서 나는 이 현상을 목격했다. 단어들은 분절되었으며, 마구 내뱉는 말 같았고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매우 특이하고 인상적으로 표현되었다. 그것은 의식이 없거나 거의 들뜬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처럼 보였으며, 혀를 제어하는 것은 전혀 없는 것 같았고, 마치 어떤 외부의 힘에 의해서 붙들린 것 같았다. 친구이자 동료인 브릭 박사도 1879에 런던의 한 어빙파의 교회에서 같은 느낌을 받았다"

(12)1800년대 영국의 플리머스 형제단(Plymouth Brethren)

(13)1841-1843 스웨덴의 성경읽기회(Readers; Lasare)

(14)1859년 아일랜드의 부흥회들

(15)1800년대 테네시와 북 케롤라이나 주의 경건주의자들. 

우리는 한 독일 역사가가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방언을 말했다고 주장한 것과, 또한 무디(Dwight Moody)의 제자들 중 일부가 방언을 했다고 주장한 무디의 친구의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들이 알고 있는 방언 말함과 동일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웨스터민스터의 신앙고백은 1648년도 영국의 청교도들이 장로교의 칼빈주의를 도입한 것인데 그 신앙고백 안에는 기도는 이해될 수 있는 언어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


20세기


근대의 오순절 운동은 1901년 1월에 켄사스의 토페카라는 작은 신학교에서 시작되었다. 학장 찰스 파햄(Charles Parham)은 성결주의에 신앙의 근본을 둔 목사였다. 그의 학생들은 방언이 수반되는 성령의 침례를 구하기 시작했고 아그네스 오즈만(Agnes Ozman)이라는 여성이 방언 말하는 것을 시작으로 모두 다 성령을 체험하게 되었다. 이 곳에서 시작된 부흥은 곧 많은 교단과 전 세계의 여러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1950년대 후반, 은사주의 혹은 신오순절 운동으로 불리는 방언 말함의 부흥이 개신교와 천주교회, 그리고 그리스도 정교회까지도 널리 전파되었다. 어떤 은사주의자들은 오순절교회와 연합하였고, 다른 이들은 자신들의 독자적인 교단을 따로 세웠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이전에 머물러 있었던 전통 교단들에 남았다.


오늘날의 오순절 교회들의 통계(1970)


세계 기독 대사전을 보면, 1970년도에 160,509개의 오순절 교회가 있고 18,694,038명의 장년부 신도들이 있으며, 36, 794,010명의 전체 출석 신도들이 있었던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전체 출석 교인의 수가 51,167,187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와 있다. 타임지(Time)가 밝힌 것처럼 이것은 오늘날 오순절 교인의 수가 어떤 개신교 교단의 수보다도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통계에 의하면 은사주의자들과 신오순절 운동의 교인들은 1870년에 1,587,700명이었고 1980년에는 11,005,390명에 이르렀다. 위에서 말한 출석(affiliation)이라는 것은 교적부에 올라 있는 숫자나 평균 출석수를 훨씬 상회한다. 그것은 장년과, 어린아이들, 신자는 아니나 , 교회에 가끔 나오는 사람들까지를 포함한 숫자이다.

1983년 9월, 국제 연합오순절교회(UPCI. United Pentecostal Church International)는 북미에서만 약 50만명, 그 외 다른 나라들에도 약 50만명의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했다. 그 당시에 북미에는 3,295개의 지역교회가 있었고 약 500개의 교회들이 개척교회였으며, 일주일에 평균 4개의 교회가 새로 시작되었다. 해외선교는 당시 90여 개국에서 5,998개의 교회와 설교지가 있었고, 53개의 신학교와, 1년동안 534개의 교회가 새로 시작되었으며 86,686명이 전도되었다.

많은 다른 유일신 사상의 오순절 교회들이 미국 외에서도 존재한다. 다음은 1970년에 10,000명 이상의 성도를 가진 미국 외의 교회이다.

(1) 캐나다, 오순절 사도 교회

(2) 중국, 참예수교회

(3) 콜롬비아, 콜롬비아 연합 오순절 교회

(4)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 오순절 교회

(5) 멕시코, 세계의 빛 교회

(6) 대만, 참예수교회

(7) 일본, 예수의 영 교회


참예수 교회는 1917년에 다른 오순절 교회와 아무런 접촉없이 중국의 신자들에 의해서 세워진 교단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잡기 직전에 참예수 교회에는 1,260개의 교회와 125,000명의 성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 그 성도들은 지하의 비밀교회로 숨어 들었다. 참예수 교회는 중국 정부가 삼자 교회로 모든 교회들을 통합하려는 시도를 잘 극복하고 있는 몇 안되는 교회들 중의 하나이다. 그들은 물로 나는 것은 물침례이며, 침례시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죄사함을 위한 것이고,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이며, 성령 침례의 증거는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콜롬비아의 연합 오순절 교회는 오순절 선교사들에 의해서 세워졌으나 현재는 철저히 자율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 교회는 자국 내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며 카톨릭을 제외하고는 가장 큰 교세를 형성하고 있다. 

그 외에도 많은 유일신 사상의 오순절 교단들이 있다. 그 중에는 멕시코에 몇 개가 있고, 영국에 이민한 카리브 사람들의 교회들, 그리고 세족식을 거행하는 유고슬라비아의 '주 예수의 영(Church of the Spirit)'교회가 있다. 

세계 기독교 백과사전은 소련에 하나의 유일신적 오순절 교회가 있다고 밝힌다. 이 모임은 지하교회인데 '사도적 정신의 복음적 그리스도인들(Evangelical Christians in the Apostolic Spirit)' 이라고 불린다. 이들의 유래는 앤드류 어션(Andrew Urshan)에 의해 주도된 1915년 부흥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들은 세족식을 거행한다. 오순절교회를 포함하여 공식적으로 등록된 교회는 '복음적 기독교인과 침례교도들의 연합(AUCECB. the Union of Evangelical Christians-Baptists)'이다. 

1940년에 유일한 사상의 신자들은 정부에 의해서 통제되는 이 AUCECB 교단에 가입교단에 가입하도록 강요받았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곧 그곳을 떠나 불법적인 모임 가운데 있기를 자청했다. 명백히 많은 이들이 이 정부교회 가운데 남아 있었다. 1974년에 피터 샤트로브(Peter Shatrov)라는 한 유일신 신자는 이 교회의 최고 간부로 임명됨으로써 이 교단 뿐만이 아니라 전체 소련 교회의 주요한 대변인이 되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 신앙의 많은 교회들 가운데도 상당수의 유일신을 믿는 신자들이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결론


우리는 이 장에서 설명된 모든 다른 교단들과 모든 면에서 교리를 공유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가 조사한 바는 단순한 하나의 사실을 보여 준다. 그것은 모든 시대 속에서 사람들은 회개와, 잠김에 의한 침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죄사함을 위한 침례, 그리고 성령을 받는 것과, 방언을 말하는 것을 믿고 가르치고 경험해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오늘날 새롭게 나타난 것들이 아니다. 성경이 그것들을 가르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역사를 통해서 그 가르침들을 따라 왔다.

특히 어떤 교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침례와 방언이 수반되는 성령의 침례에 대한 가르침들을 일관성있게 고수해 왔다. 우리는 이 두 가지의 교리를 1세기와 2세기 이후인 속사도 시대의 지도자들에게서도 찾을 수가 있다. 그리고 3세기의 초기 사벨리우스 주의자들, 그리고 20세기의 근대 오순절 교단들에서 그 동일한 가르침이 발견된다.

역사적 증거들은 또한 이 두 가지의 가르침이 몬타누스파(2∼3세기)와 후기 사벨리우스 주의자들(4,5,6세기)에게서도 발견됨을 말해준다. 3, 4세기와 중세의 카톨릭에 의해 '이단들'로 정죄된 사람들에게서, 16세기의 재침례 교도들, 17, 18세기의 반 삼위일체 주의자들, 17세기의 초기 퀘이커 교도들과 19세기의 폴리머스 형제단들 가운데서도 그 가르침들은 발견된다. 사단은 진실을 감추려고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항상 완전한 사도적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을 남겨 놓았다는 증거는 많다. 우리는 그 가르침과 경험으로서 이 사도적인 교회가 사도의 시대로부터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고 믿는다. 

교회의 역사만으로는 교리의 정통성을 입증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역사는 이러한 교리들이 어떻게 변질되어 왔고 또 수세기를 지나면서 어떻게 사라졌는가에 대한 통찰력을 준다. 그것은 이러한 가르침들이 최근에 들어와 새로 생성된 것이라는 환상을 없애는데 도움을 준다.

하나님 역사의 마지막 때인 오늘날, 완전한 사도적 진리는 전 세계에 걸쳐서 선포되고 있다. 오늘날의 세상은 방언을 수반한 성령의 침례가 기적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100년이 채 안되어서 적은 무리로 시작한 오순절 운동은 개신교 내에서 가장 거대한 집단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기독교 교단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부흥이 그분의 성령 침례와 잘 조화된다고 믿는다. 교회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최선의 역사가 앞으로 도래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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