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인 거듭남 - 제8장 성령침례
제8장 성령침례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성령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벧전 1:6). 사실 오직 하나님만이 스스로 거룩하시다. 또한 하나님은 영이시며(요 4:24) 하나님의 성령은 하나이시다(엡 4:4). 성령은 하나님 자신이시다(행 5:3-4: 고전 3:16-17, 6:19-20). 성령의 칭호들 중 하나가 '하나님의 영'이다(롬 8:9).
'성신(Holy Ghost)'과 '성령(Holy Spirit)'의 칭호는 서로 바꿔 쓸 수 있는데 흠정역(KJV)는 보통 전자를 사용하지만 때로는 후자를 사용하기도 한다(눅 11:13; 엡 1:13; 4:30). 그러나 원래의 헬라어 원본은 오직 pneuma hagion(프뉴마 하기온)이란 단어만을 쓰고 있다. 흠정역(KJV)이래 모든 주요 번역본들은 한결같이 '성령(Holy Spirit)'을 선택해 왔는데, 그것은 현대 영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이 더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가리키는 성령이란 칭호는 그의 거룩함과 영적인 속성을 강조한다. 성경은 인간 사이에, 그리고 인간 속에서 오직 성령이 수행할 수 있는 하나님의 활동의 일부를 언급할 때 이 칭호를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다. 신약성경은 특별히 성령을 하나님의 중생의 역사하심과 인간 속에 그분이 내주(內住)하시는 것을 연관짓고 있다(요 3:5; 14:16-17).
성령침례
이것은 하나님과 함께 갖게 되는 매우 중요한 신약적인 체험이다. KJV는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다"고 말한다(행 1:5). 이 구절에 있는 with는 헬라어 en<역자주: en은 '안에(=in)'라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상술성경(TAB)과 신 국제역 성경(NIV)에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en은 또한 in으로 번역될 수 있다.
침례(baptism)라는 말은 '집어넣다', '담그다', '잠기게 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성경은 이 용어를 사용하여 그 체험을 하나님의 성령 안에 완전히 잠기는 것으로 표현한다. 동시에 성경은 이런 체험을 갖는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케 된다고 설명한다. 충만함에 관한 상호 보충적인(상반되지 않는) 예증(例證)으로는 마치 빈 용기가 완전히 액체 속에 잠겼을 때 용기 주위가 액체로 둘러 쌓여 있을 뿐만 아니라 용기 속에도 액체로 가득 채워지게 됨을 빗대어 설명할 수 있다.
이런 묘사는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과 밀접한 인격적 연합을 얻는다는 의미를 전해 준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과 지속적인 관계 속에서 살며, 또 하나님은 그의 생명이 되신다. 그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며, 성령은 그의 모든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준다.
성경적 용어
사도행전은 성령침례를 다음과 같이 여러 말들로 표현하고 있다. 즉 '성령의 충만함'(filled with 2:4), '약속하신 성령'(promised 2:33), '성령의 선물'(gift 2:38), '성령의 내려오심(fell on 10:44)', '성령을 부어주심'(poured out 10:45): '성령받음'(received 10:47): '성령의 임하심'(came on 19:6). 그리고 서신서는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dwells in)라고 설명하고 있다(롬 8:9).
비어 있는 인간이라는 그릇이 성령 침례를 받았을 때 성령으로 충만함을(filled with)받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을 부어 주실 때(poured out)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는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신(came on) 것이고, 그들은 성령을 받은(received) 것이 되며, 또한 성령으로 충만함을(filled) 입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실 때 하나님은 자기의 약속을(promised) 성취하신 것이 되고 사람은 약속된 성령을 받은 것이 된다.
성령 침례에 대한 구절들 중 어떤 경우는 성령을 물로 비유하는데 예수님은 성령을 영적 갈증을 풀어 줄 생수라고 말씀하셨다(요 4:14; 7:38). 그러나 성령을 실질적으로 액체가 아닌 하나님 자신이다. 성경은 또한 성령을 불(마 3:11)과 바람(요 3:8)으로 비유하지만(마 3:11) 성령이 문자적으로 불이나 바람이나 물은 아니다.
성령의 충만함
성령의 충만함이란 말은 사도행전에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았다"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로서 나타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최초의 경험과 성령이 그 생명 속에 거하시는 것을 나타낸다.
오순절 이후 얼마 동안은 성령으로 침례 받은 많은 신자들이 기도 모임에 함께 모였을 때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다(행 4:31).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방법으로 이들 믿는 자들을 만나시고 그들이 처음에 경험했던 그 체험을 새롭게 하셨다.
베드로가 유대인의 공회에서 말했을 때 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행 4:8). 바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박수 바예수에게 얼마 동안 앞을 보지 못하리라고 예언했다(행 13:9). 이러한 예들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충만해지다'(filled)의 의미는 이미 성령침례를 받은 사람에게 특별하고도 일시적으로 능력이 부여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다른 구절들에서는 성령침례를 받은 사람 안에 성령이 지속적으로 거하시는 것을 말하기 위해 '충만해지다'라는 말을 사용한다. 사도들을 돕기 위해 선택된 일곱 사람들은 '성령이 충만'하였다(행 6:3, 5).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권고하였다(엡 5:18). 성령침례 받은 신자들에게 성령이 계속적으로 그들을 주장하도록 하는 권고의 말씀이다. 이 의미로 볼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은 근본적으로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롬 8:4)이며 매일 성령의 인도하심과 그 능력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타락한 자가 회개할 때에 그는 성령으로 다시금 '침례 받은'것이 아니라 성령의 재충만을 받는 것이다. 타락한 자의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에 그는 상속권을 잃지만 '거듭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의 거듭남의 역사적 사실과 칭의는 여전히 실재한다. 그가 회개할 때 또 다시 '거듭날' 필요가 없다.
그는 두번째 물침례나 성령침례를 경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처음에 받았던 물침례와 성령침례가 그가 회개할 때 다시 유효해지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는 단순히 의로운 상태로 회복되는 것이며 다시 한번 하나님을 순종하는 아들로서 영생을 상속받을 수 있는 자격을 부여 받는다.
'성령으로 충만하다'라는 말은 사도 교회에서 세 가지 의미로 사용했는데 항상 이 세 가지 의미 중 한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1)최초의 성령침례. (2)이미 성령침례 받은 신자들이 계속해서 성령에 순복할 때 성령이 주시는 매일 매일의 인도하심과 능력. (3)최초의 성령 체험을 다시금 새롭게 하는 그 이후에 계속되는 성령의 체험들.
우리는 성령침례를 하나님으로 더불어 가졌던 구약의 모든 경험들과는 구별해야 한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충만함은 침례 요한이 가졌던 성령 충만과는 다르다. 즉 그것은 새로운 교회를 위한 전혀 새로운 경험인 것이다.
구원의 일부
구원의 초기에 경험하는 모든 성령의 사역에 관한 묘사는 성령침례를 말한다. 성령침례는 바로 성령으로 나는 것(출생)과 같다(요 3:5). 어떤 사람이 성령으로 침례를 받을 때 성령은 먼저 그 사람의 생명 가운데 '거(居)하기' 시작하신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다른 방법은 논리적으로 있을 수 없다. 성령을 받은 일도 없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은 적도 없고, 성령이 그의 위에 임하신 적도 없으며, 또 성령이 그에게 내려오신 적도 없었다면(이 말들은 성령 받는 한 가지 체험을 성경적인 여러 표현으로 열거한 것이다) 성령이 어떻게 그 사람 속에 거하신다고 할 수 있겠는가? 성령침례는 구원의 일부이지 구원 이후에 갖는 일종의 체험이 아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성령 충만의 필요성과 성령침례가 거듭남의 일부임을 인정한다.
블로에쉬(Bloesch)는 "우리는 성령침례가 신생과 별개로 취급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고 말했다. 안토니 호크마(Anthony Hoekema)는 "만약 우리가 거듭났다면, 오직 성령만이 우리를 거듭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또한 "성령으로 받는 침례는… 회심(回心)과는 별개의 그리고 보통 회심 이후에 겪는 어떤 체험이 아니다… 그것은 회심과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며 회심의 필연적인 측면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침례를 받아 왔다. 성령침례… 거듭남과 동일하다."라고 썼다.
성령침례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 안으로 영접하는 수단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서로 구별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시기 때문이다(롬 8:9). 그리스도는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으로써 우리 안에 거하신다(엡 3:16-17). '주는 영이시며'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시다(고후 3:17-18). 오직 한 성령만이 계시기에(엡 4:4; 고전 12:13), 한번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또 한번은 성령을 받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 우리가 그 영으로 침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 안으로 모셔 드리는 것이다.
성령침례는 단지 선택된 소수만을 위한 영적 체험이 아니며 오직 오랜 시간 기다리고 필사적으로 몸부림 한 후에 얻게 되는 회심 이후의 체험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회심의 일부이며 믿고 회개함으로 경험한다. 성령을 받은 사람이 완전함에 이르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성령으로 침례를 받은 후에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복함으로 계속해서 새로와지기를 구해야 한다.
신약교회의 기초(基礎)
신약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오순절날에 시작되었다. 침례 요한은 교회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다만 예수님을 위한 길을 예비했을 뿐이다. 예수님은 요한을 어느 선지자보다 위대하다고 선언하셨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눅 7:28)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통치는 내주하시는 성령에 의해 성취되는데 오늘날 이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은 요한이 누렸던 것보다 더 위대한 영적 특권과 축복과 능력을 가진다. 요한은 천국이 가까왔다고 선포하였다(마 3:1-2). 천국의 메시지는 그와 함께 시작되었다(마 11:11-13; 눅 16:16). 그러나 그는 실현된 천국에 참여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은혜의 실현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왔기 때문이다. 그는 성령침례를 받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 성령침례를 베푸시리라고 전파하였다(마 3:11).
예수님은 그의 사역 중 신약의 교회를 세우시지는 않았지만 장래에 임할 교회를 말씀하셨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성령으로 침례를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 성령은 그들에게 능력을 주었으며 그 때 그들은 증인이 되었다(눅 24:49; 행 1:4-8).
하나님은 사람과 맺을 새로운 계약을 계획하셨고 이 계약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있어야 그 효력을 나타낼 수 있었다. 이 새로운 계약, 혹은 새 언약<KJV에 있는 계약(covenant)이나 언약(testament) 둘 다 헬라어 diatheke(디아데케) 한 단어에서 나온 것이다>은 성령의 약속을 담고 있다(렘 31:31-33; 고후 3:3-6).
새 언약이 효력을 나타내려면 먼저 예수님께서 죽으셔야 했다: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히 9:15-16). 예수님은 자신이 죽으심으로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셨으며 그의 부활은 그의 죽음을 유효하게 만들었다(롬 4:24-25). 그러므로 성령은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있은 후에야 주어진다.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9):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신약 교회는 오순절날 시작되었는데 그 시점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로 새 언약의 효력이 발효된 이후였다.
새로운 교회를 위한 새로운 체험
성령침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 후 신약 교회에 주어진 새로운 체험이다(요 7:39; 16:7).
그리스도는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그들이 받을 미래의 새로운 체험으로써 성령을 약속하셨다(눅 24:47-49; 행 1:4-8). 이 약속은 오순절날에 이루어졌다(행 2:1-4, 33). 사도행전 2:1-4 이전에는 누구도 이것은 체험할 수 없었다. 이 새 언약은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인데(히 8:6), 그 언약 중 하나가 성령의 약속이다.
선지자들은 성령의 선물을 예언하면서 그 영광에 참여하기를 갈망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신약 교회를 위하여 성령침례를 예비하셨다(벧전 1:10; 12). 구약에 하나님의 영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람들을 다루셨던 것을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벧후 1:21). 그러나 하나님은 새로운 체험과 더 위대한 차원의 성령을 누릴 수 있도록 계획하셨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생명 속에 성령이 내주(內住)하심을 누릴 수 있으며 율법 아래에서는 알지 못했던 방법으로 죄를 이길 능력을 부여받고 있다(롬 8:3-4). 이 성령의 내적 능력은 새 언약과 옛 언약을 구별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렘 31:31-33; 겔 11:19). 오순절날 이전의 사람들에게는 신약적인 의미의 중생은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도행전에서 보여주는 성령침례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순절 이전에 침례 요한이나 그의 어머니 엘리사벳, 그리고 그의 아버지 사가랴는 특정한 때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눅 1:15; 41, 67). 그러나 그들의 체험은 신약 교회의 체험은 아니었는데, 그 까닭은 아직 성령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침례요한은 성령침례를 받지 못했으며 그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눅 3:16; 7:28; 행 19:1-6). 누가복음 1장에 나오는 '성령이 충만하다'라는 구절은 하나님의 영이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특정한 시간에 사람들을 감동시키셨던 구약의 체허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침례요한의 경우에 성령은 그가 예레미야에게 행하셨던 것처럼 특별한 사역을 위하여 요한을 모태에서부터 구별하시고 그에게 기름을 부으셨다(렘 1:5). 요한의 부모는 잠깐 동안 예언적인 말을 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부여받았다. 오직 오순절 이후에야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다'는 말이 신약의 성령침례를 언급하는 것이며 그때에야 최초로 진정한 의미의 성령 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구약의 예언
비록 구약의 선지자들은 성령침례를 받지 못했지만 성령의 도래(到來)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기록하였다(벧전 1:10-12; 욜 2:28-29). 베드로는 이 예언을 인용하여 오순절날 있었던 성령침례에 적용하였다(행 2:16-18).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마음에 그의 법을 기록하리라는 새 언약을 약속하셨다(렘 31:31-33). 이 약속은 성령 부어주심으로 이루어지는데, 성령은 우리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시며(고후 3:3-6). 우리에게 율법의 의(義)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롬 8:3-4).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라고 하셨다(겔 11:19; 36:26). "내가 다시는 내 얼굴을 그들에게 가리우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내 신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쏟았음이니라" 라고 말씀하셨다(겔 39:29).
신약의 약속과 명령
침례 요한은 성령침례의 약속을 전파하였다(마 3:11). 요한은 단지 선택된 소수만을 위하여 성령이 있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그가 베푸는 침례를 받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전파하였다. 하나님은 요한에게 표징을 주시므로 그가 그 약속을 실현하실 유일하신 자(예수)를 인식하도록 하셨다(요 1:33). 예수님은 성령침례를 약속하셨고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명령하셨다(눅 11:13; 요 3:5; 요 4:14). 또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부어주실 것을 말씀하셨다(요 7:37-39). 이 구절은 몇 가지 매우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준다.
(1)성령은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약속되었다.
(2)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야지 성경과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3)믿는다는 것은 단지 어떤 시점에서 내린 정신적 동의만이 아니라 현재 시제를 사용하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계속적으로 믿는 것이다.
(4)예수님이 언급하셨던 성령의 선물은 그의 부활과 승천으로 영광을 얻기 전까지는 임하지 않았다. 그는 특별히 오순절날 성령 부어주심을 의미하셨고 이것은 모든 믿는 자들이 받아야 할 체험이다.
그리스도께서 죽기 전에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은 그가 떠나신 후에 오시리라고 간략하게 강조하셨다. 더우기 그는 성령이 또다른 형태(육체 안에서보다는 영 안에서)의 자기 자신임을 말씀하셨다(요 14:16-18; 요 14:26; 요 15:26; 요 16:7, 13).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성령의 약속을 다시 언급하시면서 그 약속을 명령으로 바꾸셨다. 그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명하셨다(요 20:22). 누가복음에서 명확히 나타나듯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성령을 받지 못했다(눅 24:49; (행 1:4-5, 8).
지상명령을 기록한 다음 복음서에서도 모든 믿는 자에게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으며, 병든 자에게 기도할 때 낫는 능력을 주시겠다는 약속 뿐만 아니라(막 16:17-18) 세상 끝날까지 그의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주의 약속이 기록되어 있다(마 28:20). 이 모든 약속들은 내주하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 이루어진다.
사도교회의 실행(實行)
신약의 교회는 계속해서 모든 사람에게 성령침례를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으로 증거하였다. 베드로는 다른 모든 제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오순절날 그 약속을 전파하였다(행 2:38). 바울은 성령의 필요를 강조하였다(행 19:1-6; 롬 8:9). 바울은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정의하였다(롬 14:17).
사도행전의 중요성
신약 성경은 네 가지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1)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2)초기 교회의 역사(사도행전), (3)서신서(로마서∼유다서), 그리고 (4)예언서(계시록).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가르침과 사역, 죽음, 부활, 승천을 기록한 역사적인 기록이다. 4복음서 어디에도 교회가 세워졌다는 기록은 없고 단지 예수님의 인격과 가르침과 업적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을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은 이야기체로 기록된 신약 교회의 역사이며,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교회가 유대 전역과 사마리아와 이방세계에까지 전파된 것을 기술한다. 서신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거듭난 신자들에게 쓴 교훈과 권고의 편지이다. 서신서에 초기 회심의 경험에 관해 언급한 글이 들어 있지만 이 글들은 독자가 이미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것을 염두에 두고쓴 글이다. 계시록도 또한 이미 세워진 교회와 신자들에게 전해진 것이며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계시한다.
사도행전은 성경에서 유일하게 신약 교회에서 있었던 거듭남을 체험한 사람들의 역사적 사건들을 담은 책이며 기독교의 물침례와 성령침례가 있었던 모든 사건들을 수록하고 있다. 그 책의 성격과 목적 때문에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관계된 거의 모든 직접적인 증거들을 수록하고 있다. 사도행전은 신약 교회를 위한 모범(模範)이며 표준이지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이 표준이 되지 못한다면 성경에서 교회가 따라야 할 모범 사례는 전혀 얻을 수 없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침례의 다섯 가지 사건은 그 기록된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전 세계의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부어주셨던 대표적인 방법이다.
오순절날
약 120명의 제자들은 주님의 승천 후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여 성령침례를 기다리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이 숫자에는 열두 사도(유다를 대신한 맛디아를 포함하여)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형제들, 그리고 여러 여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행 1:12-26). 그들은 유월절 이후로부터 오십일이 되는 유대의 절기인 오순절날에 다락에 모여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승천 후 처음 맞는 오순절날에 120명은 성령을 받고 방언을 말했다(행 2:1-4).
어떤 이들은 단지 열 두 사도만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는데 이 주장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1)예수님은 그가 승천할 때 모든 사람에게 약속을 주신 것이지 단지 열 두 사도에게만 준 것이 아니었다.
(2)120명 모두 다락에 올라가서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렸으며 그들 중 누구도 자리를 떠났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
(3)베드로가 오순절에 적용했던 요엘의 예언에는 하나님께서 자녀나 젊은 자나 늙은 자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차별없이 모든 육체에게 그의 영을 부어 주리라고 말씀하셨다(행 2:16-18). 이것은 분명 12명 이상을 말하는 것이며 여자들을 포함하여 모두 120명이 성령을 받았다.
그 다음에 일어나는 장면에는 베드로의 설교에 반응하여 3,000명이 추가로 성령을 받았으리라는 것을 가정할 수 있다.
(1)베드로는 그 말을 들은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는 약속을 알려 주었으며(행 2:38-39) 그곳에 있던 3,000명은 그의 말을 기쁘게 받아들였다(행 2:41). 베드로는 설교를 시작하면서 방금 자신들에게 일어났던 일을 설명했다. 베드로는 설교를 듣는 청중에게 자신이 경험한 동일한 성령 체험을 제시하면서 설교를 마쳤다.
(2)3,000명의 청중은 베드로의 설교를 믿고 그들의 삶에 적용했으며 베드로는 그드도 성령을 받을 수 있다고 설교했다.
(3)3,000명이 침례를 받았다(행 2:41). 이것이 단지 물침례만을 의미한다 할지라도, 회개하고 물로 침례를 받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성령이 주어지도록 약속되었다.
(4)3,000명은 방금 성령을 받았던 120명에 '추가되었다'. 우리는 풀핏 주석에서 말하는 것처럼 3,120명이 오순절날에 성령을 받았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오순절날 이후 오랜 시간이 경과한 이후에도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이방인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3,120명은 모두 유대인 내지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행 10-11). 이들 중 어떤 이들은 개종자들 -이방인으로 출생하였지만 개종하여 유대인이 된 자들- 이었을 것이다(행 2:10). 120명은 대부분 갈릴리 출신의 사람들이었지만 3,000은 오순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여러 지역 출신의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행 2:5-11). 후에 한 무리의 신자들이 함께 모여 기도할 때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행 4:31). 이것은 최초의 성령침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침례 받은 유대인 신자들이 성령으로 새롭게 함을 입고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이었다.
오순절날은 최초로 성령침례가 이루어진 사건을 보여주며, 특별히 그 최초의 성령침례는 유대인들에게 나타나고 있다.
사마리아
성경에서 성령침례가 이루어진 장면이 두번째로 기록된 곳은 사도행전 8장의 사마리아에서였다.
사마리아인들은 인종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등이 혼합된 혼혈족이었고 유대인과는 구별된 민족 집단을 구성했다.
전도자 빌립(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이 아니라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은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파하였다. 사마리아인들은 그의 말을 듣고 기적들(병고침과 귀신으로 쫓아내는 등)을 목격했고 큰 기쁨을 맛보았으며 그의 메시지를 믿고 예수 이름으로 물침례를 받았다(행 8:6-16).
이 사건은 성령침례가 기적이나, 큰 감동이나, 지적 믿음이나, 회개나, 물침례와 혼동되지 않는 뚜렷한 체험이며 이 체험에 반드시 그러한 것들이 동반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사도들이 사마리아에 일어난 일을 들었을 때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인들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안수할 때 그들은 성령을 받았다(행 8:17).
사마리아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할 때까지는 성령을 받지 못했었다. 그들은 분명 처음부터 온전히 성령을 받을만한 자세가 되어 있지 못했다. 그들은 '빌립을 믿었던'것이지 분명 자신들을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맡기지 못했던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도착하여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안수할 때 비로소 그들의 믿음이 성령을 받을 수 있을만큼 성장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열 두 사도만이 성령을 받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도 아나니아가 그를 위해 기도할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행 9), 에베소인들은 바울이 기도할 때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다(행 19). 마찬가지로 안수하는 것도 성령을 받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120명도 안수없이 성령을 받았고(행 2) 고넬료도 그러했기 때문이다(행 10).
사마리아인들의 체험은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 믿음을 가지고 물로 침례까지 받았지만 아직 성령을 받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성령이 없이는 구원이란 있을 수 없기에(롬 8:9), 마술사 시몬의 경우가 한 예로 보여주듯이 사마리아인들은 구원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성령침례를 필요로 했다. 호크마는 "사마리아인들은 빌립이 침례를 주었을 때 진정한 신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사도들이 그들에게 안수할 때까지 구원을 위한 성령을 받지 못했다… 이 이야기의 주된 관점은 구원이 성령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바울의 회심
하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비추는 강한 빛으로 다소 출신의 사울(바울)을 사로잡으셨지만, 바로 이때 바울이 구원받았다고 할 만한 증거는 찾을 수 없다. 그 때에 주님께서는 오히려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행 9:6)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아나니아에게 보내어 시력을 되찾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하셨다(행 9:17).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안수하며 그를 위해 기도했을 때 바울은 즉시로 시력을 회복했고 일어나 침례를 받았다(행 9:18). 성경은 특별히 바울이 성령침례를 받은 것을 나타내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그 때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블로에쉬는 바울의 거듭남은 그가 아나니아에게서 침례를 받고 성령을 받았을 때 있었다는 데 동의한다.
가이사랴의 이방인들
성령침례에 관한 다음 기사는 가이사랴라는 도시에 사는 로마 백부장(일백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장교)인 고넬료가 중심이 된다. 그는 경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구제를 많이 하고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며 심지어 천사의 방문까지 받은 사람이었다. 이러한 모든 인품과 존경할 만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 구원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천사는 그에게 베드로를 청하라고 하면서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행 11:14)고 말했기 때문이다. 아마 그는 회개는 했을는지 모르지만 성령을 받지 못했으므로 구원을 받지 못했다.
고넬료는 출생이나 개종에 의해 유대인이 된 자가 아닌 이방인이었다. 베드로가 설교를 하는 중에 그의 설교를 듣던 이방인들이 모두 성령을 받고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행 10:44-46). 베드로는 이 표적을 성령침례로 인정했다. 유대인들이 오순절날 받았던 동일한 선물(행 11:15-17)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며 이방인이 성령으로 침례를 받은 최초의 일임을 보여준다.
에베소의 침례 요한의 제자들
바울이 에베소에서 열 두 명쯤 되는 침례 요한의 제자들을 만났을 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물었다(행 19:2). 그들은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대답했다(행 19:2). 문자적으로는 "성령이 아직 계시지 않았다"를 말하지만 KJV는 "성령이 아직까지 주어지지 않았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어쨌든 바울은 다음에 그들에게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물었다(행 19:3). 바울은 그들이 단지 요한의 침례만 받은 것을 알고는 그들에게 예수 이름으로 재침례를 주었다. 그리고서 그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안수할 때 그들은 성령을 받고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행 19:6).
이 기사는 바울이 왜 이들 '믿는 자들'에게 접근했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다. 그는 두 가지의 매우 중요한 질문을 할 때까지 만족하지 않았다. 그것은 (1)"너희가 성령을 받았느냐?"와 (2)"너희는 어떻게 침례를 받았느냐?"라는 질문이다. 바울은 그들을 다시 가르쳐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방언 표적으로 하는 성령을 받도록 했다.
이 기록은 오늘날 우리에게 극히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 사건에 예수 이름의 침례와 방언을 수반하는 성령침례가 전 신약 교회를 위한 표준(標準)이 된다는 강력한 증거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사도행전 19장이 없다면 다른 기사들은 특별하고도 일회적인 사건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예로서, 사도행전 2장은 유대인 가운데 교회가 탄생한 것을 기록하며, 8장은 사마리아로의 복음의 확장을 기록하고, 10장은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된 것을 기록한다. 그러나 사도행전 19장에는 그러한 민족적인 특수성이 들어 있지 않다. 사도행전 19장은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가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임을 보여준다.
성령침례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온전케 하는데 여전히 필수적이다. 방언은 여전히 성령 부어주심에 대한 표적으로써 필요하며, 사람들이 성령 부어주심을 확신하는데 여전히 필요하다.
성령침례에 대한 결론
이들 다섯 가지의 사건(오순절날, 사마리아, 바울, 가이사랴의 이방인들, 에베소의 침례 요한의 제자들의 성령 체험)은 다음을 보여준다.
(1)성령침례는 신약 교회 시대를 위한 구원(신생)의 필수적인 부분이며, 구원받은 후에 경험하는 구원과 분리된 체험이 아니다.
(2)성령침례는 신약 교회 시대(오순절날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까지)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 인종과 민족과 시대와 위치에 의해 우리와 차별되어 있는 특별한 집단을 위한 것이 아니다.
복음서 안에서 구원받는 사람들
어떤 사람들은 복음서 안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근거하여 성령침례가 구원의 필수적이라는 가르침을 반대하는데, 오순절 이전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나 십자가상의 강도 등,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셨던 사람들을 들어 반대한다. 그러나 이러한 예들을 율법 아래서 일어난 것이며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유일한 과도기적 기간에 발생했다. 이 기간동안 성령은 아직 주어지지 않았으며 신약 교회는 오순절날이 이르기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의 초기 사역 기간에 옛 언약을 영생의 길로써 인정하셨으며(눅 10:25-28)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모세의 율법에 복종하라고 명하셨다(마 19:16-19; 23:1-3, 23). 그는 간음한 여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고 말씀하시면서 그녀에게 도덕의 안내자로써 율법을 남겨 주셨다. 그는 그가 고쳐준 문둥병자에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마 8:4)고 말씀하셨고 다른 열 명의 문둥병자에게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다(눅 17:14).
복음서 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은 자들은 새 언약과 약속된 성령을 기다리는 동안 옛 언약 아래서 구원을 받았다. 그들은 율법과 조화되어 구원을 받은 것이지 율법과 모순되어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의 강도를 위해 희생양과 대제사장으로써 섬기셨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오순절 이전까지는 율법에 따르기를 원하셨지만 오순절 이후에는 신약 교회 시대를 위한 복음을 따르기를 원하셨다.
단지 사도 시대의 교회만을 위한 것인가?
몇몇 사람들은 성령침례가 단지 사도들 내지 사도 시대만을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령은 남녀노소, 유대인, 사마리아인, 이방인들에게 약속되었고 그들은 성령을 받았다. 요엘은 말세에 있어서 모든 육체에게 부어질 이 체험을 약속했다(욜 2:28; 행 2:16-18). 오순절날이 말세 가운데 있었다면 이후의 모든 역사 또한 말세이다.
베드로는 오순절날 군중에게 말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 2:39). 그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들과 또한 열 두 사도들의 시대 이후에 살 자들을 포함하여 분명히 그들 자녀들에게 선물을 약속했다.
'모든 먼데 사람'은 공간과 시간에 있어서 오순절날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자들을 포함한 것이었다.
주님의 부르심은 모든 사람 -원하는 자(계 22:17)- 에게 미친다. 에베소인들에게 있었던 일은 성령침례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 단지 한번 각각의 민족 집단에게 반복되지 않을 체험으로써 주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참으로 성경은 모든 믿는 자(요 7:38-39; 행 11:15-17)와 구하는 모든 자(눅 11:13)에게 성령을 약속하고 있다.
사도행전은 오늘날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증명해야 할 의무가 있다. 사도행전이 신약 교회를 위한 모본(模本)이 아니라면 무엇이 그 모본이란 말인가? 성경 어디에 하나님께서 성령침례와 관련된 그의 약속을 철회하고 있는가? 사도행전의 체험은 오늘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 성경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성령의 약속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들의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성령이 없는 사도행전의 구원?
어떤 이들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람들이 성령을 받지 않고서도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즉 성경에 사도들의 추종자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명확하게 기록되지 않은 것과 앉은뱅이가 나은 후에 믿은 5,000명(행 4:4), 에디오피아의 내시(행 8), 루디아(행 16), 빌립보 간수(행 16) 등이 성령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구절은 없다. 성경은 이 모든 회심의 사건들을 무작정 상세히 기록하지는 않는다. 마치 복음서가 지면의 부족으로 인해(요 21:25) 그리스도의 사역 가운데 있었던 대표적인 기적과 사건만을 기록한 것처럼, 사도행전도 중요한 회심의 체험들을 예(例)로써 선별하여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누가를 감동시키셔서 후대(後代)에게 상징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성령침례에 관한 다섯 가지의 기사를 선택하도록 하셨다. 누가는 모든 상황에 맞는 선례를 세우기에 충분하게 기록했으므로 다른 모든 사건들을 기록하거나 다른 회심의 내용들을 자세하게 묘사할 필요가 없었다.
성경이 모든 경우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사도행전에 나오는 모든 회심자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는 여전히 있다. 5,000명이 '믿었고' 루디아도 '믿었다'. 참된 믿음은 성령을 받도록 이끈다. 내시나 간수 모두 기쁨을 만끽하는 체험을 했는데 이것은 아마 성령침례의 결과일 것이다.
다섯 가지의 중요한 실례가 성령침례를 회심(conversion)의 일부로써 포함하고 있으며 이들 다섯 가지 사건들은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대표한다. 많은 다른 회심(conversion)의 체험들이 상세하게 다루어져 있지는 않지만 많은 기사들이 성령침례를 암시하고 있으며 어느 것도 특별히 성령침례를 배제하고 있지는 않다. 우리는 다섯 가지의 예들이 모본을 세우는데 그 의미가 있음을 결론지었다. 몇 안되는 특별한 경우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다섯 가지 예들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 어떤 상황 하에서도 단지 완전하게 설명하지 못하거나 그 설명이 부족하다고 해서 그것으로 사도행전이 기록하고 있는 다섯 가지 사건이 담고 있는 명확한 증거를 뒤집어 엎을 수는 없다.
어떻게 성령을 받는가?
성령침례는 구원의 일부이며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성령을 받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구하고(눅 11:13) 믿고(요 7:38-39) 순종하는(행 5:32)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약속하신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기에(히 11:6) 구하는 자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한다.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약속했다(행 2:38). 사마리아인들의 예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온전한 믿음없이 물침례가 자동적으로 성령을 불러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우기 고넬료의 경우는 침례를 받기 전에 성령이 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성령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복종하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기꺼이 하고자 해야 한다. 온전히 복종하는 믿음을 나타낼 때 하나님은 그의 영을 부어 주신다. 만약 아직 예수 이름으로 물침례를 받지 않았다면 가능한 속히 침례를 받아야 한다.
회개는 꼭 필요하다. 성령이 마음 속에 거하시게 하기 위해서 죄로부터 돌이키고 자신을 영적 부정함에서 구별해야 한다(고후 6:16-7:1). 오직 하나님만이 의롭게 하실 수 있기에 죄에서 돌이키고자 하는 마음을 나타내야 하며 죄를 용서 받고 죄에서 돌아설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복해야 한다. 누군가가 회개하고 믿음을 갖게 된다면 하나님은 그의 영을 주실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성령침례를 받기 원한다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며 그분의 말씀을 믿고 약속을 받을 것을 기대해야 한다. 그는 자신의 죄를 자백하여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을 서약해야 한다. 그리고 전적으로 그분께 순복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무엇을 요구하시더라도 상관없이 바로 그 날 하나님의 성령을 받겠다고 마음에 결심해야 한다.
회개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결심을 의탁한 후에, 하나님께 그 말씀을 듣고 대답한다는 그러한 자세로 믿음의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 때에 성령이 임하실 것이며 간구하는 자를 온전히 주장하여 감동하심으로 전에 전혀 배우지 않았던 방언을 말하게 하실 것이다. 종종 회개가 있은 후 안수(按手)할 때 간구하는 사람이 은혜를 받을 만한 적절한 시기에 그의 믿음을 한 곳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 비록 안수가 성령을 받기 위한 필수 조건은 아니었지만 초대 교회에서 아주 보편적으로 행했던 일이었다.
간구하는 사람이 회개하기 전에는 성령을 기대하고 찬양하도록 강조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그가 아무리 열심히 찬양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회개없이 성령을 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는 것은 오직 간구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그가 회개하고 완전히 하나님께 복종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지만 때로 그 시간은 한순간일 수 있다. 오랜 시간 성령 받기를 기다리거나 여러번 간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받을 만한 믿음이 부족하거나 아직 완전히 회개함으로 자신의 생활의 모든 면을 하나님께 굴복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순절날 120명은 성령을 받기 위하여 일주일 내지 열흘을 기다려야만 했지만 그 이후로 성령은 값없이 누구에게든지 부어졌던 것이다. 사람들이 성령침례를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성령충만을 받는 것이 얼마나 단순한지, 그리고 그들 마음을 어떻게 준비시킬 수 있는지를 배우게 된다면 대부분 쉽게 성령을 받는다. 회개와 믿음에 관해서 배웠다면 대부분은 물침례를 받고서 성령을 받거나 회개한 후 안수받을 때 성령을 받을 것이다. 고넬료와 에베소인에 관한 기사는 우리가 회개하고 믿는 순간 그 즉시로 성령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령의 사역
사람이 성령의 침례를 받으면 그의 생명 가운데 그리스도의 영을 모셔 들여 영원한 기초 위에 서게 된다(롬 8:9; 엡 3:16-17). 그는 하나님의 영적인 자녀가 되며 하나님의 영이 그를 인도하기 시작하신다.
(1)우리는 성령으로 태어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요 3:5).
(2)성령은 우리를 양자 삼아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한다(롬 8:15-16; 갈 4:5-6).
(3)성령은 우리로 그 영으로 침례를 받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한다(고전 12:13).
(4)성령은 우리를 성화(聖化)시킨다(고전 6:11; 벧전 1:2).
(5)성령은 우리를 구원하는 인(印)이 된다(엡 1:13).
(6)성령은 우리가 상속받을 기업의 보증이 된다(엡 1:14).
성령을 받는 것은 구원의 일부이다. 성령침례와 물침례를 분리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 둘이 하나로 신생(新生)을 완성하며 구원의 모든 은혜를 얻게 하기 때문이다.
성령침례는 구원의 일부로써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에게 능력을 가져다 주는데(딤후 1:7), 그 능력이란 (1)그리스도가 죄에서 구원하심을 증거하며 그 구원의 산 증인이 되는 능력(행 1:8); (2)죄를 이기며 의롭게 살며 육체의 소욕을 억제하는 능력(롬 8:4, 13); (3)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위해 재림하실 때 체험할 부활의 능력(롬 8:11) 등을 말한다.
성령은 안식과 상쾌함을 주며(사 28:11-12; 행 3:19), 근신(謹愼)하는 마음을 준다(딤후 1:7). 성령은 우리를 가르치는 교사와 모든 진리로 인도하는 안내자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도록 빛을 비추어 주시는 분이 되신다(요 14:26; 16:13). 그는 또한 우리의 중보자(中保者)이시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되신다(롬 8:26-27; 엡 2:18). 결국 성령은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셔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게 하신다.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갈 5:22-23; 롬 5:5; 14:17)의 열매이다.
이러한 모든 성령의 사역은 성령을 받는 것이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진리를 한층 확실하게 해 준다. 위에 열거한 모든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성공적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령을 받지 않고서 구원을 얻고자 애쓰는 자는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받고자 시도하는 것이며 이것은 애초부터 실패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결론
성령침례는 하나님 안에서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정상적이고 기본적인 신약의 체험이다. 성령침례는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이 체험을 약속하셨으며 모두가 성령을 받을 것을 명하셨다. 오늘날도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고 성령의 선물을 구하면 성령을 받을 수 있다. 일단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은 죄를 이기고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만약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성령이 주장하고 인도하는)을 계속적으로 받는다면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