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절 운동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오순절 운동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사도행전의 교회는 완벽하지 않았지만 생동감이 넘쳤다. 그 지도자들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 사도적 패턴은 오래가지 못했다. 오순절의 이야기는 결국 교회가 그 뿌리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이사야의 표현을 빌리자면,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줄에 줄을 더하고 줄에 줄을 더하여"(이사야 28:10) 조금씩 회복되어온 여정이었다.
국가와 결혼한 교회
무엇이 교회를 사도적 뿌리에서 멀어지게 했는지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서기 325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교회 내부 논쟁을 매듭짓겠다며 첫 공의회를 소집한 일이다. 그는 주교들에게 합의를 강요했고,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자 사실상 자신이 입장을 정해 교회에 강제했다. 역사가들은 이를 흔히 "콘스탄티누스적 타락"이라 부른다. 국가와 교회가 뒤섞이기 시작한 이 지점부터, 교회는 점점 더 사도적 원형에서 멀어져갔다.
다시 돌아오는 길
16세기, 마르틴 루터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외치며 교회를 다시 사도적 방향으로 돌려세웠다. 오랜 전통이 성경의 본래 패턴을 가려온 만큼, 그 시작점까지 돌아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이 회복을 향한 갈망을 흔히 "회복 운동"(restoration impulse)이라 부른다.
18세기에는 존 웨슬리가 교회를 한 걸음 더 사도적 신앙에 가깝게 이끌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단지 교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체험해야 한다고 강조했기에, 종종 오순절 운동의 "할아버지"로 불린다.
19세기 후반에는 세 가지 흐름이 더해졌다. 첫째는 웨슬리의 완전 성화 교리에서 자라난 성결운동으로, 이 흐름은 점차 회심 이후의 체험을 "성령침례"라는 말로 부르기 시작했다. 둘째는 영국에서 시작된 케직(higher life) 운동으로, 능력 받음을 위한 성령의 임재를 강조하며 성령침례에 대한 관심을 더욱 부각시켰다. 셋째는 신유 운동이다. 보스턴의 찰스 컬리스가 미국 신유 운동의 선구자로 꼽히는데, 그는 믿음을 키우는 환경 속에서 병자를 돌보는 "신유의 집"을 세웠고, 이 관행은 이후 여러 곳으로 퍼져나갔다. 찰스 팔햄이 1898년 캔자스주 토피카에 베델 신유의 집을 연 것도 바로 이 흐름 위에 있었다.
토피카의 새해 전야
찰스 팔햄은 신유를 넘어 더 깊은 진리의 회복을 갈망하던 성결운동 계열의 설교자였다. 그는 1900년 토피카에 베델 성경대학을 세우고, 성경만을 유일한 교재로 삼아 직접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해 말, 팔햄은 학생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침례에 일관된 증거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돌아온 그에게 학생들은 답했다. 사도행전을 살펴보니 방언이 성령침례의 한결같은 증거로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1900년의 마지막 밤, 새해맞이 기도회에서 학생 아그네스 오즈만이 팔햄에게 안수 기도를 청했다. 그녀는 곧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고, 이후 다른 학생들과 팔햄 자신도 같은 체험을 했다. 역사가들은 흔히 이 토피카의 사건을 현대 오순절 운동의 출발점으로 꼽는다. 팔햄은 이 온전한 복음이 구원, 성화, 성령침례라는 세 단계의 은혜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치며, 자신의 사역을 "사도적 신앙 운동"이라 불렀다.
갈레나에서 아주사까지
토피카에서는 좀처럼 확산되지 못하던 이 메시지가 1903년 캔자스주 갈레나의 한 광산촌에서 마침내 터져 나왔다. 수백 명이 성령으로 충만해졌고, 운동은 캔자스·미주리·오클라호마 접경 지역으로, 이어 텍사스 휴스턴으로까지 번져갔다. 팔햄의 휴스턴 성경학교에서 공부하던 흑인 성결교 설교자 윌리엄 시모어가 바로 이 흐름 속에서 다음 단계로 이 메시지를 옮기게 될 인물이었다.
1906년, 시모어는 로스앤젤레스의 한 작은 교회로부터 초빙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전한 오순절 메시지는 그 교회 지도부의 반발을 샀고, 시모어는 곧 개인 가정집 기도모임으로 밀려났다. 그 모임이 자라면서 시모어 자신도 성령침례를 받았고, 늘어나는 인원을 감당하기 위해 아주사 스트리트 312번지의 빈 교회 건물을 확보하게 되었다.
아주사 스트리트, 불이 번지다
아주사 스트리트 미션은 오순절 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이후 삼 년 동안 이곳에서 일어난 일은 사도적 신앙 운동을 전 세계적 현상으로 바꾸어놓았다. 수백 명이 성령침례를 받았을 뿐 아니라, 이 메시지 자체가 북미와 세계 곳곳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시모어가 발행한 소식지는 이 부흥의 소식을 널리 실어 날랐고, 호기심 어린 이들과 진지하게 갈망하는 이들 모두를 아주사로 이끌었다.
멤피스에서 찾아온 찰스 메이슨은 이후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교회(Church of God in Christ)를 오순절 교단으로 전환시켰다.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온 G. B. 캐시웰은 흑인 목회자가 인도하는 부흥에 처음엔 거부감을 느꼈지만, 영적 갈급함이 그 편견을 넘어서게 했고, 그는 시모어의 안수를 통해 성령침례를 받은 뒤 자신의 지역에 이 메시지를 전했다. 훗날 관찰자들은 아주사에서만큼은 인종의 경계가 잠시나마 허물어졌다고 회고했다—흑인과 백인과 라틴계 신자들이 함께 예배했던 그 짧은 순간을.
갈보리의 완성된 사역
시카고 노스 애비뉴 미션의 윌리엄 더럼은 사도행전이 구원·성화·성령침례라는 세 단계의 은혜가 아니라, 성화가 회심의 순간부터 시작되어 신자의 삶 속에서 계속 진행되는 과정이라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이 확신을 "갈보리의 완성된 사역"이라는 메시지로 정리했고, 많은 오순절 신자들이 이를 사도적 진리 회복의 또 다른 진전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이 신생 오순절 운동에 처음 생긴 균열이었다.
새로운 이슈
더럼이 세상을 떠난 뒤, 완성된 사역 진영은 운동의 하나 됨을 회복하고자 1913년 캘리포니아 애로요 세코에서 대규모 캠프미팅을 열었다. 그런데 이 모임에서 뜻밖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캐나다인 전도자 R. E. 맥알리스터가 침례식 설교 중, 삼위일체 각 위격을 향해 세 번 물에 담그는 방식(삼중 침례)을 비판하며 사도들은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단 한 번 침례를 베풀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날 밤 기도하던 존 셰이프는 하나님의 유일성과 예수 이름 침례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확신했고, 다음 날 아침 캠프를 뛰어다니며 그 계시를 선포했다.
이후 몇 달 사이, 프랭크 에와트와 G. T. 헤이우드, 글렌 쿡을 비롯한 여러 지도자들이 이 문제를 깊이 씨름했고, 마침내 에와트와 쿡이 서로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면서 "새 이슈"—첫 번째 이슈였던 완성된 사역 메시지에 이어 붙여진 이름—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삼위일체적 침례의 효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재침례 문제는 논쟁의 뇌관이 되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유일성과 거듭남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시 사도적 뿌리로
이렇게 오순절 교회는 사도적 원형으로 되돌아왔다. 베드로처럼, 오순절 신자들도 사도행전 2:38이야말로 구원의 과정을 가장 온전히 설명하는 말씀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초대교회가 그러했듯, 이 운동도 빠르게 자라났다. 성령은 지구 곳곳에 부어지기 시작했고, 20세기 말에 이르러 이 운동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규모 있는 부흥으로 자리 잡았다. 한때 사회 주변부의 "성령 광신도"쯤으로 치부되던 오순절 신앙은, 이제 거의 모든 신앙 전통에 영향을 남긴 힘으로 성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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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David K. Bernard·Robin Johnston의 『On Being Pentecostal』 9장의 역사적·신학적 요지를 요약·해설한 것이며, 원문의 번역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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