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인 거듭남- 제12장 예외는 과연 있는가?

 제12장 예외는 과연 있는가?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히 2:3-4).


신약의 구원 계획 이외에 다른 예외가 과연 있는가? 어떤 이들이 제안한 예외들에 대하여 과연 타당성이 있는지 성경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기본 원칙들


(1)하나님만이 개개인의 구원을 결정하신다(롬 2:16; 히 12:23). 어떤 사람도 다른 누군가를 지옥에 간다고 정죄하거나 천국에 간다고 장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구원은 개인과 하나님과의 사이에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자기 스스로를 판단하되 서로를 판단하지는 말고 타인에 대한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라고 가르치셨다(마 7:1-5; 눅 6:37). 예수께서는 세상을 정죄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을 이루기 위해 오셨다(요 3:17). 그렇다면 우리 또한 그분의 본을 따라야 할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선포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에 순종하도록 격려해야 한다. 그리고 불순종에 따르는 결과에 대해서는 경고해야 하나 최후의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존중하는 이들이 있다면 단지 그들이 진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서 조급하게 배척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었다. 제자들은 그를 단지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에 대해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라고 말씀하셨다(막 9:39-40).

이러한 사람들(진리는 가지지 않았으나 예수님을 존중하는 이들)은 비록 아직 구원을 받지는 못했을지라도(마 7:21-23)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이름을 전파하는데 일조한 사람들이다(빌 1:15-18). 

따라서 그들을 배척하기 보다는 그들이 하고 있는 선한 일에 대해서 감사하고 그들을 더 깊은 진리로 인도해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완전한 복음을 긍정적인 태도로 전한다면 진리는 스스로 말할 것이고 또한 스스로의 답변이 될 것이다.

(2)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비를 베푸시는데 있어서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계신다. 그분은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라고 말씀하셨다(롬 9:15). 또한 그분은 자신의 뜻대로 구원의 방법을 선택하셨고 또한 그것을 지키실 것이다. 그분은 자신이 자비를 베푸실 조건들을 명백히 전하셨다. 바울은 처음에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가르쳤고 (롬 9:14-24). 그 다음에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그분을 주로 고백하며,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복음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구원을 허락하실 것이라는 것을 가르쳤다(롬 10:9-17).

(3)성경은 참된 교리에 관한 한 유일한 권위이며 구원의 지침서이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성경 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다(요 5:39-40). 그분은 사람들이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읽었다는 것 그 자체로 그들을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성경이 그리스도를 명백히 가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색을 얻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거부했다는 것을 책망하신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전파하는 유일한 복음만을 가르친다. 바울은 "그러나 우리가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말했다(갈 1:8-9). 

모든 참된 교리는 성경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5-17). 

우리는 성경이 이야기하지 않는 조건을 교리에 첨가할 수 없다. 더우기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는 예외 규정을 둘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우리는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을 순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말하는 것 이상의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면 그것은 그분의 권리이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경 속에서 말한 계획만을 가르칠 권위를 가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 추론, 철학, 난해한 구절을 추측하여 꿰어 맞추는 등, 잘못되고 부정확한 가르침들을 전할 수는 없다. 성경의 가르침과 예에서 벗어나는 예외적인 상황들을 예외로 인정해서는 안된다.

(4)우리는 특이한 상황들이나 가상( 想)의 경우를 가지고 교리를 세우려 해서는 안된다. 인간적인 동정이 오히려 우리를 낭패케 할 수도 있다. 우리가 성경에서 말하지 않는 예외를 가지고 교리를 세운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키는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 한 예로써 설령 하나님께서 물침례를 통하지 않고서도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게 하셨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가정적인 상황들을 만들어서 하나님이 그 상황들 가운데서 죄를 사하실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권한밖의 말을 하는 것이 된다. 만약 우리가 침례 받지 않은 한 사람에게 예외를 둔다면 논리적으로 말해 침례는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은 것이 되어 버린다. 

이와 같이 사람 스스로가 심판자가 된다면 결국 우리는 성경을 불순종하는 것과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는 태도를 권장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심판자가 되시므로 그분은 공정하고 법적으로 정확한 결정을 내리시기 위해서 일반적인 원칙들을 특정한 상황들에도 적용시키실 것이다. 

우리는 완전한 복음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순종하고 모든 사람들이 함께 그것을 나누도록 격려한 후에 영원한 심판은 오직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5)하나님은 가장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로우시며, 가장 공정한 심판자이시다. 그분은 사랑과 자비, 그리고 공정성에 있어서 완전하시나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시 100:5).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계 15:3). 구원에 관한 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의에 대한 개념도 틀릴 가능성은 있다. 왜냐하면 아무도 구원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자비를 베푸실 권리가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특정 상황들 가운데서 무엇이 공정한 것인가 아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전지(全知)하시기 때문이다. 오직 그분만이 사람의 마음을 아시고 과거의 기회들과 또 미래의 기회들에서 개인이 선택할 길을 아신다.

(6)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을 소수의 사람들만 따른다고 해서 변경시킬 수는 없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롬 3:3-4). 예수께서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마 7:14). 어떤 사람이 예수께 나와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눅 13:23) 라고 질문했을 때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라고 대답하셨다(눅 13:25). 노아의 날에 하나님께서는 전 세계를 통틀어서 겨우 여덟 명의 사람들만을 구원하셨다. 1세기에 하나님께서 선택받았던 백성들 대부분은(이스라엘은) 그분의 계획을 거부했고,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들에 대하여 기록했다. 그 당시의 대다수의 종교 지도자들과 종교 단체들이 복음을 거부했다. 만약 오늘날에도 여전히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놀라운 일일까?


이방인들은 잃어버린 바 되었는가?


이러한 원칙들을 적용하면서 복음을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영생을 얻을 수가 없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예수께서는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라고 말씀하셨다(롬 8:24). 바울은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힘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라"라고 기록했다(살후 1:7-9). 

복음을 전혀 듣지 못했던 사람이라도 이미 하나님의 피조물들 속에 분명한 증거를 받았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 1:19-20).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하나님으로 영광과 감사를 돌릴 책임을 주셨다(롬 1:21). 

또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양심을 주셨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가지지 못했을지라도 충분한 양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1)만약 그것을 따른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신의 뜻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고, (2)만일 그들이 그것을 따르지 않는다면 정죄를 받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은 양심을 통해서 어떤 행위는 도덕적으로 잘못된 죄이며 그러한 죄에 해당되는 벌은 사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롬 1:32).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있던 이들은 그 법에 의해서 판단을 받을 것이며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던 이들은 판단을 받을 것이다(롬 2:12-16).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양심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자신의 양심의 요구에 따라서 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적어도 한번 이상 잘못을 범했다(롬 3:10, 23). 아무도 자신의 행위나 양심의 법을 포함한 법을 지킴으로서 구원을 받을 수는 없다(롬 3:20; 엡 2:8-9). 양심은 단지 정죄를 위한 증거가 될 뿐이지, 그리스도 밖에서의 구원을 위한 도구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만약 누군가가 진실된 마음으로 양심을 좇고 하나님을 구한다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이"시다(히 11:6). 그분은 항상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존중하신다(시 34:18; 51:17). 그리고 그를 찾는 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다(대상 28:9; 29:3-14; 마 7:7).

하나님께서는 진리 밖에서 사람을 구원하시지는 않는다.(딤전 2:4). 고넬료는 좋은 예가 된다. 그는 경건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는데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했고 항상 하나님께 기도했다(행 10:1-2). 간단히 말해,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구했고, 찬양했으며,, 순종했다. 그의 행동은 하나님께 기억하신 바 되었고 그 결과로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천사를 보내셨다(행 10:3-6). 천사가 그를 구원할 계획을 세우거나 그에게 복음의 말씀을 전한 것은 아니다. 천사는 그가 복음을 전하는 자를 만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었다. 고넬료가 아직 구원을 받은 상태는 아니었으므로 천사는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라고 말했다(행 11:13-14). 

대한민국의 서울에 한 여성이 있었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무당이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미신적인 주술 행들과 악령들과의 교통 때문에 영혼이 고통스러워 심한 우울증으로 시달렸고 결국 자살을 시도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죽음이 가까워 왔을 때 그녀는 두명의 미국인을 환상을 통해 보았다. 그 후 그녀는 회복되었고 어느 날 제일 오순절 교회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찬송 소리에 이끌려 그녀는 안을 들여다 보았는데 이전에 그녀가 환상에서 본 두 명이 미국인들을 실제로 보게 되었다. 그들은 엘톤과 로레타 버나드 선교사 부부(Elton&Loretta Bernard. 역자 주:한국연합오순절 교회 초대 선교사)였는데 그 교회를 개척한 사람들이였다. 이 기적의 결과로 인해 그 젊은 여성은 예배를 참석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성령의 침례도 받았다. 그리고 결국은 당신의 어머니까지도 주께로 인도했다.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녀 마음의 소원을 아셨고 그분을 찾으려는 그 순전한 갈망을 아셨다. 그 결과로서 하나님은 그녀를 진리로 인도하신 것이다. 

만약 이방인들이 복음 없이도 구원을 받는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불필요한 것이 되며 그리스도께서 '모든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실수가 될 것이다. 만약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기도 전에 구원을 받는다면 선교사들은 이미 구원받은 이들을 멸망당하게 하는 꼴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많은 이들이 복음을 들으나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에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은 사실상 더 많은 사람들을 잃게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벧후 3:9). 

바울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3-15, 17)라고 기록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고 순종할 때까지는 잃어버린 상태에 처해 있다.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자비를 보이신다. 그분은 사람의 죄에 아무런 책임은 없으시며 그들을 구원할 계획을 세울 책임도 없으셨다. 구원은 그의 은혜로 받는 것이므로 그분은 그것을 스스로의 계획에 따라서 허락하신다. 더욱이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모르는 것에 대해서 책임이 없으시다.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노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셨다. 오늘날에는 그분께서 교회에게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책무를 주셨다.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자신의 후대와 당대의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탓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주 공의로우신 존재 그 이상의 분이다 -그는 자비가 많으신 분이다. -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창조와 양심을 통해서 증거를 주신 분이다.


도덕적이고 진실한 사람들


아무도 천성적으로 의롭지 못하다.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선하지 못하다. 모든 사람들은 죄인이고 아무도 자신의 선한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지는 못한다(롬 3:10-12, 23, 27, 28; 엡 2:8-9). 단 한 가지의 죄라도 한 영혼을 정죄 받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아무리 사람이 선하다고 해도 하나님이 없이는 그는 다만 죄인일 뿐이다. 누구라도 자신의 어떤 것을 댓가로 지불하고 구원을 살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방법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와 복음에 순종하는 것을 포함한다. 아무리 사람이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려고 해도 만약 그가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도덕과 선행은 결코 구원을 불러오지 못한다. 왜냐하면 많은 모슬렘교도들이나 유대인들, 불교신자들, 힌두교인들, 그리고 다른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부인하면서도 그리스도인들 만큼, 혹은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훌륭한 도덕적 기준을 가지며 또 선행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배척한 많은 유대인들이 모든 율법의 계명들을 준수하면서 도덕적으로 아주 훌륭한 삶을 살았다는 것은 의심 할 바 없는 사실이다.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으나 그 역시 개종을 필요로 했다(빌 3:5-7). 

진실함 자체로서도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거짓 종교인들이나 공산주의자들, 무신론자들 및 다른 많은 이들도 그들의 믿음에 대해 아주 진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다(요 4:24). 하나님께서는 제사보다 순종을 요구하신다(삼상 15:22), 그리고 아무도 복음을 순종하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시며 그가 진정 어떤 사람인지 아신다(렘 17:9-10). 우리는 온전치 못한 우리의 생각으로 사람의 선함을 판단함으로서 그 사람만은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어떠한 예외(例外)도 만들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사람들


그리스도를 잘 알지 못한 채 진실된 고백을 하는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모든 사람은 믿고 복음을 순종해야 한다. 거짓 선지자들과 이단들도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받지 못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이들이 그리스도를 시인하고 스스로가 구원받았다고 믿으며, 심지어 그분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지만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음으로 해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하셨다(마 7:21-27). 많은 이들이 그를 안다고 할 것이고 심지어는 그분의 임재를 누릴지라도 구원을 받지는 못할 경우가 있을 것이다(눅 13:25-27).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믿음은 가지고 있지만 완전한 복음을 순종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했고 하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교통하셨다는 것을 존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온전한 진리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그들이 그분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를 따른다면 모두 구원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체험을 결코 과소 평가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시작했으나 아직 사도적인 신자들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아직 요한복음 3:5과 사도행전 2:38절의 말씀대로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볼로는 이러한 상황 가운데 있는 사람의 경우를 보여 주는 성경적인 예이다(행 18:24-28). 그는 말에 능한 사람이었고, 성경에 통달했으며, 주의 도를 배운 사람으로써 열정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주에 관한 것들을 부지런히 가르쳤고, 회당에서 담대히 전하였다. 그러나 그는 요한의 침례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그의 전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를 데려다가 더 완전한 주의 길을 가르쳐 주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침례와 성령의 침례에 대해서 명백하게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다음 장에서 바울이 요한의 12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이 바로 그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로 보건대 성경을 아주 깊게 이해하고 능력있는 사역을 하고, 심지어는 영적 뜨거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직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이들은 말하자면, 사도적인 오순절의 준비 교인(pre-pentecostal believers)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아직 사도적인 교회의 일부가 아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체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더 인도함을 받아야 했다.

아마도 그들의 현재 위치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들은 태아의 단계이고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에이 디 어션(A. D. Urshan)이나 지 티 헤이우드(G. T. Haywood)같은 오순절 신앙의 개척자들은 다음의 비유를 했다. "말씀이 심겨졌고 그 결과로서 잉태되었다(눅 8:11; 벧전 1:23). 그러나 사실상의 출생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 형성되는 과정에 있고 완전한 진리로 인도함을 받아서 정상적이고 건강한 출생을 필요로 한다."


교회사 속에서의 그리스도인들


성경은 교회 시대를 위해 오직 하나의 구원 계획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성경은 교회 역사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계속 읽혀져 왔다. 사도시대 이후의 역사적인 기록들 또한 그 후의 세대들에게 읽혀 왔다. 그리고 그 기록들은 예수 이름의 침례와 방언으로 수반되는 성령의 침례에 대해서 확인해 주었다. 더우기 이러한 교리는 교회 시대 전체를 통해서 이어져 왔다. 

우리는 교회 역사의 비중있는 지도자들이 개혁 기간동안 어떠한 영적 생활을 했는지는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성령의 침례를 받았을 것이고 중요성을 잘 모르면서도 방언을 말했을 것이다. 또한 개신교의 지도자들이 사도적인 교리를 이해하고 있었다는 많은 증거들도 있다.

예를 들자면 종교개혁 동안에 유명한 스페인의 외과 의사였던 미카엘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는 유일하신 하나님과 예수님의 완전하신 신성, 재침례의 필요성에 대하여 가르쳤다. 루터(Luther)와 쯔윙글리(Zwingli), 칼빈(Calvin)은 모두 그의 가르침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특히 루터는 예수 이름의 침례에 대한 논란들에 대해서 인식하고 있었다. 방언을 말하는 것은 많은 재침례교도들 사이에 빈번한 일이었고 종교개혁가들은 그것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다. 루터는 예언과 영감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강조하던 (아마도 방언 말함과 통역을 포함한) '열성파'들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루터를 가리켜 '성경을 단지 지식적으로만 믿는 사람'이라고 간주했다. 그리고 그들은 루터와 루터교 신앙고백(1577)을 배격했다. 그렇다면 종교개혁가들이 최소한 어느 정도의 사도적 진리에 접했었다는 것은 분명해진다.

종교개혁자들은 결코 교리적으로 오류가 없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개인 영혼의 예정설, 유아세례, 물로 뿌리는 세례, 삼위일체같은 잘못된 교리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원칙의 삶에 모범이 되지도 못했다. 루터는 어떤 독일 지도자가 첩을 두는 것을 용인하고 권하기도 하였다. 그는 모든 재침례교도들을 이단이라고 정죄했고, 그들을 처형하는 것을 허락했으며, 야고보서의 가치를 의심하여 '지푸라기 복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는 유대인들을 폭력적으로 처형하는 것을 허가했으며, 독일의 봉건적 영주들이 농민 반란을 진압하는 것을 지원했다. 그는 농민 반란에 반대하여 '살인적 도적들인 농민 무리에 대항하여'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그 글에는 '모든 이들로 하여금 그들을 때리고, 칼로 베고, 찌르게 하자'라는 구절도 포함되어 있다. 쯔윙글리는 개신교의 법을 스위스의 천주교 지역에 전파하기 위해서 전쟁을 치르다가 전사했다. 칼빈은 미카엘 세르베투스를 죽이는 것을 주도했으며 그가 제베바 근교에서 화형을 당하도록 허락했다. 

이러한 인물들의 고결한 인격들과 그들이 교회 역사에 기여한 바들은 역사에 잘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완벽하거나 오류가 없지는 않았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는 개인적인 용기나 열정, 성경의 어떤 부분을 더 잘 이해했다는 것 때문에 그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등 구원에 있어서 개인적인 예외 규정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많은 사람들이 용기와 열정, 위대한 결단력과 희생을 잘못된 종교나 정치, 국가주의를 위해 바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유대주의나 불교, 이슬람교, 공산주의나 어떤 혁명적인 목적으로 인해 핍박을 받고, 잔인한 고문과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잃었다. 많은 이단이나 사교(邪敎)의 신도들이 그리스도를 고백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민주주의나 종교의 자유, 여호와에 대한 믿음, 성경에 대한 믿음, 이러한 것이 하나님 앞에서 중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중에 그 누구도 자신들의 고난이나 희생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신앙의 조상이나 교회사의 고결한 지도자들로 하여금 우리가 믿고 순종하고 선포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지게 허락해서는 안된다.


성경 외적인 추측들


구원에 관한 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모든 다른 추측과 생각들은 성경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야 한다.


죽음 후에도 기회가 있는가?


몰몬교 신자들이나 여호와의 증인들을 포함한 어떤 이들은 적어도 이 삶에서 완전한 기회를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는 사후(死後)에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고 가르친다. 이러한 가르침들은 상상하기에 흥미있을지는 몰라도 성경은 결코 그와 같은 교리를 복음으로서 전할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성경 어디에도 이 지구상의 삶이 끝난 후에 복음을 다시 받아들일 기회가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다시는 그러한 기회가 없음을 가르친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일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하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계 20:13). 

'두번째 기회'의 교리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두 가지의 성경구절들이 종종 인용된다. 하나는 바울이 죽은 자들의 침례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고전 15:29). 또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영이 노아의 시대에 불순종했던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도했다는 구절이다(벧전 3:18-20). 다음과 같이 이 구절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들이 있다. (1)그리스도의 영이 노아를 통해서 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전도했다. 베드로전서 4:6의 단어와 시제가 이 해석을 지지한다. (2)그리스도의 영이 그리스도의 육체가 무덤에 누여져 있는 동안에 지하의 옥에 있는 타락한 천사와 악령들(벧후 2:4)에게 그의 죽음에 대한 승리를 선포했다. (3)그리스도의 영이 옥에 있는 인간의 영들에게 전하였으나 아무에게도 두 번째 기회를 주지는 않았다.

(2)번과 (3)번의 설명은 '전했다'라는 헬라어 단어로부터 지지를 받는다. 그 단어는 일반적으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전도'라는 뜻을 지닌 유앙겔리조(euangelizo)가 아니고 그냥 '정보를 전한다'는 뜻의 케룻소(kerusso)라는 단어이다. 두 가지 설명 모두 그리스도께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획득하시고 사로잡힌 자들을 인도하셨을 때 음부(하데스)에 내려 가셨었다는 교리를 지지한다(행 2:25-32; 롬 10:7; 엡 4:8-10; 계 1:18).


불완전한 거듭남이 있는가?


불완전한 거듭남이 가능한가? 어떤 이들은 거듭남에 대해서 가르칠 때에 사도적인 패턴과는 완전히 부합되지 않더라도 다른 어떤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이러한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들은 구약의 인물로는 이드로, 발람, 그리고 니느웨성, 교회시대 이전의 인물로 십자가 강도 등 특정한 인물들을 예로 든다.

그러나 십자가 위의 강도는 율법 아래에서 구원을 받았는데 곧 예수께서 그의 제사장과 제물이 되어 주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을 이루실 자유가 있으심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예들에 너무 의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예들은 아주 특이한 상황과 시기에 일어난 일들이기 때문이다. 

신약 성경의 구원과 관련해서 사람들은 두 가지의 가능성을 제기한다. (1)어떤 이들은 방언의 표적은 없었지만 성령으로 거듭났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방언에 대해서 몰랐거나 이해하지 못해서 방언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2)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침례에 대해서 전혀 듣지 못했거나 들었더라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 이름을 부르지 않고 그냥 침례를 받았을 수도 있다. 여기에는 그들이 침례를 받을 때 예수를 주로서 완전히 믿고 또 실질적으로 (이론적으로가 아니라) 그분이 신성의 모든 충만이시라는 것을 이해했다는 가정이 따른다. 

비록 이러한 주장들이 논리적이고 통일성이 있다고 보여지지만, 거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의 어려움이 있다. (1)성경은 예외적인 암시보다는 분명한 사도적인 경험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다. (2)교회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오늘날에도 많은 신실한 사람들이 방언을 표적으로 하는 성령의 침례를 받았고, 심지어는 방언을 기대하지 않던 이들도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이름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을 잘 모르고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다. 이러한 어려움을 생각해 볼 때 우리의 분명한 책임은 완전한 사도적인 경험을 받아들이고 가르치는 것이고, 또한 이러한 경험들이 오늘날에도 계속 이어지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유아들의 운명


우리는 아직 너무 어릴 때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회개하거나 지적으로 자신들을 분별하지 못하는 영혼들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못했다. 이러한 어린 영혼들에 대해서 몇 가지 견해들이 제기되었다.

(1)그들의 죄성으로 인해서 그들은 천국에 갈 수 없다(시 51:5;롬 5:12-21). 이 견해는 죄성이 죄에 대한 욕망 뿐이 아니라 개인적인 죄와는 관계없는 유전된 죄의식까지도 포함된다는 것을 가정한다. 로마 천주교회는 이러한 주장을 믿는다. 그들은 어린아이들도 원죄를 씻기 위해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세례를 받지 않은 어린 영혼들을 위해서 연옥이라고 불리는 비성경적인 교리를 만들어 내었는데 거기에는 고통도 기쁨도 없다고 가르친다.

(2)그들은 천국에 갈 것이다. 예수께서는 어린 아이들을 예로 드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셨다(마 18:1-10; 19:14). 아마도 이것은 그들이 천국의 일부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바탕으로 하나님께서 어린 아이들의 죄성을 완전히 없애실 것이라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3)그들은 천년왕국때 부활될 것이고 구원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기회를 다시 갖게 될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이렇게 가르친다. 그러나 아무런 성경적인 근거는 없다.

(4)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예지(豫智)의 능력을 통하여 그들이 만약 살아 남았다면 어떠한 삶을 살 것인지를 아시고 그에 따라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자유의지와 유아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요소들에 대한 대답 불가능한 질문들을 일으킨다.

(5)유아들의 구원은 그들의 부모들에 의해서 좌우된다. 이 견해의 문제점은 그들 부모의 죄와 그들이 믿을만한 지적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구약에는 어린 아이들이 부모들의 죄로 인해서 고난받는 예들이 있었다. 노아의 홍수는 그 예들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것이 그 어린 아이들이 영원한 형벌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유아들이 때로는 그들 부모들의 행위로 인해서 고난받는 경우를 말해준다.

고린도 전서 7장 14절은 믿지 아니하는 아내나 남편이 믿는 배우자에 의해서 깨끗함을 받고 그 결합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거룩해 진다(하나님께 구별됨)고 가르친다. 만약 이것이 구원에 관한 이야기라면 믿지 아니하는 배우자와 장성한 자녀들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 구절은 믿는 가족으로 인하여 믿지 않는 가족이 구원을 받는다고 하기 보다는 믿는 자들이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강력한 요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유아들이나 지적으로 불완전한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이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아주 합리적인 책이고 또한 성경에 응답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어떤 연령층에도 한정시키길 원치 않으시기 때문에 성경이 이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성경은 어린 아이들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라고 말씀한다(잠언 22:6).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아주 어린 나이 때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아이들에게도 성령을 부어 주신다. 6세나 7세, 9세, 10세의 어린 아이도 성령을 받곤 한다. 성경은 아무런 나이의 제한을 두지 않는다. 그것은 어린 아이의 성장 과정에 따라서 그 지적 능력이나 신체의 발육도 다르고 하나님께서 책임을 물으시는 정도도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유아들이나 지적으로 불완전한 사람들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이 없다고 해서 혼돈에 빠져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이 우리를 향해서 계획을 가지신 것처럼 또한 그들에게 자비하신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그리고 우리를 향한 사랑을 체험하면, 우리는 또한 (위에 언급한) 그들도 그분의 한량없이 자비하신 손에 맡길 수 있다.


형벌의 정도들


성경은 죄인들이 그들이 지상에서 가지고 있던 지식과 지혜의 정도에 따라서 각각 다른 정도의 형벌(Punishment)을 받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모든 죄인들의 받게 될 무서운 형벌의 사실성을 축소시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잃어버린 구원이 얼마나 위대한 지를 절감하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를 조금 더 잘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며, 또한 우리로 하여금 상대적으로 덜한 형벌을 받을 사람들을 동정하여 복음의 예외를 만들지 않도록 도와 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공평하게 모든 사람들의 죄를 평가하실 것이고 또한 그것을 따른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원칙들을 어떻게 시행하실 것인지는 분명히 말하지 않는다. 

다음의 구절들은 그 하나님의 공평에 대해 가르친다.

(1)예수께서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는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8)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예를 들면서 그는 타국에 갔다가 자신의 집으로 갑자기 돌아온 주인에 대한 비유로 이야기 하셨다. 주인의 뜻을 알면서도 따르지 않은 종은 많이 맞을 것이고, 주인의 뜻을 잘 모르고 잘못을 한 하인은 적게 맞을 것이라는 말이다(눅 12:42-48).

(2)외식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형벌을 받을 것이다(막 12:38-40).

(3)믿다가 타락한 자들은 전혀 진리를 알지 못하던 이들보다 더 많은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마 12:43-45; 벧후 2:20-22).

(4)성도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므로 그들의 선행에 따라서 상을 받게 될 것이다 (고전 3:11-15). 만약 같은 원칙이 죄인들에게 적용된다면, 그들은 그들의 악행에 따라서 형벌을 받을 것이다.

(5)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 의한 행위에 따라서 처벌을 받을 것이다(롬 2:6, 11-16). 어떤 사람도 복음 밖에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영역에서 양심의 법을 따라 행한 죄인들은 그 영역들에 있어서는 심판을 면제 받게 될 것이나 반면에 양심을 따르지 않고 범죄한 사람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롬 2:14,15). 이러한 구별은 형벌에 다른 단계들이 있다는 사실에만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6)만약 어떤 사람이 복음이나 그리스도인을 위해서 선행을 한다면 그는 결코 자기의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마 10:40-42; 막 9:4).


결론


성경은 죄로부터의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물 침례, 그리고 성령의 침례로 요약되는 단순한 거듭남에 대한 가르침 외에는 그 어떤 예외도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는 비성경적인 이론들과 추측들을 진리라고 가르쳐서는 안된다. 우리는 모든 교리를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진리를 구하고 온전히 주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우리는 사도행전 2:38을 거듭남의 표준으로 삼는 완전한 복음을 전파할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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