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포도나무 곧 삼림 가운데 있는 그 덩굴이, 다른 모든 나무에 비해 나은 점이 있느냐? 거기에서 무슨 물건을 만들 목재가 나오느냐? 그것으로 나무 못을 만들어서 무슨 물건을 거기에다 걸어 둘 수 있느냐? 그것은 땔감으로 불 속에나 던져 버릴 것이다. 그 양쪽 끝은 타 없어졌고, 그 가운데 부분도 그을었는데, 그것이 물건을 만드는 데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 포도나무가 온전할 때에도 무슨 물건을 만드는 데 쓰일 수 없었거늘, 하물며 그것이 불에 타고 그을었으니, 무슨 쓸모가 더 있겠느냐? 그러므로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삼림 가운데 있는 포도나무를 내가 불 속에 땔감으로 던져 넣듯이, 예루살렘의 주민을 불 속에 던지겠다. 내가 그들을 대적하겠다. 비록 그들이 불 속에서 피하여 나온다 해도, 불이 다시 그들을 삼킬 것이다. 내가 그들을 대적하면,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그들이 크게 배신하였기 때문에, 내가 그 땅을 황무지가 되게 하겠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겔15:1-7, 새번역)
목재로는 쓸모 없는 포도나무. 포도나무는 포도(목적)를 맺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열매 없는 포도나무는 쓸모 없다. 땔감만 될 뿐이다.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를 떠나갈 때에, 예수께서는 시장하셨다. 멀리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열매가 있을까 하여 가까이 가서 보셨는데, 잎사귀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화과의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 나무에게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따먹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막11:12-14, 새번역)
무화과의 철이 아닌데 무화과를 찾으시는 예수님.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면 이해할 수 있다. 배가 고파서 무화과 나무에 화풀이를 하시는 것인가? 결코 아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레미아서에서 끊임없이 말씀을 반복하셨다. 회개하면 내가 지킨다.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은 결국 바벨론에게 멸망당했다. 하지만 멸망 즉시 하나님은 말씀하셨던 칠십년 포로생활을 마치고 회복하시겠다고. 악인의 죽음(멸망)도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참새 한 마리도 까닭없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다. 들의 꽃도 친히 입히신다고 하셨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시다.
따라서 예상할 수 있다. (1) 무화과 철이 아닌데 억지로 열매를 요구하신다? (2) 무화과 철에서 열매 맺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비추어 (2)을 예측한다. 길이 참으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것이다.
성경에서 포도나무, 올리브나무,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을 상징할 때가 있다.
무화과 나무는 무화과 나무이면서 동시에 이스라엘이다. 오랜동안 열매 맺지 않는 이스라엘, 오랜동안 열매 없는 이스라엘.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내게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잘라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손질하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그 말로 말미암아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그는 쓸모 없는 가지처럼 버림을 받아서 말라 버린다.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서 태워 버린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서 내 제자가 되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요15:1-10, 새번역)
순종할 때 열매 맺는다. 순종은 그냥 하는 것이 아니다. (1) 이해할 수 없을 때라도 그분을 믿기에(고수, 신뢰, 의지) 순종한다. (2) 목적을 이루기까지 순종한다. (3) 끝까지 순종한다.
포도나무로, 올리브나무로, 무화과나무로 부르신 목적을 이룰 때 열매가 있다.
포도 열매는, 무화과 열매는, 올리브 열매는 결국 무엇인가?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위해 사는 것이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왕권이나 주권이나 권력이나 권세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골1:16, 새번역)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갈2:20, 새번역)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막8:34-35, 새번역)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갇힌 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엡4:1, 새번역)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마6:33, 새번역)
우리는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다. 나는 십자가에 못박혔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순종으로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목적을 이루는 삶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우리 모두는 자기 몫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죽으면 산다. 이것이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다. 이것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아니라면, 예수 믿는 사람은 쓸모가 없다. 쓸데가 없다.
‘먼저!’ 이것은 우선순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첫째, 둘째가 아니란 말이다. ‘첫째, 하나님을 위하고 둘째, 나를 위한다’가 아니다. 먼저 이렇게 한다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는 조건도 거래도 아니다.
최선을 다하여 최고의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 십자가의 삶을 산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산다. 머리되신 예수님 위하여 산다. 몸의 지체를 위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죽었는데 나를 위하여 살 것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 가운데는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또 자기만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롬14:7-8, 새번역)
그리스도인의 삶은 쉽지 않다. 구원은 수학공식만 대입하면 되는 것 같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가까고도 아주 멀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패러다임 쉬프트 paradigm shift!
세상 나라 가치관에서 하나님 나라 가치관으로 옮겨야 한다! 광신자를 조심하고, 영과 진리의 예배를 회복하라. 기도를 회복하라.
요한 웨슬리가 말하기를, 광신자는 바람직한 목적을 추구하지만, 합당한 수단은 무시하는 사람이다.
John Wesley said, A fanatic is one who seeks desirable ends but ignores constituted mea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