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와 함께 계신 하나님

오늘도 나와 함께 계신 하나님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하나님은 저 높은 곳, 닿을 수 없는 어딘가에 계신 게 아닐까." 바쁜 하루를 보내고 나면 하나님이 아득히 멀게 느껴지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다. 그런데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히브리서 13:8) 분이며, 우리의 연약함을 외면하지 않고 친히 몸으로 느끼신 분이다(히브리서 4:15). 방관자처럼 세상을 지켜보는 설계자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삶 한가운데 계신 분—그것이 사도적 신앙이 고백하는 하나님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는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지 그분에 관한 지식을 쌓는 일이 아니다. 그분을 실제로 만나는 일이다. 몇 가지 통로가 있다.

가장 결정적인 통로는 예수 그리스도다. 이천 년 전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사셨다. 태어나고, 자라고, 가르치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사셨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하듯, 그분의 부활은 우리 부활의 증거이며 그분의 죽음은 우리 죄를 덮는 근거가 되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다. 히브리서 4:12은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고 묘사한다. 성경은 과거의 기록물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말씀이다.

자연 또한 하나님을 어렴풋이 비춘다. 노을 지는 하늘을 보며 우리는 그분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타락한 세상에는 재난과 파괴도 있다. 자연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배울 수는 있어도, 자연 자체가 그분과의 인격적 만남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개입하신다. 노아에게 방주의 설계도를 주시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고, 야곱과 씨름하신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신 분이다. 사도행전이 뚜렷한 결말 없이 이야기를 멈추는 것은, 어쩌면 오늘의 독자들이 그 이야기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도록 남겨둔 여백이 아닐까.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

거듭남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다루겠지만, 여기서 분명히 짚을 것이 있다. 성령은 믿는 자를 거듭나게 하실 뿐 아니라, 그 이후의 삶에도 계속 함께하신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성령으로 행하라"고 권면했고(갈라디아서 5:25), 예수님은 보혜사가 오셔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 약속하셨다(요한복음 14:26).

여기서 성경이 쓰는 두 표현이 눈에 띈다. 우리는 성령침례를 받는다—성령 안에 잠기듯 온전히 잠긴다는 뜻이다. 동시에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해진다—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뜻이다. 이 둘은 모순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르심"과 우리의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언어다. 관계는 분석의 대상이라기보다 살아내는 것이다.

지금도 일어나는 일

성령은 인격이지 막연한 힘이 아니다. 그리고 그분은 초자연적이다. 물이 포도주가 되고, 눈먼 자가 보고, 걷지 못하던 자가 걸었다—성경의 기적은 은유가 아니라 실제 사건이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이런 역사가 특정 시대에만 국한되었다는 암시는 성경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오늘의 교회도 같은 역사를 기대할 수 있다.

성경은 기적과 치유에 관련된 몇 가지 요소를 보여준다.

- 믿음 —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의 "없는 믿음", 제자들의 "적은 믿음", 그리고 이방 여인의 "큰 믿음"을 대조하신다. 믿음은 공식이 될 수 없지만, 분명 기적과 맞닿아 있다.

- 예수의 이름 — 사도행전의 사도들은 한결같이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명령했다.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분의 권세를 인정하는 행위다.

- 장로들의 안수와 기도 — 야고보서 5장은 병든 자를 위해 교회 장로들이 기름 붓고 기도할 것을 가르친다. 하나님은 종종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

- 속죄 —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이사야 53:5).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영원한 생명뿐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임하는 치유의 근거다.

오순절 운동의 초기 역사를 보면, 사람들이 이 운동에 이끌린 이유 중 하나는 다름 아닌 치유와 기적에 대한 절박한 필요였다. 그리고 성령침례의 뚜렷한 표적은 방언—배운 적 없는 언어로 말하는 것—이었다. 이는 단회적 사건일 뿐 아니라, 믿는 자의 삶을 지속적으로 세워가는 은사이기도 하다(고린도전서 14:4).

그래서, 오늘

신약의 하나님은 도덕 교사도, 명령을 내리는 존재도 아니었다. 그분은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그리고 성령의 부으심 안에서 우리 삶에 친밀하게 개입하셨다. 지금 그분이 육체로 우리 곁에 계시지는 않지만, 성령이 믿는 자의 마음 안에 거하신다. 그분은 오늘도 우리의 가장 확실한 도움이다. 어쩌면 오늘, 당신도 그분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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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David K. Bernard·Robin Johnston의 『On Being Pentecostal』 1장의 신학적 요지를 요약·해설한 것이며, 원문의 번역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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